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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파병문제로 온 나라가 우울했던 60년대말. 혜성처럼 나타난 자매듀엣 펄씨스터즈는 166cm가 넘는 키에 균형잡힌 몸매, 예쁜 용모와 호소력 짙은 가창력을 뽐내며 대중들의 눈과 귀를 사로 잡았다. 또한 여대생가수라는 청순한 이미지는 상상을 초월한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만들었다. 구김살없이 명랑한 성격이었던 배인순, 인숙 자매의 등장은 가요계의 체질개선을 불러왔다. 본격적인 비디오시대의 화려한 서막이었다. 포항에서 정유업을 했던 부친 배경식과 모친 현정덕의 6남매중 5, 6번째로 태어난 배인순, 인숙자매. 둘째오빠는 해외진출 1호 배우로 홍콩에서 활약했던 미남배우 성훈(본명 배용수)이었다. 언니 인순은 중앙대 도서관학과 출신으로 상명여중 3학년때는 올림픽대표 선발전에도 출전했던 국가대표급 수영선수였다. 고3때는 수도여사대 주최 영어웅변대회에서 동메달을 받았을 만큼 영어도 잘하고 목청도 우렁찼던 재주꾼으로 여자외교관이 꿈이었던 소녀였다. 동생 인숙은 어릴적부터 빼어난 미모와 발레로 다져진 춤솜씨와 몸매로 남학생들의 짝사랑 대상이었다. 음악활동 때문에 명지대 영문과에서 언니가 다니던 중앙대 도서관학과로 편입했을 만큼 쌍둥이같은 동생이었다. 음악에 대한 관심은 언니 인순이 기타학원을 찾아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적극적인 후원자였던 어머니의 배려로 동생 인숙도 함께 음악을 배웠다. 언니는 기타와 드럼 연주실력이 상당수준에 올랐을 만큼 욕심이 대단했고 동생은 언니에게 뒤질세라 노래공부에 열심이었다. 팝송에 심취했던 당시의 펄 자매는 미국 흑인가수 디온 워윅의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67년, 미8군에서 개최한 보컬그룹 오디션에 구경간 자매는 얼떨결에 참가해본 테스트에 합격, 화양프로모션에 전속되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끈한 몸매와 미모, 타고난 음악적 재질은 곧바로 미8군 베거스 버라이어티쇼에 발탁되었다. 본격 가수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이때가 67년 4월. 팀명도 없이 활동하던 당시는 외국팝송이 주레퍼토리였고 노래실력도 막 아마추어 티를 벗어난 수준이었지만 열의만은 대단했다. 68년1월, 대중들에게 첫 선을 보인 무대는 동양TV의 ‘쇼쇼쇼’무대. 제법 주목을 받았다. 4개월후 카지노의 대부로 유명한 전락원 사장의 눈에 들어 워커힐 쇼단의 일원으로 일본공연을 다녀올 정도로 촉망받는 신인으로 성장했다. 자매는 체계적인 율동을 익혀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하기로 작정하고 최선희 무용연구소에서 밤낮없이 안무연습을 했다. 당시 유행하던 고고, 소울 리듬과 자신들의 특성을 살릴 율동, 무대매너 공부에 전력을 쏟기위해 AFKN-TV 음악프로에 나오는 외국가수 연구에도 열심이었다. 펄씨스터즈의 음악스승은 미8군무대에서 만난 록의 대부 신중현. 당시 베트남으로 떠날 결심을 하고 있던 신중현에게 자신들의 데뷔음반을 내 달라고 간청했다. 떠나기 전에 기념음반을 만들기로 작심한 신중현은 새롭게 작곡한 <님아>, <떠나야할 그 사람>과 64년 기성곡 <커피한잔>등 6곡으로 펄씨스터즈에게 창법을 지도했다. 이 기간에 펄씨스터즈는 소울사이키창법을 익히며 진정한 가수로 거듭났다. 신중현의 부탁으로 앨범작업엔 들어갔지만 킹박으로 유명한 박성배 사장조차 ‘절대로 인기끌지 못할 노래’라며 녹음작업 때조차 심드렁하게 소파에 누워 잠만 청했다. 그러나 그룹 덩키스가 세션을 맡아 연주한 경음악과 함께 구성된 데뷔음반 <펄씨스터 님아!-신향DG1013.68년12월>이 세상에 나오자 온통 난리가 났다. 직설적인 표현의 노랫말에 참전문제로 우울했던 젊은이들은 돌파구를 찾은 듯 열광했고 나이든 세대들은 ‘이게 무슨 우리 노래냐. 말세’라며 혀를 찼을 만큼 상반된 평가의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데뷔음반 뒷면에 수록된 <키다리 미스터 김>등 6곡의 경음악을 포함, 싸이키델릭 향기를 뿜어대기 시작한 그룹 덩키스의 비범한 연주는 폭발적이고 호소력짙은 펄씨스터즈의 보컬에 맛을 더해주었다. 