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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①:다산 정약용(上) 40세 수명 시대에 18년 귀양살이...75세까지 장수한 3대 비결 2014년 3월 24일 <조선일보>
*글쓴이 정지천 -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1985년에 동국대학교 한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부속한방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거쳐 한방내과 전문의가 되었다.1991년 동 대학원에서 한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1년부터 동국대 한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 동국한방병원 병원장과 강남한방병원 병원장, 동국대 서울캠퍼스 보건소장, 대한한방내과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으로 진료하고 있다.
연구 논문으로 ‘二精丸이 노화과정에 미치는 영향’, ‘고지방 식이 흰쥐의 비만에 미치는 三精丸의 영향’, ‘二至丸의 고혈당 조절 작용 및 기전에 관한 연구’ 등 당뇨병, 노인병, 남성병, 항노화 등에 관한 150여편을 국내 외에 발표하였다.
저서로는 ‘명의가 가르쳐주는 약이 되는 생명의 음식(2013, 중앙생활사)’, ‘명문가의 장수비결(2011, 토트)’, ‘식의들이 알려주는 생명의 음식 120 (2008, 중앙생활사), ‘마늘 하루 다섯 톨의 자신감 (2007, 웅진윙스)’, ‘조선시대 왕들은 어떻게 병을 고쳤을까 (2007, 중앙생활사)’, ‘어혈과 사혈요법 (2002, 가림출판사)’, ‘우리집 음식 동의보감 (2001, 중앙생활사)’, ‘신장이 강해야 성인병을 예방한다 (2000, 도서출판 청송)’ 등이 있다.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선생은 어지러운 조선을 치유하기 위해 온갖 방책을 강구하고 수많은 저술을 남겼던 위대한 실학자요, 개혁사상가였습니다. 특히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은 엘리트 관료였던 다산은 정조가 사망하자 대역죄로 몰려 40세부터 18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게 됩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은 40세가 되지 못했고, 거의 대부분이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50대에 사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산은 중년의 위기를 잘 극복하고 58세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18년을 지내며 75세까지 장수했습니다.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은 부모로부터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습니다. 천재적인 두뇌는 부계로부터 이어받았는데, ‘나주 정씨’ 가문은 8대에 걸쳐 연달아 옥당(玉堂), 즉 홍문관에 들어간 명문 집안입니다. 홍문관은 관리들이면 누구나 근무하고 싶어 하는 곳이죠. 그러나 다산의 부친은 63세로 별세했고, 모친은 다산이 9세 때 돌아가셨기에 장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중년의 18년 귀양살이를 이겨내고 75세까지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1.의학적 식견이 대단했다 명문가 출신으로 34세에 당상관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하던 다산은 40세에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장례가 끝나자마자 정순왕후와 노론들은 남인을 재기하지 못하도록 정계에서 박멸하기로 하고, 그들을 사교집단으로 몰아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습니다. 바로 1801년의 신유사옥(辛酉邪獄)입니다. 다산의 셋째 형인 정약종과 자형인 이승훈은 사형에 처해졌고, 다산과 둘째 형인 정약전은 의금부에 갇혔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경상도 장기현(지금의 포항시 장기면)으로 유배를 갔는데, 도착한 직후에 병들었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천리 길을 걸어서 왔는데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자식들은 과거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심신이 지쳤던 것이죠. 게다가 낯선 곳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 숙소는 일어날 때 머리를 부딪칠 정도로 낮고 겨우 무릎을 펼 정도의 작은 방이었으니 병이 날 만도 했던 겁니다. 다산은 당시 상황을 “습한 데서 봄을 나니 마비 증세 일어나고 북녘에서 길들인 입맛 남녘 음식 맞지 않네”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똑똑한 선비 한 사람 또 죽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다산은 달랐습니다. 자신이 공부한 한의학 지식을 자신의 질병에 요긴하게 썼습니다. 집에서 보내온 의서 수십 권과 약초 한 상자로 약을 달여 먹고는 병석에서 일어섰던 겁니다. 그 당시 마을에는 의원이 없어 병에 걸리면 뱀이나 두꺼비를 잡아먹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다가 대부분 죽고 요행히 낫곤 했는데, 죽을 것 같던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본 겁니다. 그래서 객관을 지키고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의 아들로부터 병들어도 치료받지 못하는 궁벽한 고장에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지은 의서가 바로 <촌병혹치(村病或治)>입니다.
