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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춘추(蘂城春秋, 1959년)에서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에 있는 《조재의 ㆍ조재미 효자정려》자료를 싣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년 ~ 1852년)이 쓴 《효자조공묘지명(孝子趙公墓誌銘)》을 옮겼습니다. 매산(梅山)의 묘지명은 조씨 두 형제의 조상인 복형(復馨)에 관한 것으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옮겼습니다.
이 두 자료와 《조재의 ㆍ조재미 쌍효각기 》내용을 살펴보면 효행록(孝行錄)이 어떻게 전승(傳承)되나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기이한 얘기가 나오나 성격이 전(傳)이며 조선시대 광범위하게 유포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신속삼강행실도(新續三綱行實圖)]의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합니다.
《조재의 ㆍ조재미 쌍효각기 》를 쓴 동양 신현국은 《효자조공묘지명(孝子趙公墓誌銘)》을 알고 있었고 참고했습니다. 그리고 예성춘추는 오자와 탈자가 있어 수정했습니다 . 이 부분은 일일이 표시했습니다.
예성춘추 p445 ~ p449
二五四. 趙在義 (孝子旌閭)
字는 致道요, 林川人 愼守齋 璨의 後孫으로 至孝로 事親하는데 專力과 誠心을 다하여 每遣爲親買肉(원문에는 掠자이나 어색해 遣으로 고쳤다)하는데 日沒黃昏이면 虎가 따라와 守護하였다. 親患이 危谹(조선환여승람 원문엔 깊을 횡(谹)자다.篤자를 써도 뜻은 통한다. 위독(危篤)하다. 하지만 원문을 살려 횡(谹)자를 쓰는 것이 본래 뜻에 부합한다. 뒷구절 嘗糞斫指하니 와도 맞는다. 횡(谹)으로 고친다)하여 嘗糞斫指하니 蘇生하고 親喪에 哀至傷孝하여 하루에 一次式 風雨不拘하고 日省을 不廢하니 孝誠이 至極하다하고 贈童蒙教官하고 旌門케 하였다(朝鮮寰輿勝覽).
《字致道林川人愼守齋璨后至孝事親必彈誠力爲親買肉當昏夜有虎追護親患危谹(篤)嘗糞斫指得甦丁憂哀至傷孝日一省掃 風雨不廢孝 贈童蒙敎官 旌》 --- 이 구절은 원문에 없으나 《조선환여승람》해당 부분을 찾아 채워 넣었다.
二五五. 趙在美 (孝子旌閭)
字는 致寶요, 在義의 弟라. 孝友의 敦篤함이 出於天性이라. 事親에 父母의 意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하고 伯兄과 같이 同席湛樂(예성춘추 원문엔 沈痛哀樂이나 잘못 쓴 글자다)을 다하였다. 親患이 危谹(조선환여승람 에 谹자로 써 있다)하니 마음이 걱정이 되어 顏色이 變하고 嘗糞斫指하고 밤이 새도록 求藥하는데 虎가 따라다니며 指導하였다. 親喪을 當하여 哀毀不已하니 사람들이 一門에 雙孝가 나왔다고 하였다. 贈童蒙敎官하고 命旌閭하니 尹膺善이 撰狀하였다(朝鮮寰輿勝覽).
字致寶在義弟孝友篤出於天性事親志物無違與伯兄同席湛樂親患危谹(篤)心憂色沮嘗糞斫指㴱(深) 夜求藥有虎指導丁憂哀毁人稱一門雙孝 贈童蒙敎官命旌 尹膺善 撰 -- 이 구절은 원문에 없으나 《조선환여승람》해당 부분을 찾아 채워 넣었다.
贈童蒙敎官朝奉大夫林川趙公諱在義의 孝行事實積은 다음과 같다.
純宗(純祖) 癸亥 七月 七日生 己巳 二月 二十日卒 葬于忠州 柳等面 繡洲 公山谷 壬坐原
--- 순조 계해는 순조 3년 1803년이다. 충주 유등면은 1914년 이안면(利安面)과 합쳐 이류면(利柳面)이 되었다. 2012년 대소원면(大召院面)으로 고쳤다. 柳等은 우리말 버들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等은 들이다. 우리들을 오등(吾等)으로 옮긴다. 대전시 유천동(柳川洞)은 버드내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繡洲는 水周를 아칭(雅稱)으로 쓴 것이다.
