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何生何死(하생하사)
何:어찌 하, 生:날 생, 死:죽을 사.
어의: 태어나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 것은 무엇인가? 신라의 고승 원효에게서 유래한 말로, 인간의 생사에 대해
서 자문자답하는 말이다. 인간 삶의 허무함을 빗대어 쓰인다.
출전: 삼국유사(三國遺事)
원효(元曉.617~686)는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39년(617년) 때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押梁.상주)에서 내마(柰麻) 벼슬에 있던 담날(談捺)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설(薛)씨이고, 아명은 서당(誓幢)이며, 원효는 법명이다.
그는 어린 시절 청소년들이 가장 우러러보는 화랑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다.
서당의 어머니는 서당을 낳기 전날 밤 별 하나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압량의 북쪽 제단에 기도를 드리고 돌아오다가 밤나무 밑에서 서당을 낳고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때문에 서당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서당은 체격도 당당할 뿐만 아니라 총명하고 인물도 좋아 모두들 장차 큰일을 해낼 거라고 칭찬했지만 정작 본인은 ‘죽음은 무엇이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인생문제에 골몰했다.
서당이 화랑으로 뽑혔을 때 가족들은 설씨 집안에 경사 났다며 잔치까지 베풀어 축하를 해주었지만 자신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결국은 죽고 마는 것을, 뭇 때문에 으뜸이 되려고 발버둥치고, 좀 더 많이 알고자 밤을 새워 글을 읽는 것일까? 나도 그렇다. 내가 화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저들보다 나은 게 뭐 있다고 떠받침을 받으며 우월감을 갖는가?’
서당은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 때마다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 그 앞에 엎디어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등 뒤에서 방울 소리가 들리더니 한 노승이 지팡이를 짚고 올라왔다.
“젊은이, 보아하니 화랑인 듯한데, 그 무덤 속에 누가 묻혔소?”
“네, 제 어머니입니다.”
노승은 말소리를 죽여 소곤거리듯이 물었다.
“젊은이는 그 속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신다고 믿나?”
“예. 그렇습니다.”
“어허, 안타깝도다. 어머니는 거기에 계시지 않네.”
“그렇다면 어디에 계십니까?”
“그걸 알려면 우선 불교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네. 인간이 죽고 사는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어머니가 계신 곳을 알게 될 걸세.”
서당은 늘 품어왔던 의문을 풀 수 있다니 귀가 번쩍 띄었다.
“삶의 의미를 알게 되면 어머님이 계신 곳을 알게 됩니까?”
“물론이지, 어머니가 계신 곳뿐만 아니라 만날 수도 있지.”
“네? 그게 진정입니까? 그렇다면 기꺼이 불교에 제 몸을 맡기겠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하여 서당은 자기 발로 황룡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원효란 법명을 받아 스님이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恨無二蛙(한무이와)
恨:한탄할 한, 無:없을 무, 二:두 이, 蛙:개구리 와.
어의: 개구리 두 마리가 없는 것이 한이다. 즉 뇌물로 줄 물품이 없어 한스럽다는 말로 부패함을 꾸짖는 말이
다.
출전: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선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방과.1357~1419)가 나중에 보위에 오르니 바로 2대 정종이다. 정종은 어진 정치를 펴기 위해 자주 대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의 사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특히 매관매직과 탐관오리들을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종이 하루는 평복을 입고 성 밖의 한 동네를 지나다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싸리문에 붙어 있는 ‘오한평생무이와(吾恨平生無二蛙)’라는 글씨를 보았다. 정종은 옆에 있는 신하에게 물었다.
“저게 대체 무슨 뜻인고?”
“글자대로 새겨 보면 ‘내 한평생 개구리 두 마리가 없는 것이 한이로다.’ 라는 뜻이온데, 그 속에 무슨 사연이 있는 듯하옵니다.”
두 사람이 문 앞에서 서성이자 한 늙은이가 나와 물었다.
“뉘신지요?”
“지나가는 과객인데 잠시 쉬어 가도 괜찮겠소?”
