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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神일체의 하나님 | 天 一 | 한늘님 | 桓因 | 조화의 작용 |
地 一 | 한울님 | 桓雄 | 교화의 작용 | |
人 一 | 한얼님 | 桓儉 | 치화의 작용 |
이상에서 말한 한인․한웅․한검은 하나님의 작용을 셋으로 나누어 신격화한 칭호이다.
그런데 그 칭호가 우리민족의 국조이신 삼성과 동일하다.
그뿐만 아니라 三神이라 할 경우, 우주의 진여이법인 천일․지일․인일을 의미하는 경우와
한인․한웅․한검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고,
그밖에 역사적 인물로서의 우리민족의 국조를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이 점을 잘 구별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6) 하나님은 여러가지의 현상으로 표현된다.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를 존칭하여 하나님이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천일․지일․인일로 삼분하여 천일(한늘)을 연상하면
그것은 우선 해와 달과 별을 연상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하나님 신앙은 태양숭배(太陽崇拜)․일월신앙(日月信仰)․성신신앙(星辰信仰)․
칠성신앙(七星信仰)으로 변모하게 되고,
또 지일(땅)을 연상하면 그것은 산과 들(野)과 바다를 연상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산신제․토신제․용왕제가 생겨나게 된다.
또 인일(사람)을 연상하면 우선 나를 낳아 키우고 교육시켜 준
조상과 부모의 은혜를 잊을 수 없는데,
여기에서 기일제사와 시제(時祭) 등 조상숭배사상이 생겨나게 되고,
또 한인․한웅․한검의 국조가 없으면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존재할 수 없는데,
여기에서 삼성사(三聖祠)가 생겨나게 된다.
그밖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신명을 받친 충효열사(忠孝烈士)와 역대 제왕이 없으면
이 나라가 존재할 수 없는데, 여기에서 단사전묘(壇祠殿廟) 제도가 생겨나게 된다.
이를 생각하면 우리의 민속에 있는 여러가지의 신앙이 신선도의 유풍유속임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오늘날도 하나님 신앙을 여러가지로 세분하여 신앙하라는 것은 아니다.
2. 소도제천의식
1) 문제의 제기
불교와 기독교를 보면, 교주 탄신일이나 성도일 또는 부활절을 맞아 일정한 종교의식이 있다.
신선도에도 한웅천황이 개천시교(開天施敎)한 달을 상달이라 하여 매년 10월이면 三神하나님에게
제사하는 소도제천의식(蘇塗祭天儀式)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소도제천의식을 자연발생적 미신의
일종으로 여겨왔고, 거기에 별다른 의의를 부여하지 않았다.
부여하였다면 소도제천의식을 막연히 하나님을 섬기고 오곡의 풍작을 비는 경천의식(敬天儀式)
또는 풍년제(豊年祭)의 일종으로 생각하여 왔던 것이다.
생각컨대, 소도제천의식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제천의 대상이 일정치 못하여 한늘․태양․달․별
그리고 산․바다․바위․큰 나무․사나운 짐승․소․말․돼지 등 여러가지 자연물이나 자연현상 가운데
각 집단의 취향에 따라 어느 하나 아니면 몇개를 택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제천의 시기와 횟수도 일정치 못하여 1년 12월 가운데 어느 달이든 한번만 아니라 몇 번이든
편의에 따라 택할 수 있다. 제천의 절차나 방법에 있어서도 일정치 못하여 재계할 수도 있고
아니할 수도 있으며, 제물을 올릴 수도 있고 아니올릴 수도 있으며, 절을 할 수도 있고
아니할 수도 있다. 고개만 숙이는 묵념, 양손을 합장하여 주문을 외우는 기도만으로 끝낼 수도 있다.
즉, 모든 것이 각 집단이나 각 지방에 따라 각양각색일 수 있다.
그러나 소도제천의식에 있어서는 전체 민족이 숭배의 대상이나 시기에 있어서 일정하고
제천의 내용이 교육적이다. 이하에서는 소도제천의식의 유래․의의․내용․형식 등을 소개하고
이어서 신선도와의 연관성을 밝혀 소도제천의식이 자연발생적인 미신행위가 아니라
신선도의 종교의식이었음을 밝히려 한다.
2) 소도제천의식의 유래
{규원사화}의 기록을 보면
"대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조상에 보답하는 예식은 단군에서 비롯되었다.
