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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주일설교 고린도전서3:1-4
본문: 고린도전서3:1-4
제목: 사람의 기준을 따르면
오늘은 고린도전서3:1-4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의 기준을 따르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기준을 따르면”
세상은 기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준에 따라 살게 됩니다.
1kg하면 그것이 어느 정도 인가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을 정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한 기준이 없으면 엄청난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혼자 살때는 그런 기준이 필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살아갈 때는
그런 기준이 있어야 질서가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을 지키지 못하면
사회나 단체는 처벌이나 징계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준일까요?
세상의 기준일까요?
대한민국의 기준일까요?
다른 나라의 기준일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곧 십자가의 복음을 따라 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십자가의 복음은
세상이 원하는 가치와 기준에 어긋납니다.
그래서 복음은 세상과 그 통지자 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립니다.
하지만 구원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성령의 깨우침을 통해 그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으로 다가온 이 은혜의 부르심은
그동안의 삶의 해답인 줄 알고 의지해 온 세상의 지혜와 힘과 영예가 헛되고 무가치함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세상 기준에 빠져 신앙에 혼란에 빠진 성도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르 통해 구원을 받았으며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들이 깨우친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에 통하는 현명함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 지혜란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들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말씀에 근거하여
바울은 교회의 상황을 진단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
결론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 만족적 자만심과 달리
그들은 전혀 영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성령이 가르치신 말씀대로 움직이는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사람들을 따라 사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처음 그들이
복음을 만났던 시간으로 돌아갑니다.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가사 복음을 전하고 회심자들을
가르칠 때 그들을 영적인 사람들처럼 대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아직 육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과의 대조는
회심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대조가 아닙니다.
지금 바울은 그들이 진정으로 회심했느냐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복음과 어긋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그에 어울리는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순종이 따르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아닐까요?
물론 믿음이 아예 없는 교인들이 있기는 합니다.
지금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은 어떠할까요?
이는 그들의 빗나간 행동에 대한 목회자의 꾸지람이지
그들의 믿음의 자체에 관한 신학적 정죄는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실제 그들의 삶은 문제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육적이고
여전히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불신자는 아닙니다.
육적 형태를 일삼지만 이들은 엄연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며
어린아이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습니다.
바울이 꾸지람을 하고 있는 이유는 신자이면서
신자답지 않은 행태를 일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신자들을 육적이라고 하는 비판은
개별 일탈 행위에 대한 비판보다 더 포괄적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육적이라는 표현은 자연적 인간
곧 육에 속한 인간과 통합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지 못한 상태,
곧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의 존재 방식입니다.
곧 그들의 사고와 행동이 복음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당시 사회를 지탱하던 인간적 가치들, 곧 세속적인
지혜와 힘과 명예 등의 가치에 이끌리는 형태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한 혼적 존재가
보여주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육적 삶입니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 행동이 성령과 무관하다는 비판입니다.
한마디로 회심하기 이전의 삶, 그리스도를 배우지 못했을 때의 행태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는 꾸지람입니다.
처음 바울이 선포했던 십자가의 말씀은
주변 세계의 토양에서 자란 고린도 신자들을
깨우쳐 새로운 삶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통해 부르심을 경험했습니다.
이를 통해 세속적 자랑의 허망함을 깨닫고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새로운 능력과 지혜에
기대어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믿고 돌아섰다면 이 복음 속에서
삶을 살아왔다면 그들이 사고방식과 삶의 양상이
복음의 본질에 맞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 성숙한 어른이 되듯,
그리스도 안에서 막 태어난 어린아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신자들로 자랐을 것입니다.
정상적이라면 자라야 합니다.
물론 갓난아이가 바로 어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도 그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교회가 생겨날 때 바울은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이들을 영적인 사람인 양 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일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이나 말 혹은 행동을 두고 말하자면
그들은 아직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신앙을 가졌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많은 부분 육적인 상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앙적 어린아이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들을 양육했습니다.
단단한 음식 곧 어느 정도 자라야 소화할 수 있는 딱딱한 음식 대신 대신 갓난아이에게 맞는 우유를 먹였습니다.
그들에겐 아직 제대로 된 음식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제대로 된 음식은
성숙한 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성령의 계시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 선물들은 사람의 지혜로 계몽된 언어가 아니라
성령의 깨우친 언어로 소통됩니다.
이러한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세상의 힘과 집착과 자랑을 버립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만을 구원의
유일한 희망으로 의지하며 자랑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되고
그런 체험을 통해 오는 깨달음을 통해
생생하고 구체적인 지식으로 견고해져 갈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고린도라는 이방 세계의
문화와 가치에 빠져 살던 사람들,
그러다 막 은혜의 부르심을 받고 회심한 어린 신자들에게
곧바로 성숙한 사고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바울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방식
곧 젖을 먹여 양육했습니다.
