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 동계 정온 고택(명가인가? 흉가인가?)
1. 동계 정온
동계(桐溪)정온(鄭蘊1569~1641)선생은 초계정씨로 이조참판(남인), 기호남인학풍수립에 기여한 학자이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인 것을 비난한 죄로 제주도에 귀향가서 10년을 보내던중 인조반정으로 복권되어 요직을 거쳤다. 병자호란에서 김상현과 함께 대표적인 척화파로 인조가 항복하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거창 북상면 농상리 산속(모리재)으로 들어가 5년 뒤 졸(卒)하였다. 이후 임금들은 청(淸)에 항복한 것을 분하게 여겨 척화파를 충신으로 대접하였다. 주자학은 명분과 예절을 중시하고 부국강병을 외면함으로써 망국의 학문이 되었는데 척화파가 무슨 충신이겠는가.
2. 무신난(戊申亂)과 가계의 몰락
* 권력에서 멀어진 소론과 남인이 주도하여 영조4년(1728년, 무신년)에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려는 무신의 난(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 청주지역은 반란군의 원수 남인 이인좌, 영남(嶺南)은 경상남인 정온의 현손 정희량, 호남(湖南)은 소론 태인현감 박필현이 대장역할을 담당하였고, 평안병사 이사성등이 내통자이었다. 이인좌는 1728.3.15. 기병하여 청주성을 접수하고 한양으로 북상하던중 안성에서 3. 23 오명항이 이끈 관군과 접전을 벌였다가 대패하고 체포되어 현장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정희량은 3.19 거창 안음현(현재 거창 위천면)에서 기병(起兵)하여 합천 조성좌의 도움을 받아 거창 합천 등4개 군현을 석권하고 병력이 7만이라 호언하였으나 4.3 위천면 전투에서 대패하고 현장에서 처형되었다.
* 무신난은 전국적 규모의 반란이었으나 한달이 못되어 진압되고 4.19 오명항이 남대문에서 영조의 영접아래 개선식을 가지므로써 진압이 종료되었으나 남인에대한 숙청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무신난의 결과는 수천명이 희생되고 노론의 장기집권과 거창등 경상우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 정희량은 무신10역적으로 낙인찍히고 두아들은 참형당하고 막내 정철흥은 나이 어린 덕으로 처형을 면하고 제주 추자도로 귀양갔다(이후 1787년 그의 아들 정함이 반란에 연루). 정희량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안씨(큰 아들 정의황의 처)가 교형에 처해지고 동계의 형 정율의 다섯 아들도 절손되고 8촌 정세유 부자등 가까운 친족은 전부 처형되어 양자를 들일 때 직계(直系)후손을 구할 수 없었다.
3. 양자(養子)와 등룡
1738년(영조14년) 정온을 봉사(奉祀)할 후손을 논의 한 끝에 임경업의 예(例)에 따르기로 하고 무후로 요절한 종손 정의호(정희량의 장조카)의 양자로 정계주를 입적시켰다. 정계주는 정의호의 24촌? 조카인데 정온의 진손(眞孫)은 모두 참형또는 유배되어 부득이 방계에서 선정한 것이다.
1764년에는 봉사손을 조정에서 공식등용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1797년 정계주의 손자 정식이 광릉참봉으로 특채되었고 정기필(1800~1860)의 활약으로 부흥하였다. 정조가 정온의 충절을 기린 시를 받아 현판에 새겨두고 있다. 그러나 정계주는 정온이 소론인 것을 망각하고 노론행세를 하였으며 7세종손 정태균은 동학란을 진압하려온 일본군에게 동계고택을 막사로 제공하고 일제아래에서 중추참의등 친일반역자로 호의호식했다. 의친왕은 정태균과 친분이 있어 두달간 동계고택에 머문적이 있다.
4 고택건축
무신난은 경상우도(낙동강 동쪽지역인 성주 거창 등)에서는 무신혁명으로 부르고 반란군의 명예회복을 기리는 비석(碑石)을 세우는데 반면에 진압공로를 인정받아 양반행세를 하던 쪽은 진압 공적을 새긴 비석을 세워서 상반된 비석이 뒤섞여 있다. 동계고택은 무신난이후 10년이상 폐허로 있다가 양자 정계주가 물러받고 증손 정종필(1797~1821)이 1820(순조20년) 본가 대지에 재건축했다. 이때 고택 뒤에 사당역할을 하는 종택을 지었다. 무신난 때 적몰된 전답1만4천평을 1819년 되돌려받아 재력이 있었다.(고죽 네이버 브로그 무신난일지를 참조함)
5. 명가인가, 흉가인가?
* 발복을 기준으로 본다면 동계선생은 현손 정희량의 반란실패로 인하여 수십명의 후손이 처형(심지어 부인2명도도 교형)당하고 진손이 전멸지경에 이르렀는데 명당이라면 이런 화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계후손에게는 흉지이다. 그러나 양자입양된 자식들은 동계선생 봉제사덕으로 능참봉도하고 재산도 취득하여 잘 살고 있으니 동네길지급은 된다. 길손들은 동계선생의 아픈 역사를 모르고 “충신의 제사를 끊지 않으려고 자식하나는 살려두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간다.
* 풍수상으로는 어떤가?
남덕유ㅡ금원산 ㅡ모리산 ㅡ성령산의 경로를 거쳐서온 말락지이다. 래룡이 힘차고 물이 잘 둘렀다. 들판이 모두 혈처의 재산이다. 중등중급의 비룡음수형인데 고택은 생기가 내려온 곳을 지나고 만궁된 곳도 지나서 자리를 잡았다. 만궁된 곳에 있는 몇 집은 밖에서 보아도 잘사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더라.(2023.10)
* 고택 소국---
* 고택 모습---
*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