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너를 마주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눈앞에 나타났구나. 그렇다면 나 또한 이에 부응할 의무가 있지. 평소였다면 네가 다가오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솔직히 이번만큼은 기다리기도 했으니까 기꺼이 맞이하기로 했다. 2019년은 조금 힘들었거든.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어느 날 저녁, 길을 나섰다. 내비게이션의 화살표를 한반도의 동쪽 끝, 호미곶으로 돌린 채.
호미곶
새해가 밝아온다니, 해돋이부터 생각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수십 년간 머릿속에 각인되어 온, 일종의 고정관념일 터. 그래도 어쩌랴. 새해를 밝히는 해돋이를 보고 새롭게 시작해보자는 뻔한 결심을 이번에도 해야 하겠는데 말이다. 이 신성한 의식을 치르기에 포항 호미곶은 적당히 뻔했고, 적당히 아름다웠으며, 적당히 의미심장했다. 한반도의 지형을 호랑이라고 보았을 때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인 이곳은 동쪽으로 쭉 뻗어 나가는 그 끝 지점이기도 했으니까.
근처 숙소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아침 일찍 호미곶 해맞이 광장으로 향했다. 명불허전. 해돋이 명소답게 이미 몇몇 여행자가 자리를 잡고 해가 떠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수평선으로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이어졌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은 이들이 졸린 눈을 비비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호미곶의 상징인 ‘상생의 손’ 그 너머를 주시했다. 모두 숨죽인 채 한 방향만을 바라보던 그때, 수평선 위로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가 떠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니, 그 장관에 넋을 잃고 바라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머리부터 살짝 보이더니 어느새 반쯤, 이내 수평선에 찐하게 붙어 있다가 떨어지는 모습까지도 생생했다. 하루가, 또 하나의 새로운 해가 열리고 있었다. 미간이 아려오던 찰나에 두 눈을 감고 소원을 비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는 점점 더 떠오르더니, 상생의 손 위에 얹어졌다. 순간 확신했다. 2020년은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돋이를 본 뒤, 발길을 돌려 향한 곳은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 1코스의 출발점이다. 호미반도의 해안을 따라 둘레길이 조성된 이후 줄곧 한 번쯤은 걷고 싶었던 길이다. 호미곶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이었지만,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에서만큼은 더 의미가 깊다고 생각했다. 마을 주민들이 애용한다는 청림 운동장으로 이동해 본격적으로 길을 걸어 나갔다.
길은 처음부터 해안을 따라 이어졌다. 평소 근처에 주둔하는 해병대가 순찰하는 군사 구역이지만, 마을 주민과 걷기 여행자들을 위해 낮 시간대만큼은 개방하고 있단다. 곱디고운 모래사장이 해안선을 따라 쭉 펼쳐졌다. 해안선의 완만한 곡선은 빙 둘러 호미반도의 안쪽까지 유려하게 뻗었다. 그렇다고 모래사장 안쪽으로 힘겹게 걸을 필요는 없었다. 목조 데크가 설치되어 있어 편하게 걸을 수 있었으니까. 비밀의 길에 들어서기라도 했다는 듯이, 고요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고돌았다. 길동무는 잔잔한 바람과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 그뿐이었다.
겨울이 왔다지만 공기는 묘하게 포근했다. 어느덧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햇볕이 찬 공기를 열심히 밀어내 주고 있는 덕택이었다. 2020년은 행복할 거라며 다독여주는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새해를 맞이하는 게 이리도 벅찰 일인가 싶어 혼자 피식했다. 양쪽 어깨를 빙빙 돌려 체온을 올렸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6.1km의 길을 단숨에 걸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듯이 곳곳에 쉬어갈 만한 공간이 많았다. 이국적으로 장식해 둔 테이블에 앉아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기를 수차례. 이따금 날아드는 갈매기 떼는 파도가 오가는 간격에 맞춰 춤을 춰댔다. 무릎 아래에서 바람결에 따라 쉬익쉬익 소리를 내는 아담한 해송들이 이 길의 귀여움을 담당했다. 잠시 뒤로 돌아서서 걸어왔던 길을 볼 때면, 거대한 공업 지대가 주변 풍경과는 사뭇 다른 스카이라인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 또한 나름대로 흥미로운 풍경이었다. 두어 시간이면 다 걸을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도착 예정 시각은 조금씩 늦춰지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도구해수욕장을 지났다. 한여름이라면 피서객들로 북적이는 곳이었겠지만, 한겨울의 바다는 그저 적막했고 차분했다. 해변을 따라 세워 둔 야자수 모형이 쓸쓸해 보였다. 모래사장을 따라 걷는 길이 조금 지루해지고 있던 순간, 저 너머로 작은 어촌이 보였다. 그리고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 1코스의 종점,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의 모습도 어촌 뒤쪽 언덕 위에서 배꼼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어선을 이끌고 조업을 나가서인지, 아니면 한바탕 물고기를 낚은 후 쉬어가는 시간이어서인지 마을은 조용했다. 큼지막한 어촌이라든지, 거대한 수산시장이 있는 항구라든지 하는 곳들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였지만, 그래서 좋았다. 바다가 일렁이는 간격에 맞춰 포구에 묶어둔 어선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길고양이 몇 마리는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가 싶더니,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엎드려 한껏 여유를 즐겼다. 긴 줄에 고기를 매달아 말리는 모습, 바다 끝을 멍하니 바라보며 세월을 낚는 낚시꾼들의 모습이 연달아 이어졌다.
