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 드롭 Snow Drop -학명Galanthus L, 석산과 갈래투스속, 내한성 구근초로 원산지는 유럽 남부, 코카서스 지방 :
재배는 9∼10월에 반응달에 구근을 심는다. 구근은 건조저장을 싫어하니 그대로 지하에 두며, 원예 화분심기에는 늦봄에 잎이 져도 휴면시킨 채 가끔 관수만 하고, 분구는 늦여름에 하되 빨리 심어야 한다. 두 잎이 한 꽃봉오리를 보듬고 있다가 2월경 램프와 같은 꽃을 피우며 꽃빛은 순백색(줄기와 잎은 진초록)이다. 꽃의 용도는 화단용, 화분심기용, 정원용 등으로 길러지고 있다. 스노우 드롭은 특히 유럽 남부의 코카서스 일대에 겨울의 정취를 돋보이게 하는 꽃으로 18종이 주종이다.
[꽃 말] : 희망希望, 첫사랑의 한숨, 위안慰安, 어려울 때 친구
[탄생화] : 1월 1일에 태어난 귀하는 눈이 내려도 찬바람이 불어도 결코 굴屈하지 않는 스노우드롭처럼 인내심忍耐心이 강强한 성격性格을 갖고 P시는 것이 장점이십니다.
<원숭이는 재주 많고 자식사랑 극진 (동양문화속에 투영된 원숭이)> -2004년 새 해는 갑신년(甲申年) 원숭이 해다. 십이지(十二支)가 시공간의 지표였던 전근대 시대 원숭이의 시간인 신시(申時)는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 방향으로는 서남서(西南西)를 의미했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퇴근시간인 동시에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위해 궁궐과 탑, 무덤에 서서 서남서쪽으로부터 다가오는 재앙을 막아주는 수호신 역할을 했던 것이다. 원숭이는 무엇보다 인간과 가장 많이 닮은 영장류 동물로 재주가 많고 부모자식과 부부지간의 애정이 사람을 뺨칠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사람에게 붙잡혀 배에 태워진 새끼를 구하기 위해 중국 창강(長江)의 강둑을 따라 백여리나 쫓아오다가 지쳐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단장(斷腸)의 슬픔’은 원숭이의 지극한 자식사랑을 보여준다. 또 원숭이는 기호와 언어를 쓰고 사회생활을 하는 등 동물 중 가장 인간과 비슷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간사스럽다는 등의 나쁜 이미지가 생겨 ‘재수없는 동물’로 기피당하기도 한다. 띠를 말할 때 ‘원숭이띠’라고 말하기보다는 ‘잔나비띠’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 같은 속설 때문이다. 잔나비는 ‘날쌔다’라는 뜻인 ‘재다’라는 동사와 ‘원숭이’라는 뜻을 지닌 ‘납’이라는 명사가 합쳐진 말로 원숭이를 의미하는 옛말이다. 동양 3국에서 이른바 ‘날렵한 원숭이’의 원조는 ‘서유기(西遊記)’에 등장하는 손오공(孫悟空)이다. 삼장법사(三藏法師)의 제자가 돼 저팔계(猪八戒), 사오정(沙悟淨)과 함께 화염산(火焰山)의 싸움 등 81난(難)을 헤쳐나가는 손오공이 신출귀몰함은 언제 보고 들어도 흥미진진하다. 동양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민족을 제외하면 기피당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원숭이가 사기(邪氣)를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중국에선 좋은 건강과 성공, 수호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큰 건물이나 사찰에 원숭이상을 새겨 세우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 비친 원숭이의 이미지는 어땠을까. 구비전승에선 꾀많고 재주있으며 흉내 잘 내는 장난꾸러기로 이야기되며, 도자기나 회화에서는 모성애를 강조하고 스님을 보좌하는 모습, 천도복숭아를 들고 있는 장수의 상징으로 많이 표현되고 있다. 특기할 것은 기상조건이 오늘날과 달랐던 선사시대나 고대에는 우리나라에도 원숭이가 살았다는 사실이다. 평양시 상원군 검은모루동굴과 충북 청원군의 두루봉 동굴, 제천 점말동굴 등의 구석기 유적에서 원숭이 뼈가 화석으로 발견돼 서식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문헌기록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이차돈 순교관련 기사를 보면 527년(법흥왕 14)에 이차돈이 처형된 뒤 “곧은 나무가 부러지고 원숭이가 떼지어 울었다”는 내용이 전한다. 그러나 이후 우리나라에는 원숭이가 살지 않는다는 ‘동국무원(東國無猿)’이란 얘기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원숭이에 얽힌 이야기가 흔치 않다.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의 천진기 학예연구관은 “송강 정철(鄭澈)의 가사 ‘장진주사(將進酒辭)’에 보이는 잔나비 노래가 한국문학사에서 원숭이를 소재로 한 최초의 일일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이 때도 송강이 잔나비를 구경하고 읊은 것이 아니고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에서 인용한 것뿐이었다. 물론 원숭이는 조선시대 중국이나 일본에서 선물용으로 가끔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를 보면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들이 원숭이 수백마리를 들여와 일본과의 전투에서 이용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민간에선 원숭이를 재수없는 동물로 기피해왔다. 술취한 사람을 보고하는 말인 “원숭이 낯짝 같다”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속담에서 보듯 생김새를 소재로 하거나 잔꾀를 경계하는 내용의 속담이 많다. 잔나비띠 사람들의 성격을 이야기할 때 ‘재주는 많고 영리하지만 진득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원숭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다. 한국인이 원숭이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은 불운과 비애, 슬픈 장난 등으로 아침에 원숭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재수가 없다고 하는 속신(俗信)이 이를 입증한다. 원숭이 꿈에 대한 해몽도 부정적이었다. 이처럼 민속에 나타난 원숭이는 다소 부정적이었던 반면, 통일신라시대 이후 전통미술품에선 불교와 중국의 영향 등으로 좋은 면이 부각됐다. 애절한 모정을 표현한 ‘청자원형연적(靑磁猿形硯滴)’이나 원숭이가 부귀다산의 상징인 포도넝쿨 사이로 다니거나 포도를 따먹는 모습을 그린 각종 도자기나 걸상, 십장생(十長生)들과 함께 등장하면서 장수를 상징하는 천도복숭아를 들고 있는 그림 등이 대표적이다. 원숭이 해에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는 1392년 조선건국과 1932년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한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열사의 의거 등이 있다. 갑신년 새 해에는 원숭이처럼 다재다능한 능력으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되 자기 재주를 너무 믿어 방심하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다잡자. 오는 2월9일까지 서울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제2기획전시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갑신년 잔나비띠’는 원숭이 해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자리다. (문화일보 2004/01/01 최영창기자 munhwa.com )
<1월 January>
1월 January란 명칭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Janus에서 비롯되었다. 앞과 뒤에 모두 얼굴이 있는 신으로서 뒤의 얼굴로는 과거를 보고 앞의 얼굴로는 미래를 본다. 그래서 해가 바뀌는 1월의 신이 되었다.