一, 自五、六歲 知父母恩重而或有疾病 流淚侍側不移
一, 自十歲以後乃知出必告反必面之儀
一, 凡百事必告受命行之不一自意行之小不逆父母之志
一, 牛馬鷄犬不敢高聲叱之以手順驅逐之猶恐父母之怒
一, 供養之時則入其廚親自炊飯或妻兪氏俱饍必先嘗後進不使奴婢身代
一, 家後園中有在如枕(예성춘추 원문엔 枕의 俗字로 써있다)者多積也 老父年齡八十餘眼彩矇朧不明此石視以灰石謂其長者 某日我死後勿用客費一如吾言掘地作爐以板木吹風者爲之三月後乃至作筍積于簷內三年以去也即商石非灰石 ---爲자가 있는 자리는 ○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채워 넣었다.
一, 鄕里中若有喜事則告于前以悅親心 若有凶事則掩匿不告無至以老親惱心損氣
一, 親患有急買肉於延豐水回市屠肆中躬 自負之峽路二十許里 行夜已 深矣 忽有一大虎或左或右從之公顧以戒之日爾無害我之心當適爾所可矣 以何意從來如此乎 虎亦欣然如聽之低頭插尾依如飼養犬之行小無害意共抵門前因忽不見平明見之簷巡印跡以去以爲隣人所賢知也
一, 鄕里中宴會席有別味異需則必袖以歸養
一, 老父以痢疾委席不起竟至別世此時乙丑十一月 日也 忽思美魚長魚羹食之則吾病似有差效然如此冬節何可得食乎公號天痛泣曰以吾不孝之誠何處求得乎 小項門下一僕告及日門外有一人持魚一串以求請願賣者即出見之則果是美魚長魚三四尾也 百拜致敬厚價買服之即差也 賣魚人曰此魚昨昨日捉之而去夜夢有一老人謂曰南方三十許里主持去則必捧厚價勿失此時驚然覺之乃一夢也 夢者虛靈也 信不信間持來矣果如夢非也致敬于主人曰出天之孝也 彼人漆枝居權某失名錄不記
一, 老父眼彩不明座內床九念石之物視以岩石其餘散列之物視以魚驚謂其長者某曰速去前川魚一串捉得勿而老父覓魚之時也弟氏奉命行之居無何得魚一篋以求公氣小網如水中捉魚樣以歡親心惟恐弟氏之違行
一, 臨終時斷指流血于口甦生三月後卒此時丙辰十二月四日也
一, 鄕里人以餅肉酒果稱之曰此人天生孝子雲爾
一, 每年春和日暖時則兄弟六人互相負其母登後園花叢中或折花插其鬢臭其母鼻以悅老母之心
一, 每?於前撫其乳如嬰兒樣以爲母親歡笑
一, 與母親每日朝夕兼飯必先嘗而勸之則收取以食之或未一時兼盤則不能甘食故誓不移時
一, 每當昏定之時就寢然後呼 母三次不應則已知睡熟而暗閉窓戶出于自己處取鷄入省之時若不起寢則默然侍側以待起枕後問煥寒溫呼
一, 老母疾病嘗糞以驗吉凶
一, 先考歿後遺有乎 日取用取作之物兩手撫之日先考手澤手垢塗存焉如見父母之容顔藏置于空廳如父母處取或恐破損雖草介之物惜如銀金
一, 先考葬於本郡甘勿內面博達山下二十五里許也 每日省楸之時朝往哭拜後憑墳不移不覺日終而老母在堂不可經夜留之乘暮還家之路虎火前道者累次現跡
一, 公臨終時呼長子龜鎬曰日不見母氏之供食如平日兼盤以來即告祖母則母氏喜而領飯出母子相勸倍食公乘淚不覺匙飯 趙 在 美 落於誠下不成人事母氏亦垂淚饌入大公因臥病枕調長子夫婦日善事祖母則地下他日父子相逢必報厚恩言畢因閉目下世
贈贈童蒙敎官朝奉大夫諱在美孝行事實積
一, 自幼時父母有疾病則號天痛泣日以身代命
一, 移居槐山智藏里三十許里也 有親命移則之時不去則心以恐逆父母之志去則誠難 朝夕之志問安然事勢不得已而投托聘宅李氏方而無瀰一日反省之路不廢風雨每日乘暮之行虎火前導媟路所無忌憚鷄鳴後晨夜歸家往來之勞形容推悴如是者半平父母以憐其勞還居于本地以養父母小無情心