“예! 마루 위로 오르시지요.”
정종은 마루 위에 올라 집주인과 마주앉자 먼저 말을 꺼냈다.
“주인장, 저 싸리문에 붙여놓은 글이 무슨 뜻이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제 생각대로 써놓은 것입니다.”
“그래도 무슨 뜻이 있는 듯한데, 말해 보시오!”
정종이 재차 되묻자 늙은이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꾀꼬리, 뻐꾸기, 따오기가 논두렁에서 만났습니다. 이들은 서로 제 목소리가 제일이라고 자랑했으나 결판이 나지 않자 부엉이에게 판결을 해달라고 부탁했지요. 다음 날, 따오기는 논고랑에서 개구리 두 마리를 잡아서 부엉이에게 갖다 주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판정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부엉이는 그들의 목소리를 다 들어보고 ‘꾀꼬리는 소리가 좋긴 하지만 간사한 여자 목소리 같고, 뻐꾸기도 소리는 좋지만 너무 구슬프고, 따오기는 소리가 거세긴 해도대장부 소리 같아서 제일이다.’ 하고 판결했답니다.”
정종은 그제야 집주인이 가난해서 벼슬을 사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벼슬을 주고 싶어서 말했다.
“주인장, 우리는 지금 과거 보러가는 길인데 함께 가지 않겠소?”
“가봐야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의 들러리만 서게 될 테니 헛일이지요. 당신들도 돈이 없으면 아예 가지 마시오!”
“그런 것은 우리가 해결해줄 테니 걱정 말고 함께 갑시다.”
집주인은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런데 과거를 본다고 해서 가보니 시제가 기이하게도 ‘개구리 와(蛙)’자가 나왔다. 집주인은 일필휘지로 ‘오한평생무이와(吾恨平生無二蛙)’라고 써서 제출했다. 그가 장원급제를 하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는 벼슬길에 올라 평생의 소원을 성취했고, 정사를 잘 보살펴서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恨比辱强(한비욕강)
恨:한할 한, 比:견줄 비, 辱:욕될 욕, 强:힘쓸 강.
어의: 원한 보다 욕이 낫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여 원한을 사는 것보다 화풀이로 하는 욕설을 듣는 것이 차
라리 낫다는 뜻. 남에게 원한이 될 일을 경계하라는 교훈이다.
출전: 지장집략(誌狀輯略). 한국의 인간상(韓國의 人間像)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냈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 조정에서 일을 마치고 퇴궐하는데 어염집 아녀자가 아무 예도 갖추지 아니하고 이항복의 앞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무엄하도다. 감히 정승영감 행차이신데 앞을 가로질러 가느냐?”
수행하던 하인들이 그 여인을 잡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여인은 입술이 터져 흐르는 피를 손으로 닦으며 하인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인들은 여인을 거칠게 길 밖으로 내몰고 다시 가마를 출발시켰다.
집에 도착한 이항복은 하인들을 모아놓고 훈시를 했다.
“집에 오는 길에 길 가던 여인을 내동댕이친 것은 너희들의 큰 잘못이다. 아무리 예의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조용히 말하여 비켜서게 할 것이지, 어지 힘없는 아녀자를 다치게 하였느냐? 앞으로는 각별히 조심하도록 하여라.”
그런데 뒤쫓아온 여인이 대문 앞에서 악을 썼다.
“머리 허연 늙은이가 하인들을 시켜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어서 나와 나를 치료하거라, 도대체 당신들이 뭐길래 힘 없는 백성에게 이렇게 주먹질을 한단 말이냐?”
한낱 보잘 것 없는 여인이 정승을 모욕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였다.
“대감님. 잡아다가 단단히 버릇을 고쳐 놓겠습니다.”
“아니다. 그냥 두어라.”
하인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항복을 쳐다보았다.
“대감님. 저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당장 잡아다가 …….”
“조용히 하고 너희들은 그만 물러가도록 하여라.”
이항복은 하인들을 물리치고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손님들이 이항복에게 물었다.
“저 여인이 도대체 누구한테 저렇게 험한 말을 하는 겁니까?”
