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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자서전/시민의 불복종(2002.11.26.)
간디 함석헌 역 /도로우 장기홍 역
삼성출판사 1982년
모한다스 간디_인도의 정치가 법률가 독립운동지도자. 통칭 마하트마(위대한 넋) 간디라 불린다. 그는 몸소 민중의 선두에 서서 단식을 무기로 인도 국민회의파를 강력히 결속하고, 농민 노동자계급의 자각과 생활 확보를 진흥시켜 인도 민중사회의 자립과 해방의 정치적 사회적 지반을 이룩했다. 부정과 침략과 민족적 불평등에 대한 간디의 철저한 무저항주의의 저항과 그 승리는 세계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로로우_그는 에머슨과 함께 미국 콩코오드파의 사상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철학자. 그는 워얼든 호반에 파묻혀 개인주의에 입각한 철저한 자족생활을 표방, 실천하는 한편 그러한 사상을 강연이나 저서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전개시키려고 노력했다.
옮긴이의 말
간디 자서전을 옮기면서
나는 내가 하지는 못하면서도 남을 나무라기는 잘한다. 칼릴 비브란의 예언자를 읽고는 왜 이날껏 이 예언자를 번역한 사람도 하나 없었느냐 하고, 바가바드 기타를 얻어 들고는 이런 보배를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알려주지 않았을까 했다. 내가 나무라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재지가 없으니 나은 선배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 간디의 자서전도 그렇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외국 인물로서 일반 사람에게 가장 존경받는 것은 간디 아닐까? 그런데 3.1운동 이후 그렇게 좋아하는 간디인데 어째서 그 전기는 해방이 될 때까지 하나도 번역된 것이 없었는지 모른다. 나라가 씨ᄋᆞᆯ에게 있는 줄 알고, 씨ᄋᆞᆯ을 깨워 주고 길러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요,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이라면, 글을 배운 책임을 하기 위해서라도 씨ᄋᆞᆯ들에게 간디를 스승으로, 친구로 소개해주었어야 할 것인데 아니했다. 생각해 보자, 해방 전에 공산주의자들이 방방곡곡을 파고들어 쑤셨듯이 ,간디의 사상과 투쟁 방법을 그만큼 씨ᄋᆞᆯ에게 알려 주었더라면 일이 어떻게 됐겠나? 붉은 군대가 북한 사람을 속이려고 할 때에 가장 먼저 한 일이 조만식 선생을 내세우며 조선의 간디라고 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무슨 뜻인가? 자기네와는 1백80도 반대 방향의 간디인데 왜 그 이름으로 조선생을 내세웠을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조선놈을 잡으려면 조선놈의 심정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우리는 도리어 그렇게 못했는데 우리 대적은 간디주의를 내세우면 조선놈은 다 속일 수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간디의 길은그만큼 우리에게 들어맞는 길이었다. 그런데 아까울손, 그것을 우리가 못했다는 말이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소리지, 남을 나무랄 것 있겠는가, 나를 채찍질해야지. 겨우 1958년에 와서야 간디연구회란 것을 몇이서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5월 서리를 맞았다. 그러나 이상기후를 탓해도 소용 없고, 생명은 제 책임을 제가 만들어 지는 거다. 내가 했어야 할것인데 약했다. 지금 와서야 솔직히 하는 고백이지만 모든 책임은 내게 있었다.
아번에 삼성출판사에서 간디 자서전과 도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을 한권으로 만들어 낼 것을 계획하면서 그번역을 부탁해 왔기 때문에 첫마디에 응했다. 이제는 간디가 유명은커녕 잊혀지려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 사양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번역에 몰두할 수 없었다. 그때 다른 것은 별로 없으나 걱정되는 것이 둘이 있었다. 하나는 병석에 누ㅜ어 7년 동안 몸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언제나 한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하는 늙은 아내요. 그 다음은 약속해 논 간디의 자서전이었다. 다행히 일이 잘 풀려 일을 할 수는 있었으나 너무 늦어서 삼성출판사에 대해 미안하기 짝이 없다.
