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이 넘은 나이 이후에는 한국에서 살아야 한다.
(2012 년)
지난 3.25(금) 에서부터 4.8(금)까지, 큰 아이 오인이네 식구가 집이라고, 서울에 왔다가 자기들 본거지인 시카고로 돌아 갔다. 2주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그런대로 이번에는 의미 있는 방문이었다. 시골인 고향 아산에서의 선산 방문, 그리고 4촌, 6촌 및 가까운 친구들과 외갓집 식구들과 오인이의 40회 생일축하 별도저녁, 그리고 동해안 속초에서의 2박 3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지나갔다. 동반한 꼬맹이 선이와 선영이가 하나뿐인 4촌 준혁이와 친교, 한 차에 아이들만 태우면, 떠들어 대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시끄러워서 운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피붙이라고 서로들 좋아했다. 그것이 인생이거늘!
아이들이 떠난다고 하여 금 8일 또 눈시울을 붉히었다. 이를 본 집사람이 “얼씨구! 저 사람 좀 보게나! 저게 요즈음 보통 하는 일 예요. 저 사람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돌아섰다. 무엇보다도 손녀, 선이와 선영이가 예뻤고, 헤어지는 것이 싫었다. 자기들 4촌인, 만 5살 박이, 준혁이가 말하는 것처럼 “귀여웠다” “그런데 그런 표현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해 보면 65세의 한심한 영감이었다. 할아버지로서 아이들 눈엔 내가 그렇게 비추어 지지 않았을까?
지난 번에도 오인이의 유학생활 등 교육문제에 관하여 몇 마디 하였지만, 큰 놈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생각은 좀 달랐다. 나도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서울에서 1차를 떨어져, 2차로 외대를 다니다가 군대에 간 녀석이, 학교를 서울에서 다 마치기도 전에 미국에 유학하여야 되겠다고 말하여, 본인이 희망하던 건축분야를 공부시켰던 것이고, 한국에서 10 살 된 꼬마로 엄마의 손을 잡고 미국에 이민간 며느리 수진이를 우연히 만나 결혼하여 시카고에 살림을 차린 것이다. 생각해 보면 큰 녀석의 팔자는 제가 타고나는 모양이었다. 며느리의 수입이 좋아서 아버지인 나와 공부를 잘하던 제 동생 등, 우리 3부자 중 가장 잘 살았다! 그리고 건축설계 부분에서는 일가견이 있어, 탄탄대로를 걷고 있단다. 미국사람들도 못 쫓아 온단다. 그래서 대견해 보였다! 120 킬로로 체구가 커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큰 아들이기 때문이다?
Say in Korean! I could not speak in English. 손녀 선이, 선영이 와 의 대화 내용이다. 나는 최소한 2가지 언어는 하여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였고, 아이들은 제가 편하자고 영어로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턱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과 뜻이 통하였다. 얼굴을 비비고 손을 마주치면서 뜻이 통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한 식구였다. 단지 한가지 나쁜 것이 있다면 내가 곧 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남자들이 나이를 들면서 여성 Hormone 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원!
준혁이도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면 미국으로 갈 것이다. 이때부터는 큰 녀석이 꼬마들의 부모책임을 맞을 것이다. 물론 큰 아들이 아버지 노릇을 한다는 한국의 장자개념을 이때부터 미국사람들도 잘 알아야 할 텐데! 그래야만 준혁이의 교육이 수월해 질 텐데! 매 주일 아침 미사시간에 “한국에서 준혁이가 지도자로 커 나갈 수 있도록 지혜와 슬기, 용기와 건강을 주십시오. 그리고 선이와 선영이도 미국에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 및 건강 등을 주십시오. 그래야만 한. 미간의 협조로 우리 한반도에서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전쟁이 다시는 일어 나지 않습니다!” 라고 매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우리 집사람 말마따나, 이것도 병일까? 두째 오중이가 준혁을 보는 눈은 좀 나와는 달랐다.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게 내 버려두라는 것이었다. 이 녀석은 그동안 아빠가 하는 짓이 못 마땅해도 부자지간의 정리상 그대로 두워었던 것이다.
그리고 Chicago라는 특수성을 인정하여 큰 녀석에게 건축기사로서의 실력이 인정되어, 앞으로의 전망이 밝다면, 온양에 세워질 “한국 현대외교전시관”에 큰 녀석 오인 이와 둘째 녀석 오중이가 함께 참여하여 “우리 땅에 오인 이가 설계한 건물이 들어서고, 교육용 전시관이 번창하기를 내가 지금 빌고 있다면, 이도 사치일까?” 그래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60이 넘는, 오인이가 한 해에 몇 번씩 한국에 나오는 구실을 마련해야 될 것 같았다. “미국에서는 문제가 없다니, 한국의 건축기사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나는 꿈꾸듯, 공항에서 손녀 꼬맹이들의 Good-bye 소리도 못 듣고 있었다. 그래서 보내놓고 또 눈시울을 적셨다, 끝.
첫댓글 권영민 동문의 가정을 위 글로 정리하면, 큰아들 오인(40세) 과 며느리, 그 사이 선이와 선영이가 있다. 두째 아들 오중에게는 준혁이라는 아들이 있다. 맏아들 오인은 시카고에서 건축기사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아들의 힘을 빌러 고향 충남 온양에 한국현대외교전시관을 지을 예정이다.
감사합니다. 정교수,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