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헌 金昌憲(1898~1930)】「 1929년 국민부 4중대장 선임, 1930년 조선혁명군 4중대장」
1898년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출신이다. 이명으로 김문거(金文擧·金文居)를 사용하였다.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될 무렵부터 참가하였다. 8월 대한통의부 법무부원에 선임되었다. 1923년 12월부터 1925년 초 사이에는 사령장(司令長) 부관 또는 헌병대장으로, 1924년 2월에는 비서부(秘書部) 비서로 활동하였다.
1924년 6월 16일부터 3일 간 개최된 대한통의부의용군장교회의에 참석하였다. 6월 17일 홍기주(洪基柱)·문학빈(文學彬)·김석하(金錫夏)·김보국(金保國)·차용육(車用陸)·현일천(玄日天)·김창룡(金昌龍)·이규성(李奎星)·신호영(申浩永)·김국주(金國柱)와 함께 “통일적 운동으로 광복사업을 완성”한다는 취지의 맹약문(盟約文)을 발표하였다. 또한 다음과 같은 결의안도 발표하였다. 결의안은 군인과 무기 편성은 각 부대 모두 이번 달 30일 이내로 군적(軍籍)과 무기기장(武器基帳)을 일체 정리하여 군사부(軍事部)에 송부하고 일반회원에게 참관시킬 것, 각 부대의 현재 자금은 무기와 군적을 송부할 때 군사부에 보내어 무기를 구입하도록 할 것. 단 무기위원 2명을 선정하여 군사부 지휘 아래 무기구입사업을 맡도록 할 것, 무기위원은 정이형(鄭伊衡)·현일천으로 정할 것. 단 위원이 사고(事故)가 있을 때는 표수(票數) 차석(次席)에 근거하여 김석하가 그 책임을 맡도록 할 것, 군대편성은 탈퇴한 군대를 제외하고 혼합하여 새롭게 편성하는 것으로 할 것, 각 부대는 이전 부대의 이름을 삭제하고 중대(中隊)를 본위로 4개 중대로 개편할 것, 사령부 사무를 신속하고 지속적으로 시무(視務)하도록 하고 사령장은 신망 있는 인물을 선거하도록 요구할 것, 군인이 모연(募捐)한 자금은 전부 군사부에 직납(直納)시킬 것, 표훈상공(表勳賞功)은 금후 이를 실행할 것을 군사부에 요구할 것, 5중대와 주임소대(駐臨小隊) 장교 중에서 특파원을 선정할 것. 주임대(駐臨隊)에는 안홍(安鴻)을, 5중대에는 김국주·김보국을 특파할 것. 중대사무실은 중앙소재지에서 50리 이내에 둘 것. 장교회의는 매월 음력 15일에 통상 개최할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1924년 8월 유하현(柳河縣) 양자초(樣子硝)에서 대한통의부 제4중대 제1소대장으로 부하 41명과 함께 활동하면서 헌병소대장도 겸임하였다. 8~9월경에는 제8중대를 조직하고 중대장에 선임되었다. 1924년 말부터 헌병대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헌병대는 30명 정도로 구성되었고, 간부를 호위하거나 일반군인과 지방민의 행동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1925년 초에는 제4중대 제2소대장, 비서부 비서장(秘書長)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5월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서 다물청년당(多勿靑年黨)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강복원(姜復元)·이인근(李寅根)·이석호(李石虎)와 함께 다물청년당헌장을 발표하였다. 이 헌장에서 독립을 위하여 “자수자양(自修自養)하고 자작자급(自作自給)”할 것과 “전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운동과 동일한 보조를 취할 것”을 천명하였다. 강령에는 구성원의 자격을 정하는 규정과 집행기관과 의결기관을 둔다는 규정을 명시하였다. 다물청년당은 남만주 각 지역에 지부를 두었고, 당원은 500명이었다.
이후 대한통의부와 군정서(軍政署)·광정단(匡正團) 등이 통합하여 유하현 삼원보에서 조직된 정의부(正義府)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 7월 정의부 군사부 헌병대장, 사령장 부관으로, 9월에는 사령장대리 겸 부관으로, 1928년 3월에는 의용군 제3중대장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화전(樺甸)과 반석(盤石) 등지에서 개최된 전민족유일당조직회(全民族唯一黨組織會)에 정의부 대표로 참가하였다. 전민족유일당조직회는 전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아서 보다 강력한 독립단체를 만들어 항일전선을 형성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는 18개 단체 대표 39명과 30명의 방청자가 참석하였다. 이러한 항일운동단체 통합 분위기 속에서 1929년 4월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었다. 1929년 5월 28일 국민부 제1회 중앙의회에서 제4중대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8월 국민부에서는 중국 관헌에게 일제의 만몽침략정책(滿蒙侵略政策)에 대한 문서를 전달하였다. 이를 계기로 통화정촌분관(通化檉村分館)의 요구에 따라 중국 당국으로부터 국민부 간부들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1929년 8월 국민부는 “조선총독정치시정20주년을 기념”하여 일제가 경복궁에서 9월에 개최할 조선박람회에 양세봉(梁世奉) 등 4명과 함께 무장하여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929년 9월 27일 국민부 공안부집행위원과 중앙검리국(中央檢理局) 검리장(檢理長)에 선임되었고, 11월에는 경호국장으로 활동하였다. 12월에는 유하, 해원(海原)지역을 관할하는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6대장에 선임되었다. 1930년 8월 8일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조선혁명군 제4중대장에 임명되었다.
위 회의에서 좌·우파 갈등에 의해 국민부는 국민부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게 되었다. 국민부 반대파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와 연락하며 반국민부위원회(反國民府委員會)를 조직하였다. 양측의 대립은 무력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1930년 9월 20일 국민부지지파는 조선혁명군을 동원하여 국민부 반대파 주하범(朱河範)·김창룡(金昌龍)·김이택(金利澤)을 암살하였다. 10월 10일 이에 대한 보복으로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 국민부 근거지에서 이성근(李成根) 외 6명의 국민부 반대파에게 사살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