▶1115 여진족의 아골타[阿骨打(아골타), 1068-1123] '금'나라 건국, *[아구다]는 중국 정복왕조인 금(金)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1115∼1123)로 성 완옌[完顔]. 묘호 태조(太祖). 이름 민(旻). 아르추카수[按出虎水] 완옌 부족의 수장(首長) 핵리발(劾里鉢: 世祖)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나란[拏懶]씨 출신이다. 아버지, 숙부인 영가(盈歌: 穆宗) 및 형 오아속(烏雅束: 康宗)을 도와서 완옌부의 세력확대에 큰 공을 세웠다. 1113년 오아속의 뒤를 이어 수장이 되었을 때 완옌부는 동부 만주의 생여진(生女眞)과 고려의 장성(長城) 밖 여진 제부(諸部)의 통합에 성공하였다. 요(遼)나라의 혹심한 주구(誅求)에 시달린 여진인들의 쌓인 불만을 이용하여, 1114년 그는 군사를 일으켜 요군을 만주 동부의 영강주(寧江州)에서 격파하고 그 부근의 여러 주(州)를 함락시킨 뒤, 이듬해 황제위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후 약체화한 요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요동(遼東)에 진출, 중국 북동부의 연운(燕雲) 16주의 수복을 꾀하기 위해 송(宋)나라와 동맹하였다. 이어 요나라를 협공, 1121년 말부터 요나라 중경(中京: 네이멍구자치구 寧城縣大名城)을 점령하고, 다시 서경(西京)을 함락시켰다. 1122년 그의 친정(親征)으로 연경(燕京: 北京)을 함락시키는 등 요나라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연경 및 그 주변 땅을 송나라에 줄 것을 승낙하고 연경으로부터 철수하였다. 1123년 병에 걸려 본거지 회령부(會寧府: 黑龍江省 阿城)로 돌아오다가 객사하였다. ( 출처: 두산백과)
▶1574 율곡 이이, 임금에게 [만언봉사[萬言封事] 올림, *[만언봉사[萬言封事]는 율곡 이이(李珥:1536~1584)가 성학(聖學)의 대요(大要)를 적은 책으로 필사본. 1책 53장(張). 규장각도서. 《갑술만언봉사(甲戌萬言封事)》라고도 한다. 1574년(선조 7)에 지어 올린 봉사(封事)로서, 주로 성학의 대요를 논하였고, 수기안민지요(修己安民之要)와 기천영명지술(祈天永命之術)에도 언급하였다. 전문(全文)이 율곡집(栗谷集)에도 실려 있다. ( 출처: 두산백과)
▶1748 요한 베르누이[Bernoulli, Johann, 1667.8.6∼1748.1.1] 사망 *1748년 1월1일 스위스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가 81세로 작고했다. 요한 베르누이는 당초 문학을 공부하다가 의학으로 방향을 돌렸고, 다시 수학으로길을 틀었다. 수학자로서 그의 공적은 미적분학을 체계화하고 해석학을 물리학에 응용한 데 있다. 요한 베르누이는 또 바젤대학에서 가르치며, 뒷날‘해석학의 화신(化身)’으로 불리게 될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비롯해 많은후진을 길러냈다. 자연과학의 역사에서 베르누이를 거론할 때는 반드시 그 앞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 성(姓)만 얘기하면 어떤 베르누이를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베르누이 집안은 뛰어난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베르누이 일가는 16세기 후반 종교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안트베르펜을 떠나 스위스 바젤에 뿌리를 내린 프로테스탄트 집안이다. 이 집안은 오늘의 주인공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3대만 헤아려도 8명의 수학자를 배출했다. 베르누이수(數)로 확률론에 공헌한 요한의 맏형 야콥 베르누이와, 유체(流體)의 속력과 압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베르누이 정리를확립한 요한의 차남 다니엘 베르누이가 특히 알려져 있다. 수학이나 자연과학 쪽에 눈길을 돌리지 않은 베르누이가(家) 사람들도 거의 모두 법률촵행정촵예술이나 다른 지적 분야에서 뛰어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베르누이 가문은, 두 세기에 걸쳐 50여 명의 음악가를 낳은 독일의바흐 가문이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를 비롯해 수많은 일급 학자들을 낳은 스위스의 소쉬르 가문과 더불어, 유전과 환경(nature vs. nurture)이 생물체에 행사하는 결정력을 두고 벌어진 고전적 논쟁에서 전자(前者)의 편에 선 우파 이론가들에게 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빼어난 베르누이 개인들도 베르누이 집안이라는 환경이 없었다면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으리라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한국일보 2004.1.1 고종석 논설위원 hk.co.kr )
▶1785 영국 신문 [더 타임스(The Times)] 창간, *런던에서 발행되고 있는 영국의 대표적 신문으로 -세계 10대 신문 중 하나로서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며 흔히 《런던 타임스 The Times of London》를 약칭해서 《타임스》라 부른다. 1785년 1월 1일 J.월터 1세에 의해 《데일리 유니버설 레지스터 Daily Universal Register》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1788년 1월 1일 《타임스》로 명칭을 바꾸고 상업적인 뉴스와 논평에 스캔들 기사를 곁들여 발행하기 시작했다. 1803년 창업자의 아들 존 월터 2세가 운영하게 되면서 지면을 4면에서 12면으로 늘렸고, 명주필 T.번스와 J.딜레인의 도움을 받아 영국의 여론형성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권위있는 신문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독자적인 편집진을 갖추고 있는 자매지 《선데이 타임스 The Sunday Times》를 1822년에 창간하였다. 1848년 존 월터 2세의 아들 존 월터 3세가 경영권을 넘겨받았는데, 경영부진으로 사세가 기울어 1908년 노스클리프경(卿)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노스클리프경은 선정적인 보도에 치중하여 편집의 권위와 명성은 예전에 미치지 못하였다. 노스클리프경이 죽은 후, 1922년 월터와 J.J.애스터 양가에서 경영권을 되찾았으며, 1950년대 당시 영국방송협회(BBC) 사장이었던 윌리엄 헤일리경이 편집주간(1952~1967 재임)으로 재임하면서 다시 정론지로서의 옛 명성을 회복하고, 참신한 기획과 생생하고 흥미로운 편집으로 변화를 꾀했다. 1966년에는 제1면에 싣던 광고를 다른 면으로 옮기고 뉴스 기사를 실어 오늘날의 신문구성 틀을 다졌다. 그후 1981년 2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국제적 신문발행인 루퍼트 머독이 이 두 신문을 인수했다. (출처: 두산백과)
▶1801 소행성 처음 발견
▶1804 아이티, 프랑스로부터 독립
▶1861 모나코 독립
▶1863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奴隸解放宣言, Emancipation Proclamation] 발효, *1863년 1월 1일 미국의 노예해방에 관하여 대통령 A.링컨이 발표한 선언으로 남북전쟁 중 링컨은 1862년 9월의 안티텀 전투에서 전황이 북부에 유리해지자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 여러 주가 1863년 1월 1일까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노예해방을 선언하겠다는 경고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선언이 정식으로 포고되었다. 내용은, ①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하며, ②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충실히 일할 것, ③ 흑인에게 연방 군대에 참가할 기회를 줄 것 등을 규정하였다. 이 선언은 남북전쟁에서의 전략적 의의도 가지는데, 남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남부 여러 주의 연방 조기복귀(早期復歸)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노예해방은 전쟁 뒤 합중국 수정(修正)헌법 제13∼15조의 성립으로 폐지가 확정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1864 미국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태어남, 뉴욕의 한 빌딩의 방 번호이기도 했던 그의 '갤러리 291'을 통해 사진 예술 전개와 함께 피카소와 초현실주의를 처음으로 미국에 소개했다.
