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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회과부도 어복민 입니다.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은 2~3년 만인 것 같네요^^
세계여행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5불당 클럽을 알게되어
사회과부도 하나 들고 5불당 정모를 찾아와 큰 도움을 얻어 여행을 했었죠^^
그래서 5불당에 항상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제 인터뷰와 여행 사진이
세계일주 바이블에도 나오게 되어서 참 감사한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네요...
여기 글을 쓰는 이유는~ 제가 세계여행을 하기로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글이 있는데요
오늘 회사 연차내고 ㅋㅋ 오랫만에 정리를 했는데 5불당 회원님들과도 나누고 싶어서 글 올립니다.
저처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분이 계시길 바라면서~
블로그 원문:
http://blog.naver.com/fishabm/150035545322
사회자
오늘 여러분들과 대화를 나누실 분은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의 저자이며 현재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일하시는 한비야 선생님이십니다. 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한비야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받은 한비야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세계일주를 해보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세계지도가 있어야 마음이 편한 사람입니다. 방이나 책상에 지구본이라도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는데, 여러분들 중에 자기 방이나 책상에 세계지도를 붙여 놓고 계신 분들이 얼마나 되나요? 세상은 더 이상 여자와 남자로 나뉘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미 남자가 하는 일과 여자가 하는 일에 큰 차이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또, 세상은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로 나뉘지 않습니다. 세상은 '세계지도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 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종류의 사람은 완전히 무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깊이와 규모가 다르다는 겁니다. 세계지도를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국이 무대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연대에서 시작해서 서울, 대한민국, 아시아, 전 세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늘 지도를 보게 되고 우리의 위치를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 지도 한 장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는 제 자신이 가장 좋은 표본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세계지도가 늘 제 주변에 있었는데, 그것은 물론 아버지, 어머니의 의도이시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세계지도를 보며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땅이 이렇게 다 붙어있는데, 걸어서 한 바퀴 돌 수 있지 않나요?' 그때 제가 10살 무렵이었는데, 아버지께서는 '그래, 땅이 다 붙어 있어. 그러면 너 한 번 돌아볼래?'라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일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 생각이 세계지도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제 주위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선물이 바로 '지구본'입니다. 아이들에게 지구본을 주면서 우리 나라를 찾아보라고 하면 생각만큼 잘 찾지 못합니다. 반도 형태를 찾으면서 인도 주변을 뒤지기도 하는데,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우리 나라를 찾는 순간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 왜 이렇게 작아.'하고 놀라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 어른들이 이야기해줘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맞아, 네가 태어나고 사는 곳은 이렇게 아주 작은 곳이야. 그렇지만 이곳은 단지 너의 베이스 캠프일 뿐이고 너의 무대는 전세계야.' 저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이는 이미 세계화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를 잘하는 아이, 아니면 세계여행을 많이 해서 견문이 넓은 아이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아이의 마음속에 세계지도가 자리잡고 있으면, 그 순간 아이는 세계화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불 안에서만 활개치지 않으려면, 세상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세상엔 보편적인 가치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공유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만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자기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하면서 살 수 있을까? 인간의 최대치는 어디서 나오는가? 여행이야기를 해보면, 저는 세계일주를 하면서 어떻게 말을 하고 다닐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영어나 혹은 그 나라의 말에 자신이 없어서 여행을 다닐 수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몇 가지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쉬운 방법은, 그 나라에 가면 제일 큰 도시에 가서 사전을 하나 사는 것입니다. 영어-그 나라언어, 그 나라언어-영어 두 가지 사전을 사서 그것은 가지고 단어만 나열해도 충분히 소통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제 경우에는 제스처를 정말 잘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제스처를 사용할 때에는 주의를 해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제스처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는데, 저는 여행을 할 때,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혼자서만 다닌다. 