도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을 옮기면서
도로우의 이름을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우찌무라 선생의 강의를 통해서였다. 역시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인물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깊은 이가 소개해 주는 것이므로 보통 생각의 사람이 아닌 줄은 알고, 어느 때 가서는 읽게 될 것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그때 당장 도로우를 읽지는 못했다. 정말로 도로우에 흥미를 가진 것은 도리어 간디를 통해서였다.
그래서 간디 연구회를 시작했을 때 제1착으로 한 것이 도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일반에 보급시키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모든 것이 불편했고 돈도 없었으므로 프린트로 해서 내기로 했고, 그 사무를 염낙준씨가 담당하기로 했는데 그 번역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 지금 경북대학에 지질학 교수로 있는 그때는 아직 연구생이었던 장기홍 군이었다.
차례
옮기는 사람의 말
해제_간디의 사상과 비폭력운동
1 문제제기
150만의 병원과 3억 파운드의 군사비를 제공하여 1차대전 수행에 적극 협력한 인도에 대한 전후 영국의 보답은 무엇이었는가? 빵이 아니라 돌이었다. 자치부여의 공약이행이 아니라 민족운동에 대한 새로운 탄압, 즉 로울래트법과 아므리차르 대학살이었다.
어긋난 기대 속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인도 민중의 가슴속에서 북받쳐 오르고, 쓰디쓴 굴욕감이 납덩어리처럼 인도 민중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전능의 괴물한테 사로잡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듯이 보였다. 수족은 마비되고 정신은 무감동이었다.고 내루는 그의 인도의 발견에서 당실을 기막힌 심정으로 회고하고 있다. 사실 오랜 세월에 걸친 가차없는 착취로 인하여 민중의 빈곤은 날로 더해갔고, 민중의 활력은 갈수록 메말라들고 있었다.
침체와 무기력, 절망감과 허탈의식 속에서 헤매던 인도민중을 이토록 각성시켜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전진하도록 발동을 건 간디, 그는 과연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사상은 무엇이며 또 그런 사상은 어떻게 실천에 옮겨졌을까?
2 기본 사상
한마디로 그것은 아힘사: 사랑 내지 비폭력의 교의에 입각하는 사탸그라하 운동을 통해서였다.
간디가 그의 아힘사라는 교의를 인도에 가져온 이래로 그것은 줄곧 전 인도를 지배해 왔다고 논한 후 네루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인도의 정치적 및 사회적 생활에 커다란 역할을 다하고, 또한 널리 세계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교의 그 자체는 물론 인간의 사상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었지만, 그것을 대중적인 규모로 정치 및 사회운동 당초에는 그것은 개인에 관한 문제였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는 종교적인 문제였다. 간디는 이 개인적인 이상을 사회적인 이상으로 높이려고 애썼다. 그것으로 정치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을 변경하려고 하였다. 라고
간디는 철두철미한 실천의 인간이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인도인의 복지향상을 위해 그는 한시라도 실천활동을 그만 둔 일이 없었다.
3 실천방법
1)새 교육
유용한 공작뿐 아니라 일반교육의 교수요목에 포함되는 모든 과목을 가르치기를 원했다.
2)건설적 프로그램
인도가 직면하고 있고 또한 인도가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기 전에 해결해야 하던 온갖 정신적, 사회적 및 경제적 문제를 포함시키고 있었다.
3)사탸그라하
상대방을 해치거나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마음과 기사도정신을 가지고 스스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상대방의 양심을 찔러 상대방으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과 인간적인 감정을 환기시키려는 데 있다.