▶1867 룩셈부르크 독립
▶1879 영국 소설가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Forster, Edward Morgan, 1879.1.1- 1970.6.7]출생, *런던 출생. 케임브리지대학교 재학 중 학내의 자유주의 그룹에 참가하였다. 빅토리아왕조의 도덕이나 가치관에 반발, 그리스 문명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혔다. 그들의 모임은 나중에 '부룸즈버리 그룹'으로 발전하여 당시의 지도적 문화 서클이 되었다. 졸업 후 이탈리아로 가서 《천사가 두려워하는 곳에 Where Angels Fear to Tread》(1905), 《가장 길었던 여로(旅路) The Longest Journey》(1907), 《전망 좋은 방 A Room with a View》(1908)을 썼다. 1910년 그의 가장 원숙한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하워즈 엔드 Howards End》를 썼고, 또 1924년에 발표한 대작(大作) 《인도로 가는 길 A Passage to India》에서는 동서문명의 대립과 인간이해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그렸다. 그 밖에도 환상적인 작풍의 단편집, 여행기·전기·수필, 독창적인 소설론 《소설의 제상(諸相) Aspects of the Novel》(1927) 등의 논평 및 기타의 저작이 있다.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다. (출처: 두산백과)
▶1879 20세기폭스사 설립한 헝가리 출신 미국 영화제작자 윌리엄 폭스(1879-1952)출생,
▶1883(조선고종20) 제물포 개항, 인천으로 이름 바꿈, 부산항과 원산항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
▶1892 폴란드태생 미국 지휘자 아서 로진스키(1892-1958)출생,
▶1895 미국 연방수사국(FBI) 창설자 존 에드거 후버(1895-1972)출생
▶1886 영국, 버마 병합
▶1896(조선고종33), 음력(陰曆)대신 양력(陽曆) 사용 시작
▶1897(고종광무원년) 서울시내에 최초의 석유가로등 설치
▶1900 대한제국, 만국우편연합 가입
▶1901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연방 성립
▶1905 경부선 철도 전구(서울-부산)간 개통 운행 시작, *우리나라 두번째 철도선인 경부선이 1905년 1월1일 운행을 개시했다. 1901년 서울 영등포(8.20)와 부산 초량(9.11)에서 공사가 시작된 지 3년4개월 만이다. 공사는 관민의 저항과 반대, 용지매수 분쟁, 결빙과 홍수 등으로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조선 정부의 협조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저렴한 비용으로 건설됐다. 경부선에 이어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연결하는 최초의 부관연락선 '일기환(壹岐丸)'이 취항(1905.9.11)하고, 경의선(서울-신의주)이 개통(1906.4.3)됨으로써 섬나라 일본은 사실상 대륙과 연결되는 효과를 보았다. 1913년에는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 각국과 화물운송을 시작해 오랫동안 숙원해온 대륙진출도 확실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첫 열차는 시속 26.5㎞ 속도로 17시간이나 걸려 서울과 부산 간을 운행했지만 5개월 후에는 14시간으로 단축됐고, 1906년에는 다시 11시간으로 단축돼 속도기술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다. (조선일보db)
▶1905 시베리아 철도 (파리-블라디보스톡 구간) 특급열차 운전 개시
▶1910 청 나라 중화민국으로 개칭
▶1911 일본 경찰이 민족운동과 조선독립운동 말살책과 탄압을 위해 신민회원 다수를 체포 고문한 [105인사건百五人事件](민족주의자 700여명 피검)] 조작발생, *1911년 일본 경찰이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다수의 신민회원을 체포하여 고문한 사건으로 1910년 평북 선천(宣川)에서 안명근(安明根)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 경찰은 이것을 구실삼아 신민회원과 평안도 일대의 그리스도교 신자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을 억압할 계획을 세워, 안명근 사건을 신민회원 등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처럼 조작하여,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이승훈(李昇薰)·이동휘(李東輝) 등 6백여 명을 검거하였다. 그러나 신민회원이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총독암살 음모를 꾸민 사실이 없으므로 그 사실을 부인하자, 일본 경찰은 거짓 자백을 받기 위해, 당시의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明石元二郞]의 지시로 이들에게 가장 악독한 고문을 자행했는데, 그 결과로 6백 명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 105명을 기소하였다. 1심(審)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105명은 불복상고를 제기하여, 2심에서 99명은 무죄석방되고 윤치호·양기탁·안태국(安泰國)·이승훈·임치정·옥관빈 등 6명만이 주모자로 몰려 4년의 징역선고를 받고 복역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1912 한국 표준자오선 일본표준시에 맞춰 127도 30분에서 135도로 변경
▶1912 쑨원(손문 孫文), 난징(南京)에서 수립된 중화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취임 공화제 선포, *[난징정부 南京政府(남경정부)] -중국의 중화민국(中華民國)시대에 난징을 수도로 한 정부의 약칭으로 ① 신해혁명 직후 쑨원[孫文]을 임시대통령으로 한 중화민국 임시정부(1912년 1월∼13년 12월), ② 장제스[蔣介石]가 수반이 되어 좌파(左派)의 우한[武漢] 국민정부에 대항해서 난징에 수립한 국민정부(1927∼49), ③ 량홍즈[梁鴻志]를 수반으로 하여 일본의 앞잡이 구실을 한 중화민국의 유신정부(1938∼40), ④ 왕자오밍[汪兆銘]을 수반으로 한 일본 앞잡이 구실을 한 국민정부(1940∼45) 등의 약칭이다. 4개의 정부 중 실질적인 중앙정부의 구실을 한 것은 ②의 국민정부뿐이다. 1927년 4월 장제스에 의한 반공(反共) 쿠데타 직후에 좌파의 우한정부에 대항하여 우파의 장제스가 수립하였으며, 9월에 우한정부를 흡수하였다. 또한 32년의 제1차 상하이[上海]사건 때는 일시 뤄양[洛陽]으로 옮겼고, 37∼40년의 중일전쟁 때는 한커우[漢口]와 충칭[重慶]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에 다시 난징으로 돌아왔으나, 국민군 ·공산군의 내전에 패하여 타이완으로 밀려난 후로는 난징정부의 이름은 자연히 소멸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1912 중화민국 탄생] -1912년 1월1일 쑨원(孫文)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함으로써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쑨원은 3일전 17개 성(省)으로 구성된 대표자 모임에서 16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임시 대총통에 선출됐다. 중화민국 수립은 1911년 10월 양쯔강 인근의 무창(武昌)에서 혁명군이 봉기하고 1개월 만에 17개 성이 호응해 궐기한 신해혁명 덕분에 이뤄졌다. 임시약법(헌법)을 제정하며 공화국으로 골격을 갖춰나갔지만 중화민국은 군사·재정적인 자립 역량이 부족했다. 일곱살의 선통제 푸이(溥儀)는 쑨원과 북양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타협으로 2월12일 퇴위, 진시황 이래 2200여년 동안 유지된 중국왕조 역사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청조도 268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쑨원도 어쩔수 없는 힘의 열세로 3월11일 총통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주고 제2혁명으로 기회를 노렸으나 실패하고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조선일보db)
▶1913 어린이 교육잡지 '붉은 저고리' 창간, *1913년 1월 1일 창간된 문예지로 신문관(新文館) 발행. 편집 겸 발행인 최남선(崔南善). 월 2회 간행. 최초의 어린이신문이었으며, 1913년 6월 15일 조선총독부의 기휘에 저촉되어 제12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1917 이광수(李光洙),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매일신보에 연재 시작, *이광수(李光洙)의 장편소설로 1917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된 한국 최초의 현대 장편소설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울 경성학교의 영어교사 이형식은 김 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 개인지도를 하다가 선형의 미모에 차차 연정을 품게 되는데, 어린 시절의 친구이며 자기를 귀여워했던 박 진사의 딸 영채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받는다. 이 때 영채는 투옥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었다. 그 뒤 영채는 경성학교 배 학감에게 순결을 빼앗기자 형식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한편, 자살을 기도하였던 영채는 동경에 유학 중인 병욱을 만나 마음을 바꾸고 음악과 무용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하며, 약혼한 형식과 선형은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들은 같은 기차로 유학길을 떠나고 있었으며, 모두 학교를 마치고 고국에 돌아오면 문명사상의 보급에 힘쓸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근대문명에 대한 동경, 신교육사상, 자유연애의 찬양 등이 주제를 이루어 당시 독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 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선구적인 의의를 지니는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출처: 두산백과) *[이광수 李光洙, 1892-1950.10.25] - 호 춘원(春園).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소작농 가정에 태어나 1902년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후 동학(東學)에 들어가 서기(書記)가 되었으나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1904년 상경하였다. 이듬해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의 추천으로 도일, 메이지[明治]학원에 편입하여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는 한편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10년 동교를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재차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철학과에 입학,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하여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1919년 도쿄[東京]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21년 4월 귀국하여 허영숙(許英肅)과 결혼,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썼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고 창씨개명을 하였다. 8·15광복 후 반민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밖의 작품에 《윤광호(尹光浩)》 등의 단편과 《이차돈(異次頓)의 사(死)》 《사랑》 《원효대사》 《유정》 등 장편, 그리고 수많은 논문과 시편들이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19 리히텐슈타인 독립