그렇다고 젖과 제대로 된 음식의 구분이
선포된 복음 자체의 차이는 아닙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누구에게는 동일합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복음은 급진적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요구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발톱을 숨기고 접근했다가 적응한 뒤에 힘든
조건을 제시하는 방식은 바울의 선교와는 멀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복음이 요구하는
죄의 회개와 용서 및 삶의 변화에 관한 메시지는
처음부터 선명하게 선포되어야 했습니다.
충격이 없을 정도로 완만한 우회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180도 돌아서는 날카로운 돌아섬입니다.
하지만 복음의 원리를 분명하게 선포하는 일과
적대적 현실에서 그 복음을 살아 내는 일은 다릅니다.
배운 복음을 일상에서 새로 깨우치는 일은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라
생애 전체에 걸쳐 계속되는 학습과 성숙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돌아보고
그에 어울리는 순종의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신앙 좋은 청년은 결혼하면서
복음적 남편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부모가 되면 복음적 부모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배운 말씀을 기계적으로 이식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상황 자체가 새롭기 때문입니다.
나는 남과 다릅니다.
그렇기에 나의 개별성과 내 상황의 구체성에
어울리는 복음의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이는 말씀 자체에 대한 신실한 이해 못지않게
내가 사는 일상에 대한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 신자들에게
이런 성숙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 가운데 여전히
미성숙한 형태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쯤 되었으면 성숙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데
아직 미성숙한 상태였습니다.
여전히 단단한 음식을 소화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은 여전히 육적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유를 먹고 자라면 이유식을 먹고
자라면 일반적인 음식을 먹고
자라면 다른 사람에게 음식도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것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닙니까?
은혜의 복음 대신 세상 가치에 따라
분열과 분쟁의 행동을 하고 있다면
육적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풍성한 은사를 받았습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치유의 은사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은사들은 성령이 주신 것들입니다.
이점만 생각하면 그들이 영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영적 은사를 받았다고
그들이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영적 성숙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풍성한 은사의 소유했다는 자부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은사 속에 담은 은혜의 논리에 따라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그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지 않기에
지금 그런 모습을 꾸짖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그렇게 서로 경쟁하며
분쟁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에게 보여지는 경쟁적 갈등과 분열은
모두 사람을 자랑하는 욕망의 결과물들입니다.
사람을 자랑한다는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나 조건을
기준으로 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에 집착하는 것은 그런 가치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리고
그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무시하고 멸시하며
그래서 그들과 멀어지려는 애써 노력합니다.
그런 세속 조건을 따지는 그런 경쟁적 태도는
조건 없는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의 복음과 모순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그리고 어리석다는
십자가의 메시지로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여태껏 의지하던
세상의 가치관들을 폐기 처분하셨습니다.
그랬는데 아직 분쟁하고 분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세속적 가치에
휘둘리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십자가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은혜의 부르심을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이 혁명적 복음이 가지는
능력이 실천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직 어려서가 아닙니다.
시간이 얼마 안 되어서도 아닙니다.
방향이 심각하게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것은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상반된 행위를 보이는 것은
아직 우리 자신이 육신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대신 인간적 가치와 조건들에
경쟁적으로 집착한다는 점은 그들의 기준이
사람의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면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4절에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이 투박한 물음은 더 긴 생각을 줄인 문장으로 보입니다.
결국 성령이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 채
‘주변사회의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합니다.’
라는 꾸지람입니다.
그들의 미성숙한 육적 상태를 꼬집기 위해
바울은 더욱 직설적인 언어로
그들의 분열적 행태로 묘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라고 말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라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바울이 지적했던 분열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 파벌로 갈라지는 이런 행태는
한 분 그리스도께 속하고, 한 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신자들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특별히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분탕질을 일삼는 이들을 1:13-17절에서 풍자했습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바울 내가 너희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느냐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리스도보다
오히려 바울의 이름을 더 내세웁니다.
그리고 별것이 아닌 이런 인간적 유대를 근거로
조금더 가깝다고 친하다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특별하게 취급합니다.
아볼로의 이름을 내세운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바울과 아볼로를 서로 구별하고
차별하면서, 한쪽을 높이 평가하고 다른 쪽을 낮춥니다.
각각 자신의 선호에 따라 이런저런 파벌로 갈라집니다.
그러면서 그 갈라짐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명분으로
특정 지도자를 빙자합니다.
교회 신자들이 그들의 사역자를 대하는 방식이
십자가 복음의 논리 대신 당시 주변 사회의 관행에
더 쉽게 휘둘리는 상황인 셈입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모습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러한 모습이 있다면 우리는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성숙하지 않는 자녀는 부모에게 근심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어떤 존재가 되겠습니까?
성숙으로 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준이 세상 기준을 따르지 않고
아니면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을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미 자랄 때가 지났습니다.
징징대는 일은 그만 둘 때가 되었습니다.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성숙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세상에 유익을 주는 성도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