一, 觀行之路無一時空手行適口之物必袖以奉甘旨
一, 鄕里人以酒餠果肉稱以來大孝
一, 母夫人平生所嗜之物生雉也 一日顧謂公曰近日口味不甘或有雉肉嗑之似有回味之道然是何求耶 公默聽之暗瑞求雉之意而歸而自己家之際忽有衆犬逐一雄雉亦驚栔覺村落飛入子公家中馬飼料室歿頭伏之公以雙手掬之進於母夫人所隣人相謂曰此亦孝感所致也
一, 壬子年老父以泄痢委重公獨任醫家來往之勞自繡洲至槐山東面爲四十許里每多昏夜峽路林汀行不分知尺之際累次一虎依如衛行
記
二, 公諱兄曰 在義 弟曰 在美 嘉林箸族也 以高麗平章事 嘉林伯 諱天赫 爲始祖自本朝簪組相望至諱元卿進士謁聖文科官成均司成以儒術顯重是生諱翊文科軍資監正生諱應恭進士翰林黃海都事生諱璨號愼守齋學識有聞薦授爲不就洗馬蔭軍資監參奉參奉二男長諱馨有至行次諱復馨處士公也 篤於孝爲親病求藥虎爲之騎行事聞旌閭梅山洪先生直弼實誌其墓曰希聖與伯氏齊名互相推讓古亦有孝友之行而尠有如趙門之二難也 復馨生諱景輝景輝生諱正遠又三傳而諱學心隱德娶 草溪鄭氏諱汝奎之女是爲敎官二公之考及妣也 鄭氏擧六男二公之序最長及第三也
孝子處士趙公墓誌銘
崇禎 紀元後 四庚戌 唐城 洪直弼 撰
旌閭重修記
崇禎 四甲寅 孟夏 恩津 宋達洙 記
宋近洙 書
孝子 贈朝奉大夫童蒙敎官 趙公兄弟行狀
永歷五 癸丑復月 下澣 坡山 尹膺善 狀
雙孝閣記
疆圍赤奮若大壯之月上浣
東陽 申鉉國 記
<표점>
趙在義 / 趙在美 孝行事實
趙在義 (孝子旌閭)
字는 致道요, 林川人 愼守齋 璨의 後孫으로 至孝로 事親하는데 專力과 誠心을 다하여 每掠爲親買肉하는데 日沒黃昏이면 虎가 따라와 守護하였다. 親患이 危篤하여 嘗糞斫指하니 蘇生하고 親喪에 哀至傷孝하여 하루에 一次式 風雨不拘하고 日省을 不廢하니 孝誠이 至極하다하고 贈童蒙教官하고 旌門케하였다.
《朝鮮寰輿勝覽》
字致道, 林川人 愼守齋璨后. 至孝事親, 必彈誠力爲親買肉. 當昏夜, 有虎追護. 親患危谹(篤), 嘗糞斫指得甦. 丁憂哀至傷孝, 日一省掃, 風雨不廢. 孝, 贈童蒙敎官, 旌.
趙在美 (孝子旌閭)
字는 致寶요, 在義의 弟라. 孝友의 敦篤함이 出於天性이라 事親에 父母의 意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하고, 伯兄과 같이 同席湛樂을 다하였다. 親患이 危篤하니 마음이 걱정이 되어 顏色이 變하고 嘗糞斫指하고 밤이 새도록 求藥하는데 虎가 따라다니며 指導하였다. 親喪을 當하여 哀毀不已하니 사람들이 一門에 雙孝가 나왔다고 하였다. 贈童蒙敎官하고 命旌閭하니 尹膺善이 撰狀하였다.
《朝鮮寰輿勝覽》
字致寶, 在義弟. 孝友篤, 出於天性. 事親, 志物無違, 與伯兄同席湛樂. 親患危谹(篤), 心憂色沮, 嘗糞斫指, 㴱(深)夜求藥, 有虎指導. 丁憂哀毁, 人稱一門雙孝. 贈童蒙敎官, 命旌. 尹膺善 撰.
贈童蒙敎官朝奉大夫林川趙公諱在義 孝行事實蹟 純宗(純祖) 癸亥 七月 七日生, 己巳 二月 二十日卒. 葬于忠州柳等面 繡洲 公山谷 壬坐原.
