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기 1장 1절 – 22절)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3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4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5 그들이…잔치를 끝내면 욥이…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7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13 하루는… 14 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6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17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18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19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한지라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개역개정) 오늘부터 욥기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욥기는, 왜 의로운 사람도 고난 받는가에 대한 의문과 문제 제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욥처럼 이유 없는 극심한 고난의 문제에서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신앙적 삶의 자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교훈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인 것으로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은, 어떤 논리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재난과 고난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흔히들 하나님을 믿으면, 어떠한 어려움도 없고 우리를 번성케 하는 축복만 있을 것으로 믿거나, 그렇다고 가르치며 미혹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어려움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어쩌면 오히려 하나님을 믿으면 더 극심한 어려움을 겪어야 할 때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실 안에서 키우는 화초나 울타리 안에 가둬둔 가축으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이 난무하더라도 그러한 세상의 척박한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야생마처럼 연단하고 훈련해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펼쳐가는 주님의 거룩한 백성과 온전한 신앙 인격의 사람들로 세워가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가정에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닥친 고난을 고뇌 가운데 믿음으로 극복해가는 욥을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복된 신앙인들로 성숙해가기를 원하십니다. 1-2장은, 의롭고 선하게 살았지만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시련을 당한 욥의 상황을 증언합니다. 3-37장은, 욥을 위로하러 왔던 3친구와 참관인이었던 엘리후가 위로가 아닌 이 고난의 원인을 두고 서로 갑론을박하며 논쟁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고난당한 이들에게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38-42장은, 이런 모든 상황과 대화를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만물을 창조하신 신비스런 섭리조차 제대로 모르는 인간의 무지를 질타하자, 비로소 욥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며 회개할 때 그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역사적 섭리에 대한 인간의 전적인 순종을 욥의 고난의 문제를 통해서 논리적 대화체로 풀어가며 제시합니다. 1. 욥을 어떤 사람으로 증언합니까? 욥을 어디 사람으로 증언합니까?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1:1)라고 소개합니다. “우스 땅”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릅니다. 추정하기는, 사해 남동쪽 에돔 지역 또는 아라비아 사막 북부의 갈대아 접경 지역으로 봅니다. 어찌되었든,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욥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큰 문제가 안 되는 것은, 욥의 시대를 이스라엘 민족 이전의 아브라함이 살던 족장시대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활동이 특정 혈통과 지역에 제한되는 것을 나타내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봅니다. 욥이 살던 때를 족장 시대로 보는 것은, 욥의 수명이 족장 시대 수명과 비슷하게 장수했으며(42:16), 욥의 재산을 족장 시대처럼 가축으로 측정했으며(1:3), 욥이 족장 시대처럼 가정의 제사장적 역할을 했고, 하나님에 대한 호칭 역시 족장 시대에 주로 쓰였던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를 대부분(31회) 사용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욥기를 누가 기록했느냐에 대해서, 첫째는 욥의 논쟁에 참여했던 엘리후가 그 논쟁을 정리한 원작자가 아닌가 보며, 둘째는 그 전승을 우스 근처인 미디안 광야에 살았던 모세가 듣고 정리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셋째는 외부와의 문화 교류가 빈번하면서 지혜 문학이 꽃을 피웠던 솔로몬 시대에 그가 정리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넷째는 포로기 이후 신구약 중간사 시대에 고난을 받던 유대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정리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첫 번째로, 욥의 신앙 인격을 한 마디로 어떻게 증언합니까?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1:1). “온전하고”는, 그가 완벽하거나 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인격의 진실성이 선한 것으로 가득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웃과 사람을 향해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와,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그분의 뜻 가운데 살아가려는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의 도덕성을 “정직하여”라며, 그가 진실하여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곧고 올바른 인격자로 증언합니다. 또한 그의 종교성을 “하나님을 경외하며”라며, 단순한 윤리적 도덕적 차원을 뛰어넘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고 인정하는 경배의 삶을 사는 신앙의 소유자로 증언합니다. 이로써 그의 모든 삶이 “악에서 떠난 자더라”며, 그의 인격과 신앙이 자신의 삶의 행위와 분리되지 않고 일치하는 사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자의 중요한 삶의 특징이, “악에서 떠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욥의 가족 사항을 어떻게 증언합니까?