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들은 누구나 도시를 떠나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맛을 느끼고 즐기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도시를 벗어나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살고 싶은 꿈을 꾸곤 했지만 도시를 떠나 시골에 가서 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꿈에 불과했다. 그러던 차에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인구 10만 명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비록 외국에서의 고단한 유학생활이었지만 바라던 시골생활을 하게 된 셈이다. 그 당시에 공부하던 대학에서는 10달러만 내면 학교 아파트 옆에 있는 땅을 빌려주었다. 처음으로 몸을 움직여 일하는 노동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물론 취미 생활에 불과했지만 배추, 상추, 고추, 토마토, 부추 씨를 뿌려 보았다. 처음에는 고랑에 씨를 뿌리기도 하고, 비가 오면 한 번에 씨가 씻겨 내려가기도 하는 등 시행착오가 많았다. 그런데도 책상에서 씨름할 때보다 몸은 힘들었지만 또 다른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7년 동안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강릉에 있는 아파트에 삶의 터전을 잡았다. 강릉은 공기가 좋은 소도시이긴 하지만 시멘트로 지어진 아파트에서의 생활은 서울의 생활과 큰 차이가 없었다.
나에겐 두 딸이 있다. 첫 딸아이는 미국의 작은 도시에서 7년을 보낸 연유에서인지 낙천적이며 귀국해서도 건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첫 돌이 지나서 귀국한 둘째 아이는 좁은 아파트에서 늘 병치레가 심했다. 다행이도 귀국한지 3년만에 또 다시 캐나다에 교환교수로 가게 되었다. 이번에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인구 20만의 작은 도시에서 일 년 간 머무르게 되면서 놀라운 일을 겪게 되었다. 한국에서 늘 약봉투를 달고 다녔던 네 살 된 작은 아이가 몰라보게 건강해진 것이다. 한국에서 준비해간 약이 그곳에선 전혀 필요가 없었다. 그 원인은 간단했다. 아이가 넓은 놀이터에서 흙과 잔디를 밟으며 마음껏 뛰어놀다보니 건강해진 것이었다. 캐나다에서 일 년 간 생활을 마감하면서 나는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우리는 귀국을 하자마자 아파트에서 이사를 나가기로 하고 근처의 농가주택을 찾아 나섰다.
16년 전 우리 가족이 이사한 곳은 시골 마을에 있는 15평의 낡은 농가주택이었다. 흙집으로 지붕은 빨간 함석으로 되어 있고, 문은 창호지문으로 되어 있다. 330평의 집터에는 포도, 매실, 자두, 살구, 모과, 감, 앵두 등 갖가지 과일나무가 있었고, 텃밭이 딸려 있어 각종 채소를 직접 길러 먹기에 안성마춤이었다. 그러나 막상 농촌지역으로 이사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몸이 약한 작은 아이가 논두렁을 따라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두시간만에 한 대가 오는 버스를 타고 초등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아이는 시골 생활을 즐거워했고, 곧 건강해졌다.
우리 부부는 열심히 텃밭에 상추, 쑥갓, 오이, 가지, 호박, 당근, 고추, 배추, 무, 감자, 고구마 시금치, 근대, 아욱, 마늘, 파, 부추, 옥수수 등을 심어 텃밭에서 나오는 푸성귀가 우리 가족의 식탁을 채워주었다. 미쳐 푸성귀가 나오기 전인 봄철에는 쑥, 민들레, 씀바귀, 질경이, 돈나물 등이 우리 가족의 입맛을 돋우어 주었다. 우리 집 안에는 앵두, 자두, 매실, 사과, 감, 포도, 구기자, 산수유, 개암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나는 봄에는 감나무의 어린 잎과 뽕잎을 따서 차를 만들고, 쑥과 민들레, 질경이 등을 캐서 말려 둔다. 가을에는 고구마순과 무시래기, 무말랭이를 말려두어 겨울철에 먹을 먹거리를 만든다. 11월에는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배추, 무, 마늘, 고추, 파 등을 이용하여 김장을 한다. 땅을 파고 항아리를 묻고 김장김치를 저장하여 겨우 내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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