一, 自五、六歲, 知父母恩重, 而或有疾病, 流淚侍側3不移.
一, 自十歲以後, 乃知「出必告, 反必面」之儀.
一, 凡百事必告受命行之, 不一自意行之, 小不逆父母之志.
一, 牛馬鷄犬, 不敢高聲叱之, 以手順驅逐之, 猶恐父母之怒. 一, 供養之時, 則入其廚親自炊飯, 或妻兪氏俱營, 必先嘗後進, 不使奴婢身代.
一, 家後園中有石如枕者多積也. 老父年齡八十餘, 眼彩矇朧不明, 此石視以灰石, 謂其長者曰: “某日我死後, 勿用客費, 一如吾言, 掘地作爐, 以板木吹風者爲之. 三月後乃至作帶, 積于簷內, 三年以去也.” 即商石, 非灰石.
一, 鄕里中若有喜事, 則告于前以悅親心; 若有凶事, 則掩匿不告, 無至以老親惱心損氣.
一, 親患有急, 買肉於延豐水回市孱肆中, 獨自負之, 峽路二十許里. 行夜已深矣, 忽有一大虎, 或左或右從之. 公顧以戒之曰: “爾無害我之心, 當適爾所可矣. 以何意從來如此乎?” 虎亦欣然如聽之, 低頭插尾, 依如飼養犬之行, 小無害意, 共抵門前, 因忽不見. 平明見之, 簷巡印跡以去, 以爲隣人所賢知也.
一, 鄕里中宴會席, 有別味異需, 則必袖以歸養.
一, 老父以痢疾委席不起, 竟至別世. 此時乙丑十一月 日也, 忽思: “美魚長魚羹, 食之則吾病似有差效, 然如此冬節, 何可得食乎?” 公號天痛泣曰: “以吾不孝之誠, 何處求得乎?” 小項, 門下一僕告及曰: “門外有一人, 持魚一串以求, 請願賣者.” 即出見之, 則果是美魚長魚三四尾也. 百拜致敬, 厚價買服之, 即差야. 賣魚人曰: “此魚昨昨日捉之, 而去夜夢有一老人謂曰: ‘南方三十許里, 主持去, 則必捧厚價, 勿失此時.’ 驚然覺之, 乃一夢也. 夢者虛靈也, 信不信間持來矣. 果如夢, 非也.” 致敬于主人曰: “出天之孝야.” 彼人漆枝居權某, 失名錄不記.
一, 老父眼彩不明, 座內床九念石之物視以岩石, 其餘散列之物視以魚驚. 謂其長者某曰: “速去前川, 魚一串捉得.” 勿而老父覓魚之時也. 弟氏奉命行之, 居無何, 得魚一篋以求. 公氣小網, 如水中捉魚樣, 以歡親心, 惟恐弟氏之違行.
一, 臨終時, 斷指流血于口, 甦生三月後卒. 此時丙辰十二月四日也.
一, 鄕里人以餅肉酒果稱之曰: “此人, 天生孝子雲爾.”
一, 每年春和日暖時, 則兄弟六人, 互相負其母, 登後園花叢中, 或折花插其鬢, 臭其母鼻, 以悅老母之心.
一, 每遊於前, 撫其乳如嬰兒樣, 以爲母親歡笑.
一, 與母親每日朝夕兼飯, 必先嘗而勸之, 則收取以食之. 或未一時兼盤, 則不能甘食, 故誓不移時.
一, 每當昏定之時, 就寢然後, 呼母三次, 不應則已知睡熟, 而暗閉窓戶, 出于自己處. 取鷄入省之時, 若不起寢, 則默然侍側以待, 起枕後, 問煥寒溫呼.
一, 老母疾病, 嘗糞以驗吉凶.
一, 先考歿後, 遺有乎日取用取作之物, 兩手撫之曰: “先考手澤手垢塗存焉, 如見父母之容顔.” 藏置于空廳, 如父母處取. 或恐破損, 雖草介之物, 惜如銀金.
一, 先考葬於本郡甘勿內面博達山下二十五里許也. 每日省楸之時, 朝往哭拜後, 憑墳不移, 不覺日終. 而老母在堂, 不可經夜留之, 乘暮還家之路, 虎火前道者累次現跡.