후세의 역대 여러 나라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 나라가 없었으니,
부여․예․맥․마한․신라․고구려 등 제국은 10월로서 하고, 백제는 4중월로서 하되,
도천(禱天)․무천(舞天)․제천(祭天)․교천(郊天)․영고(迎鼓)․동맹(東盟)이라 한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음력 10월에 제천하던 것이 만세의 풍속이 되었으니
이것이 동방 특유의 성대한 제전(祭典)이요,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하고,
{신단실기}에도 이르기를 생각건대
"단군이 제천단을 설치한 것은 무릇 백성으로 하여금 멀리 근본을 쫓아 보본케 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러므로 단군이 어천(御天) 후에 인민이 그 유교를 준수하여 태백에 보본단과 아사달에
삼성사(三聖祠)를 건립하고 역대 제왕의 단․사․전․묘(壇․祠․殿․廟)를 각각 세우니
그 시원(始原)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에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규원사화}와 {신단실기}에는 소도제천의식의 시원이 하나님에게 제사하는 데에 있고,
단군 때부터 비롯된 것 같이 기록되고 있으나, 다음의 기록을 보면 한인의 환국 때부터 비롯되었다.
{태백일사}를 보면 "상고하건대 삼신(三神)은 한늘을 낳고(生天) 만물을 가꾸시며(造物)
한인은 사람을 가르쳐 의(義)를 세우니 이로부터 자손이 서로 의(義)와 교(敎)를 전하고,
현묘한 법도를 깨달아 광명이세(光明理世)하였다.
실로 천지인(天地人) 삼극(三極)은 대원일(大圓一)하는 서물(庶物)의 원의인 즉,
천하구환(天下九桓)의 예락이 곧 삼신고제(三神古祭)의 풍속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소도제천의식은 단군왕검 이전 한인의 환국에서
天地人 三神一體의 하나님에게 보본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다음 {한단고기} 삼성기전하편 배달국 시대를 보면, "한웅천황이 처음으로 개천(開天)하여
백성에게 교화를 베풀 때, 천경(천부경)을 연(演)하고 신고(三一神誥)를 강(講)하여 크게 무리를
가르쳤다. 이후로 치우천황이 토지를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서 병사를 단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소도(蘇塗)를 주관하고 무리와 의논하여 하나로 화백(和白)하고 아울러 지․생(知生)을 쌍수(雙修)하여
천궁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즉 배달국 시대에도 소도제천의식이 있었다.
{단군세기} 고조선 시대를 보면 개천 1565년(B.C. 2333년) 10월 3일에 이르러 신인(神人) 왕검이
오가(五加)의 우두머리가 되어 무리 800을 이끌고 단목의 밑에 와서 삼신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하였다. 또한 단군왕검 무오 51(B.C. 2283)년, 제(帝)가 운사(雲師)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穴口;
지금의 강화)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마리산(마니산)에 제천단을 쌓았다. 지금 삼랑성이 그것이다.
10월에 국중대회를 열고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내니 백성들이 기뻐하며 즐겼다.
이로부터 황화(皇化)가 구역(九域)의 먼 곳에 까지 적시어 덕교(德敎)를 즐김이 점차 널리 퍼져
나갔다고 하였다. 또한 16세 단군 위나제조를 보면 무술 28년 구환(九桓)의 제한(諸汗)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삼신하나님에 한인․한웅․치우 및 단군왕검을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고
무리와 더불어 5일 대연을 베풀었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원래 10월의 소도제천의식은 한웅의 개천입교(開天立敎)를 기념하고,
천일․지일․인일의 삼신하나님에게 보본하기 위한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삼신하나님에 한인․한웅․한검(치우)을 배향하여 모신 것은 단군왕검 어천 이후의 일이다.
이것만을 보아도 소도제천의식은 신선도의 종교의식임을 알 수 있다.
3) 소도제천의식의 내용
소도제천의식이 신선도의 종교의식임을 논증하기 전에 그 내용을 먼저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소도제천의식의 목적은 근본에 보답하는 데에 있었다.
{신단실기}에 이르기를 "제천단을 설치한 것은 무릇 백성으로 하여금 멀리 근본을 쫓아 보본케
하기 위한 것이다. 태백에 보본단을 설치하고 아사달에 삼성사(三聖祠)를 건립하여 역대 제왕의
단․사․전․묘(壇․祠․殿․廟)를 각각 세우니 그 시원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에 있는 것이라 하였고,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무릇 제사하는 것은 반드시 선조가 살아있을 때를 본떠서
선조가 항상 살아있는 것처럼 지성을 드려야 한다. 신주를 세우고 설상(設床)하여 제물을 드리는
것은 곧 친히 뵙는 예의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나간 먼 일을 사모하여 조상에 보답하는 것은
지금의 삶이 거듭 이어지기를 바라는 후손에 대한 가르침인 것이다" 하여
소도제천의식이 삼신하나님과 역대 제왕과 선조의 은혜에 대한 보답임을 밝히고 있다.
둘째, 숭배의 대상이 삼신오제(三神五帝)이다. 즉 三神하나님과 五方의 五帝이다.
정인보는 {사기} 봉선서에 근거하여 五帝란 동․서․남․북․중앙의 오방신(五方神)이라 하고,
부여의 영고, 예와 맥의 무천, 마한의 천군 등 소도제천의식도 삼신제단(三神祭壇)을 설치하고
삼신오제에 제사를 지내는데 5방 고산(五方 高山)에서 지낸다고 하였다.
