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때가 이르지만 바다 풍경이 보고 싶습니다. 사람의 모습이 없는 바닷가는 텅 빈 것 같지만 풍경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니까 사실 쓸쓸하다고 할 것은 아니죠. 서양 미술사에서 풍경화의 역사는 알브레흐트
뒤러부터 시작하면 500년 밖에 안됩니다. 많은 풍경화 장르가 있지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바닷가 묘사에 관한 최고의 화가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미국의 알프레드 톰슨 브리처 (Alfred Thompson
Bricher / 1837~1908) 입니다.
그랜드 머낸 섬의 위대한 여름 Grand Summer, Grand Manan / 95.52cm x 71.12cm
오후가 되자 바다를 거칠게 달려 온 파도가 섬에 부딪히면서 푸른 색 물안개를 피워내고 있습니다. 힘으로
가득 찬 바다가 섬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며 내지르는 탄식 소리는 파도를 타고 바위로 오르고 있지만,
바다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림을 보고 있자 바위를 두드리던 파도가 가슴도 두들기기 시작
했습니다. 멍이야 들겠지요. 그래도 머릿속이 맑아졌으니 그 것으로 좋습니다.
브리처는 영국에서 이민 온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20년에 이민을 왔으니까 그가 태어나기 17년 전
이었죠. 태어난 곳은 뉴도프라는 곳인데 뉴욕의 바닷가에 접한 곳입니다. 그가 후에 해변과 바다 묘사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 중에 하나는 출생지와도 관련이 있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해변가에서 At the Shore / 15.88cm x 30.48cm / 1871
바닷가에 아이를 세우고 나면 늘 부모들은 뒤에 섭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함이 어린 아이에게는 낯 선
느낌이겠지요. 그러나 그 끝이 없는 곳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아이의 정해진 길이기도 합니다. 그 것을
잘 아는 부모들은 앞에 서지 않습니다. 잠시 물러 나면 받아 줄 수는 있겠지만 그 끝을 다녀 온 부모는
아이의 등을 밀어서라도 내 보내죠. 물론 어렸을 때는 부모님으로부터 등을 밀리고 나이 들어서는 아내로
부터 등을 밀리는 한국의 중년들도 있지만요.
브리처가 성장한 곳은 뉴베리포드라는 곳이었는데 그는 점원 일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14세부터
21세까지 로웰 인스티튜트에서 미술 공부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꽤 긴 시간이죠. 그런데 그를 소개한
글에는 거의 독학으로 미술을 배웠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점원 일을 했다는 기록과 뭔가 안 맞는다
싶었는데 일을 하면서 쉬는 시간에 학교를 갔다는 기록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학교에 적을 두었지만
실제로 학교에 나간 것은 많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일을 하면서 혼자서 그림 공부를 했다는 말이
맞습니다.
구름 낀 날 A Cloudy Day / 60.96cm x 50.80cm / 1871
구름이 몰려 오는 하늘 한 가운데로 동그랗게 남은 햇빛이 바다를 밝히고 있습니다. 밀려드는 파도가 조금
높아 보이는 걸 보면 바다가 거칠어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저렇게 서서 수 많은 세월 동안 울렁거리는
바다의 모습을 지켜 보았을 바위는, 울렁거려 본적이 없었을까요?
‘나라고 없었겠니? 안으로, 안으로 숨어 들어서 이렇게 속부터 딱딱하게 된 것을 정말 모르겠니?’
바위를 보고 ‘애련에 물들지 않았다’고 하셨습니까? 그런가요?
스물 한 살이 되던 해 브리처는 뉴베리포드에서 화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합니다. 그 해 여름 마운트 데저트
섬으로 스케치 여행을 갔는데 그 곳에서 풍경화가인 윌리엄 하셀틴과 찰스 딕스를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과의 만남은 그의 작품 스타일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언젠가 썼던 기억이 나는데 준비를
하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귀인’을 만납니다.
메사추세츠의 오래 된 뉴베리포트 습지의 사냥꾼
Hunter in the Meadows of Old Newburyport, Massachusetts / 56cm x 111.8cm / c.1873
시원한 광경입니다. 늪지대로 물새라도 잡으러 온 것 같은데 사냥꾼과 사냥개는 아직 자리를 못 잡았습니다.
느낌으로만 보면 어깨에 총을 매고 하늘을 쳐다보는 사냥꾼이나 그 옆 늪지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사냥개나
실력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맑고 가슴이 확 터지는 풍경 속에 사냥꾼과 사냥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크기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뉴잉글랜드 지방의 역동적인 해안가 바위를 묘사한 하셀틴의 작품을 보고 브리처는 해안가와 바다
풍경을 그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살면서 수 많은 ‘고수’들을 만나게 됩니다. 젊어서는 고수가 되어
보겠다는 결심을 곧 잘 했지만 지금은 공허한 결심도 잘 되지를 않습니다. 머리에 낀 나잇살이 문제입니다.
데이지 핀 벌판 The Daisy Field / 37.47cm x 53.34cm / watercolor on paper
이런 데이지 군락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 -----
닮고 싶어
아니, 꼭 너였으면 해
그, 하얀 미소’
이풀잎 시인의 ‘데이지’s Song’의 한 구절입니다.