대중들은 자매가 목터지게 뿜어대는 하모니에 매료당하며 타이틀곡<님아>는 오디오 보급이 미미했던 당시로서는 믿기힘든 1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침체된 레코드계에 히트보증수표로 등장한 펄씨스터즈 쟁탈전은 레코드회사들의 주먹다짐이 오가는 스카우트 파동으로 이어질 만큼 뜨거웠다. 또한 서울대 문리대 출신 괴짜시인 주성윤의 짝사랑 사연은 장안의 화제거리였을 만큼 수많은 젊은 남성들은 자매의 매력에 흠뻑 빠져 애간장을 태웠다. 데뷔앨범의 예상치 못했던 빅히트에 정신이 번쩍 든 킹박은 2집앨범을 서둘렀다. 준비된 신곡없이 발표된 2집 <신중현과 펄씨스터 히트앨범-신향,DG1018,69년1월>은 미8군 쇼시절에 즐겨불렀던 팝송레퍼토리 10곡을 모은 팝송번안앨범. 수록된 팝송들은 하얀집, 내사랑 어디갔나(SOMEBODY TO LOVE ME)등 친숙하면서 비트 강한 싸이키델릭곡들로 구성이 된 희귀음반이다. 데뷔 1년만에 상상을 초월한 반응으로 6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단숨에 정상에 서버린 펄씨스터즈. 동남아일대의 쇼비즈니스의 거물로 알려진 필리핀 재벌과의 데이트설이 나도는 등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일본에서도 유혹의 손길이 다가왔다.
펄씨스터즈는 69년 중반 시민회관에서 최초의 보컬듀엣 리싸이틀 <소울 카니발>을 개최하며 전국순회공연에 나서는 등 초고속 인기 가도를 내달렸다. 신중현, 키보이스 등 당시 우정출연한 가수들의 면면은 펄 자매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데뷔시절 교통비조로 5,000원정도를 받던 수입은 지구레코드로 소속을 옮기면서 전속료만도 50만원으로 폭등하였다. 또한 영화계와 전국각지의 공연요청은 코로나승용차를 구입해야만 스케줄을 지킬 수 있었을 만큼 끊이질 않았다. 69년12월 MBC 10대가수 청백전은 펄씨스터즈 노래인생에서 절정의 순간이었다. 이미 한국문화대상 등 10여개의 상을 휩쓸었지만 가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영예인 가수왕 등극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정식데뷔 1년남짓만에 최정상에 군림한 가수는 전례가 없었다. 전속사를 옮긴 후, 펄은 소울사이키델릭에서 박춘석, 백영호 등의 <수탉같은 여자> <슬퍼도 떠나주마>등 스탠더드곡으로 변신하며 히트퍼레이드를 이어갔다. 이당시 KBS TV의 30분 스페셜 <패티킴 쇼>는 좋은 반응을 받던 때. 시험삼아 펄씨스터즈로 특별시간을 편성, 3차례 방영했다. 상상을 초월한 시청률에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경쟁방송사인 MBC, TBC. 엄청난 개런티와 조건을 내건 전속계약 쟁탈전으로 비화되며 펄씨스터즈는 감당하기 힘든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이때 터진 <도둑 음반출시>사건. 킹레코드 소속 신중현이 작곡하고 지구레코드 소속 펄씨즈터즈가 노래한 TBC TV 일요연속극 주제가 <나팔바지-유니버샬,KLH9,70년5월>를 킹레코드의 박성배 사장은 가수와 작곡가에게 한마디 언질도 없이 출반했다. 서울을 제외하고 지방배급만을 해버린 음반이 대전공연때 우연히 레코드가게에 들른 펄자매에 의해 발각되자 음반회수여부로 법적대응설까지 나도는 등 소란스러웠다. <나팔바지>는 한국최고의 소울가수 박인수의 첫 녹음곡이라는 희소성과 거침없고 시원한 코러스로 인기가 높은 희귀음반이다. 또한 69년 명동 코스모스홀 펄,신중현 재회의 오작교 <소울파티>공연때 발표했던 10곡이 수록된 <속 님아-유니버샬,KST2,70년11월>도 주목할만한 음반. 가수왕 수상식 사진까지 수록된 볼거리와 더불어 무려 7분이 넘는 사이키델릭 사운드로 무장된 타이틀곡은 전곡에 비해 더욱 절규하는 소울색감을 뽐내며 사랑을 받았다. 71년 여름 오아시스로 또다시 전속을 옮겼다. 