즉 숭배의 대상이 삼신오제라는 것이다.
셋째, 10월에 소도제천의식을 지냈다.
{규원사화}를 보면 "제천하는데 부여․예․맥․마한․신라․고구려 등 제국은 10월로서 하고,
백제는 4중월로서 하되, 도천․무천․제천․교천․영고․동맹이라 한다"고 하였다.
즉 백제를 제외하면 전체 민족이 음력 10월에 소도제천의식을 지냈다는 것이다.
넷째, 모든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마한세가}(하)를 보면 "제천하는 예는 마땅히 국전에 있으니 지나침이 없도록 하라.
반드시 옛 사실을 징거하여 정성껏 공경하는데 이르러야 한다. 지금 제사를 지내고 맞이함에 있어
정제하고 신역(神域)을 샅샅이 청소하고, 희생을 깨끗이 준비하여 패백을 써서 삼신에게 보답하여야
한다. 이때 帝가 7일 재계하고 여원홍에게 향과 축을 내려주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삼신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검소하면서도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7일 전부터 재계하고, 향과 축, 희생과 패백을 사용하는 등 모든 정성을 다하고 있다.
다섯째, 경(천부경)을 읽고, 덕(德)을 기리는 노래를 불렀다.
{단군세기}를 보면 신시(神市) 이래로 국중대회를 열고 제천하는데,
덕(德)을 기리고 서로 화합하는 어아가(於阿歌)와 애환가(愛桓歌)를 불렀다.
또한 왕이 누전에 올라 경(經;천부경)을 논(論)하고 고(誥;삼일신고)를 연(演)하였다고 하였다.
여섯째, 살생을 금하고, 옥문을 열어 대사(大赦)하였다.
{단군세기} 제11세 도해제조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를 보면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였으며, 옥을 풀어 밥을 먹이고 죄수를 풀어주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백제 법왕이 금살령(禁殺令)을 내린 것도 불교의 영향만이 아니라
상고시대부터 내려온 관행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삼륜구서(三倫九誓)의 훈(訓)을 행하였다.
{마한세가}를 보면 제3세 가륵 원년에 소도를 세워 삼륜구서의 훈을 베푸니
치화가 크게 행하여졌다고 하였다.
여덟째, 경당(?堂)을 설치하여 각종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태백일사}를 보면 소도가 선 곳에는 충효신용인(忠孝信勇仁)의 오상(五常)의 도(道)가 있었다 하고,
소도의 옆에는 반드시 경당을 세워 미혼자제(未婚子弟)에게 사물을 강습케 하였는데,
대개 독서(讀書)․습사(習射)․치마(馳馬)․예절(禮節)․가락(歌樂)․권박(拳搏)겸 검술(劍術) 등의
육예(六藝)였다고 하였다. 신채호 역시 소도의 경기 내용으로 한맹(寒盟)․수박(手搏)․검술(劍術)․
궁시(弓矢)․격구(擊球)․금환(金丸)․주마(走馬)․회엽(會獵)이라 하였다.
이상과 같은 목적과 절차 및 내용으로 볼 때,
소도제천의식은 자연발생적인 미신행위가 아니라 종교의식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4) 소도제천의식과 신선도와의 연관성
소도제천의식이 하나의 종교의식이라 할 때, 신선도와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첫째, 한웅천황이 개천입교(開天立敎)한 것이 10월이며, 단군왕검이 조선국을 건국한 것도 10월이고,
소도제천의식도 10월이다. 따라서 10월은 년중 상달이 되는 것이며, 한웅천황의 개천입교와
단군왕검의 조선국 건국 및 소도제천의식은 서로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신선도의 발생원리인 삼신오제와 소도제천의식의 숭배대상이 동일하다.
신선도의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은 삼신일체 원리에서 발원되고,
충․효․신․용․인(忠․孝․信․勇․仁)의 오상(五常)의 도(道)는 오제사상(五帝思想)에서 발원된다.
즉, 신선도는 삼신오제(三神五帝)사상에서 발원된다.
그런데 소도제천의식에서는 오방(五方)의 명산(名山)에서 삼신오제(三神五帝)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는 신선도의 발생원리를 신격화시켜 소도제천의식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신선도와 소도제천의식은 그 유래를 함께 한다.