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1:2), 7남3녀라면 참으로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과거에는 많은 자녀를 두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었으며, 욥이 받은 첫 번째 축복으로 소개합니다. 세 번째로, 욥이 받은 물질적 축복을 어떻게 증언합니까?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1:3). “동방 사람”은, 흔히 요단강 동편의 광범위한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가장 훌륭한 자라”는 것은 으뜸가는 부자라는 뜻으로, 단지 물질적인 부자인 것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자기가 가진 재산에 걸맞게 으뜸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네 번째로, 그 자녀들의 다복한 우애와 늘 하나님을 의식하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어떻게 증언합니까? 먼저는,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1:4)고 하여, 욥의 “아들들”이 아버지와 독립된 삶을 꾸려가고 있음을 나타내며, 그 형제자매간에 우애가 좋았음을 증언합니다. 다음으로는,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1:5)고 함으로써, 자녀들이 “잔치”를 통해서 자신들도 모르게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된 언행을 했을 것을 우려하여 그들의 죄를 정결케 하는 속건제(贖愆祭)인 “번제”(燔祭) 예식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1:5)는 것은, 이처럼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신중한 삶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2. 사탄은 욥의 문제를 어떻게 제기합니까? 참으로 의롭고 선하며 평화롭던 욥의 가정에 갑자기 평지풍파가 불어 닥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는 많은 경우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오늘 욥기에서 발생된 상황은 사탄이 하나님께 제기한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인 그의 가정에 일어난 문제(1:13-29)는 제1차 천상 회의(1:6-12)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 사탄과 천사가 함께 모였다고 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1:6).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하지 아니한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곁에서 시중들며 함께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관할하는 영적 존재인 그들의 성품과 특성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의미에서 “아들들”이라고 호칭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호칭하는 것도, 이런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본래 최고 천사장으로 천사들의 우두머리였지만,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죄악의 타락으로 하늘에서 땅에 쫓겨난 영적 존재인 “범죄한 천사들”(벧후2:4,사14:12-20)입니다. 따라서 “사탄”은 ‘고발하는 자, 대적하는 자, 이간질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참소하여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는 존재로서,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11:14)하고 나타나 사람들을 속인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참소하는 그의 활동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적 문학기법의 표현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이 주도하는 천상회의에 참석한 것은, 그러한 “사탄” 자체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 존재하며 당신의 백성들을 연단하기 위해 주님께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천상회의에 참석한 “사탄”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서 왔느냐?”(1:7)고 묻자, 그 대답이 무엇입니까?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1:7)라는 보고는,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배회하는 모습으로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이기적이고 독단적으로 악한 일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비유합니다. 어떤 이들은, 죄악이 가득한 세상 군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사단의 통치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물어보신 것과 욥에 대한 칭찬이 무엇이었습니까?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1:8). 욥이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이자, 진실한 종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내 종”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존경과 명예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복된 삶을 살았다는 최고의 칭찬 아닌가요? 욥기에서 증언하는 욥에 대한 중요한 신앙인격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1,8)라고 한 것을,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가 숫자적으로 성장했다가 쇠퇴하고 있고, 그 이유와 사회의 손가락질과 지탄이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배타적’이라는 인격적인 지적에, 우리는 어떤 존재가 떠오릅니까? 화합과 일치와 회복이 아닌 분열과 갈등과 대립을 부추기는 한국 교회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하신 욥의 칭찬을 기분 좋게 듣고 있을 “사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누구보다 “사탄”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라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욥의 신앙을 단순하게 생각했다가, 이 말을 듣고 나니 또 그럴 법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미혹입니다. “사탄”은 그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1:10). 하나님께서 넘치게 베푸신 축복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욥의 믿음을 시험해볼 것을 미혹합니까?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1:11).