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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종려주일 예배 설교
○ 마태복음 21장 9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나님께서는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실 것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아기로 태어나시기 4,000년 전부터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4,000년이 지나자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그 누가 4,000년 후에 일을 미리 말씀하시고 그것을 4,000년 동안 만들어 가시다가 지키시겠습니까? 그 4,000년의 세월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어보셔서 아시듯이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보내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렇게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은 엄청난 침략과 재난과 압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과 불신앙의 사람들을 걸러내셨습니다. 그리고 불신앙이 계속되면 하나님은 징계를 통하여 그들을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받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시기 위해 수많은 선지자들도 보내셨고, 다양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집중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꾸만 하나님을 외면하며 등을 돌렸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치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인 롯과 같이 하나는 믿음으로, 하나는 불신으로 나뉘어졌던 것처럼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어졌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유다와 이스라엘로 나누셨고 나누신 후 이스라엘에게도 은혜 베푸셨지만 유다에게는 각종 은총을 더하셨습니다.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믿음을 계승한 여러 왕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섬겼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의 우상을 숭배하는 마음들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로인해 점점 악해저 가던 유다는 결국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완전히 멸망하고 말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유다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70년이었습니다.
이렇게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엄청나게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페르시아에 이어 세계를 정복하는 꿈을 가진 알렉산더의 등장으로 유대 나라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때 그리스 신화와 철학을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문화를 세계화시키려는 꿈을 가진 알렉산더의 정책으로 인해 오로지 여호화 하나님 한 분만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는 유대사회의 문화와 충돌했습니다. 강한 나라의 문화와 억압으로 인해 유대 민족은 전통을 고수하려는 사람들과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유대사회를 흔들어 놓던 알렉산더가 죽자 그의 부하 장수 네 명이 알렉산더가 점령한 영토를 나눠서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은 이미 다니엘은 예언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예언 속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은 네명의 장수가 영토를 나눈 후에 애굽을 다스리던 왕과 시리아를 다스리던 왕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 전쟁으로 인해 중간에 있던 유대나라는 짖밟혀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유대나라는 이쪽 편도 들수 없고 저쪽 편도 들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쪽편을 들면 다른 한 쪽이 와서 보복을 하고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갔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이쪽 편도 안들고 저쪽 편도 안들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 자기들에게 조공을 바침은 물로 자기들을 섬기라는 강한 협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애국심을 가지고 나라를 되찾겠다고 사람들을 모아 시리아에 도전하고 로마에 도전했지만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로인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생활을 무려 400년 동안이나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에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워낙 조용한 탄생이었고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사셨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을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침례 요한이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방 오실 것이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이 말을 믿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기다림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러다가 침례 요한에 의해 침례를 받으시고 사역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하신 수많은 일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신가?’ 하는 의문들을 가지면서 큰 기대감을 가지고 몰려 들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절기 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시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예루살렘에서 기다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맞은 편에 있는 산인 감람산의 벳바게에 이르렀습니다. 감람산 벳바게는 감람산에서 동쪽 방향인 베다니 쪽으로 걸어서 10분 정도 가다보면 만나는 마을입니다. 벳바게의 낱말 뜻은 “무화과 나무의 집”이라는 뜻으로 보아 그곳에는 무화과나무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으로 들어가시다가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만나 저주하신 것도 역시 그 지역에 무화과 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그 말씀을 들은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맞은 편 마을로 가서 길가에 매여있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가서 나귀 새끼를 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보고 물었습니다. “나귀새끼를 풀어서 어디로 끌어가려고 하느냐?” 그러자 두 제자는 말했습니다. “주께서 쓰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주었습니다. 두 제자는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올려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귀 새끼를 올라타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성 안에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성 밖으로 나와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 겉 옷을 펴서 바닥에 놓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다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예수님이 지나가실 길에 펼쳐놓았습니다. 왕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승리를 상징하는 말도 아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을 까요? 그 이유는 스가랴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스가랴 2장 10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하심으로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 시온 딸인 예루살렘 가운데 머무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으며 스가랴 9장 9절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는 이 사실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태복음 21장 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을 “네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너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의 왕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왕이신 예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할렐루야!