이상을 미루어 생각하면 소도제천의식이 신선도와 더불어 함께 발원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태백일사}에 천하구환(天下九桓)의 예락(禮樂)이 삼신고제(三神古祭)의 풍속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하였는가 하면,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에는 한웅천황이 소도를 직접 주관하였다 하고,
이능화도 {조선무속고}에서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와 맥의 무천 등 소도제천의식이
단군신교의 유풍 유속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소도제천의식의 유래도 태고시대의 신선도와 함께 시원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신선도와 소도제천의식이 서로 불가분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소도제천의식의
내용도 어느 종교의식에 뒤짐이 없었다. 그러므로 소도제천의식은 신선도의 종교의식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고, 아울러 신선도는 합리적 성립종교라는 사실이 거의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Ⅸ. 신선도의 실재적 근거
상고시대부터 합리적 성립종교가 있었다면, 천재지변이 극히 심하여 유적이 모두 유실되고 없어졌다
하더라도 그 유적이 있던 자리 곧 유적지(遺跡址)는 없어질 수 없다. 그러나 고유신앙이 사라지게
되면서 민족적 주체의식도 사라져 사고방식도 외국화될 수 밖에 없었으니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까만 안경을 쓰고 보면 사물이 까맣게 보이고, 파란 안경을 쓰고 보면 사물이 파랗게
보이는 것과 같이, 남의 나라의 사상을 배우고 남의 나라의 신을 섬기다 보면 사고방식도
남의 나라 사람 같이 되어 자기 것도 남의 나라의 것으로 보이게 되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을 고려해서 본 항목을 읽어야 할 것이다.
1. 신선도의 유적이 있다
첫째, 신선도의 제천처와 사당이 있다.
신선도의 숭배대상은 원래 천일․지일․인일의 삼신하나님이다. 곧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신선도에서는 명산 대천에서 삼신하나님께 제사를 올리었다. 그러나 세계가 이기화되고
민족주의의식이 고취되면서 한인천제와 한웅천황과 치우천황의 삼성을 삼신하나님으로 섬겼는가
하면, 한인천제와 한웅천황과 단군왕검의 삼성을 삼신하나님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곧 인간이 신격화된 것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자기나라의 군주를 천황이라 신격화시켜
하나님 같이 모시고, 불교에서 정반왕의 태자 석가모니를 신격화시켜 응신불(應身佛)로 모시고,
기독교에서 요셉의 아들 인간 예수를 신격화시켜 하느님(하나님)의 아들로 모시는 것과 같은
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각 종교에서 인간을 신격화시켜 모시는 것도
신선도의 유풍 유속이라 할 수 있다.
삼성 또는 삼신을 모셨던 유적으로 현재 남아있는 것은 한밝산의 보본단, 묘향산의 단군굴,
평양의 단군묘, 서울의 사직단(社稷壇)과 인왕산의 국사당(國師堂), 강화도 마니산의 제천단(참성단)과
정족산의 삼랑성(三郞城), 황해도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와 어천대(御天臺), 금강산의 천제단,
태백산의 천황단과 단군성전 및 황지, 서울 인왕산 활터인 황학정(黃鶴亭), 조선호텔 앞의 제천단인
원구단(圓丘壇), 전북 진안 솟도산인 마이산(馬耳山), 전남 해남읍의 천진전(天眞殿), 경북 김천
직지사를 비롯해서 사찰의 한쪽에 모셔있는 삼성각, 울진군 북면 나곡리의 성황당과 신목,
제주도 북제주군 송당리 만장굴 본향당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신선도의 절터가 있다.
{삼국유사}가섭불연좌석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및 제가전기(諸家傳記)에 다 이르기를 신라의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의 남쪽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으니 그곳은 전불시절 가람의 터이다.
지금 황룡사의 지역은 일곱 절터 중의 하나이다.
국사(國史)에 의하면 진흥왕 즉위 14년인 개국(開國) 3년 계유(553) 2월에 월성 동쪽에
신궁(新宮)을 건축할 때에 그 지역에서 황룡이 나타나므로 왕이 의아히 생각하여
황룡사로 개조하였는데 연좌석은 불전 후면에 있었다.
전에 한번 참배한 바 돌의 높이는 5-6척 가량이며 그 둘레는 겨우 세발이다.
우뚝 섰는데 위는 편편하였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뒤로 두번이나 화재를 겪어
돌에 갈라진 곳이 생겼으므로 절의 중이 쇠를 붙여 보호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옥룡집․자장전․제가전기 등 전거에 근거하여 황룡사의 터를 전불시절 일곱
절터 중의 하나라 하고 있다. 즉 전불교인 신선도의 절터가 신라의 고도 계림에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역사적 실재 인물인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전불시대의 가람의 터에 절을 지었다는 것과
가섭불의 연좌석에 참배하였다는 점, 화재를 만나 연좌석에 금이 난 것을 절의 스님이 쇠를 붙이고
잘 보호하였다는 점 등,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미루어 생각할 때, 위의 기록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삼국유사} 아도기라 편을 보면, 아도본비를 근거로 일곱 절터와 거기에 새로이 들어선
불교사찰의 명칭을 하나 하나 밝혀주고 있다.