“머리 허연 늙은이가 나밖에 더 있소?”
“그럼 당장 잡아들이지 왜 그냥 두십니까?”
이항복은 잔잔히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내가 잘못했으니 욕설을 듣는 것은 당연하오, 저 여인은 가슴에 맺힌 화를 저렇게라도 풀어야 나에게 원한을 갖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대감의 체면이 뭐가 됩니까?”
“남에게 못할 짓을 해서 원한을 사는 것보다 잠시 욕을 먹는 것이 훨씬 낫지요.”
사람들은 그제서야 이항복의 너그러운 인품에 고개를 숙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海東孔子(해동공자)
海:바다 해, 東:동녘 동, 孔:심히 공, 子:아들 자.
어의: 고려시대 문인 최충의 별호로서, 문장과 학문을 비롯하여 다방면으로 뛰어난 사람을 이른다.
출전: 해동공자최충소고(海東孔子崔沖小考)
고려 제11대 문종(文宗) 때 사람, 최충(崔沖. 984~1068)은 자는 호연(浩然), 본관은 해주(海州)로, 현종(顯宗), 덕종(德宗), 문종(文宗) 삼대에 걸쳐 벼슬에 올랐으며 의결기관의 최고 수장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추앙되었는데 1047년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는 법률관들에게 율령(律令)을 가르쳐 고려 형법(刑法)의 기틀을 만들기도 했다. 또 1050년에는 서북면 병마사가 되어 흉년에 부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부역을 면제시켜 주기도 했으며, 퇴임한 후에는 후진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가 우매한 백성들을 교육하고자 학당을 여니 글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래서 학도들을 위해 새로 아홉 개의 글방을 더 지으니, 이는 각각 공부하는 내용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이라 불렸다.
당시의 일반적인 교육은 문학 방면에만 중심을 두어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만을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구재학당은 그런 폐단에서 벗어나 여러 방면의 인격을 닦는 데 힘썼다. 그러니까 인격도야라는 확실한 교육 목표를 가지고 교육을 했던 것이다.
또한 학습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무더운 여름에는 조용한 절방을 빌려서 공부를 시켰다. 때로는 고관이나 유명한 선비들을 초청하여, 초에다 금을 긋고 그곳까지 촛불이 타는 사이에 시를 읊도록 하는 각촉부시회(刻燭賦詩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구재학당은 날로 번창하여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곳에서 배운 사람들이 인품도 훌륭하고,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숫자도 많아지자 유학자(儒學者)들도 다투어 그와 같은 사숙(私塾.글방)을 차렸다. 그러니까 사숙은 일종의 사립 학교였고, 사숙을 차린 사람들은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거나 학문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사숙은 전국적으로 11개소나 되었으며, 사학을 12공도(公徒)라 불렀는데, 그 중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리는 최충의 학당이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했다. 12공도는 나중에 유학 중심의 단체가 되어 안향(安珦)에게 계승되었고, 안향은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여 학문발달과 인격 도야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에 반하여 공립 교육기관인 관학은 매우 부진하였다. 국가 시책에 따라 불교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최고의 교육기관인 국자감마저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거란 등 외적의 침입이 잦아 교육기관이 많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최충의 이러한 시도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그가 살았을 때는 물론이고, 세상을 떠난 다음까지도 인기가 이어져 문헌공도는 날로 번창하였다. <고려사>에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학교는 최충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충은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그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그를 기려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解髮携琴(해발휴금)
解:풀 해, 髮:터럭 발, 携:끌 휴, 琴:거문고 금.
어의: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껴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도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자 그를 비관하여 머
리를 풀고 거문고를 끼고 산으로 들어간 물계자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세상 일의 허무함을 한탄하는 의미
로 쓰인다.
출전: 삼국사기 열전 제8 물계자
신라 제 10대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재위.195~230) 때 장군 내음(㮈音)의 수하에 물계자(勿稽子)라는 군사가 있었다. 그는 인품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커서 작은 일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당시 팔포상국(八浦上國)들이 연합하여 아라국(阿羅國. 가락국,김해)을 점령하려 하자 아라국에서는 신라로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이사금이 손자 내음을 시켜 물계자와 함께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8국의 군사를 물리치게 했다.
