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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들(Free board) 개비씨 주몽에 대하여...동북공정보다 심한 역사왜곡
김두산 추천 0 조회 754 06.05.23 08:49 댓글 13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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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05.31 12:19

    예, 저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사기, 한서를 읽어보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위에서 밝힌 인구문제, 군주의 호칭 문제, 유물 문제(전한의 유물은 없음) 등이 있었습니다.

  • 06.05.31 12:20

    일본칼이 아니라 그시대 우리나라 칼 맞습니다. 현재의 일본도도 다 대륙문화에서 건너가 만들어진 것이죵..

  • 06.05.31 15:18

    //저는 그저 "관한"이라고 적혀 있어서 "관계한"이라고 해석했습니다 // --> ;;;; "관한"이라고 쓴 적이 없다는데 자꾸 "관한 이라고 우기시네.. 자기 논리속에서만 빠져계시나... 허.. 참.. 다시 잘 찾아보세요.. 제가 뭐라고 썼는지.. 명문상으로 "관한(talk about)"이 아닌 "관련된(relate to)"으로 썼습니다..

  • 06.05.31 15:21

    다시 말하지만 전자는 통설에 관한(통설은 무엇인가에 대한), 후자는 통설에 관련된(통설에서는 무엇을 주장하는것이가에 대한) 입니다... 전 님이 말하는 대로 의미상도 아니고 명문상으로 후자를 썼습니다.. 다시 잘 찾아 보시고요... 둘 사이를 구별 못하신다면, 그건 님의 국어실력이 문제인 듯합니다...

  • 06.05.31 15:25

    또한, 마지막에 밝힌 님의 의견에 따르면, 한민족 오천년 역사상 고조선 때가 가장 인구가 많았던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러나, 농업기술과 제철기술이 열악한, 그리고 우경(소를 이용한 농사)도 이용하지 않았던 그시대에 이모작, 우경 등을 이용한 조선보다 더 많은 인구를 먹여살린 점이 상당히 모순이군요..

  • 06.05.31 15:29

    혹시 님이 밝힌 4한의 인구는 조선 총 인구의 몇배인지 아시나요..;; 그 인구라는게 대체 어디서 나온 자료인지 상당히 의심스럽군요...

  • 06.05.31 15:32

    그리고 전한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서 한4군이 허구라.... 위에서 제가 언급했다시피 4군중 3군은 30여년만에 멸망하였으나, 낙랑은 수백년을 지속하였다는게 통설입니다.. 다시말하면 낙랑은 전한 뿐만 아니라 후한까지 동시대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지역의 후한의 유물은 충분히 한4군의 근거가 됩니다... 게다가 고조선 역사 내내 8조법이었던게, 이 시대에 이르러 갑자기 60여개조로 늘어난 것도 상당히 의심스럽지요..이 부분을 간과하시는 군요..

  • 06.05.31 15:37

    제가 보건대, 님은 환단고기를 비롯한 각종 재야사학에 심취하고 계신듯 하는데, 이러한 서적들은 현재, 우리 사학계에서 상당히 사실로는 배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물론 재야사학이 주장하는 바가 정설로 받아진 현대 사학에서 발생하는 의문점들을 기초로한 반박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 06.05.31 15:42

    그렇다고 재야사학이 기존의 정설을 뒤엎을 만큼의 근거도 충분히 제시를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재야사학의 반박에 대한 통설의 또다른 반박도 충분한 근거를 토대로 현재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아직 학계에 검증도 안된 사실을 님처럼 그랬으면 좋겠다는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역사를 논하면, 역사 자체의 의미가 무의미해질 뿐 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전체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치 과거의 일본이나 현재의 중국처럼 말이지요..;;

  • 06.05.31 18:45

    전 황우석 박사님사건이후로 개비시는 쳐다도 안봐요 라디오도 마찬가지구요

  • 06.05.31 23:08

    레인이얌 // 인구 문제에 대해 거론하셨는데... 중국 고대로부터 우리나라 조선 시대까지는 군과 현의 인구는 줄곧 4만에서 6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이 고구려 지역에 설치한 96현의 인구의 추정도 450만에서 500만 정도로 보는 것이고요. 설마 이것을 몰랐다고 하시는 겁니까?