*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 : 지금의 興輪寺址)
* 삼천기(三川岐; 지금의 永興寺址)
*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黃龍寺址)
* 용궁(龍宮) 북쪽(지금의 芬皇寺址)
* 사천미(沙川尾 ; 지금의 靈妙寺址)
* 신유림(神遊林 ; 지금의 天王寺址)
* 서청전(斷請田 ; 지금의 曇嚴寺址)
이상 외에도 경기도 양주군 천보산 회암사의 터를 서천축(西天竺)의 지공선사(指空禪師)는
상세칠불(上世七佛)시절의 큰 절터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전불시절의 절터가 우리나라에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나라에 신선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가불교에 의하여 그 사고방식이 인도화된
일부 불교신자와 불교학자들은 무조건 위의 기록을 부정하려 할 것이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셋째, 만주 길림성 영안에 단군조선 시대의 영고탑(寧古塔)이 있었다.
{단군세기}를 보면 제16세 단군 위나제(尉那帝) 무술 28년(B.C.1583) 구한(九桓)의 제한(諸汗)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삼신상제께 배향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제20세 단군 고홀제(固忽帝)
병신 36년에 영고탑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단군조선 시대에 영고탑이 있었다.
또한 {국어대사전}을 보면 영고탑을 영안이라 하고 영안은 만주 길림성에 있는
역사적 고성(古城)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영고탑은 만주 길림성 영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석가불교가 전래되기 이전 만주 요동에 불탑이 있었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소수림왕 2년 서기 372년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 편을
보면 소수림왕 이전 성왕이 요동을 순행하다 보니 삼중토탑(三重土塔)이 있었다 하고,
또 성왕이 이로 인하여 신앙심이 생겨 칠중목탑(七重木塔)을 세웠는데, 그후에 불법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즉 석가불교 전래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불탑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섯째, 불교사찰 본당 대웅전은 신선도의 대웅전이다.
불교에서는 사찰본당에 비로자나불을 모셨으면 비로전, 미륵불을 모셨으면 미륵전, 아미타불을
모셨으면 (아)미타전, 약사여래를 모셨으면 약사전이라 한다. 그와 같이 석가불을 모셨으면
석가전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와 달리 불찰본당의 명칭을 대웅전이라 하였다.
대웅이란 불타의 십불호(十佛號)에도 없는 명호이다. 불교에서 대웅(大雄)이란
대자(大慈)․대비(大悲)․대혜(大慧)와 같이 어느 사람의 인격을 의미하는 말로서
석가세존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런데 대웅전이라 하였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태백일사}를 보면 "대웅전이란 승도(僧徒)들이 고사를 답습하여 잉칭한 것이며, 본래는 승가의 말이
아니라 하고, 또 말하기를 승도와 유생은 다 랑가(郞家)에 예속되었다. 이로써 가히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불찰본당의 대웅전은 옛 사실을 답습한 것으로서 원래 불교의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말 '한'은 '대(大)'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한웅을 대웅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대웅전은 곧 한웅전으로서 신선도의 본당 명칭이라 할 수 밖에 없고,
그 안의 삼불(三佛)도 삼신(三神)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대웅전이란 간판의 존재는 석가불교 전래 이전 상고시대부터 우리나라에 고불교인
신선도가 있었고, 석가불교가 신선도를 계승하였다는 살아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여섯째, 상고시대부터 한웅신상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세기} 제11세 단군 도해(道奚) 조를 보면 "10월에 대시전(大始殿)을 세우고 장려하도록
명령하고 천제한웅의 유상(遺像)을 만들어 모시었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 번쩍하여
마치 큰 태양과 같았으며, 둥근 빛은 온 누리를 비추고 박달나무 밑 환화(桓花)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의 가운데 앉아있는 것 같았다. 원심에 천부인표(天符印標)를 지닌
대원일지도(大圓一之圖)가 누전에 걸려 있었다. 호(號)를 거발한(居發桓)이라 한다"고 하였다.
거발한이란 천․지․인(天․地․人)삼신일체의 천도를 크게 깨달은 성인을 지칭함이다.
여기에서 보면 한웅유상을 모셨음이 불찰본당 대웅전의 중앙에 모셔있는 불타상과 꼭 같다.
누전에 대원일지도가 걸려있다는 것은 불타상의 후면벽에 걸려있는 일원상과 같고,
환화의 위에 한웅유상이 앉아 있다함은 연화대 위에 불타상이 앉아있는 것과 같다.
이를 보아도 불찰본당의 대웅전은 신선도의 고사를 답습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곱째, 고고학적 근거가 있다.
1983-85년에 걸쳐 중국 요령성 눙원현 우하량 유적지를 발굴조사하였는데, 그 구릉상에서
제사유적과 신전 및 여자신상이 발견되었다. 이를 방사선 측정한 결과 기원전 3500년으로 나왔다.
중국 요령성은 옛날 청구(靑邱)라 불리웠던 곳이며, 청구는 고대의 우리나라를 말한다.
따라서 이번에 중국 요령성에서 발견된 제사유적과 신전 및 여자신상은 신선도의 실재성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덟째, 오늘날 10월 3일의 개천절행사가 한웅천황이 신선도를 설하고 신선도가 있었다는
또 하나의 살아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하였다.