다산이 지은 수많은 저서 가운데 유명한 의서를 기억하십니까? 다산은 부인과의 사이에 6남 3녀를 얻었으나 4남 2녀를 천연두로 잃고 말았습니다. 다산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는지 36세에 63종의 의서들을 철저히 고증해서 ‘마진’과 ‘두창’, 즉 홍역과 천연두를 치료하기 위한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의서를 지었습니다.
▲마과회통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다산은 유학을 공부한 선비인데 언제, 어떻게 의학을 공부했는가 하고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으시죠. 당시의 선비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한의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랬기에 오래도록 공부에 시달리면서도 건강을 돌볼 수 있었고 자신의 질병은 물론이고 가족들의 질병을 직접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었던 것이죠. 선비 중에 특히 의술에 조예가 깊었던 분들을 ‘유의(儒醫)’, 즉 선비의사라고 하는데, 고산 윤선도, 미수 허목, 성호 이익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장수했습니다. 또한 선비들은 ‘양생법(養生法)’을 열심히 체험하고 실행하였습니다. 정신적인 면을 비롯하여 음식, 기거, 운동, 휴식 등 모든 방면에서 실천하였고, 요즘의 기공체조라고 할 수 있는 도인법(導引法) 등을 시행하였기에 질병을 예방하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죠.
2.그림에 취미를 가진 걸출한 화가이기도 했다 그림이나 음악 등에 취미를 가지는 것은 마음 건강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죠. 선비들이 실천했던 양생법 중에 정신 양생법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요. 다산은 건축설계를 잘 했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 사군자화 등을 잘 그렸습니다. 선비들이 사군자를 그리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에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계절과 때를 같이 하는 매난국죽은 각각의 특성이 덕과 학식을 겸비한 군자의 인품에 비유되고 있어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퇴계 이황 선생이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였고, 추사 선생도 항상 매화를 좋아하였으며, 미수 허목 선생도 <묵매도>를 그렸는데, 이 분들의 공통점은 70세 혹은 80세 넘게 장수했다는 겁니다.
다산의 미술 재능은 모계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다산 스스로 외가의 정수(精髓)를 물려받았다고 회고한 바 있는데, 고산 윤선도 집안의 예술적인 유전자가 내려온 것이죠. 다산의 모친은 ‘해남 윤씨’로서 고산 윤선도의 증손녀이자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죠. 윤두서는 국보 240호로 지정된 <자화상>을 그린 문인화가로서 시, 서, 화에 두루 이름을 떨쳤습니다.
3.마음을 잘 다스리다 다산이 중년의 위기를 견뎌내고 장수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그가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정신력이 없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정신력이 있어야만 근면하고 민첩할 수 있으며, 지혜도 생기고 업적을 세울 수 있다. 진정으로 마음을 견고하게 세워 똑바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면 태산이라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다산은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로서 집념이 강하고 의지가 굳건했습니다. 그랬기에 기나긴 귀양살이를 견뎌내며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암을 비롯한 온갖 성인병이 벌떼처럼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건강이 건강하게 장수하는데 기본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양생법 중에서 으뜸이 ‘정신 양생’인 것이죠. 예로부터 병의 뿌리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했는데, 아무리 육체가 건장해도 정신이 건실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주치의를 두고 건강에 대해 수시로 상담하는 분도 많지만, 마음 건강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②: 다산 정약용(中) 유배지에서 초죽음이 된 다산에게 입맛이 돌아오게 한 음식 2014년 3월 27일 <조선일보>
일류 의술과 그림 솜씨로 몸과 마음 다스려 다산의 의술은 어느 정도였을까?