▶1919 독일 스파르스쿠스단 공산노동당 창립
▶1928 한국 최초의 [신춘문예新春文藝]작품 입선작 발표, *주로 일간신문사에서 새해의 문예 당선자를 뽑는 연중행사로 매년 연말에 문학작품을 공모하여 신년 초에 당선 작품들을 지면에 발표하고 당선자에게 상금을 주며 축하한다. 한국 문필육성에 큰 공헌을 한 신춘문예는 1925년 《동아일보》에서 처음 시작하였으며, 제1회 소설 입선 작품은 최자영(崔紫英)의 《옵바의 이혼사건》이다. 이어 1928년 《조선일보》에서도 실시하였다. 그후 8 ·15광복과 6 ·25전쟁으로 몇해 동안 중단되었다가 1955년 다시 실시되었다. 이때 1954년에 창간된 《한국일보》에서도 신춘문예 제도를 창설하였고, 나중에 《경향신문》과 《중앙일보》에서도 실시하였다. 문단의 등용문으로 가장 권위가 있는 이 제도는 현재 잡지사와 여러 지방신문에서도 채택하는 곳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다. 소설 ·시 ·희곡 ·동화 등 각 분야에서 많은 문인이 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여 활동하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31 염상섭, 장편소설 [삼대三代]를 조선일보에 연재 (∼9.17) *염상섭의 대표적 장편소설로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 서울의 이름난 만석군 조씨(趙氏) 집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에 이르는 삼대가 일제 치하에서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리면서 당시의 청년들의 고민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3·1운동 전후의 대지주의 생태, 그 당시 풍미했던 사회주의자들의 군상이 복잡하게 얽혀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할아버지가 죽자 쑥밭이 되는 덕기의 집안, 젊은 사회주의자들의 상호 불신과 반목, 그리고 그들 내부에서의 갈등과 테러가 인상 깊게 묘사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염상섭廉想涉, 1897.8.30 ∼1963.3.14] - *호 횡보(橫步). 서울 출생.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 도일하여 교토부립중학[京都府立中學]을 졸업, 게이오[慶應]대학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귀국,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0년 《폐허(廢墟)》지 동인에 가담하여 문학의 길에 투신했다. 1921년 《개벽(開闢)》지에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여 문단적인 위치를 굳히고 1922년에는 최남선(崔南善)이 주재하던 주간종합지 《동명(東明)》에서 기자로 활약했으며, 현진건(玄鎭健)과 함께 《시대일보》 《매일신보》 등에서 일하기도 했다. 1946년 《경향신문》 창간과 동시에 편집국장, 6·25전쟁 때는 해군 정훈국에 근무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만세전(萬歲前)》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금반지》 《고독》과 장편 《삼대(三代)》 등이 있고, 8·15광복 후에도 《두 파산(破産)》 《일대의 유업(遺業)》 《짖지 않는 개》 등의 단편과 장편 《취우(驟雨)》 등이 있다.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문학을 이 땅에 건설한 최초의 작가로서 김동인(金東仁)·현진건과 함께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처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적인 소설로 평가되며, 그 후의 대부분의 소설은 전형적인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으로 일관되었다. 1953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예술원 종신회원에 추대되었으며,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장에 취임하고 아시아자유문학상, 195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2년에 3·1문화상(三一文化賞), 1971년 문화훈장 은관 등을 받았다. (출처: 두산백과) **대표작: [표본실의 청개구리標本室-靑-] -1921년 《개벽(開闢)》지에 발표한 처녀작으로서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로 일컬어진다. 1인칭 소설로, 내용은 '나'라는 주인공이 중학교 2학년 때 청개구리를 해부하던 기억을 더듬는 데서 시작된다. 어느날 친구와 함께 남포까지 가서 친구 Y의 소개로 정신이상 증세가 있는 김창억(金昌億)을 만난다. 철학자연하는 그는 우리 모두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일종의 영감(靈感)에 사로잡히게 되어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서 세계평화를 위한 회를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후 북만주를 방랑하던 중 Y의 편지를 통해 김창억의 후문을 듣게 된다. 즉 김창억은 자기의 왕국을 불살라버리고 자기를 버린 후처의 본가 주변에서 걸식하며 지낸다는 것이었다. '나'와 '김창억'을 통해 당시의 창백하고 무기력한 청년층의 우울상을 해부한 작품이다. (출처: 두산백과)
▶1934 수필가 번역문학가 전혜린 [田惠麟, 1934.1.1∼1965.1.11]출생,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 출생하였다. 경기여자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 재학 중 독일에 유학, 뮌헨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에는 서울대학교 법대·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6년 F.사강 원작 《어떤 미소》를 비롯하여 E.슈나벨의 《한 소녀의 걸어온 길》(1958), 이미륵(李彌勒)의 《압록강은 흐른다》(1959), E.케스트너의 《파비안》(1960), L.린저의 《생의 한가운데》(1961), H.게스턴의 《에밀리에》(1963), W.막시모후의 《그래도 인간은 산다》(1963), H.노바크의 《태양병(太陽病)》(1965) 등을 계속 번역 소개하였다. 그 밖에도 사후에 출판된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와 비장(秘藏)의 일기를 모은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1968) 등이 있다. 자살로 스스로의 인생을 결말지었다. (출처: 두산백과)
▶1934 독일 소설가 바서만[Wassermann, Jacob, 1873.3.10∼1934.1.1] 사망, * 바이에른의 퓌르트에서 유대계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실과학교(實科學校)를 졸업한 후 문학에 뜻을 두고 빈으로 가서 잡지 편집에 종사하다가, 1900년부터 작가로서 독립하였다. 처음에는 구츠코(Gutzkow)의, 나중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았으며, 정신분석에 흥미를 가지고 시대의 위기를 비판적으로 관찰하였다. 유대인의 고뇌를 체험하고, 모든 사회의 부정을 간취(看取)하여 그것들을 소재로 현대사회를 묘사하였다. 자전(自傳) 《독일인 및 유대인으로서의 나의 길》(1921)은 그가 독일에 살며 스스로도 독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으로서의 갈등의 체험담이다. 처녀작 《치른도르프의 유대인들》 및 《젊은 레나테 푹흐스의 이야기》(1900)로 문단의 인정을 받은 다음 정력적인 필치와 예리한 심리묘사를 구사하는 장편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카스파르하우저 Caspar Hauser》(1908) 《거위를 껴안은 사나이》(1915) 《크리스티안 반샤페 Christian Wahnschaffe》(1919) 《회귀선(回歸線)》(1923) 등이 대표작이다. (출처: 두산백과)
▶1937 중국공산당 강서성(江西省)에 정권수립
▶1938 전국 1400시장의 장날에 양력 사용
▶1942 합방국 26개국 공동선언 발표
▶1945 프랑스, UN 가입
▶1946 히로히토[(유인裕仁) 1901.4.29∼1989.1.7] 일왕, 자신의 신격성을 부인하고 인간임을 선언, *히로히토는 일본의 제124대 왕(재위 1926∼1989)으로 칭호 미치노미야[迪宮]이고, 다이쇼[大正] 일본 왕의 장자이며, 1916년 입태자의 의식, 1919년 성년의 예식을 거쳐, 1921년 다이쇼 일본 왕의 섭정이 되었고, 1924년 나가코 왕녀[良子王女]와 결혼, 1926년 12월 왕위에 올랐다. 중일전쟁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등 일본의 팽창주의 역사를 체험하였고, 1946년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서의 신격(神格)을 부정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하여 일본국 헌법제정과 함께 상징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 생물학을 연구하여 《사가미만[相模灣] 후새류도보(後類圖譜)》 《나스[那須]의 식물》 등을 저술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1947 자유중국 신헌법 공포
▶1947 영국, 통신 국유화 실시
▶1948 소련, 중국내전 불개입발표
▶1948 전기요금 6배로 인상
▶1949 ECA 원조도입 시작
▶1949 미국, 한국정부를 정식 인정(초대 대사에 무초)
▶1949 남북한 우편물교환협정 체결
▶1949 친일파와 부일협력자 처단 위한 반민특위 발족,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일제 치하 36년간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 설치되었던 특별기구로 약칭 ‘반민특위’라고도 한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1947년 친일잔재청산을 위하여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법안이 미군정의 동맹세력인 친일경찰, 친일관료, 친일정치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준을 거부하였다. 이로써 친일파 청산의 과제는 정부 수립 후로 넘어가게 되었다.