2. 샤마니즘과 돌무덤은 신선도의 유풍․유속이다
1) 샤마니즘
샤마니즘(샤머니즘)은 우랄알타이어족을 주축으로 하여 아시아 일대와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민간신앙의 한 형태이다. 주술과 제사와 예언을 통하여 기복과 재액을 목적으로 하는
자연종교의 한 형태로 여겨왔다. 한자의 살만(薩蔓)․찰만(札蠻)․철만(撤蠻)․산만(珊蠻)은 모두 샤만의
음역(音譯)이다. 우리말에서 샤만은 무당이라 불리는 것이 보통이고 중부 이남의 방언에서는
"당굴 또는 당골"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제 샤만의 연원이 신선도와 동일함을 밝힌다.
첫째, 샤만의 어원은 고조선의 삼한(三韓)이다.
샤만의 어원이 팔리어의 사마나(Samana), 대승불교의 사문(沙門), 페르샤어의 우상이나 사(祠)를
의미하는 세멘(Schemen)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팔리어(Pali語)를 쓰는
드라비다족(族)이나 페르샤어(Persia語)를 쓰는 아리안족(族)은 우랄알타이어족(族)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발음의 유사성만으로는 그 근거가 너무나 빈약하다.
또한 대승불교의 사문에서 샤마니즘이 나왔을 것이라는 주장 역시
샤만이 대승불교보다 후에 나왔다는 주장으로서 어불성설이다.
이에 반하여 벤자로프는 샤만의 어원을 만주어라 하였다. 만주는 과거의 우리나라 고조선의
영토로서 고대의 만주는 진(辰)․변(辨)․마(馬)의 삼한(三韓)이 웅거하던 곳이다.
"삼한은 곧 三王이다". 삼왕은 교정일치(敎政一致) 시대의 통치자임과 동시에 제사장이며 주술자이고
예언가이다. 이들은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고 재앙을 면하게 하는 것을 통치의 목적으로 한다.
기능면에서 샤만과 삼한(삼왕)이 동일하다. 또한 발음도 삼한→삼안→샤만으로 자연스럽게 전음될 수
있어 샤만과 삼한은 원래 같은 음이다. 따라서 샤만의 어원은 벤자로프의 주장과 같이 만주어로서
고조선의 삼한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우주관 및 신관이 동일하다.
샤마니즘에서는 우주를 상계․중계․하계로 나누어 상계는 상제와 선신(善神)이 주관하고,
중계는 인간과 생물이 사는 곳이며, 하계는 악신이 있는 곳이라 한다.
신선도에서도 삼신일체의 원리에 따라 우주를 상계(천계)․중계(인계)․하계(지계)의 삼계(三界)로
나누고, 천신(天神)․인신(人神)․지신(地神)의 삼신(三神)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래서 샤마니즘과 신선도의 우주관이나 신관이 동일하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무속에서는
천신․지신․인신을 삼신제왕이라 하여 주신으로 섬기고, 무(巫)자도 파자하면 무(巫)의 상획은
하늘을 의미하고, 하획은 땅을 의미하는데, 두 사람이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형상이다.
즉 '무(巫)'자는 천․지․인(天․地․人) 삼신일체(三神一體)의 회의문자이다.
이를 보아도 샤마니즘과 신선도는 우주관과 신관 그리고 그 발생원리에 있어서
서로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셋째, 인체계의 구성계기를 3원적 구조로 보는 것이 동일하다.
뿌리아트의 샤마니즘에서는 사람의 육체계를
Oyeye 즉 Material body : 육체. Amin 즉 약간 하등되는 영혼: 숨. Sunyesun 즉 사람만의 영혼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인체계의 구성계기를 육체․숨․영혼의 3원적 구조로 보고 있다.
신선도에서도 인체계의 구성계기를 숨(氣)․마음(心)․육체(身)의 3원적 구조로 본다.
이것 역시 샤마니즘과 신선도가 서로 동일하다.
넷째, 살생유택(殺生有擇)사상이 동일하다.
샤마니즘에서는 어느 동물 또는 식물과 자기 종족과의 사이에 혈연적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종족의 수호자로 숭배하여 그 살상(殺傷)․식용(食用)․남용(濫用)을 금하고, 일정한 경우에
한해서 의례적으로 살상․식용한다. 즉 샤마니즘에서는 때와 물건을 가리어 살생한다.
신선도의 오계(五戒)에도 때와 물건을 가리는 살생유택(殺生有擇)이 있다.
다섯째, 신선도가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인데, 샤마니즘에서도 도․불․유 삼교의 용어를 혼용한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서 샤마니즘은 자연종교가 아니라 원래 성립종교라 할 수 있는데,
샤마니즘의 경전을 보면, 어느 경을 보아도 거기에 도․불․유 삼교의 용어가 혼재하고 있다.