다산은 의원으로서 조정의 부름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69세에 당시 세자였던 익종의 병세가 위독하자 부호군에 임명되어 남양주에서 궁궐로 불려왔지요. 그런데 약을 올리기 전에 익종이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다산이 요행히 세자의 병을 낫게 하면 좋고, 만약 세자가 다산이 지어 올린 탕약을 복용하다가 세상을 떠나면 책임을 물어 다산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려는 노론의 술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산은 세자의 상태를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으로 정확히 파악하고는 집에 있는 특별한 약을 써야 한다며 사람을 보내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죠. 그래서 약을 가져왔는데 그 사이에 세자가 사망했던 겁니다. 이것은 환자의 생사 예후를 정확히 진찰하는 능력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서 다산이 용한 한의사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죠. 그리고 73세 때 순조임금의 환후가 급해 또다시 소명을 받고 상경하게 되는데, 도성에 도착할 무렵에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했습니다.
다산의 그림 솜씨는 어느 정도일까? 매화쌍조도 유배 13년째에 부인이 신혼 시절에 입었던 색이 바랜 다홍치마를 보내왔는데, 치마를 잘라 서첩을 만들어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맞은 두 아들의 삶이 흔들리지 않도록 앞날의 지침이 될 만한 글을 써서 보내주고, 작은 천 조각에는 못다 한 부정을 담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지난 해 혼인했던 외동딸에게 보냈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매화쌍조도(梅花雙鳥圖)>입니다.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새 한 쌍은 바로 부부의 상징이니, 매화꽃의 그윽한 향기를 찾아 신혼의 딸 내외가 찾아 들어온 모양을 표현한 것이죠.
▲매화쌍조도(梅花雙鳥圖)
翩翩飛鳥 息我情梅 有烈基芳 惠然基來 爰止爰棲 樂爾家室 花之旣榮 有賁基實
- 嘉慶十八年癸酉七月十四日 洌水翁書于茶山東菴
펄펄 나는 저 새가 우리 집 매화가지에서 쉬는 구나 꽃다운 그 향기 짙기도 하여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네 여기에 올라 깃들여 지내며 네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 꽃이 이제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많이 달리겠구나
매화는 올곧은 선비의 지조와 정신적 지향을 상징하는 꽃으로서 한겨울에 피어나는 동매(冬梅)의 품격은 온전한 지조를 갖춘 선비의 상징입니다. 풍성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조촐한 모습이지만 온 천지가 차가운 날에 어느 꽃보다도 먼저 깨어나서 단아하고 청초하며 맑고 깊은 향을 머금은 꽃망울을 피워냅니다. 그러니 이 매화꽃은 유배지에 있는 다산 자신의 분신인 셈입니다. 유배지에 격리되어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능력도 없고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그저 무기력한 아비가 외동딸 내외에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바라는 그림이죠.
심신이 고달팠던 다산에게 활력을 되찾게 해 준 호박죽 다산은 장기현에서 1년 만에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고는 전남 강진으로 내려와 17년을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강진에 도착했으나 아무도 만나주지 않고 방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천주교도로 몰렸던 대역죄인이기에 재앙을 부르는 인물로 여겼기 때문이었죠. 다행히 읍성의 동문 밖에 있던 밥과 술을 파는 주막집 노파가 선심을 써서 방을 주었는데요, 흙으로 담을 쌓아 위에 몇 개의 서까래를 걸치고 짚으로 이은 집이라 겨우 비바람을 가려주는 정도였습니다. 거기서 4년을 지냈다고 합니다. 주막집에 있을 때 다산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죠. 팔다리가 저리기도 하고 병치레도 잦았는데요, 입맛도 떨어져 곡기를 입에 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병치레로 입맛을 잃은 다산은 주모가 미음도 쑤어 올리고 입맛 당길 만한 젓갈도 만들어 줬지만 거의 먹지 못했습니다. 마침 주막에서 일을 거들던 표서방이라는 사람이 유배지에서 고생하는 다산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고는 음식 솜씨 좋은 딸을 시켜 호박씨를 까서 갈아 만든 죽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다산은 고소한 냄새가 나는 호박죽을 대하고는 모처럼 입맛을 찾아 한 그릇을 다 비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읽고 산책도 했다는 것이죠.