이 전쟁에서 물계자는 큰 공을 세웠으나 내음은 그의 공로를 밝힐 경우 자신의 공적이 깎일 것을 염려하여 그의 공을 품신하지 않았다. 그러자 물계자의 친구가 물계자에게 말했다.
“자네는 공이 막대했는데 인정해주지 않으니 억울하지 않은가?”
그런데 물계자의 대답은 의외로 담담했다.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구하는 것은 지사가 취할 바가 아니네, 다만 뜻을 이룸에 힘쓰며 뒷날의 때를 기약함이 장부가 취할 바일 것이네.”
3년 후, 또다시 골포(骨浦. 창원), 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 등 3국 사람들이 갈화성(竭火城)을 침공해 오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물리쳤다. 물계자는 이 싸움에서도 수십여 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으나 포상할 때 또 빠졌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다.
“신하의 도리는 나라가 위급한 것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거늘 전일 포상과 갈화의 어려운 싸움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이를 어찌 최선을 다했다 하겠으며 무슨 면목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겠소?”
인간사의 허무함을 느낀 그는 머리를 풀고 거문고 하나만을 들고 사체산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幸州大捷(행주대첩)
幸:다행 행, 州:고을 주, 大:큰 대, 捷:이길 첩.
뜻: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과 싸워 크게 물리친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을 성공적으
로 이루는 경우를 이른다.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한국(韓國)의 인간상(人間像)
권율(權慄.1537~1599)은 호가 만취당(晩翠堂)이고,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그는 임진왜란 초기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공을 세우고, 그 공로로 전라도 순찰사(巡察使)가 되었다. 그런데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자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수원 독산성에 도착, 명군(明軍)과 합세하여 한양을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명장 이여송(李如松)이 벽제관 싸움에서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들어갔다.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군의 한강 강안에 있는 외딴곳의 산성으로, 동쪽은 준험하고, 서북쪽은 평야와 접해 있다.
병사 선거이(宣居怡)는 군사 4천여 명을 이끌고 금주(시흥)에서,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은 강화에서, 충청감사 허욱(許頊)은 통진(通津.김포)에서 지원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권율의 군사는 만여 명에 불과했으나 결사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한편 왜군은 벽제관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자 일거에 행주산성까지 빼앗고자 선조 26년(1593년) 2월 12일 새벽, 병력 3만여 명으로 공격해왔다.
이에 권율의 군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적군이 가까이 육박해 오기를 기다렸다가 화살과 돌을 퍼부어 왜군에게 크게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적군은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끈기 있게 공격해 왔다. 적군의 함성과 총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탄환은 비 오듯 쏟아졌다. 권율은 손수 물통을 들고 병사들의 목마름을 달래주면서 항전을 독려했다.
왜군은 9차례에 걸쳐 공격을 가해 왔다. 권율은 최선을 다하여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부녀자들까지도 긴 치마를 짧게 잘라 입고, 그 치마폭에 돌을 날라 투석전을 벌였다. 이때부터 부녀자들이 앞에 두르는 짧은 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왜군은 진퇴를 거듭하다 불리해지자 마지막 방법으로 마른 풀을 묶어 불을 질러 성책을 태우려 했다. 그러자 성에서는 물을 끼얹어 이를 진화했다.
그러나 서북쪽의 외성이 무너져 왜군이 돌격해 들어오니 승병은 내성까지 후퇴해야 했다. 이에 권율 장군이 직접 칼을 빼들고 앞장서서 왜병을 베며 독전한 결과 왜군은 대패하여 달아났다. 이때 적은 후퇴하면서 자기편 군사의 시체를 쌓아놓고 불태운 후 돌아갔는데, 타는 냄새가 십 리 밖에까지 뻗쳤다.