【반민법의 제정】 1948년 8월 헌법 제101조에 의거하여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이어 9월 특별위원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의하면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의원이 된 자는 최고 무기징역 최하 5년 이상의 징역,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한 자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징역, 직 ·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재산몰수에 처하도록 하였다. 【반민특위의 구성】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반민법이 공포되자 국회는 곧 반민특위 구성에 나서 10월 12일 그 구성을 완료하였다. 이어 11월 25일 국회 제113차 본회의에서는 반민특위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 조직법안’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 부속기관 조직법안’ ‘반민법 중 개정법률안’을 모두 통과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국회에서는 특별재판부 재판관과 검사관 및 반민특위 도(道)조사부 책임자를 선출함으로써 민족반역자 및 부일협력자에 대한 처단기구를 완성하였다. 한편 친일행각을 벌였던 경찰간부들은 반민특위 관계자들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시켰다. 10월 하순 수도청 수사과장 최란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전 수사과장 노덕술은 수사과장실에 모여 반민특위 위원 중 강경파를 제거하기로 모의한 후 테러리스트인 백태민에게 이 일을 맡겼다. 처단대상 15명 가운데는 대법원장 김병로, 검찰총장(특별검사부장) 권승렬, 국회의장 신익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모의는 백태민의 자수로 사전에 발각되어 모의자들은 구속 ·기소되었다. 【반민특위의 활동】 1949년 1월 5일 반민특위는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8일 박흥식을 체포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자 이승만은 담화를 통하여 견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요지는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반되며 안보상황이 위급한 때 경찰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대법원장(반민특위특별재판부장) 김병로는 반민특위활동이 불법이 아니라는 담화를 발표하고 정부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계속 비협조로 일관하더니 2월 24일 반민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반민법 법률개정안을 제2회 39차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결과는 부결되었으며, 특위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 기간동안 특위의 활동성과는 총 취급건수 682건 중 기소 221건, 재판부의 판결건수 40건으로, 체형은 고작 14명에 그쳤다. 실제 사형집행은 1명도 없었으며, 체형을 받은 사람들도 곧바로 풀려났다. 【반민특위의 와해】 반민특위는 국회프락치사건과 6 ·6경찰의 특위습격사건을 겪으면서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국회프락치사건이 친일파 척결의 주도세력이었던 소장파의원들을 간첩혐의로 체포함으로써 반민특위를 위축시켰다면, 특위 산하 특경대에 대한 경찰의 습격은 반민특위의 폐기법안을 통과시키게 함으로써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벌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역사적 평가】 8 ·15광복 직후 무엇보다도 신속히 친일파를 척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초기에 기회를 놓쳤고, 이후 미군정은 남한에 반공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공산세력에 대항할 세력으로 친일파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친일파의 청산은 미국의 국익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로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의 통치구조를 부활시키고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어 등장한 이승만정권 역시 미군정의 통치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았고, 친일파는 이승만의 정권장악과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또 이를 위하여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무력화시켰다. 그 결과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친일세력이 그 후에도 한국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길을 열어준 것은 물론이고, 한국민족주의의 좌절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출처: 두산백과)
▶1950 제1회 건국국채 발행
▶1951 중공군 6개군단(김일성의 6.25남침전쟁에 북괴군지원참전), 1951.1.1. 38선 넘어 대규모 공세 개시,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River Yalu) - 중공군 압록강을 넘다] -중국군이 한국 전쟁에 참전한다는 것이 가능성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국군이 38도 선을 넘어선 다음 날인 10월 1일, 한국군이 아닌 UN군이 38도선을 넘어설 경우 중국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UN군은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다음날인 10월 2일, 38선을 넘었습니다. 중국의 지도자인 모택동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대해 소련의 지도자인 스탈린과 긴밀히 협의하기 시작했습니다.특히, 그 당시 중국은 공군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소련으로부터 공군력을 지원받고 싶어했습니다. 결국, 중국이 지상군을 파견하는 대신, 스탈린이 공군과 전쟁물자를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이 결정되었습니다. 한편, 맥아더 장군은 당시 중국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의 참전을 걱정하는 트루먼 대통령과 만나 중국은 절대로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를 확신시켰고, 설사 중국이 참전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희생만이 있을 것이라며 크리스마스까지 미군을 일본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19일), 맥아더가 중국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한지 단지 사흘 후에, 중국군은 압록강을 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북한에 들어오자 마자 모두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UN군은 중국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을 전혀 눈치챌 수 없었습니다. 이 때, UN군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과 함경 남도 도청 소재지인 함흥을 막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북한의 대부분이 UN군에게 장악되었을 때, 중공군의 개입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1950년 11월 2일 - 중국의 한국전 참전] 10월 25일 미군은 중국군으로 보이는 군대로 부터 기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미군은 그들이 그저, "중국계 한국인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11월 1일 서부 전선에서 중국군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였고 다음 날인 11월 2일 중국은 방송을 통해 그들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중국군의 공격으로 유엔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기 시작합니다. 유엔군이 느낀 상대는 지금까지 싸웠던 북한군과 매우 달랐습니다. 이들은 유엔군의 보급로와 도주로를 차단하고 정면에서 공격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후방에서 불쑥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특히, 이들은 낮에는 숨어있다가 밤에만 공격을 하였고 진군할 때는 언제나 나팔을 불거나 징을 치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습니다. 주변의 산에는 불을 내어 연기가 휩싸였고 이 가운데서 그들을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비행기의 공습은 효과를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공격 방법은 UN군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도중 고립되어 있던 어떤 미군부대는 초토화되는 치명타를 입기도 했습니다. 한편, 하늘에서는 소련에서 제작된 MIG-15기가 출연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유엔군은 하늘에서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공격할 수 있었지만, 이 성능 좋은 MIG기로 인해 더 이상 편안한 비행을 즐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11월 하순, 동부 전선에서도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동부 전선도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미 제 1 해병사단이 가장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중국군뿐만 아니라 한반도 북부의 살인적인 추위로 부터도 공격을 당했습니다. 중국은 미 해병대를 제거하기 위해 약 7개 사단을 동원하여 그들을 겹겹이 애워쌌습니다. 중국군의 주 공격 방법은 사람의 수를 앞세운 인해 전술이었습니다. [인터뷰 : 에드워드 리브스 , 당시 미 육군 7사단] 장진호에서 전투할 때였습니다. 적군이었지만 중국군이게 정말 미안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50구경 기관총을 사용했는데, 그들은 피하지도 않고 똑바로 달려들었습니다. 즉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이용해서 병력을 이쪽 저쪽으로 이동시키지 않고 한 방향으로 계속 진격함으로써 고지를 점령하는 전술을 쓴 겁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곧바로 다가왔습니다. 그 불쌍한 친구들은 전술을 사용할 줄 몰랐으며 사람을 아주 무가치하게 이용했습니다.