  • 06.05.31 23:20

    레인이얌 // 마지막으로 제가 제시한 근거에는 "환단고기"에 나온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사기"와 "한서"와 "삼국유사" 그리고 "삼국사기"에 나온 내용입니다. 북경 근처의 지명(강 이름)에 "패수"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것은 "한서"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사기에는 한사군의 이름도 없고 위치도 나와 있지 않고, 백여 년 뒤에 쓰여진 "한서"에서는 이름만 나와 있습니다. 위치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 뒤 수백 년 뒤에 쓰여진 자치통감에서 "낙랑은 패수에 있었다"라고 나옵니다. 설마 중국인이 우리나라 패수(대동강)을 알고 썼을까요? 아니면 자기네 패수를 생각하며 썼을까요? 또한 저는 환단고기를 읽은 적이 없습니다.

  • 06.05.31 23:30

    레인이얌 // 덧붙입니다. 제가 제시한 어떤 글을 보더라도 고조선 때가 가장 인구가 많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는 없습니다. 혹시라도 한4군이라고 해서 16만에서 24만의 인구를 주장하실른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볼까요? 인구 6천만의 한나라가 전체 인구 24만(또는 겨우 그 몇 배)의 고조선과 싸우려고 그 호들갑을 부렸답니까? (어째서 한나라 인구가 6천만이었냐고 딴죽을 걸 수도 있겠네요.)

  • 06.06.01 11:44

    //낙랑의 군현은 25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1현의 인구는 4~6만입니다. 낙랑의 인구는 최소 100만입니다. 삼국지의 촉나라 인구가 겨우 96만이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나라 인구가 200만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해 보시고요. 또한 변방으로 가면 중심지보다 훨씬 인구밀도가 떨어집니다//---> 이게 앞에서 님이 한 말입니다. (그대로 복사해 가져왔습니다.)

  • 06.06.01 11:53

    한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이 최소 100만이면, 산술적으로 따지면 한사군은 400만 내외겠네요.. 그런데, 한사군은 고조선 전영토가 아닌 일부영토에 세워진 것이라는 점과 고조선 멸망이후 대량의 유민이 발생하였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고조선의 전체 인구는 이보다도 훨씬 플러스라고 저에게 들리네요.. (물론 낙랑이외의 진번, 임둔, 현도군의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워 산술적으로만 계산..)

  • 06.06.01 11:59

    그런데... 한영우씨 책을 비롯한 통설의 입장... 다시말해, 대한민국사학계의 공식적인 조선의 인구를 보면, 임진왜란 후 50년 후를 기준으로 150여만(한영우, 317p)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전 조선초의 인구는 이보다 3배가량 많습니다... 대략 450만 내외지요...

  • 06.06.01 12:04

    님의 말에 따르면, 고조선의 인구는 1500여년 후의 조선과 비교할 때, 비슷하거나, 그보다 이상이라는 결론이 납니다.. 막말로 1500년동안 인구가 그대로 라는 것이죠... 우경을 사용하지도 않고, 농사기법도 낙후되었고, 농기구도 청동기며, 천문술 또한 1500여년의 과학기술의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 06.06.01 13:14

    잘 아시네요. 한나라 때 6천만이던 인구가 명나라 초까지 그대로 6천만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물론 이것도 저쪽 중국 애들에게는 통설이고, 세계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레인이얌 님 말대로라면 그것도 모순 아닙니까? 레인이얌 님은 앞서서 낙랑이 평안도에 있다고 한 적이 없다고 하시지만, 글 쓰시는 내용을 읽어보면 "(고)조선도 작은 나라고, 낙랑도 당연히 고조선보다는 아주 작은 나라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낙랑이 고조선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아주 작다고 볼 근거도 없습니다.

  • 06.06.01 13:28

    반대로 사기와 한서만 살펴서 생각해 보죠. 한나라의 군사력은 120만 가량 되는데, 인구의 2%입니다. 조선의 군사력이 적어도 1만5천으로 본다면 300만 인구죠.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고대에는 특별나게 보병을 많이 키웠다고 여기더군요. 당시 군주는 모두 미친 사람뿐이랍니까? 유비의 촉나라나 손권의 오나라처럼 그렇게 군사를 키웠다가나 몇 십 년 버티지 못하고 망합니다(실제로 그 두 나라는 5십 년을 겨우 버텼죠). 유비 아들 유선이 북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미련해서가 아니라 현명해서 포기했습니다). 원나라때의 찌질이 유학자들이 경제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유선을 욕했죠. 명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 06.06.01 13:45

    하지만 실제로 고조선의 군사력은 2만 5천에서 4만 정도로 봅니다. 이것도 한나라와 싸울 때를 기준으로 했으므로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모자라기는 힘들죠. 2만 5천 병사로만 보더라도 5백만 인구입니다. 한나라는 인구대 병사의 비율이 합리적인데, 고조선은 그렇지 못했다는 말은 의도적인 억측이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몰상식한 나라가 한나라 이전부터 존재하면서 400년 이상 이어올 수나 있었을까요? 이런 상식 수준의 계산을 할 수 없게 하는 까닭이 "고조선은 작은 나라이고, 낙랑은 더 작은 나라이다"라는 고정관념 때문이 아닐까요?