4)간디주의의 평가
간디는 많은 면에서 인도에 혁명적인 변혁을 가져오게 했고, 또한 그의 비폭력의 유훈은 부단:그라므단 운동의 지도자 비노바 브하베를 비롯하는 정통파 간디주의의 건설적 프로그램 운동자들에 의해 충실하게 지켜져 그의 비폭력의 정신은 여전히 인도에 살아 남아 있지만, 그 정신은 단지 인도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세한 폭력에 대한 비폭력 투쟁은 지난날 식민지 피억압민족의 해방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거니와, 그것은 오늘날에도 각국의 인종차별 반대운동의 지도자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로망롤랑은 간디야말로 3억의 민중을 궐기시켜 대영제국을 진감시키고 거의 2천년 이래 인류의 정치에 제일 강력한 운동을 도입한 인물이라 평했지만 근자에도 아아놀드 토인비는 20세기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간디라는 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M.K.간디 간디 자서전
영문번역자의 머리말
머리말
제1편
1 태어남과 그 집안
2 어린 시절
3 조혼
4 남편 노릇
5 중학교에서
6 비극 1
7 비극 2
8 도둑질과 속죄
9 아버지의 돌아가심과 내 이중의 수치
10 종교의 어렴풋한 모습
11 영국에 갈 준비
12 계급에의 쫓겨남
13 마침내 런던에
14 나의 선택
15 영국신사 행세
16 변경
17 섭식의 실험
18 방패가 된 나의 수줍음
19 부진실의 암종
20 종교인들과의 교제
21 니르발라 케 발라 라마
22 나라얀 헴찬드라
23 대박람회
24 면허-그리고는?
25 나의 무력
제2편
1 레이찬드바이
2 어떻게 생활을 시작했던가?
3 첫 번 소송사건
4 첫 번 받은 충격
5 남아프리카로 갈 준비
6 나탈에 도착
7 몇 가지 경험
8 프리토리아로 가는 길
9 고난은 아직도 더
10 프리토리아의 첫날
11 기독교도와의 교제
12 인도인과의 접촉을 찾음
13 쿠울리의 신세
14 소송의 준비
15 종교심의 발효
16 모사는 재인, 성사는 재천
17 나탈에 정주
18 유색인 변호사
19 나탈 인도 국민의회
20 발라순다람
21 3파운드의 세금
22 종교의 비교연구
23 살림을 차리다
24 본국으로
25 인도에서
26 두 가지 열망
27 봄베이 집회
28 푸우나와 마드래스
29 곧 돌아오다
제3편
1 폭풍우가 다가오는 소리
2 폭풍
3 시험
4 폭풍 다음의 평온
5 자녀교육
6 섬기는 정신
7 브라이아차랴 1
8 브라아마차랴 2
9 소박한 생활
10 보어 전쟁
11 위생개량과 기근구제
12 인도로 돌아오다
13 다시 인도에서
14 서기와 하인
15 국민의회 개회
16 쿠르존경 접견회
17 고칼레와 같이 지낸 한 달 1
18 고칼레와 같이 지낸 한 달 2
19 고칼레와 같이 지낸 한 달 3
20 베나레스에서
21 봄베이에 자리잡을 것인가?
22 시련에 처한 신앙
23 다시 남아프리카로
제4편
1 사랑의 헛수고
2 아시아에서 온 귀족
3 모욕을 참고
4 다시 살아난 희생정신
5 내성의 결과
6 다식주의에 특성됨
7 흙 물 지료법의 실현
8 경고
9 권력과의 대결
10 거룩한 회상과 재회
11 유럽인과의 친밀한 교제1
12 유럽인과의 친밀한 교제2
13 인디언 오피니언
14 쿠울리구성서이냐 게오투냐?
15 흑사병 1
16 흑사병 2
17 불길에 싸인 쿠울리귀성
18 책의 매력
19 피닉스에 정착
20 첫날 밤
21 모험에 뛰어든 폴라크 씨
22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사람
23 가정을 들여다 봄
24 줄루 반란
25 혼의 탐색
26 사탸그라하의 탄생
27 식이실험을 계속함
28 카스투르바이의 용기
29 가정에서의 사탸그라하
30 자제를 향하여
31 단식
32 교장으로서
33 학문 교육
34 정신훈련
35 밀밭 속의 가라지
36 참회로서의 단식
37 고칼레를 만나러
38 대전중의 나의 역할
39 정신적 딜레마
40 축소형 사탸그라하
41 고칼레의 비극
42 늑막염 치료
늑막염이 낫지 않아 걱정이 됐다. 그러나 치료는 약을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변경하면서 외적인 치료를 겸해야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알린슨 의사를 찾아갔다. 그는 이름난 채식주의자로서 음식 변경으로 병을 치료하는 분이었는데 나는 1890년에 그를 만났었다. 그는 나를 빈틈없이 검사했다. 나는 그에게 우유를 안 먹기로 맹세했다는 말을 했다. 그는 나를 격려해 주면서 이와 같이 말했다. 우유를 잡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은 얼마 동안은 기름기 있는 것을 잡수시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는 검은 빵과 근대, 무, 양파, 그밖의 구근류 같은 생채소와 신선한 과일, 특히 오렌지를 먹으라고 했다. 채소는 익히지 않은 날 것을 먹되 씹을 수 없거든 잘게 썰어서 먹으라고 했다.