{삼신태자경}을 예로 들면, 거기에 천황(天皇)․지황(地皇)․인황(人皇)과 유황유소․제곡도당․수인․여와․
황제헌훤 등의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나오고, 팔궤․삼신․삼십삼천․도솔천․도시왕․칠성님․지부대왕․
서천서역․불전․옥황상제․세존님․108염주․관세음보살․아미타불․육자염불․임록․관록 등의 각종의
록, 옥경․12제국․백부왕 등등 도․불․유의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무당들의 푸닥거리를 보아도 도․불․유의 용어를 혼용한다.
이상과 같이 샤마니즘과 신선도의 근본이 동일하다. 그것은 무엇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첫째, 샤마니즘과 신선도가 같은 데서 연원되었거나,
아니면 이능화의 주장과 같이 샤마니즘은 신선도의 유풍 유속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우리나라 중부 이남 지방에서 무당을 당굴 또는 당골이라 하는 것이나,
몽고어의 Tengri도 "단군"의 음(音)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고,
셋째, 샤마니즘 현상은 서구보다도 아시아 일대에 특이한데 그것은 우리민족의 고대문화가
아시아 일대에 넓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좁게는 신선도의 영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배달사상 곧 신선도는 동방사상의 원류이며, 우리민족은 동아문화의 창조자라는
안호상 박사의 지론이 타당함을 알 수 있고, 한국의 무속은 신선도와 더불어
민족사상의 본산이며, 고대 한국은 세계무속의 진원지라 할 수 있다.
2) 돌무덤
동이민족의 시신매장 시설은 다른 민족과 달리 돌을 가지고 축조하였는데 그것을 돌무덤 또는 석묘
(石墓)라 한다. 돌무덤 중에는 돌무지무덤(적석총), 돌널무덤(석관묘), 돌덧널무덤(석곽묘), 돌방무덤
(석실묘), 고인돌무덤(지석묘) 등이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무덤형식의 하나가 바로 돌널무덤이다.
이와 같은 돌무덤은 신석기 시대로부터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만주와 한반도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남쪽으로는 일본의 구주지방과 유구열도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멀리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돌무덤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한반도의 돌무덤의 기원을 청동기시대에 시베리아로부터 내려왔다고 보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가 시베리아에서 전래되었다고 믿었던
것처럼 한반도의 돌무덤도 북방에서 전래되었다는 북방전래설(서구전래설)이 주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3-1985년에 걸쳐 중국 요령성 능원현 우하량 적석총 유적에서 15개의 돌널무덤이
발견되었다. 이들 돌널무덤의 안에서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하여 채색토기․옥기 등 전형적인
홍산문화유형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연대는 기원전 4000-3000년 경에 해당된다.
시베리아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돌무덤의 연대는 기원전 2500-1200년 경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요령성 유역 돌널무덤의 축조년대는 시베리아보다 무려 2000년 이상이나 빠른 셈이다.
그러므로 동북아 돌널무덤의 기원을 발해연안으로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인돌 역시 돌무덤과 더불어 신석기 시대 후기 내지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200)에
한반도와 만주의 요동지방에서 유행한 대표적인 돌무덤 중의 한 형태이다.
고인돌은 지석(支石)을 표현한 말로써 일본어로는 "トルメン:도루멘", 영어로는 "Dolmen:돌멘"인데
이러한 말의 어원이 일본인들에게나 서구인들에게는 무슨 뜻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로서
일본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다. 순수한 우리말 "돌멩이"인 것이다.
이를 보아도 돌무덤이나 고인돌의 기원이 우리나라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단기고사}에 의하면 원래 고인돌의 개석(蓋石)은 천일(天一)을, 지석(支石)은 지이(地二)를
상징하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천단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고인돌이 무덤으로 변하기 전에는
제천단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샤마니즘 현상이나 돌무덤이 신선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그것이 아시아 일대에
널리 펴져 있음은 신선도의 사상이 그만큼 세계적이고 보편적이며 실재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Ⅹ. 결 론
지금까지 신선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종교의 일반적 구성요건에 대입시키면,
첫째, 설주로서 한인천제․한웅천황․단군왕검의 삼성이 있다.
둘째, 숭배의 대상으로서 삼신하나님이 있다.
세째, 종교적 목적으로서 홍익인간 이화세계건설이 있다.
넷째, 사상으로서 도․불․유 삼교일체사상이 있다.
다섯째, 계율로서 삼륜․오계․오륜․팔조․구서 등이 있다.
여섯째, 의식으로서 소도제천의식과 가정에서의 제사의식이 있다.
(본서에서는 가정에서의 제사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였다)
일곱째, 경전으로서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이 있다(본서에서는 설명을 생략하였다).
또한 이상의 일반적인 종교적 구성요건 외에 신선도는 다음과 같은 특수성을 지닌다.
1) 서구종교의 숭배대상은 여호와 또는 알라로서 국지적 민족적인데 신선도의 숭배대상은
삼신하나님으로서 보편적 세계적이다.