*[1950년 11월 30일 워싱턴-원자 폭탄 사용도 가능하다] -중국군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고, 그 결과로 미국이 완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트루먼 대통령은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한국 전쟁에서 원자 폭탄이 사용될 수 있다는 암시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덧붙여 그는 원자 폭탄을 사용할 때 UN의 승인을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며 의존하지도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자 UN의 많은 나라들은 한국전쟁이 제 3차 대전으로 번질까 두려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UN의 많은 나라들은 휴전을 제안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원자 폭탄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영국의 애틀리 총리는 황급히 워싱턴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국과 협상을 하자고 설득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오히려 강력 대응을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미국과 영국의 견해가 대립되고 있을 무렵인, 12월 5일 중국군은 수도 평양을 점령했고 UN군은 계속 후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전세는 다시 역전 된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 역시 중국의 참전에 대해 미국이 강력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첫째, 미 해군은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고 둘재, 중국 본토를 폭격하며 셋째, 대만에 있는 장개석 군대를 참전시키고 넷째, 원자탄 사용도 고려할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이런 의견을 수용하여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최종 결정은 결사 항전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며칠 뒤, 트루먼 대통령은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애틀리 총리의 노력으로 트루먼 대통령은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950년 12월 24일 - 흥남 철수 작전과 한국의 쉰들러 리스트] -한편, 장진호 에서부터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모인 유엔군과 한국군 부대들은 안전하게 철수하기 위해서 흥남 주위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습니다. 함흥을 비록한 주변 지역은 모두 중공군에게 포위 당했기 때문에 배를 타고 안전한 지역으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피난민들도 흥남 부두로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타야할 배는 그 곳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피난민들은 철수하는 미군에게 실낫 같은 희망을 걸고 부두에서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미군은 처음, 피난민들과 같이 철수할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전시에는 아무리 생명이 중요하다고 해도 군인이 최우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때 한국인 고문관으로 있던 현봉학이 알몬드 사령관에게 피난민들이 여기 남는다면 중공군에게 분명히 몰살당할 것이라며 생명을 반드시 구해 주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위와 같은 이유로 그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현봉학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 골몰하다 하니 대령과 함께 LST등 여러 군용 함선에 여유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즉시 이를 이용하여 피난 계획을 수립하여 알몬드 사령관에게 재청을 합니다. 결국 알몬드는 이 제안을 수락하여 피난을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우리는 당시 이 쉽지만은 않았던 이 피난 계획을 끝까지 추진한 현봉학을 한국의 쉰들러 리스트라 부릅니다. *[1951년 1월 4일 - 1.4 후퇴] -흥남에서 철수가 무사히 성공할 무렵, 서울이 위치한 서부전선은 중국군에게 38선까지 밀렸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 제 8군 사령관 워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동안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낙동강 전선을 막아낸 비운의 장군이었습니다. 그의 후임으로는 리지웨이가 임명되었고 그는 곧바로 전선으로 날아왔습니다. 1951년에 접어들면서 중국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고 서울이 중국군에게 곧 함락당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자, 서울 시민들 대부분이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두 번째로 서울을 떠나는 피난길이었습니다. 얼어붙은 한강 위로 사람들의 물결이 이어졌고 그들이 떠난 서울은 적막의 도시로 변했습니다. 오늘(1월 4일) 리지웨이 사령관도 남쪽으로 후퇴결정하고 금강까지 후퇴하였습니다. 유엔 공군은 계속해서 보급로를 공격하였고 그로 인해 공산군은 공격을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리지웨이는 시간을 얻었고 그 동안 전선을 재정비하였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일은 의욕을 잃은 장병들을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프차와 경비행기로 전선을 돌아다니며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다시 전투가 시작 됬습니다. 리지웨이는 막강한 화력으로 인해전술에 맞섰습니다. 그는 공산군의 보급원을 완전히 끊기 위해 북한의 공장지대와 주요 도시인 평양, 원산에 폭탄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리고 1월에는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수원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중국은 이에 맞서 2월에 대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UN군은 이를 무사히 막아냈습니다. 특히, UN군으로 참전한 프랑스는 지평리에서 미군과 함께 중국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저지하였습니다. *[1951년 4월 11일 워싱턴 - 맥아더 해임] -전세가 다시 유리해짐에따라 미국은 한국전쟁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에 들어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그리고 합동 참모 본부는 전쟁을 확대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전쟁이 중간에 다면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UN의 국가들은 휴전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희생을 원치 않았고 한국전쟁이 세계 대전으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할 경우 한국에서 철수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3월 15일 UN군은 서울을 다시 점령하였고 전세는 계속 UN군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전쟁이 유리해지자 UN의 휴전 압력은 더욱 거세졌고, 결국 미국은 중국과 협상을 통해 휴전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3월 20일 이 소식을 들은 맥아더 장군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맥아더는 정부와는 한 마디의 협의도 없이 중국의 신경을 건드릴만한 성명을 발표하고 중국군 사령관에게 휴전 협상을 제안합니다. 이와 함께 트루먼 정부의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러한 맥아더의 행동에 격분하여 4월 11일 그를 해임시켰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 태평양의 시저, 전설적인 장군 더글라스 맥아더는 이렇게 해임되었습니다. 