늙은 호박은 따뜻한 성질로서 비위장을 보충하고 기를 끌어올려 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호박의 노란 색은 오장 중의 비장에 해당되는 색으로서 주로 비장에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늙은 호박은 소화 흡수가 잘 되어 비위장이 약한 사람이나 질병을 앓은 후 회복기에 있는 환자들에게 좋습니다.
▲늙은 호박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③: 다산 정약용(下) 유배지에서 초죽음이 된 다산에게 입맛이 돌아오게 한 음식 정약용이 갱년기를 극복하도록 도와준 22세 청상과부 2014년 4월 1일 <조선일보>
다산이 한창 왕성하게 식견과 포부를 펼쳐나가야 할 40세는 요즘의 50세 중반 정도에 해당되므로 남성갱년기였습니다. 갱년기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호르몬의 감퇴로 여러가지 증상들이 나타나는 시기로서 초로기에 해당됩니다. 남성갱년기는 보통 55세경에서 65세 사이인데, 50세 혹은 그 이전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은 엘리트 관료였던 다산은 정조가 사망하자 대역죄로 몰려 40세부터 18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게 됩니다. 다산은 온 집안이 풍비박산을 당하고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로 외딴 곳에서 혼자 귀양살이를 하였으니 요즘의 ‘기러기 아빠’보다 훨씬 더 어려운 형편이었죠. 그러니 건강에 큰 이상이 생길 수 있었고, 갱년기장애가 나타나기 쉬운 상황이었습니다. 갱년기장애가 생기면 우울증, 위장장애, 전립선염, 전립선비대증, 성기능장애 등이 생기기 쉽고, 노화가 촉진됩니다.
남성에 갱년기가 오는 원인은 뭘까요? 40대 중반 무렵부터 고환의 기능이 위축되면서 정자 수와 남성호르몬의 분비가 감소되고, 전립선 조직이 위축되며 부신이나 갑상선 등의 내분비기관이 쇠퇴해져 면역계통이 약화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뇌세포의 위축과 뇌세포 수의 감소로 인해 인체 내 평형상태가 깨어지면서 신경계통과 정신활동이 저하되는 탓이죠. 특히 생활환경의 변화나 과도한 근심, 걱정, 긴장 등에 의해 촉진되므로 명예퇴직, 조기 실직 등을 겪는 경우에 나타나기 쉽습니다.
한의학 문헌에도 40세가 넘으면 음기가 반으로 줄고 50세가 넘으면 양기가 날로 쇠퇴해져서 건망증이 생기고 나태해지며 시력과 청력이 떨어지고 화를 잘 내며 식욕이 없고 불면증이 생긴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갱년기장애 증상이 확실히 나타날 경우에는 노화도 빨라집니다. 주된 원인은 신장의 음기와 양기가 부족해진 것이며, 선천적으로 체질이 허약하거나 음식 섭취의 장애로 비위장이 손상되거나 과로하여 기가 소모되거나 신경을 많이 쓰고 짜증과 화를 내는 것 등이 신장과 심장, 비위장의 허약을 일으킨 것이죠. 다산이 남성갱년기를 극복하고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요?
첫째, 충분한 운동을 꾸준히 하다 다산이 귀양지를 옮겨 오래 머물렀던 다산초당은 남해바다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이는 만덕산(전라남도 강진군) 자락에 있었죠. 초당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산길은 그림 같은 바다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몸은 산에 두고 마음과 눈은 바다에 두고 걸을 정도라고 합니다. 야생 차나무와 접목들이 우거져서 건강낙원이나 다름없는 바로 그 길을 다산이 매일 걸었던 것이죠. 이처럼 남성갱년기를 극복하고 성인병을 예방하려면 허리와 하체의 근력을 강화시키는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날마다 허리 체조를 하고 매일 40분 이상 약간 빠른 속도로 걷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땀이 약간 날 정도로 해야 효과가 있지요. 특히 체중이 많은 분들은 더 열심히 운동해서 땀을 많이 흘리고 배가 나오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면역력도 증가되지요.