43 본국으로
44 변호사 시절의 추억
45 사기변호인가?
46 사건 의뢰인이 협력자가 되다
47 한 사건 의뢰인이 구조된 이야기
제5편
1 첫 경험
2 푸우나에서 코칼레와 함께
3 협박이었던가?
4 샨티니케탄
5 3등승객의 비애
6 간청
7 쿰바 멜라
8 라크슈만 줄라
9 아슈람의 창립
10 모루 위에
11 계약이민의 폐지
12 인디고의 얼룩
13 친절한 비하르 사람
14 아힘사와의 대면
15 소송의 취하
16 일의 방법
17 동료들
18 촌락에 침투
19 통치자가 선량할 때
20 노동자와 접촉
21 아슈람을 잠깐 들여다보다
22 단식
23 케다 사탸그라하
24 양파 도둑
25 케다 사탸그라하의 종국
26 하나가 되려는 열망
27 모병운동
28 죽음의 문턱까지
29 로울래트법안과 나의 딜레마
30 그 놀랍던 광경
31 잊을 수 없는 그 주간 1
32 잊을 수 없는 그 주간 2
33 히말라야적 오산
34 나바지반과 영 인디아
35 판잡에서
36 킬라파트 대 암소보호
37 아므리차르 국민의회
38 국민회의에 입회
39 카디의 탄생
40 마침내 찾아내다
41 교훈적인 대화
42 밀물처럼
43 나그푸르에서
안녕히
해제_도로우와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도로우는 1817년 보스턴에서 서북으로 20마일 떨어진 콩코오드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그가 출생한 그 마을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45년간 파란많은 내면 생활을 씩씩하게 살고 간 미국의 뛰어난 지성이었다.
도로우의 아버지는 연필 제조업에 종사하던 평범한 시민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목사의 딸로서 상당한 교양을 지닌 명랑한 부인이었다. 그의 어린시절은 자연에 파묻힌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자연이 언제나 그에게 가까이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 자연을 즐길 만한 물질적 정신적 여유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은 자연을 즐기기에 앞서 자연과 싸워야 하는 괴로운 처지에 놓이는 법이다. 미국사람의 태반이 대학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을 그 시절에 그는 이미 하아버드를 졸업한 대표적 지식인이 아니었던가(그의 집안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 관조로서 물질위에 서고 과학 위에 서자는 것이었다. 트란센덴탈이란 바로 초월하다, 초연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에 파묻혀 속세를 멀리하고 2년 동안이나 혼자 살았다(일생을 독신으로 보낸 것은 물론이다)
자연을 사랑한 그가 정치의 공해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야겠다고 느낀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정부의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시민은 불복종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의무로 여겨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1849년에 처음 발표된 시민의 불복종에 간결하고 힘있는 문장으로 잘 표현돼 있다. 제일 적게 다스리는 정부가 제일 훌륭한 정부라는 토머스 제퍼슨의 이상이 곧 도로우의 이상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미국적 전통의 핵심을 파악한 지성이었다. 그러나 그가 혁명가가 되지 않은 것은 그는 혁명적 사상을 실천함에 있어 폭력의 행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폭력을 거부한 그 사실이 도로우를 영원한 혁명가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듯이-보라! 도로우의 영향으로 인해 얼마나 힘있는 지도자들이 탄생했는가? 톨스토이, 간디, 마아틴 루터 킹 등등 미국의 60년대를 휩쓴 히피 운동의 시조가 헨리 데이비드 도로우라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히피의 운동은 일단 사라졌다 해도 도로우의 생각은 계속 살아서 미국 사회뿐 아니라 전세계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격려할 것이다.
H.D.도로우 시민의 불복종
연보
첫댓글 간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남자 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