그의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밴플리트를 8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4월 16일 맥아더는 미국의 시민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는 비록 해고되었지만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그의 귀국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반면, 트루먼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커져만 갔습니다. 4월 19일 미 의회에서 71세의 노장군 맥아더의 연설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맥아더의 연설] "Old soldiers never die, but just fade away!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그의 연설은 엄청난 찬사와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심지어 어떤 의원들은 소리를 내어 울기도 했습니다. 한편, 맥아더의 해임 후, 1951년 4월과 5월에 중국군은 다시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이번에는 UN군과 중국군 모두 준비가 충분한 상태였습니다. UN군은 공산군의 공격을 겨우 막을 수 있었지만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제 전쟁은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중국군의 인해전술과 유엔군의 대규모 화력전...그들은 이제 힘으로는 이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1951년 여름 - 국제전의 무대, 한반도] -51년 여름 무렵, 유엔 참전국으로 한국에 파견된 여러 나라의 군대들이 본격적으로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유엔군으로서 한국에 전투 부대를 파견한 나라는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터키, 타이, 그리스, 남아프리카 공화국,벨기에-룩셈부르크, 콜롬비아 그리고 이디오피아 모두 16개국 입니다. 또, 5개국 ,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그리고 이탈리아, 이 의료 지원을 하였습니다. 비UN국으로 일본은 비밀리에 해군을 참전시켰습니다. 공산측은 소련과 중국이 개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주인공인 대한민국과 북한을 합쳐 모두 25개국이 이 전쟁에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한과 북한의 내전적 성격이 짙었지만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제는 국제전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마치 이들에게 전쟁터를 빌려주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출처: 한국전쟁 http://www.osan.hs.kr/~artrics/korea/stories/stories.htm )
*[중공군 제6차공세와 국군 제3군단 붕괴의 교훈/최용호] -c1950년 10월 중국 공산군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명분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국군과 유엔군을 기습적으로 격파하고, 38선을 넘어 남진을 계속하였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과 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반격에 나서 1951년 3월 15일에는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c이어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계속되자, 중공군 사령관인 팽덕회(彭德懷)는 "또 다시 서울을 점령하여 모택동(毛澤東)에게 노동절(5월 1일) 선물로 바친다"는 목표 아래 한국전쟁참전 이후 다섯 번째의 공세 즉, 제5차공세를 감행하였다. 이때 중공군은 유엔군의 공중공격과 파평산 및 설마리 일대의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저지되자, 제5차공세의 실패를 조기에 만회하기 위해 연이어 제6차공세(중국은 "第5次 戰役 2階段 攻勢"로 호칭)를 계획하였다. c제5차공세시 중공군은 서울북방에서 유엔군의 화력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던 경험이 있었다. 따라서 제6차공세는 한국군부대가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동부산악지역을 목표로 선정하고, 불과 1주일만에 서부의 주력을 동부로 재배치하였으며, 인제군 신남 일대의 국군 제5·7사단을 돌파하여 현리 일대의 국군 제3군단(제3·9사단)을 포위 격멸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중공군은 1951년 5월 16일 밤, 동부지역의 북한군과 함께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국군 제5·7사단 지역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9개 사단을 투입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형성된 돌파구를 이용하여 2개 사단을 현리 후방의 오마치와 침교로 진출시켜, 제3군단의 후방을 2중으로 차단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잘 알지 못하였던 제3군단의 예하부대들은 다음날인 5월 17일 오전 중까지도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였다. 또한, 이날 14:00경 비행기로 현리를 방문한 군단장 역시 "선임사단장의 지휘하에 오마치를 돌파하라"고 명령한 후, 속사리에 위치한 군단사령부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제3·9사단은 이 날 밤 1개연대 씩을 차출하여 오마치 돌파작전을 시작하였으나, 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부대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렸다. 건제(建制)가 무너진 부대들은 누구의 통제도 없이, 무질서한 철수를 시작하여 무작정 방대산을 넘어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부대는 이때 무거운 공용화기부터 버리기 시작하여 개인화기까지 버린 병사도 있었으며, 계급장마저 떼어버린 간부도 있어, 전투원이라기 보다는 피난민과 다름이 없는 행렬이었다. c이어서 중공군의 집요한 추격이 계속되자, 제3·9사단은 하진부리까지 70km를 철수한 후에야 겨우 부대를 수습할 수 있었다. 한편, 미 제8군사령부는 5월 19일 아침, 서울동남방에 배치된 미 제3사단을 전환하여,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는 속사리 북방의 운두령을 점령하게 하였다. 그 결과 퇴로가 차단된 중공군은 제3군단이 붕괴되었던 것처럼, 막대한 피해를 입고 붕괴되어, 화천저수지 일대까지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에게 결코 완승(完勝)을 거둘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소규모의 고지쟁탈전으로 전환하였으며, 마침내 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 짓기 위한 협상테이블에 나서게 되었다. c한편,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현리전투의 책임을 물어 국군 제3군단을 해체하는 극약처방을 내렸으나 보다 큰 실수는 상급부대에 있었다. 당시 제8군의 정보판단은 중공군의 주력이 불과 일주일 사이에 서부에서 동부로 재배치되었음에도 "중공군 제6차공세의 목표가 서울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또한, 제8군은 국군 제5·7사단이 붕괴된 5월 17일 아침까지는 중공군의 주공방향을 식별하고, 대책을 강구할 수 있었음에도 19일 아침에야 비로소 미 제3사단을 전환시켰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3군단이 붕괴된 '가장 큰 원인'은 '제8군의 판단착오와 조치부실'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제3군단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마치를 차단한 중공군이 5월 17일 아침, 중대규모에서 오전에 대대, 저녁에는 사단규모로 증강되었기 때문에 군단의 돌파작전은 17일 오전이었다면 가능할 수 있었으나, 그 이후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전투가 마무리 된 5월 27일까지 70%의 병력과 30%의 장비가 수습되었지만, 만약 군단의 동측 설악산 일대에서 공격하였던 북한군이 그들의 계획대로 방대산 후방으로 진출하였다면, 더욱 심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을 것이다. c따라서 당시 제3군단은 '방대산을 넘는 무질서한 철수'보다는 "현지를 방문하였던 군단장의 현장지휘와 유엔군의 공군력을 바탕으로, 중공군이 예상치 못한 방책을 강구했어야만 했다. 이 경우 '현리 일대의 전면방어', 또는 '인제-홍천 축선의 새로운 방향 공격' 등의 방책도 고려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방일보, 2002.04.29.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최용호 http://www.mnd.go.kr/sub_home/Imhc/choiyh-05.htm