스케치 여행은 화이트 마운틴, 캣츠킬 그리고 미시시피 강까지 이어졌습니다. 브리처는 여름에는 주로
여행을 통해서 스케치 북을 채웠고 겨울에는 작품을 완성하곤 했습니다. 프레데릭 처치도 같은 제작 방법을
썼는데 아마 당시 풍경화들의 작업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등대가 있는 해안 풍경
Coastal Scene with Lighthouse / 16.5cm x 27.75cm / watercolor and gouache on paper / 1875
등대를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등대는 바다를 향한 육지의 외침이기도 하고 바다와 육지를
구별하는 경계이기도 합니다. 외침이 사라지고 경계가 모호해지는 세상을 저는 늘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등대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짠해집니다.
곧 브리처는 주요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합니다. 1860년부터 1년 사이에 20점의 작품을 완성했다고 하니까
왕성한 작품 활동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일정한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면의 1/3정도 되는 높이에
수평선이 펼쳐 있고 화면의 앞 쪽에는 해변의 모습이 살짝 자리를 잡습니다. 두 서너 줄의 밀려 오는
파도와 화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흰 색과 갈 색 구름, 그리고 멀리 떠 있는 흰 색
돛의 배 몇 척이 그 것입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이발소 그림’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해안 풍경 Coastal View / 38.10cm x 81.28cm
잔잔한 파도가 묶여 있는 배를 가볍게 흔들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섬에는 밀려든 파도들이 흰 띠를 두르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급할 것 없어 보이는 흰 돛단배 두 척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묶인 조각배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 바다에 가면 자유가 보이는가요?’
남북 전쟁의 어수선한 사회 환경 속에도, 더구나 개인적으로는 그의 동생이 전쟁 중에 사망했지만 브리처의
작품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의 바닷가 풍경을 묘사한 작품은 평화로움과 힘이 가득했고 거대한 크기의
캔버스에 묘사된 바다 풍경은 장관이었습니다. 혹자는 그런 그의 작품을 보고 ‘인간이 뭐라고 해도 인간
보다 훨씬 많은 힘을 가지고 있는 자연은 인간을 용서한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요?
생각이 많은 순간
A Pensive Moment / 33.02cm x 73.66cm / Gouache and watercolor on paper / c.1875~1880
바닷가 산책 길에 잠깐 기울어진 배에 앉아서 책을 보다가 떠 오르는 생각에 몸이 굳어졌습니다. 일어서야
할지 앉아야 할지, 한 손의 책을 든 여인의 자세에는 망설임이 가득합니다. 자신의 그림자 위에 더해진
돛 대의 그림자만큼 여인의 생각도 한 없이 뻗어 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곧 괜찮아지겠지요. 화면이 너무
맑거든요.
31세가 되던 해 브리처는 뉴욕에 있는 YMCA 빌딩에 화실을 마련하고 이사를 합니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깔렸지만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습니다.
다색 석판화 회사와 계약을 맺고 그의 그림이 인쇄되면서 그의 인기는 한층 높아졌습니다. 금전적으로도
윤택해졌겠지요. 1874년 37세가 되던 해 미국 수채화가 협회 회원이 되고 5년 뒤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
회원이 되면서 공적인 인정도 절정에 이릅니다.
흐름에 몸을 맡기고 Drifting / 101.60cm x 81.28cm / 1886
노를 배 위에 올려 놓고 몸을 배에 맡겼습니다. 이제부터 흐르는 물이 여인을 데려다 주겠지요. 워낙 고요한
물이라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물이 끄는 대로, 바람이 밀어 대는 곳으로
몸을 맡겨 보고 싶습니다. 할 수 만 있다면 마음이 가는 곳으로 가면 제일 좋겠습니다.
45세가 되던 해 브리처는 사우스햄턴에 집을 지었는데 그가 주제로 삼던 바다를 더욱 가까이에서 관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빛과 물 그리고 공기의 흐름뿐 아니라 자연의 숭고함과 찬란함에도 관심이 많았던
브리처에게는 최적의 장소였겠지요. 집을 지으셨다고요? 성공하셨군요, 브리처 산생님!
그랜드 머낸 섬의 부룬디스 헤드 Brundith Head, Grand Manan / 60.96cm x 50.80cm / 1899
그랜드 머낸 섬은 파도가 거센 곳인가 봅니다. 앞서 본 ‘그랜드 머낸 섬의 위대한 여름’을 묘사한 곳의
반대편 풍경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 바다는 힘이 넘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덮을 만큼 포악해 보이지
않습니다. 바다가 좋은 이유는 그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원할 때면 내가 필요로 하는 얼굴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 가라 앉았을 때 다시 보고 싶습니다.
브리처의 그림을 보면 당시의 날씨와 장면을 바라본 위치를 지금 확인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또
단순히 사진을 찍듯이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녹여 넣었다는 평을 받습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가를 알려주는 그의 작품이 학생들과 미술계로부터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맨체스터의 잔잔한 바다 Rippling Sea, Manchester / 38.1cm x 83.8cm
말년에 브리처는 모더니즘이 등장하면서 그가 평생을 추구했던 작품 스타일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소위 유행에 뒤진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을 그는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을까요? 생각해보면
시간이 흘러가면서 버리고 가는 것이 한 둘이겠습니까? 53세가 되던 해 브리처는 71세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그가 태어난 뉴도프로 거처를 옮겨 남은 여생을 보냅니다.
허든슨강파 (Hudson River School)의 마지막 세대였던 브리처의 바다는 오늘도 그림 속에서 끝없이
잔 물결을 밀고 당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