두 번째는 육로로만 다닌다. 마지막으로 한 곳에 가서는 적어도 한 달 이상 그 지역 사람들과 똑같이 입고, 자고, 먹는다. 이 세 가지가 조합이 되었기에 오지여행가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육로로 케냐에서 에티오피아로의 국경을 넘어가는데, 그 당시에 소말리아 전쟁 때문에 육로로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소말리아에 주둔하던 평화유지군들이 무기를 방치하고 철수하는 바람에 인구수보다 무기수가 훨씬 많아진 상황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었죠. 가난한데, 무기는 많다. 그런데 돈을 가진 사람이 지나간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무기를 사용하여 돈을 뺏는 일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전 그 곳을 육로로 넘어갔어요. 케냐까지와는 다르게 그 곳에선 영어가 한 마디도 안 통했습니다. 국경을 넘자마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한 열 사람 정도가 둥그렇게 앉아 있다가 갑자기 영어를 조금 하는 것 같은 한 사람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What is my name?" 처음엔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제 이름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비야' 라고 대답했더니, 거기 십여 명의 사람들이 전부다 '헛!'하고 놀라는 제스처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거의 안 통하던 때에 제 생각에는 '비야'라는 이름이 이 나라 말로 다른 어떤 뜻이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다시 그 사람들이 "What is my country?"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Korea라고 대답했더니, 다시 한번 '헛!'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이 '헛!'하고 놀라는 제스처를 취한 것은 '알았다'라는 의미의 동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2~3일 정도는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 나라에서 쓰이는 제스처들을 따라 하면 굉장히 좋아하기도 하고 그들과 잘 동화될 수 있습니다. 제스처도 안 통할 때는 어떻게 하는가? 그럴 때에는 그림이 아주 좋습니다. 한번은 러시아를 들어가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밖에 몰랐어요. 그때 모스크바까지 가야 하는데 말을 못하니까 수첩에다 먼저 시계를 그리고 돈에 “?”를 그린 후에 창구에 가서 모스크바라고 물으니까 시계 밑에 시간 적어주고, 얼마인지 적어 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대로 돈을 주고 표를 사고 열차를 탄 후에 2~3일 정도 앉아 있다가 밖에서 '모스크바, 모스크바' 이러면 내리면 돼요. 그림도, 제스처도 안 통하면 그냥 한국말로 하세요. 그게 제일 잘 통해요. 마사이족이던 피그미족이던 그 나라 말을 모르면 특히 고맙다. 안녕히 계세요 이런 말들은 정말 우리말로 하면 잘 통해요.
오랜 기간 동안의 오지여행 중에서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딱 한번 들어는데 에티오피아에서 말라리아 약을 너무 많이 오래 먹어서 약 부작용이 생긴 때였어요. 처음엔 머리카락이 엄청 많이 빠지기 시작했고, 그 다음엔 눈이 부셔서 눈물이 자꾸 났어요.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여행을 했는데 결국엔 간 기능 상실로 몸져누웠어요. 그때 포도당 가루를 물에 타먹어도 안되고 사이다를 먹어도 안됐어요. 2주 동안 계속 쓸개즙만 토해내면서 여관에 누워있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그때 죽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죠. 저는 매일 매일 일기를 썼는데 그 당시엔 한국에 갈 생각만 하고 한국 가서 할 일들만 적었어요. 그런데 계속 일기를 쓰다 보니까 방향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결론은 "가기는 어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리고 나서 그 다음날 바로 에티오피아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서 신라면 있냐고 물었더니 바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거기에 6명의 교민들이 다 모여서 한국 음식을 먹었는데 한국음식은 밥이 아니라 보약이었어요. 아무 것도 못 먹던 제가 그날 한 그릇을 다 비우고 3시쯤 되어서 라면까지 얻어먹고 왔습니다. 그 당시 피골이 상접할 당시에 찍은 사진이 지금도 제가 가장 아끼고 마음에 드는 사진인데, 이런 마음에 드는 표정이 어디서 나올까 하는 생각을 곰곰히 했더니 바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현장에서 제가 좋아하는 일을 했을 때 그 표정이 나오는 거였어요.
이 세상은 "꿈을 꾸는 사람"과 "그 꿈을 이루는 사람"으로 나눠져요. 그 둘의 차이는 꿈을 꾸는 사람은 계속 앉아 있고 요행만을 바라는 사람이고, 꿈을 이루는 사람은 오늘도 그 꿈을 향해서 한 발짝 한 발짝 가고 있는 사람이에요.
현재, 저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 제가 아프리카를 다닐 때 이 여행을 마치고 나서 내가 무슨 일을 해야 내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할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었어요. 그 때는 직장도 없고, 집도 없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러한 고민을 더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에 제 눈에 보였던 것이 난민들이었어요. 제가 세계 문제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에는 대량 난민들이 없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전체가 난민촌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도 같아요. 그런데 아프리카를 가보니까 그 아프리카 전체가 난민촌이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아프리카 난민들도 우리와 같이 빨간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일이 이었어요. 자생 난민촌을 지나가고 있는데 죽어가고 있는 어린 아기를 봤어요. 이미 눈이 돌아가고 거의 죽어가고 있었는데, 아이 엄마가 갑자기 "악"소리를 지르는 거였어요. 그러더니 저보고 와보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갔더니, 아이 입을 막 벌리더니 그 안을 보라고 하는 거에요. 그 입안에 뭐가 있었는 줄 알아요? 그 죽어 가는 아이의 잇몸에 하얀 이가 조금 나와 있었어요. 그 순간 저는 그 엄마의 눈에 살짝 비친 희망의 빛을 봤어요. 아이가 살 거라고 생각하는… 물론 그 아이는 한참 있다가 죽었는데, 저는 그 이후로 마음이 무거웠어요. 그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계속 난민 촌을 가고 싶었어요. 그냥 마음이 끌렸어요.