이는 시온의 딸인 예루살렘의 왕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의미 속에는 온 이스라엘의 왕을 의미하기도 하며 또한 온 세상의 왕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온 세계의 왕이 지극히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 나라를 택하여 오셨고,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에 오셨으며, 작은 마을인 나사렛에서 사셨고 지극히 작은 짐승인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사람이 나면 한양으로 보내고, 말이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라고 합니다. 이는 사람을 성공시키려면 사람이 많은 도시 한 가운데로 보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울은 인구가 너무나 팽창되어 살기 어려운 곳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골지역은 동네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아무도 관심도 없는 나사렛에서 살게 하셨다가 이스라엘과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달리실 때가 임박해서야 예루살렘에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일시적으로는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환호하며 대대적으로 환영하였지만 그러나 그 불은 소나기를 맞은 장작불처럼 너무나 쉽게 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환영인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지만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돌아서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할 때도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예수님을 맞으면서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9절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환영했던 이유가 뭐냐하면 자기들을 구원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구원자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구원과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구원은 달랐습니다. 오늘날의 수많은 교인들이 원하는 기도를 통한 구원과 예수님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구원이 다릅니다.
먼저 이스라엘백성들이 얻고자 했던 구원은 육체적인 구원입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육체적인 구원은 일회적이며 그것은 또다른 형태를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암이 걸려 죽을 뻔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치료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육체적인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을 육체적인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다른 곳이 아파서 또 구원해달라고 기도할 때가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병 치유나 건강을 위한 기도는 죽는 날까지 계속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또 가정 생활이 너무 어려워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린 사람이 빚쟁이들의 빚독촉을 받으면서 인생의 궁지에 몰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딱한 사정을 보시고 구원해주실 때도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이스라엘에서 활동할 때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나아와 자기 남편이 선지자의 생도로써 최선을 다했는데 하나님이 데려가시고 가족들만 남았는데 그 빚이 점점 늘어나서 이제는 두 아들을 다른 사람의 종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에 몰렸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너희에게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지자 생도의 아내가 말합니다. “기름 병에 기름이 조금 밖에 없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 고백입니다.
엘리사선지자는 그 기름병을 자기에게 가져오게 시킨 후 세 사람에게 “너희는 너희 집에 있는 빈그릇들을 이리로 가져오고 또 나가서 이웃집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빈그릇들을 빌려와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생도의 아내와 그녀의 두 아들을 보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앞뒤 옆에 있는 모든 이웃집들을 찾아가서 빌릴 수 있는 그릇이란 그릇은 다 빌려왔습니다. 부엌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게 한 엘리사 선지자는 그 기름이 든 병을 이웃집에서 빌려온 그릇들과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그릇들 위에 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로인하여 모든 그릇들마다 기름으로 가득 찼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그것들을 가져다가 빚도 갚고 세 식구가 먹고 살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 가정이 빚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외에도 세상은 각자 자기들이 처해있는 곳에서 구원해달라고 구합니다. 북한 사람들은 김정은의 독재에서 구원해달라고 구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말합니다.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들이 예수님께 기도할 때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면서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습니까? 첫 번째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두 번째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입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구원자의 자격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일을 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맞습니다. 요한복음 3장 2절을 보면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수많은 표적들을 보면서 니고데모와 몇몇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하니님께서 보내신 선생이라고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고, 눈먼 자의 눈을 밝히 보게 하시며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께 육체적인 구원만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부로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주고 싶어하시는 것은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구원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라고 그 이름을 부르라고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천사가 전해준 말은 이것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로부터 구원해주시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표적들을 체험하고 육신적인 많은 곤고함과 어려움으로부터 구원받은 경험이 있어도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하고 심판을 받고 영벌에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0절을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하고 있습니다.
죄사함을 받는 회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 47절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라고 하시면서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며 또한 회개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믿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다윗의 자손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자여 하면서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얼마 못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죄로부터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영생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 역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믿는 정도로 끝내면서 여러분들이 구하고자 하는 육신적인 것만을 계속해서 구한다면 여러분들은 그러한 것들이 응답을 받을 지라고 영생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의도대로 자신을 자신이 지은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실 주님으로 믿고 죄를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사도행전 3장 19절의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하는 바로 그 새롭게 되는 그 날이 여러분들에게 이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며 죄를 회개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주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무려 4,000년이 넘어도 그 약속을 분명히 지키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여러분들의 주인이며 우리 모두의 주인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주시는 유일한 왕이십니다. 오늘 종려주일에 바로 영생의 왕이신 에수님을 여러분들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이 복이 여러분들 모두에게 임하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