가장 재미있는 볼거리는 아무래도 벽화였다. 영일만 일대에서 전해지는 ‘연오랑세오녀 설화’를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낸 벽화가 있어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설화는 이러했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시대, 이 근방에 연오와 세오라는 부부가 살았다. 어느 날, 연오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한 바위에 올라 해초를 따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바위가 연오를 태우고 바다를 건너더니, 일본 땅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일본 사람들은 바위를 타고 온 연오를 기이하게 여겨 왕으로 추대했다.
한편, 세오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 연오를 찾으러 바닷가로 나섰다. 이곳저곳 수소문을 하던 세오는 바위 위에 놓여 있는 연오의 신발을 발견했고, 그대로 그 바위에 올랐다. 바위는 세오를 태우고 또다시 바다를 가로질렀다. 머지않아 세오는 왕이 된 연오가 있는 일본 땅에 도착했다. 세오 역시 마찬가지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신라 땅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만 것이다. 해를 관장하는 신하는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이런 변고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아달라왕은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 연오와 세오를 찾았다.
연오는 자신이 일본으로 오게 된 것이 전부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고, 세오가 짠 비단을 가지고 가 제사를 지내면 다시 해와 달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사신에게 세오의 비단을 하사했다. 신라의 국왕은 연오의 말을 따라 제사를 지냈고, 그제야 해와 달이 다시 밝게 빛나게 되었다고 한다. 제사를 지낸 곳이 해를 맞이하는 곳, 즉 ‘영일만’이었다고. 그러니까 영일만의 지명 역시 연오랑세오녀 설화와 연관이 있는 셈이다.
연오와 세오의 이야기는 어촌을 지나면 비로소 만나게 되는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 1코스의 종점,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에서 자세히 확인해 볼 수도 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오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여러 자료를 전시관에서 소개하고 있다. 연오랑세오녀 설화를 먼저 살펴본 후, 길을 걷고 싶다면 이곳에서부터 역방향으로 걷는 것도 재미있겠다. 영일만의 풍경을 한적하게 즐길 수 있는 정자도, 기념사진 한 장 남기기 좋은 전통마을 테마 공간도 공원 곳곳에 자리한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늘 하루 제대로 여유를 부린 탓이다. 곳곳에 놓인 의자도,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도 한몫했다. 포항 시내와 그 너머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그 덕분이었다. 해는 떠오르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고, 영일만 일대는 화려한 조명으로 물들었다. 참으로 아름다웠던 하루다.
정겨운 시장의 모습
포항 호미반도에는 요즘 가장 핫한 장소가 숨어있다. 구룡포가 그 주인공. 인기리에 방영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배경 ‘옹산군’이 사실 이곳 구룡포였던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게장으로 전국을 평정한 지역으로 묘사되었지만, 사실 이곳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메기 특산지다. 매년 겨울이 과메기의 제철이기도 하니, 그냥 지나칠 이유가 없다. 구룡포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훌륭한 과메기를 모아 판매한다.
구룡포에서 과메기를 먹는 방법은 두 가지다. 이곳에서 포장된 과메기를 구매해 집이나 숙소에서 즐기거나, 여느 수산시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상차림 식당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과메기로 만드는 생선은 청어와 꽁치가 일반적인데, 청어가 조금 더 비싸다. 공급에 따라 가격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룡포에서 꼭 맛보아야 할 음식이 한 가지 더 있다. 국수다. 전국의 거의 모든 제면소가 공장화를 거쳐 빠르게 면을 생산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구룡포에 자리한 제일 국수공장은 여전히 옛 방식을 고수한다. 바닷바람에 정성스레 말린 이곳의 면은 쉽게 엉키거나 퍼지지 않고, 쫄깃한 식감이 오랫동안 남아있는 게 특징이다. 공장 근처 국숫집에서 해풍 국수를 쉽게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