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55, 56, 57
선조 3
- 사화, 붕당, 그리고 조선의 위기
조선시대 정치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는
‘사화(士禍)’와 ‘붕당(朋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세조의 계유정난 이래
기득권을 가진 기존 관료 집단인
훈구파가 조정을 좌우하고 있었는데,
15세기 말엽부터 훈구파를 비판하는
사림파(士林派)가 대두했고,
이후 양자의 충돌로
여러 차례 사화가 발생하여,
사림의 무수한 선비들이 옥사하였음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그 후 선조 대에 이르러,
윤원형 같은 외척세력이 쇠퇴하자,
사림이 다시 정계로 대거 진출하였는데,
사림 사이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무리끼리 뭉쳐 상대방과 반목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붕당입니다.
선조 대에,
김효원과 심의겸의 이조정랑 추천 문제로
생긴 양자의 반목으로,
관료들이 동인과 서인이 갈린 이래,
나아가 재야의 유생들까지도
어느 한쪽을 지지해,
결국 거의 모든 사림이 대를 이어가면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사림의 동서분당 이후
붕당은 계속 핵분열을 일으켜,
동인은 동인대로,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강경론을 주장한 남인(南人)과
온건론을 주장한 북인(北人)으로
갈리었습니다.
또한 서인(西人)은
나중에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리니,
이와 같이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흔히
사색(四色)당파라 하였습니다.
붕당간의 대립은,
지극히 배타적이었을 뿐더러
주로 복상(服喪) 문제, 세자책봉 문제 등
민생과는 관련이 없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즉, 치열한 붕당간의 대립은
영조, 정조 등의 탕평정책으로
다소 누그러졌지만
19세기에는 세도정치로 발전해
망국의 길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붕당정치는,
서양의 정당정치에 비견될 수 있는
장점 또한 많다는
긍정적 평가 역시 존재합니다.
그러나 결과론적이겠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망국의 상황 등
치명적인 결과를 생각한다면...
선조 즉위 이래
조선은 이와 같이 동인, 서인으로,
동인이 다시 남인, 북인으로 나뉜
붕당정치에 골몰하고 있었고,
역사의식과 통찰력이 없는 임금은
붕당을 이용해 왕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을 둘러싼 주변의 국제정세는
급격하게 위험한 형국으로 치닫고 있어,
아차 하다가는 백성은 몰살을 당하고
나라는 통째로 사라질 판이었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형국속에
호랑이 앞의 토끼 신세인 조선만
정작 모르고 있었으니,
불쌍한 것은 오로지 백성이었습니다.
계파 싸움하다 시간 다 보내고,
저들의 권력싸움에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피폐 해집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앞에서
처참해지는건 백성들....
국민을 대표해
국민을 위해 일해야할 저들의 정치는,
과연 무엇을 위한 정치이기에.
본인 밥그릇 불리기에 더 악착같은 현실,
못 된 것들이라 할 수 밖에 없지요
담회로~~
[출처] 조선왕조 실록 55|작성자 DJ Song
《조선왕조실록(56)》 선조 4
- 예고된 침략(1)
정여립 사건으로
조정에 피바람이 불고,
붕당 정쟁으로 나라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지던 1590년경.
명나라에서는,
13대 황제 신종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세가 약화되고 있었던 반면,
북방에서는,
만주족 누루하치가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여
급격히 힘을 키워가고 있었으며,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전국시대가
오다 노부가나와 그를 계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 의해
통일이 되었습니다.
히데요시는,
100년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을 이루어냈다는 극도의 자신감에 더해,
끝없는 전쟁을 통해
최정예의 수십만 군대를 보유하였으니,
이러한 자신감과 군대를 활용하고픈
욕구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리라.
거기다,
언제든지 반기를 들 여지가 있는
영주들이 딴 생각을 못하도록
관심사를 외부로 돌릴 필요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수십만의 정예군대로
중국과 인도를 정복할 꿈을 꾸게 되고,
그러기 위해
먼저 조선을 침략해 빠르게 항복을 받은 후
조선의 도움을 얻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는 히데요시의 대착각이었습니다.
일본은 침략을 결정한 이후
많은 밀정을 조선에 들여보내
조선 지도를 제작하고 조선의 사정과 지형,
인구와 물자 분포 등을 파악했지만,
최고위 수준에서의 정보가 부실하였습니다.