어느 날 난민 촌에서 24명의 남자아이들과 친해졌는데, 이 아이들은 사진만 찍으려고 하면 혓바닥을 내밀어요.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 이름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그 아이들을 핑크보이 1, 2, 3... 이렇게 불렀어요. 그러던 중에 제가 비자 문제로 그 난민촌을 3일 떠났다가 일을 다 마치고 나서 다시 돌아왔는데, 그 24명의 아이들이 한 명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핑크보이 1,2,3... 이러면서 한 명씩 다 찾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불러봐도 안 나오길래 뭔가 심상찮은 느낌이 들어서 다른 애한테 물어봤더니 말을 안하고 쭈뼛거려요. 그러더니 하는 말이 그 사이에 아이들이 다 죽었다고 해요. 저는 더 이상 물어보지도 못하고 반군들이 와서 한꺼번에 다 죽였나보다 생각했어요. 이후에 담당 의사한테 직접 들어보니까 마을에 괴질이 돌아서 모두 죽은 거였어요. 그 때 그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던 약이 있었는데 그게 700 원이었어요. 그 700원짜리 약이 없어서 아이들이 모두 죽었던 거예요. 너무 허무하고 무거운 마음이 들어서 여행을 다니다가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제 인생의 전환에 대해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프가니스탄의 난민촌에 갔을 때 아이들하고 많이 친했었어요. 제가 그곳을 떠나는 날에 지뢰로 인해서 팔, 다리가 잘린 어떤 여자아이가 난민촌에서 겨우 구할 수 있는 빵 하나를 저한테 주는 거였어요. 그 아이의 엄마가 알게 되면 크게 혼나는 일이지만, 그 아이에게 있어서 그 빵은 저에게 줄 수 있는 커다란 선물이었어요. 그 때 제가 잠시 고민했어요. 이 아이의 소중한 식량을 먹어야 하는지 아니면 이 빵을 먹더라도 너희들을 생각하는 평생의 친구가 어딘가에 있다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좋은지... 그래서 제가 일순간 고민하다가, 그 빵을 받아서 "고마워" 하고 한입 베어 물었더니 그 아이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 거예요.
그날 일기를 쓰면서 <난 이 여행이 끝나면 반드시 이 난민들을 위해서 긴급구호를 하는 일을 하고 싶다. 내가 국제홍보학을 전공하고, 오지만 다닌 일들이 이 일을 위한 것이다> 라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작년 10월에 월드비전이라는 국제구호단체의 긴급구호팀장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로 보면 정말 소원성취를 하게 된 것이죠. 이 긴급구호팀장의 경우는 명함을 내밀어도 알아주지도 않는 자리고 월급도 적어요. 그렇지만 저는 이 일을 위해서 저의 어떤 것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는 이 현장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얼굴은 그다지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 중에 한 얼굴을 보고 있는 겁니다. 그 이유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피하면 안돼요. 자기와 정면 대결을 하고 찾아낸 것을 무서워하지 마세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행복하고 잘 할 수 있는지 이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자기와 정면 대결을 해야 해요. 이 꿈은 너무 소박해, 이 꿈은 안 이뤄질 거야... 사회적 대접은 어떨까? 이런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여러분들이 듣는 가치들은 정말 여러분들을 기뻐하게 하는 소리가 아닐지도 몰라요.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셨으면 좋겠어요. 마음속의 행복의 조건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현장에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선후배, 주위의 말들이 아닌 여러분 마음 깊숙이 있는 또 다른 자기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면 대결을 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일기를 쓰세요. 그리고 며칠간이라도 혼자 뚝 떨어져서 지내며 자기와 정면 대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후의 나온 결론은 절대로 무시하지 마시고 무서워하지 마세요.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 오늘 귀한 시간들을 내었는데, 전 여러분들이 꿈을 이루는 사람인지 꿈만 꾸는 사람인지 자가 점검을 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택한 목표, 자기가 가고 싶은 길, 되고 싶은 것에 오늘도 한 걸음씩 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지켜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지켜봐 주세요. 아마도 10년 후면 제가 긴급구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도 저는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꿈을 이루고 정상에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자
귀한 말씀 해주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위의 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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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이 글은 제가 세계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준 글이랍니다^^
강연에 직접 참여하진 못했지만 학교 잡지에 실린 글을 읽고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요
블로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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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헛!
헛!
오랫만.!
우와~ 오랜만이예요. 잘 사셨나요?
서진이는 여전히 죽돌이야? ㅋㅋ 담 정모 때 함 보자^^
ㅜㅜ 멋지시다는....
아...한비야님...저두 스무살때인가? 한비야님이 걸어서 지구 세바퀴반을 돌았다는 기사를 읽고 세계여행을 꿈꾸고 있는 사람입니다...언젠간 이뤄지길 바라며...한발짝 떼 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