권율은 계속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인 우키타(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이시다(石田三成.석전삼성), 요시가와(吉川廣家.길천광가) 세 장수에게도 큰 부상을 입혔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의 삼대첩(三大捷) 중의 하나였는데 권율은 그 공으로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이때 이여송의 명군은 왜군이 서울을 점령하면 그때 치기 위해서 개성에 대기하고 있었다.
행주산성에서 대승한 권율과 김명원(金命元) 등이 거느리는 조선군은 고양, 파주 등지에서 왜군의 보급로를 끊었고, 이순신의 수군은 해상에서 일본 수륙군(水陸軍)의 연락을 차단시켜 전세는 차츰 왜군에게 불리해졌다. 게다가 유성룡(柳成龍)이 명나라 장수 사대수(査大受), 이여매(李如梅)와 군사를 이끌고 용산에 쌓아 둔 적의 군량 10만 석을 모두 불태우니 왜병들은 더욱 곤경에 빠졌다. 거기다가 전염병까지 돌아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으므로, 그들은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퇴각했다. 이때 이여송이 그들의 뒤를 추격했더라면 커다란 전과를 거둘 수 있었으나 그는 벽제관 싸움에서 혼이 난 후로는 겁을 먹고 싸움을 피했기 때문에 왜군은 완전히 철수하여 남쪽 해안지대에 진을 칠 수 있었다.
행주산성은 권율의 행주대첩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사적 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好奇守國(호기수국)
好:좋을 호, 奇:기이할 기, 守:지킬 수, 國:나라 국.
뜻: 호기심이 나라를 지키다. 고려 말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에게서 유래했으며, 작은 일이 원인이 되어 큰일을
해낸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韓國)의 인간상(人間像)
고려 말, 화약을 제조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최무선(崔茂宣.1326~1395)은 송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고 탐구심이 강해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양반 가문이었으므로 어른들은 무기(武器)에 대해 관심을 갖는 무선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해 설날, 무선은 궁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광경을 보고는 크게 놀라 아버지에게 물었다.
“저 휘황찬란한 불꽃은 무엇으로 만들었지요?”
“저건 원나라에서 가져 온 화약을 터뜨리는 거란다.”
“그걸 왜 원나라에서 들여와야 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기 때문에 비싼 값으로 사온단다.”
순간 무선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결심이 솟구쳐 올랐다.
“화약 만드는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거라면 내가 알아내겠다.”
무선이 여러 가지 책을 뒤져 보아도 화약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한 책은 없었다. 그래서 중국말을 배워 원(元)나라로 건너가 기술을 배우기로 마음먹고 출발했다. 그러나 타국에서 화약 만드는 비밀을 캐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다 그 기술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며, 설사 안다 하더라도 그런 비밀을 쉽게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무선은 갖은 고초 끝에 이원(李元)이라는 화약 만드는 기술자를 집에 모셔와 마침내 염초(焰硝.화약)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듯이, 꺾일 줄 모르는 그의 집념과 노력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됐다.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고 화약을 만들어 낼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하자고 하자.”
그러나 이 건의는 대신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과학 기술에 대한 무지의 탓이기도 하지만 국가적 기밀을 감히 어떻게 알아내겠느냐며 무선을 믿지 않았다. 무선은 뚝심으로 설득하여 마침내 1377년 10월, 화통도감 설치를 허락받고 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무선은 마침내 대포를 만들어 왕과 중신들이 보는 가운데 시험 발사를 해보였다. 땅을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뻘건 불길이 하늘을 날더니 강 건너에 있는 집을 한 방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자 모두들 탄성을 올렸다.
그 무렵 왜구들의 행패는 날로 심해져, 1350년(충정왕 2년)에는 충청도와 경기도는 물론이고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의 해안 지방을 침범하고 재물을 약탈해 갔다. 그럴수록 최무선은 전함과 대포 만드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1380년 8월, 왜구의 무리가 백 척도 넘는 전함을 몰고 전라도와 충청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나라에서는 심덕부(沈德符)와 최무선에게 그들을 격퇴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최무선은 백여 척의 배에 대포를 싣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 전투를 벌였다.