▲다산 정약용이 귀양 내려와 지내던 터에 새로 마련된 다산초당. 정정현 기자
둘째, 육식을 비롯한 영양 보충을 충분히 하다 중년 이후에도 남성호르몬을 적절히 유지하고 성생활을 원활하게 지속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육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중년기 이후에 성기능이 떨어지는 원인 가운데는 동물성 음식 섭취가 너무 부족한 탓도 있기 때문이죠. 정액과 정자를 만들어내는 원료가 단백질이고 콜레스테롤은 남성호르몬의 원료인데, 동물성 식품에는 이들이 풍부하기 때문이죠. 또한 채식으로 얻을 수 있는 영양에는 한계가 있고, 채식만 하면 기력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이 많거나 기력이 쇠약해진 경우에는 육식을 해야 활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다산은 넉넉지 못한 형편에 먼 타향으로 귀양을 갔는데 어떻게 육식을 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강진 인근에 살고 있던 다산 부친의 친구가 인근에서 가장 부호였고, 훗날 사돈이 되는 그의 아들은 다산의 죽마고우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외가인 해남 윤씨들의 경제적인 도움이 있었고, 게다가 당대 최고의 학자가 시골에 오니 인근에서 자손들의 공부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이 줄을 잇게 됩니다. 그래서 여유 있는 생활과 함께 많은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셋째, 적당한 성생활을 하다 괴롭고 외로운 귀양살이를 오래 하는 다산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표서방의 딸입니다. 표서방은 음식 솜씨 좋은 딸이 만든 음식을 다산에게 매일 날라다 주었는데, 표씨 여인의 음식으로 다산이 입맛과 기력을 되찾은 낌새를 눈치 챈 주모는 아예 다산의 밥상까지 그녀에게 들려 방안으로 들여보냈죠. 그녀가 끼니마다 정성껏 마련해 주는 음식은 보약이 되어 다산의 건강을 회복시켰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서 표씨 여인은 다산의 잔심부름까지 맡게 되고 귀양살이하는 다산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표씨 여인은 스물 두 살의 청상과부로서 15세 때 가난하고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갔다가 자식도 낳지 못한 채 남편이 돌림병으로 죽자 친정에 돌아와 있었는데, 워낙 가난한 친정 형편 때문에 고을 부자 양반댁의 찬모로 들어가 전라도 음식을 하나하나 익혔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표씨 여인은 다산의 첩실이 되었고, 다산과 그녀 사이에 딸이 하나 생겼다고 합니다. 남성갱년기를 극복하는 데는 잘 먹고 심신의 안정을 취하는 것과 더불어 적당한 간격의 성생활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생활이 부족하게 되면 성 호르몬의 생성도 부족하게 되어 성기능이 더욱 떨어지면서 갱년기장애 증상이 더 심해지게 되기 때문이죠. 또 성 호르몬의 역할이 성기능 뿐만 아니라 뇌기능, 골 대사, 근육과 지방 분포, 심장혈관계 등 우리 몸의 곳곳에 영향을 나타내므로 적당한 간격의 성생활을 가져 성 호르몬이 분비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산이 그린 특별한 매조도 ‘의증종혜포옹매조도(擬贈種蕙圃翁梅鳥圖)’는 2009년 6월에 처음 공개됐습니다. 다산이 52세 때 다산초당에서 매화를 그린 소품이지만 정갈하면서도 내력이 깊은 작품으로서 7언 절구의 시가 곁들여져 있습니다.