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1:12)고 허락하며, 단서조항으로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1:12)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미혹을 당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미혹이나 시험을 당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지만, 욥의 믿음의 연단과 성숙을 위해서 잠시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3. 욥에게 닥친 갑작스런 재난은 무엇입니까? 욥을 향한 하나님의 칭찬에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라고 문제를 제기했던 “사탄”은,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1:11)라며, 그의 믿음을 시험해볼 것을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1:12)는 제한적인 허락에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1:12)고 했습니다. 욥을 향한 “사탄”의 시험이 곧 시작되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욥은 이러한 천상 회의가 있었는지 꿈에서조차 모르는 일 아니었겠습니까? 이 때문에 흉적들의 습격과 자연 재난을 통해 갑작스럽게 하루사이에 번갈아가며 욥에게 정신없이 들이닥친 시련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첫 번째 재난은, 욥의 소와 나귀를 한꺼번에 빼앗기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1:13). “스바 사람”은 북부 아라비아에 살던 유목민으로, 잔인성과 약탈로 악명이 높았던 베두인 혼혈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환”의 보고였습니다. 두 번째 재난은, 욥이 그 보고에 당혹스러워할 때 숨 돌릴 틈도 없이 “양과 종들”이 벼락에 맞아 다 불타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1:16). 이번에는 자연재난이었습니다. 과거에는 벼락을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보았기에 “하나님의 불”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욥은 얼마나 황망했겠습니까? 세 번째 재난은, 낙타와 종들이 다 죽임을 당했다는 보고였습니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1:17). “갈대아 사람”은 훗날 바벨론 왕국을 건설한 족속들로, 앗수르와 메소포타미아 북쪽 산악지역에 살며 약탈을 일삼고 호전적이었던 이들이었습니다. 이런 동시다발적인 상황이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1:13)라고 함으로써, 아무 염려 없는 모두가 평화로운 시간을 즐길 때에 벌어진 재난들이었습니다. 한 순간에 재산이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린 당혹스러운 사건이기는 했지만, 자신과 자녀들이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며 위로를 삼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재난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었던 10자녀가 집이 무너져 한꺼번에 몰살당했다는 끔찍한 보고였습니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1:18-19). 가축도 가축이었지만, 비록 소유물로 취급되었을지라도 종들이 한꺼번에 다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녀들이 “맏아들의 집에” 모여 잔치를 벌이다가, 사막에서 모래 바람과 함께 불어 닥친 엄청난 회오리바람에 집이 무너져 모두 몰살을 당했다니, 그 충격은 욥으로 어떤 할 말도 다 잊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련이 있게 된 배경이 “사탄”이 하나님께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1:11)라는 기대였다는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욥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다고 증언합니까? 먼저는,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1:20-21)라고 하여, 갑작스러운 재앙에 대한 슬픔의 표시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순종하는 고백으로 엎드려 경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음으로, 이와 함께 드린 놀라운 고백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라는 찬양이었습니다.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와 자녀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것들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고백이자, 인간의 생사화복을 오직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탄”이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라고 제기했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날 기복주의적 축복 사상으로 만연한 한국 교회에서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만약 욥에게 닥친 시험이 우리에게 닥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욥은 “사탄”의 시험으로 갑작스럽게 닥친 엄청난 시련에, 놀랍게도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1:22)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지명하여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1:8)고 했던 칭찬이 틀린 것이 아님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욥의 승리이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승리였습니다. 따라서 “욥”의 이름은 ‘고난 받는 자, 울부짖는 자, 핍박받는 자, 증오 받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랍어로는 ‘돌이키는 자, 뉘우치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의 인격을 가리켜서,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배타적’이라고 지적한 것이 일부 사람의 모습이겠지만 대체적으로 다들 공감한다는 점에서, 욥을 향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했던 신앙 인격의 지적 앞에 우리는 어떤 마음과 생각이 드십니까? “욥”이 잔치를 베푸는 “자녀들”이 혹시라도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심판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정결예식까지 행했는데, 닥친 재난 앞에 어떤 마음과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욥의 믿음이 “사탄”의 문제 제기처럼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라는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보십니까? 누군가 ‘번영은 행운아를 시험해보지만, 역경은 위인을 시험해본다’고 했고, ‘재산은 사라질 수 있지만, 인격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번 욥기서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세워지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