  • 06.06.01 13:50

    한-조선 전쟁에서 서울인 왕검성까지 몰렸으므로 왕검성 주민까지 군사로 내었기 때문에 실제 군사력은 훨씬 적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완전히 몰상식의 극치라고 봐야 합니다. 고구려 멸망할 때 평양에 있던 방어 병력은 5만에서 15만 사이로 추정합니다. 이 대부분이 일반 백성이었겠죠. 문제는 고구려의 전체 병력 수도 그와 비슷했다는 점입니다. 병력 운용법을 하루아침에 새롭게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때까지 해오던 대로 하는데, 그러다보니 병사가 모자라고, 그래서 모자라는 머릿수만 일반 백성에서 채워서 한다는 뜻이죠. 이것을 "멸망 위기에서 일반 백성까지 군사로 내었다"라는 식으로 곡해하죠.

  • 06.06.01 14:01

    게다가 고조선은 마지막 한-조선 전쟁에 앞서 이미 국경을 2천리나 동쪽으로 물린 상태였습니다. 그 2천리를 10리=2킬로로만 잡더라도 400킬로에 해당하는 거리입니다. 서울-부산간 거리와 엇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넓이로 따지면 남한 크기만한 땅을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전성기 때에는 앞서 말한 그 인구보다 더 많았다고 봐야 할 근거가 생기죠. 자 이제 생각해 봅시다. 진짜로 고조선 인구가 400만이 못되었으리라 보십니까? 아니면 그 넓은 땅을 한이 아닌 동맹국 선비가 들어와서 뺏어가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 06.06.01 14:09

    어떤 나라가 있으면 그 나라의 인구를 예측할 때에, 그 예측된 인구가 다른 지엽적인 역사, 예를 들면 전쟁사 등과 맞물려 생각할 때에도 모순이 없어야 합니다. 한나라쪽 인구를 6천만쯤으로 보는 까닭도 그들의 군사력이 120만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군사력 전체가 아니므로 좀더 많다고 봐야 하지만, 그래도 3~5%를 넘지 않습니다. 오나라나 촉한처럼 7~10%에 달하는 군사 비율은 오히려 이상한 상태입니다. 그런 나라는 결국 경제가 무너지고 마침내 조세가 걷히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여 스스로 무너지고 맙니다.

  • 06.06.01 14:17

    이제 조선과 임진왜란에 대입해 봅시다. 보통 북방군으 2만 5천에서 3만 정도로 봅니다. 수군을 5천으로 봅시다. 이게 사실상의 조선의 전체 군사력입니다. 간단히 2만5천으로 보고 그것이 전체 인구의 2%라고 생각한다면 조선의 인구는 5백만이 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은 많은 병역기피자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5백만이라는 인구도 "병역기피자를 제외한 인구"일 테니까요. 조선 초에 30만 병력이었으므로 인구가 900만(3%로 볼 때)이냐? 이런 찌질이같은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어느 나라이든 무력으로 일어선 국가는 초기에 비정상적으로 병사가 많습니다. 그래서 안정기가 언제인지를 따지게 되고요.

  • 06.06.01 14:32

    동양에는 서양과 같은 "중상주의" 시기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국민에 비해 병사가 월등히 많았던 시기가 존재하기 힘듭니다. 명나라나 청나라의 군사 3백만이 많은 수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한 조선의 병사 2만 5천은 북방군만을 따진 수죠. 수군도 빼고, 중앙군도 뺐죠. 그 둘을 합치면 1만쯤 되고, 그것까지 합해서 따진 조선의 인구는? 7백만이죠.