바다에서는 패배를 모른다고 기고만장하던 왜구는 고려의 군함이 다가오자 저마다 칼을 뽑아들고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최무선은 지휘검을 높이 쳐들고 찌렁찌렁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발사!”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왜구의 배가 단번에 폭발하며 차례차례 수장되기 시작했다.
대포로 공격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왜구는 당황하여 갈팡질팡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대포의 위력은 최무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커서 왜구의 배들은 삽시간에 전멸했다.
나라에서는 최무선을 공신으로 추대하고 높은 벼슬을 내렸다.
1383년, 왜구는 복수를 하겠다며 다시 1백20여 척의 배를 몰고 남해로 밀려왔으나 최무선은 전함 47척을 이끌고 나아가 또다시 깨끗하게 물리쳤다. 거함이 대포 한 방에 산산조각이 되어버리니 왜구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기세가 오른 최무선은 1389년 2월, 조정의 승인을 받아 1백 척의 군함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여 3백 척의 왜구 전함을 몽땅 불살라 버렸다. 이로써 왜구는 고려 침공을 꿈꾸지 못하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虎來哺乳(호래포유)
虎:범 호, 來:올 래, 哺:먹일 포, 乳:젖 유.
뜻: 호랑이가 젖을 먹여 주다. 견훤이 강보에 싸여있을 때, 범이 와서 젖을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크게 될 사람은 짐승도 알아보고 도와준다는 뜻.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10
견훤(甄萱.867~935)은 신라 상주의 가은현 사람으로 서남해 방위에 공을 세워 裨將이 되었다. 견훤은 비장의 지위를 이용해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892년 반기를 들고 여러 성을 공략, 900년에는 완산주(完山州.전주)를 도읍으로 정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칭했다. 그는 본래 성이 이씨(李氏)였으나 뒤에 견씨(甄氏)로 바꾸었다. 그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부였으나 견훤의 후광에 의하여 나중에 장군이 되었다.
견훤이 아주 어렸을 때의 일로 태어나 강보 속에 있을 때 아자개가 밭을 갈러 나가니 어머니는 견훤을 숲 속에 뉘어두고 밥을 가지러 갔다. 그 사이 견훤이 배가 고파 울자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여 주었다. 고을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거라고 했다.
견훤이 장성하니 체격과 용모가 장대하고 기이하며 지략이 남달리 뛰어나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뜻을 세우고 종군하여 서남해의 방술병(防戌兵)으로 나가 있었는데, 잠잘 때도 무기를 베고 적을 경계함에 소홀함이 없이 언제나 모범이 되었다. 그런 철저한 경계로 빈틈이 없자 적은 그런 소식을 듣고 물러났으며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견훤의 지위가 높아지고 그를 따르는 무리가 그에게 충성할 때 신라의 정세는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진성여왕(眞聖女王) 6년, 아첨꾼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농락하니, 기강이 해이해지고, 기근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려 먹을 것을 찾아 헤매었으며, 도둑 떼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나라를 세울 야심을 품고 사람을 모아 서라벌의 서남쪽 주(州)와 현(縣)을 공격하니 그가 가는 곳마다 호응하는 사람이 많아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했다. 그러자 그는 완산주(完山州:전주)를 점령하여 스스로 왕이 되어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중국과도 국교를 맺고, 후고구려의 궁예(弓裔)와 세력을 다투며 판도를 확장해 나갔다. 또 고려의 왕건(王建)과도 자웅을 겨뤄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령했다.
926년에는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이 고려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알고 경주를 함락시킨 후 그를 자살하게 하고, 후임으로 경순왕(敬順王)을 추대했다. 그러나 929년 왕건과의 싸움에서 패한 후 점점 몰락해가자 유능한 신하들이 왕건에게 투항했다. 그러는 중에 왕위 게승 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劍)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했다. 그리고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 자신이 세운 나라를 스스로 멸망하게 하는 비운의 왕이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첫댓글
何生何死 ! 심오한 철학이 담긴 내용에 삶의 의미를
반추해봅니다.
의미있는 삶의 지표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