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두 개 때문에
우리나라 기후인 사계절과 여름 장마, 겨울 삼한사온은 교과서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요즈음 봄과 가을이 실종되었다 하고, 장마 예측도 힘들며, 겨울 추위도 들쭉날쭉이다. 이렇듯 날씨가 예사롭지 않으니, 이를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 재앙이라고도 말한다. 이런 때에 인구 절벽의 암울한 미래, 눈앞 후쿠시마 핵 폐수의 불안과 공포를 결코 괴담이라고 덮을 수 없다. 단기·중장기 대책을 시행하지 않으면 한반도는 버려진 땅이 될지도 모른다.
특히 정치 권력이 이 모든 게 과거의 잘못이라며 책임을 전가하거나, 상대의 약점을 들춰 상황을 호도하는 것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는 각오와 의지로 먼저 실천하지 않으면, 그저 핑계이고 모래탑일 뿐이다.
보성에 가면 열선루가 있다. 1597년 8월 15일 수군 재건길에 나선 이순신이 열선루에 머물 때이다. 선전관 박천봉이 선조의 분부를 가져왔다. 이순신은 곧, 잘 받았다는 장계를 썼으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이다. 겉으로만 보면 선조의 명에 큰 각오로 따르는 내용이지만,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왕의 명을 거스르는 일이다.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을 받고 수군 재건길에 나선 이순신이 보성에 이르러 받은 명령은 ‘조선 수군이 미약하니 육군에 의탁해 싸우도록 하라’는 수군 폐지의 유지였기 때문이다. 전시 중에 왕의 명령을 어기는 일은 반역에 해당하는 일이다. 또 이순신은 이미 왕명을 어겼다 하여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휘하 장졸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포박되어 한성으로 호송되었다. 의금부에서 27일간의 옥살이를 하고 백의종군을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번에도 선조의 명령에 단호히 맞섰다. 조선 수군을 포기하는 것은 곧 백성을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순신의 결정은 한 달여 뒤인 9월 16일 명량대첩이 되었고, 바람 앞의 촛불이던 조선의 운명은 기사회생하였다. 무엇보다도 남원성 함락으로 만여 백성이 죽고, 수십만 개의 코를 베던 왜의 만행에서 백성들에게는 실낱 같은 삶의 희망이 되었다. 당시 수군 재건길에 나선 이순신을 길가의 백성들이 아버지라는 호칭인 ‘이야’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걸핏하면 남의 약점을 캐고 모략을 일삼던 조선 조정의 관료들이었지만, 이순신은 이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신념을 실천했기에 그 수많은 백성이 살았고 희망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때 이순신을 믿고 지지했던 분들이 있다. 그중 이순신의 종사관 정경달은 압송되는 이순신을 한산도에서 한성까지 함께 따라갔다. 영의정 류성룡과 병조판서 이항복 등에게 이순신의 죄 없음을 탄원하고 임금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어찌어찌 선조를 만나 ‘전하, 설령 죄를 물으시더라도 그 몸을 부수지 마소서. 전하께서 통제공을 죽이시면 사직을 잃으실까 염려되옵니다’라며 이마를 마루에 찧으며 호소했다.
하지만 선조는 ‘너희들이 남쪽 바다에서 사직을 염려했느냐?’라며 퉁명스레 나무랐고, 통제영을 마음대로 떠난 죄로 정경달은 곤장 쉰 대를 맞았다.
이순신이 보성을 다녀가고 닷새 뒤인 8월 20일 왜군은 보성읍성을 공격해 열선루 등 성내 관아를 모두 불태웠다. 이때 함께 탄 보성읍성의 동문 누각은 계양루이다. 이 계양루는 중국 위(衛)나라의 ‘계란 때문에 인재를 버리지 않는다’라는 고사에서 연유한다. 전국 시대에 위나라 자사가 왕에게 장수 ‘구변’을 천거했다. 왕은 구변이 하급 관리 때 계란 두 개를 뇌물로 받았다며 난색을 표명했다. 이에 자사는 ‘계란 두 개 때문에 나라의 방패가 될 장수를 버리면, 이웃 나라가 비웃는다’라며 ‘인재 발탁에 완전을 바라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지만, 계란 두 개 같은 이유로 대세를 그르쳐서도 안 된다. 그러나 하나같이 비리 부류로 권력을 채운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후쿠시마 핵 폐수가 안전하다며 수조의 물을 먹는, 사리 분별없이 설치는, 상하가 똑같은 부나방 부류가 우글대는 한, 이는 기후 재앙, 인구 절벽 같은 우환에 희망이 없음이다. 보성의 열선루와 계양루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하는 단상이다. (김목 광주전남아동문학인회 회장)
[상유십이 장계]
1597년(선조30)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선조임금에게 올린 장계(狀啓)이다. 《난중일기》에는 언급되지 않고, 《이충무공 행록(李忠武公 行錄)》, 《이충무공 행장(李忠武公 行狀)》, 《시장(諡狀)》,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 《신도비(神道碑)》 등에 전한다. 기록에 따라 그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신도비(神道碑)를 제외한 나머지 기록에 공통적으로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란 문구가 언급되어 있기에 일반적으로 "금신전선상유십이 장계"라고 한다.
공(이순신)이 배설에게 계책을 물으니, 배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육전을 도와서 공을 세우자고 하였다. 또 조정에서도 육전에 병력을 합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공은 장계를 올려서, “임진년 이후로 적이 감히 남쪽 지방을 겁탈하지 못한 것은 사실은 수군이 적의 세력을 막았기 때문인데, 이제 망일 수군을 없앤다면 적들은 반드시 호남을 거쳐 한강으로 올라갈 것입니다.(壬辰後賊不敢南刦者 實以舟師沮其勢也 今若撤舟師 則賊必由湖達漢) 다만 순풍에 돛 한 번만 달면 될 것이니, 신이 두려워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只憑一颿風 此臣所懼也)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이 12척이 남아 있으니, 신이 죽지 않은 한 적도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今臣戰船 亦有十二 臣若不死 則賊亦不敢侮我矣)”라고 하였다. - 출처 : 네이버 위키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