이번에는 허벅지가 드러나는 요염한 핫팬티를 선보이며 남성팬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이때 발표한 윤항기곡 <별이 빛나는 밤에>는 MBC 심야음악프로와 이름이 중복되어 타 방송국의 방송거부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이때 터진 배인순과 인기가수 이상열의 염문설은 연예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새벽 드라이브’, ‘해변 데이트’로 뜨겁게 달궈져가던 스캔들은 이상열의 짝사랑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100번째 취입곡인 이봉조의 <사랑의 교실>. 입상은 못했지만 동경국제가요제 본선에 진출하는 영광을 안기며 일본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해 주었다. 72년4월, 구설수를 피해 ‘공부하러 간다’며 잠적하듯 서둘러 일본에 진출한 펄 자매는 모던발레연습과 일본의 유명작곡가 스즈끼 구니히꼬로부터 발성법을 새롭게 배우며 일본정복을 꿈꿨다. 소니 CBS와 2년 계약을 맺으며 일본엔 너무도 흔한 씨스터즈 이름 때문에 <준과 숙>으로 듀엣 명칭을 바꾸어 데뷔를 했다. 일본 데뷔음반은 <달빛에 젖은 꽃> <이젠 만날 수 없어>라는 두곡의 도너츠판이었다. 이중 <달빛에 젖은 꽃>은 5회 신주꾸가요제에서 은상에 입상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73년5월, 일본 국내 히트곡 8곡과 자신들의 오리지널 4곡을 묶어 발표한 첫 독집 <하얀 가랑비의 이야기>는 일본TV, 라디오 등의 열렬한 주목을 받았지만 정상정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절치부심하던 펄 자매는 미국그룹 <루이스>의 권유로 캐나다와 미국 라스베이거스, 뉴욕 등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리랑 등 한국의 민요와 자신들의 히트곡으로 제법 관심을 끌었지만 세계의 벽은 너무 높았다. 76년10월 언니 배인순의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결혼으로 펄씨스터즈는 자동해체되었다. 동생 배인숙은 79월6월 솔로 데뷔히트곡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를 발표하며 가능성을 인정받기도 했지만 82년 재미동포 내과의사 한전수와 결혼을 하며 은퇴, 평범한 주부로 돌아갔다. 미모와 가창력으로 비디오가수 시대를 주도하며 가요의 세계화를 시도했던 펄씨스터즈가 남긴 음악은 여전히 나이든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짙은 향기를 내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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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장충단휴게실 | 글쓴이 : rose of Sharon 원글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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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차말로...많이 들었던 추억의 노래들이지요잉한 번 클릭해서 안되모..한번더 그녀들 정상에 올랐다...정상에서 재벌며눌 되었단 말에 아숩지만...잘 되었네 동생 배인숙이 좀 쓸쓸해 보였는데....배인숙씨는 외국인 의사랑 결혼한 줄 알았다요 세월은 흘렀어도 추억 속의 노래는 이렇게 ..........남아 있네요.
두사람이 교차해서 부르니 더 그런건지 첫사랑 같은 곡은 이태리 원곡보다 더 좋은 거 같습니다. 저 북소리 두근두근을 표현하는 베이스기타음, 첫사랑의 두근거림, 설레임 을 어떻게 음악적으로 저렇게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당시 123살() 무렵의 이 소년이 뿅뿅 갔었으니 ()
뭔지도 모르고 부르고 다녔는데 노래를 들으며 그리운 시절로 돌아갑니다. 몸이 저절로 돌아가고
ㅎㅎ 저도 어린시절 따라부르며부모님 앞에서 춤까지 췄었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