특히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의 국가 규모나
정치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조선을 힘으로 강하게 위협하면,
국왕은 곧 항복할 것이고 왕이 항복하면,
조선인은 일본의 충실한 신민이 될 것이니
조선인까지 합세해서 명나라를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조선은,
일본 정세에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일본을 조무래기로 취급하여
그 국력을 턱없이 낮추어 보는 것은 물론이고,
당시 일왕과 최고실력자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해,
최고 실력자 오다 노부가나의 죽음을 두고 “왜인들은 최근
자신들의 왕을 시해했으므로
이런 야만스러운 나라에 사절을
보내줄 수 없다"하며
일본의 통신사 파견요청을 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쨌든,
조선을 겁주어 복속하려는
일본의 거듭된 통신사 파견 요청을 거절하던,
조선은,
일본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담회로~~
[출처] 조선왕조 실록 56|작성자 DJ Song
《 조선왕조실록(57) 》 선조 5
- 예고된 침략(2)
조선 통신사의
일본내 활동과 귀국 후의 활동에 대해
실록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유성룡의 ‘징비록’을 근거로 한
‘수정실록’에는,
김성일이,
당당하게 일본의 무례를 꾸짖은 반면,
황윤길은,
재물확보에 급급해 비루한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김성일이 유성룡과 같은 동인인데다,
전쟁발발에 대해 헛다리를 짚는 걸 보면,
유성룡의 김성일에 대한 후한 평가는,
자기 붕당에 대한 자화자찬에 불과한 것으로
봄이 타당합니다.
김성일은
유학자로서의 자부심이 워낙 세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
정세파악을 그르치고 조정에 사실상
허위보고를 하고마는 크나큰 우를 범합니다.
조선에 돌아온 정사 황윤길은,
히데요시의 눈빛이 빛나고
지략이 풍부해보였으며 여러 사정을 볼 때
머지않아 조선을 칠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부사 김성일은,
히데요시는 쥐같이 생긴 인물로서
두려워할 바 못되고 조선을 칠 의사와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선조를 비롯한 조정은,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나,
난상토론 끝에 결국은
"전쟁은 그렇게 쉽게 나는 것이 아니다,
왜구의 노략질 수준이겠지
설마 전면전을 하겠어?"라는 심정으로,
보다 마음 편한 선택인 김성일의 의견을
믿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졌습니다.
일단 발생하면 어마어마한 인명이 죽고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그런 속성을 가진
“전쟁”이 과연 실제로 발발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하는 중차대한 문제를,
면밀한 과학적 분석과 전략적 탐색이 아닌
토론으로 결론 내리는 이 신기한 문화...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지
조정은 이순신, 송상헌 등을
남쪽 최전방에 배치하고,
전국에 축성, 성곽보수 등을 명했으나,
이마저도 김성일은,
민심이반을 걱정하며 반대하였습니다.
조선은,
유학으로 무장한 학자들이 다스리는 나라,
문신의 나라였고(권력은 붓끝에서 나온다!),
이들이 병조판서 같은 자리를 차지해
무신들을 부리고 다스렸으며,
이렇다 할 전쟁없이 평화가 유지되면서,
그나마 조선 초에 있던
진법훈련이니 병기개량이니 하는 것들마저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말을 듣는 장수가
여진족 몇을 베게 되면,
이를 과장해 명장이라 치켜세워 승진을 시켰고,
장수는 장수대로
인사권을 쥔 문신들에게 뇌물을 바치기 위해
축재를 하기에 바빴습니다.
군졸들은,
아무 빽도 없고 도망갈 배짱도 없는
약자 중의 약자들로서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었습니다.
위와 같은 삼위일체 체제에,
왕 같지도 않은 왕에,
거기다가 전쟁은 없다는 동인정권의
결정적 오판까지 겹쳤으니,
이 나라가 어찌 성할 수 있었겠습니까
임진년 봄,
왜인들이 머무르는 왜관은
이미 텅 빈지 오래였고,
전쟁을 예감한 이순신이 홀로
거북선을 타고 포격훈련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조선은 조용했고,
예고된 전쟁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담회로~~
[출처] 조선왕조 실록 57|작성자 DJ 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