2) 서구종교의 신앙목적은 신의 구원에 의한 사후의 천국탄생으로서 개인주의적인데,
신선도의 신앙목적은 신인일체(神人一體) 내지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의 인격완성을 통한
성인군자 내지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지향과 홍익인간 이화세계 건설로서
개인주의적이면서 세계주의적이다.
3) 서구종교는 어느 개인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조작된 종교로서 거기에 발생원리도 없다.
그러나 신선도는 불변적 진리인 천도(天道) 곧 삼신일체를 발생원리로 한다.
4) 서구종교의 교리와 사상은 시대적 민족적 소산으로서 국지적 민족주의적인데,
신선도의 교리와 사상은 명․성․정(命․性․精) 삼진(三眞)의 수련과 백․흑․황의 삼대인종을 배경으로
성립되어 보편적 세계주의적이다.
5) 서구종교는 수양방법으로서 단지 기도와 독경과 자선행위 뿐인데,
신선도는 수양방법으로서 기도와 독경과 자선행위 외에 명(命)․성(性)․정(精)의 삼원적 품부를
수련하는 조식법(調息法)․지감법(止感法)․금촉법(禁觸法)이 있다.
6) 서구종교는 신인상하(神人上下)의 생명불평등사상인데,
신선도는 천지인(天地人) 일체의 생명평등사상이다.
7) 서구종교는 2원론으로서 대립과 투쟁을 자기의 생존을 위한 당연한 수단으로 보는데,
신선도는 3원론적 1원론으로서 조화사상이었다.
신선도는 이상과 같이 종교적 구성요건과 서구종교와 다른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신선도는 지금부터 근 6천년 전, 세계인류가 원시의 미몽에서 깨기 전에 성립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신선도는 시대적 국지적 민족주의 종교가 아니라 보편적 세계주의 종교임을 의미한다.
* 상고시대의 우리나라는 부처님이 세운 나라로서 천축국(天竺國)이 었으며,
예의지국이었고 군자지국이었으며 신선지국이었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의미한다.
* 신선도를 설한 한인천제와 한웅천황과 단군왕검은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석가모니․공자․노자․예수보다도 더욱 위대한 성인이시며 부처님이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 우리민족은 상대문명의 주인공으로서 동방문화의 개척자요 세계문명의 지도자였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 우리민족은 다른 민족과 다른 특수한 사상과 문화를 일찍이 개척함으로써 이웃 민족들로부터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민족의 문화가 말살당하게 된 동기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 노자의 도교․석가의 불교․공자의 유교 등 이들 종교의 원류는 신선도로서 현재 국내에 있는
도교․불교․유교는 역수입되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이에 대해서는 제2부에서 상설한다.
* 신선도는 현대철학이나 현대종교 이전의 선행종교로서 동양사상의 원류요 세계사상의 원조이며
모체라는 이론이 성립된다.
* 서양 사람들이 설정하여 놓은 원시니 선진이니 하는 개념은 이제 수정되어야 하고,
문화에도 생성소멸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 서구문화기원설․북방문화기원설․남방문화유입설․중국문화수입설․인도문화수입설 등
종래의 학설들은 당연히 수정돼야 한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이상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천수백년만에 처음으로 제기되는 문제이며
너무나 새롭고 의외의 문제로서 당장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배달사상에 대하여
백지이면서 안호상 박사께서 말한 바, 중독․왜독․양독 등 외래사상에 중독된 사람들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은 사소한 결함을 빙자하여 내용을 깊이 연구하여 보지도 않고,
무조건 부정하려 할 것이다. 물론 본 연구는 새로운 연구요 자료도 얼마 없는 데서 이루어진
연구로서 여러가지로 보완하여야 할 곳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미운 사람을 대하듯 무조건 흠집만 찾아내고 부정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이들에게 직언하나니 부정하려면 반드시 반증을 제시하여야 한다. 반증없는 부정은
학자의 도리가 아니요, 무조건 자기의 학설이나 통설만을 고집하려는 안일주의자요,
민족이나 인류의 명예보다도 자기 개인의 명예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이기주의자라는 혹평을
면치 못할 것이다. 깊은 자성이 있기를 촉구한다.
오호라! 여기에서 다소나마 우리민족은 미개민족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긴긴 밤에 먼동이 트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해돋이 땅 동방의 금수강산에 밝은 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해중선국(海中仙國) 군자지국(君子之國)에 반드시 대운이 열리리라 믿는다.
7천만 민족의 3천년 한이 풀리고, 세계에 참다운 평화가 오리라 믿는다.
독자들은 분발하라. 민족과 인류를 위하여 용기를 내라.
배달사상은 젊은 독자들의 적극적인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배달사상이 21세기의 세계를 지도하게 될 것이다.
부족한 점을 보완 재정비하고,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그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곧 국가의 위신을 세우고 민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며,
세계평화를 위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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