▲의증종혜포옹매조도
古枝衰朽欲成搓 擢出靑梢也放花 何處飛來彩翎雀 應留一隻落天涯
묵은 가지 다 썩어서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어 나와 꽃을 다 피웠구려 어디선가 날아온 채색 깃의 작은 새는 한 마리만 응당 남아 하늘가를 떠도네
고매(古梅)의 묵은 가지가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봄을 맞아 푸른 가지를 쭉 뻗더니만 내친 김에 기대하지도 않은 꽃을 마저 피웠다. 그 꽃을 보고 날아든 채령작 한 마리가 쓸쓸히 하늘가에 떨어져 머물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 그림과 글은 강진 유배 시절 다산이 소실에게서 얻은 딸에게 보내는 애틋한 심정을 담은 것이라고 합니다. 마르고 썩은 가지에 새싹이 돋아 꽃을 피웠다는 것은 자신이 뜻하지 않게 이곳에서 새 인연을 맺게 된 사정을 암시하며, 어디선가 날아든 채색 깃털의 작은 새는 그 사이에서 얻은 딸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이죠. 고미술품 전문가에 의하면 “매조도의 가치도 의미 있지만 다산의 행서는 명필의 반열에 들어도 손색없을 만큼 빼어난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다산에서의 여유롭던 시절의 모습 “내가 다산에 우거한 지 이제 4년이 되는데 언제나 꽃이 피면 산보를 나갔다. 산의 오른쪽 고개를 하나 넘고 시내를 건너가 석문(石門)에서 바람을 쐬며, 용혈(龍穴)에서 쉬고 청라곡(靑蘿谷)에서 물을 마시고 농산(農山)에 있는 농막에서 잠을 잔 뒤에, 말을 타고 다산으로 돌아오던 것이 늘상 하던 일이다. 윤서유와 그의 사촌아우가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와서 때로는 석문에서 기다리고, 때로는 용혈에서 기다리거나 때로는 청라곡에서 기다렸다. 취하도록 마시고 배불리 먹은 뒤에는 그들과 함께 농막에서 낮잠을 자는 것도 늘상 하는 일이었다.” <조석루기(朝夕樓記)>
▲초당 뒷편 마애석에 새겨진 다산의 자취. 정정현 기자
인근에서 가장 부호였던 사돈네 집의 ‘조석루’라는 정자의 기(記)로 지은 글에 그 당시 즐기던 생활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던 것이죠. 친구이자 나중에 사돈이 되는 윤서유 집안에서 자기를 대접하던 모습이었으니, 이만하면 죄인의 유배 생활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였죠. 이만하면 유배를 갈 만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다산처럼 18년이나 길게 하지만 않는다면 귀양살이가 건강장수에 도움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귀양을 다녀온 사람들 중에 장수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암 송시열은 늙어서 7년 정도나 귀양살이를 했지만 83세까지 살다가 사약을 마시고서야 죽었고, 고산 윤선도는 14년 넘게 귀양을 다녔지만 85세까지 장수했으며, 추사 김정희도 9년이나 귀양을 다녀왔으나 71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잡한 관직생활과 극심한 당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심신을 편안케 할 수 있는 기회였고, 맑은 공기와 소박한 음식에다 매일같이 산책을 하며 유유자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귀양을 다녀오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혹은 장기간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휴양을 하였던 경우에도 장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행복했던 다산의 귀향기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의 생가 (다산유적지 홈페이지)
다산은 57세(1818년) 봄에 <목민심서> 집필을 마치고, 8월에 유배에서 석방되어 강진을 떠나 고향인 남양주의 마재 본가에 돌아왔습니다. 60대 중반을 넘은 이후 다산은 정말로 아름답고 즐거운 노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에 찾았던 고향 마을 근처의 명승지를 다시 찾아 옛날을 회고하며 아름다운 시와 글을 지었습니다. 용문산에도 오르고 용문사에 들러 글을 지었고, 강원도의 명승지도 찾아 나서 소양강의 흐르는 물에 뱃놀이도 하고 정자에 올라 회포를 풀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에 형제들과 함께 노닐었던 천진암에서 당대의 학자들과 함께 글을 짓기도 했습니다. 외롭고 쓸쓸했던 유배 시절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노년기의 다산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다산은 75세 때 회혼일에 자손과 친척들이 모인 상태에서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건강하게 장수한 다산의 삶은 감동 그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