▶1953 맬다이브 공화국 수립
▶1955 문예지 [현대문학 現代文學] 창간, *1955년 1월 1일에 창간된 월간 문예지로 1955년 1월에 창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대 사장은 김기호, 주간은 조연현(趙演鉉), 편집장은 오영수(吳永壽)였으며, 그뒤 주간은 김윤성·윤재근·신동욱·감태준·최동호·양숙진 등이 역임하였고, 편집장은 김수명·김국태·감태준 등이 역임하였다. 창간사를 통하여 '한국의 현대문학을 건설하자는 것이 그 목표이며 사명임'을 밝혔다. 시·소설·희곡·수필 등 문학의 전 분야에 걸친 작품 외에도 고전문학 및 외국문학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1955년 창간과 동시에 현대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소설·희곡·평론의 4개 부문에 걸쳐 시상하고 있다. 1971년에는 문인극회를 창설하여 3편의 연극을 상연하였고, 같은 해 시 전문지 《시문학》을 창간하여 발행하다가 1973년 도서출판 성문각에 넘겨주었다. 1981년에는 전국순회 문예강연과 창작실기 강좌를 실시하여 지방문단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1982년부터 가로쓰기를 단행하였고, 1983년 출판부를 신설하여 단행본의 출간을 시작하였다. 1989년에는 부설문예대학을 개설하여 문학이론 강좌를 하였다. 1993년부터 그해에 나온 작품 가운데에서 실험적 작가정신이 투철한 작품을 선정하여 시상하고, 그 작품들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집》과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집》으로 묶어 출간하고 있다. 같은 해에 판형을 국판에서 신국판으로 변경하였으며, 1997년 6월호부터는 표지와 편집 체제를 새롭게 바꾸었다. 1996년 8월 지령 500호 기념 특대호를 발행하였다. 한국문학가협회 감사패(1959), 서울시문화상(1965), 문화공보부장관 공로감사패(1967), 한국잡지협회상 경영부문(1967), 한국잡지협회상 편집부문(1968), 보관문화훈장(1986), 공보처주관 제3회 우수잡지 선정(1994) 등을 수상하였다.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많은 문인들을 배출시켜 왔는데, 시에서는 박재삼·김관식·문덕수·황동규·마종기·이성부·이승훈·정현종·강우식·오세영·오규원·이선영 등, 소설에서는 이범선·최일남·박경리·서기원·정을병·이문구·김원일·이동하·조정래 등, 평론에서는 김윤식·신동욱·박동규·홍기삼·임헌영·이기영·김인환·이선영·김시태 등을 포함해 이제까지 배출된 문인의 수는 총 563명(시인 323명, 소설가 131명, 평론가 73명, 기타 36명)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월간 순수 문예지로서, 창간 이래 단 한번의 결간 없이 2001년 5월 통권 557호를 기록하고 있으며, 한국 문단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55 문교부 외래어표기법통일안 발표
▶1956 수단, 영국으로부터 독립
▶1956 영암선 개통
▶1958 언론제한을 포함한 선거법 국회 통과
▶1958 유럽공동체시장(EEC) 발족
▶1959 쿠바 혁명으로 피델 카스트로 집권
▶1960 호적법 제정 공포
▶1960 카메룬,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2 정부, 연호를 단기(檀紀)에서 서기(西紀)로 변경
▶1962 서사모아, 뉴질랜드로부터 독립
▶1963 KBS-TV 유료광고방송 실시, 시청료 징수 업무 개시
▶1963 군사정부, 민간인의 정치활동 재개
▶1963 정치활동 금지 해제
▶1963 부산시 정부직할시로 승격
▶1964 정부, 십진법의 국제적인 도량형단위계 미터법 실시
▶1965 사병 복무기간 2년10개월에서 2년6개월로 단축
▶1965 아랍 공동시장 발족
▶1966 험프리 미국 부통령 내한
▶1966 한국-일본, 대사 임명에 동의 주일대사에 김동조, 주한일본대사에 기무라(木村) 임명
▶1966 프랑스 4공화국 초대 대통령 오리올 뱅상(1884-1966)사망,
▶1967 대구 서문시장에 큰불, 점포 337개 소실
▶1967 미국,영국,프랑스,일본 최초의 4원 TV 중계에 성공
▶1968 부동산투기억제세법 발효
▶1969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제 발족
▶1970 IMF 특별인출권 발효
▶1971 정부, 근대화백서(1961-1970년) 발간
▶1971 남산 제1호 터널 개통
▶1972 정부, 언론자유 제한위해 프레스카드제 도입
▶1972 프랑스 샹송가수.영화배우 모리스 슈발리에(1888-1972)사망,
▶1972 군사정전위원회 유엔측 수석대표 폴리제독 DMZ 평화이용 4개항 제의
▶1973 영국-에이레-덴마크, EC에 가맹
▶1974 아프가니스탄 남북한과 동시 수교
▶1975 미국 대법원, 워터게이트 사건 관련자 4명에게 유죄 선고
▶1977 생활보호대상자 및 저소득자 2백9만5천명 대상으로 의료보호제도 실시
▶1978 동력자원부 발족, 초대 장관에 장예준
▶1978 인도항공 소속 보잉 747기 폭발로 봄베이 근처 바다에 추락, 213명 사망
▶1979 미국, 자유중국과 단교 및 상호방위조약 파기하고 중공과 수교
▶1979 미국-중국, 30년만에 국교 수립
▶1981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
▶1981 그리스, 10번째로 유럽연합(EC)에 가입
▶1981 팔라우공화국 독립
▶1982 한국전력공사 발족
▶1983 고위공직자의 재산등록 등을 규정한 `공직자 윤리법' 발효
▶1984 세계최대기업 ATT사(미국전화전신회사), 22개의 지역전화회사(자회사)를 분리 독립
▶1984 브루나이, 영국으로부터 독립
▶1987 농수산부, 산림청을 흡수해 농림수산부로 확대 개편
▶1988 김일성 신년사에서 남북연석회의 제안, 쌍방의 당국자 포함한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들과 각계 인사들이 참가하는 남북연석회의 제안하고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다국적 군축회담,
▶1988 제24회 서울올림픽 공동주최, 상호비방 중지문제 등을 논의하자고 제안
▶1988 국민연금제, 최저임금제 실시
▶1989 해외여행 자유화 전국민으로 확대
▶1989 김일성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회의 제의, 4당 총재와 재야 인사들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남북정치협상 제의하고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촉구
▶1990 정부, 문화공보부를 폐지하고 문화부와 공보처 신설. 환경청, 환경처로 승격.
▶1990 KBS, 문자다중방송 실시
▶1990 딘킨스, 뉴욕시 최초의 흑인시장으로 취임
▶1990 김일성, 신년사 통해 남북한 최고위 당국 정당 수뇌협상회의 제의
▶1991 김일성, 신년사 통해 민족통일정치협상회의 소집 제의
▶1993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와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분리
▶1994 서울시, `서울 정도(定都) 600년의 해' 선포.
▶1994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발효
▶1995 쓰레기 종량제 전국 실시
▶1995 노벨물리학상(1963년) 수상한 미국 물리학자 유진 폴 위그너[Wigner, Eugene Paul, 1902.11.7∼1995.1.1]사망 *1902년 11월 7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하였다. 베를린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28년 모교의 강사가 되었다.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교 강사, 1938∼1971년까지 이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시카고대학교 야금연구소에서 E.페르미 등과 함께 원자력 연구에 참여, 원자로(原子爐) 건설에 진력했다. 이론물리학 분야에 많은 업적이 있으며 분자·원자이론에서의 군론적(群論的) 연구, 고체론의 연구(위그너자이츠의 방법), 원자핵의 반응론(브라이트위그너의 이론), 핵력(核力:위그너力), 장(場)의 이론 등 수학적 방법을 구사한 것이 많다. 1963년 원자핵과 소립자(素粒子) 구조 연구의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엔리코페르미상(1958), 원자력평화이용상(1960), 독일물리학회 막스플랑크메달(1961), 미국 국가과학메달(1969), 앨버트아인슈타인상(1972) 등을 수상했고,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출처: 두산백과)
▶1995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정부, 쓰레기 종량제 전국에서 실시
▶1996 중요 무형문화재 30호 '가곡' 예능보유자 김월하(金月荷.1918-1996)사망,
▶1997 114 안내전화 유료화
▶1997 당산대교 철거 시작
▶1999 유로(EURO) 체제 출범
▶2000 Y2K(컴퓨터 2000년 인식오류) 대란우려 불발
▶2000 영화 '박하사탕' 개봉(-3.24)
▶2002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Euro) 공식 사용 개시
▶2002 유럽, 유로화 공식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