  • 06.06.01 15:11

    제가 글을 쓰면서 지나치게 수치를 딱딱 맞추어 쓴 부분이 있고, 국민 대 병사의 비율도 2%(실제로는 2~3%)로 고정시켜버린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하지만 고조선의 경우처럼 2만5천에서 4만 정도로 볼 때 3%에 해당하는 부분을 4만으로 해석하면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게 됩니다. 앞서 말한 한나라 병사 120만인데 실제로는 그보다 많았다고 썼죠.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사가 많을 때, 다시 말해 3%에 해당하는 때가 바로 그때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 3%도 경제력의 한계에 다다른 수치라고 봐야 합니다.

  • 06.06.01 14:55

    중국의 인구에 대해 한줄만 쓰죠.. 답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06.06.01 15:03

    BC5000(493만) - 전국시대(3000만) - 진(2000만) - BC 202 한 초기(1300만) - AD157 환제3년(7200만) - 삼국시대(2500만) - 위진남북조 말기(4400만) - 수(5542만) - 당 현종 14년 (8775만) - 송 휘종 4년 (1억1946만) - 원 혜종 11년 (9730만) - 명 세종 45년 (1억6480만) - 청 목종 13년 (3억 5890만) - 중화민국 (5억 4545만)

  • 06.06.01 15:08

    중국의 인구 증감표에서 대충 필요한 부분만 썼습니다.. 위 인구표에서 고조선멸망 BC108년에 가장 근접한 시기인 BC202에 중국은 1300만.. 또는 AD2년(위에는 없지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6300만... (이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농업혁명때문입니다) 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은 논외이므로 해당시기인 삼국시대, 위진 남북조 등을 빼고 안정기만을 볼 때, 송나라부터 1억을 돌파합니다.. 그리고 명때 1.5억... 청때 3.5억이군요.....

  • 06.06.01 15:13

    따라서 고조선 멸망인 기원전 108년의 중국의 인구는 1300만이상 6300만 이하인데, 임진왜란 후 조선의 동시대였던 명이나 청 당시 중국을 보자면 1.5억 이상 3.5억 이하군요... 결론을 내자면 1700년 동안 최소 5배 최대 10배 인구가 뛰었군요.. 근대 고조선인구(400만으로 가정) = 조선인구(450만) ... ;;;

  • 06.06.01 15:18

    에궁.. 이제 슬슬 귀차니즘이... 에거~~ 진.. 짜... 로... 이제부터 리플 안달아야쥐... 유치한 논쟁에 시간 다 뻇기네. ㅠㅠ.. 왕미친놈 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쯤에서 이제 서로 그만 두죠? 보아하니.. 서로간의 관점의 차이는 해결되지 않을 듯 하니.. 전 진짜로 오늘부로 이 글엔 리플안달겠습니다..

  • 06.06.01 18:54

    명나라 말기에 1억6천만을 넘어서고, 청나라 후기에는 4억을 넘어섭니다. 또한 진나라 때(한나라 초기까지) 실제 통치 영역은 현대 중국의 10%에 불과합니다. 후한이나 송나라와 같은 경우는 현대 중국의 25%입니다. 명나라도 현대 중국의 35%를 넘지 못하죠. 청나라가 유일하게 현대 중국보다 넓은 영역을 오랫동안 유지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인구 비교는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고조선과 조선의 영역은 그 크기가 비슷하며(약 20만 평방킬로미터) 조건도 비슷합니다. 기후도 비슷하고요(위도가 높았지만 그때는 더 따뜻했습니다).

  • 06.06.01 19:03

    주나라 말기(진나라 인구)와 실제 통치 영역을 현대에 적용하면 10배에서 13배가 늘어난 셈입니다. 이는 앞서 제가 말한 500만에서 10배에서 13배 늘어난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합니다. 그다지 다른 점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평양 근처에서 기원전 10세기 무렵의 탄화미가 발견되었을 때, "농업 기술" 어쩌고 하는데, 그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탄화미와 함께 탄화된 대나무가 나왔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대나무가 자랄 수 있을 만큼 따뜻한 기후였다는 뜻이죠.

  • 06.06.11 12:35

    뭐 상고사 관련 소설 읽은게 하용준 작가의 "고구려 유기" 밖에 없네... 배경지식이 짧아 이야기를 못꺼내겠군..

  • 06.06.12 21:08

    죄송하지만, 제가 읽은 것은 소설이 아닌데요. 물론 한자로 된 원문이 아니었지만(한쪽은 한자, 다른 한쪽은 번역문인데, 저는 번역문만 읽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죠. 참고로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시황이나 아방궁을 욕하지 않죠. (애초에 아방궁이 궁녀들과 그다지 관련도 없습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날조했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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