기억은 늘 장소를 데리고 온다.
옛 마산 시청 앞, 장군내에서 대거리 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지금은 간판도, 냄새도, 사람의 웅성거림도
사라졌지만 한때 그곳에는 ‘불노초’라는 이름을 단 식품회사가 있었다. 간장을 만들었고, 이름조차 또렷이 떠오
르지 않는 여러 식품을 만들던 곳이었다. 불노초라는 단어가 워낙 강렬해서였을까, 회사의 규모나 제품보다도
그 이름이 먼저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이름보다 더 오래 남은 건 사람의 이야기다.
그 집에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보다 한두 살 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네 오빠들을 보고 스스럼없이 “오빠”
하고 부르며 함께 놀았다고 들었다. 얼굴이 예뻐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던 말이 따라붙는다. 직접 선명
하게 본 기억이라기보다, 여러 사람의 말과 분위기가 겹쳐 만들어진 얼굴이다. 그래서인지 그 아이는 실존 인물이
라기보다, 그 시절 마산 골목의 햇빛과 바람이 빚어낸 하나의 상처럼 느껴진다.
불노초.
먹으면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상상 속의 풀. 이름만 들어도 인간의 욕망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도 시간을 이기지 못했다. 권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노쇠 앞에서 그는 동쪽 바다 너머
봉래산에 불노초가 있다는 말을 붙잡았다. 천 명의 남녀를 배에 태워 바다로 내보냈다는 이야기는, 지금 들어도
전설처럼 비현실적이면서도 인간적이다.
그들은 일본으로, 제주도로, 부산 영도로 흩어졌다고 한다. 누구도 본 적 없는 풀을 찾으러 떠났으나, 그 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늘 같은 황제의 명을 받고 나왔지만, 빈손으로 돌아갔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여긴
그들은 결국 그 땅에 주저앉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제주 서귀포의 이름도, 영도 봉래산의 표지석도 생겨났다
고 한다. 사실과 전설의 경계는 희미하지만, 그 희미함이 오히려 이야기를 오래 살게 한다.
마산의 불노초 식품회사도 그러했을 것이다.
상상 속의 약초 이름을 간판에 걸고 현실의 간장과 식품을 만들며 살았던 사람들. 자식 대에 와서는 결국 명맥을 잇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고 들었다. 불로를 뜻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회사도 사람도 시간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사실이 불노초라는 이름을 더 쓸쓸하게 만든다.
천하를 호령하던 진시황조차 불노초를 얻지 못하고, 산동 지방을 시찰하던 길에 객사했다. 영원을 꿈꾸던 자의 최후치고
는 너무 인간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야기를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복해서 꺼내는지도 모른다. 실패한 욕망은
늘 교훈이 되고, 교훈은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시대는 묘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현대에 와서는 과학과 의학이 인간 수명의 비밀을 파고든다. 텔로미어라는, 세포 끝에 달린 작은 구조가 노화와 수명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뉴스로 접한다. 상상 속의 풀 대신 현미경과 연구실, 논문과 실험이 불로의 자리를 대신
한다. 백세 인생이라는 말도 더 이상 허황된 꿈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약 정말 불노초가 있다면, 우리는 그 풀을 먹고 무엇을 하며 살게 될까. 끝나지 않는 삶 속에서 기억은 더 소중해질까,
아니면 더 쉽게 잊혀질까. 마산의 그 골목, 불노초 간판, 그리고 예쁘다고 소문났던 그 집 딸의 얼굴 같은 것들이 과연
남아 있을까.
아마도 그래서 불노초는 끝내 상상 속에 머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유한하기에 기억은 빛나고, 사라지기에 이야기는 남는다. 마산의 불노초 회사가 문을 닫았듯, 한 시대는 그렇게 조용히
물러난다. 그러나 그 이름과 이야기,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또 다른 수필이
되어 살아남는다.
불로를 꿈꾸던 인간은 끝내 사라지지만, 그 꿈을 이야기하는 인간은 이렇게 오늘도 글을 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인간적인 불노초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