一, 公臨終時, 呼長子龜鎬曰: “日不見母氏之供食, 如平日兼盤以來.” 即告祖母, 則母氏喜而領飯出. 母子相勸倍食, 公乘淚不覺匙飯.
趙在美 (弟) 孝行事實 [前文 續]
落於誠下, 不成人事. 母氏亦垂淚饌入, 大公因臥病, 枕調長子夫婦曰: “善事祖母, 則地下他日父子相逢, 必報厚恩.” 言畢, 因閉目下世. 贈童蒙敎官朝奉大夫諱在美 孝行事實蹟
一, 自幼時, 父母有疾病, 則號天痛泣曰: “以身代命.”
一, 移居槐山智藏里三十許里야. 有親命彩則之時, 不去則心以恐逆父母之志; 去則識縣朝夕之半, 問安然其勢不輯. 已而投托卿宅李氏方而無繃.
一日, 反省之路不廢風雨, 每日乘夜之行, 虎火前導, 旗跡所無. 哀智鳴後, 晨嚮家往來之勢, 彩推悴如是.
一, 耆半平父母, 以壠其勞, 還居于本地以養父母, 小無情心.
一, 觀行之路, 無一時空手行, 適口之物, 必袖以奉甘旨.
一, 鄕里人以酒果肉稱以來大孝.
一, 母夫人平生所嗜之物, 生雉也. 一日顧謂公曰: “近口口味不甘, 或有雉肉嗑之, 便有回味之道, 然是何求耶?” 公默聽之, 暗瑞求雜之意. 而歸而自己家之際, 忽有衆犬逐一雄雉, 亦驚榮覺, 村落飛入天子(公)家中馬飼料室, 歿頸伏之. 公以雙手摘之, 進於母夫人所. 瞬人相謂曰: “此亦孝感所致也.” 一, 壬子年, 老父以泄痢委重. 公獨任醫家來往之勞, 自繡洲至槐山東面爲四十許里, 每多昏夜峽路林汀行. 不分知尺之際, 果夫一虎, 依如衛行. 記 / 墓誌銘 / 重修記 / 行狀 / 閣記
【 記 】
公諱兄曰在義,弟曰在美,嘉林著族也。
以高麗平章事嘉林伯諱天赫爲始祖。自本朝,簪組相望。
至諱元卿,進士,謁聖文科,官成均司成,以儒術顯重。 是生諱翊,文科,軍資監正。 生諱應恭,進士,翰林,黃海都事。 生諱璨,號愼守齋,學識有聞,薦授[洗馬],不就,蔭軍資監參奉。
參奉二男:長諱馨,有至行;次諱復馨,處士公也。篤於孝,爲親病求藥,虎爲之騎行。事聞,旌閭。梅山洪先生直弼實誌其墓曰:「希聖與伯氏齊名,互相推讓。古亦有孝友之行,而尠有如趙門之二難也。」
復馨生諱景輝,景輝生諱正遠,又三傳而諱學心,隱德。娶草溪鄭氏,諱汝奎之女。是爲敎官,二公之考及妣也。鄭氏擧六男,二公之序,最長及第三也。
【 孝子處士趙公墓誌銘 】
崇禎紀元後 四庚戌, 唐城 洪直弼 撰.
【 旌閭重修記 】
崇禎四甲寅孟夏, 恩津 宋達洙 記, 宋近洙 書.
【 孝子 贈朝奉大夫童蒙敎官 趙公兄弟行狀 】
永歷五 癸丑復月 下澣, 坡山 尹膺善 狀.
【 雙孝閣記 】 疆圍赤奮若大壯之月上浣, 東陽 申鉉國 記.
<번역>
趙在義 / 趙在美 孝行事實
조재의 (효자정려)
자는 치도(致道)요, 임천인(林川人) 신수재(愼守齋) 찬(璨)의 후손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과 힘을 다하여, 매번 어버이를 위해 고기를 사 오는데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면 호랑이가 따라와 수호하였다. 어버이의 병환이 위독하여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째 피를 내어 부어드리니 소생하셨다. 어버이 상을 당해서는 슬픔이 극에 달해 효성을 다하였고, 하루에 한 번씩 풍우를 무릅쓰고 날마다 안부를 살피며 묘소를 돌아보는 일을 폐하지 않으니, 효성이 지극하다 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고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조선환여승람》
字致寶, 在義弟. 孝友篤, 出於天性. 事親, 志物無違, 與伯兄同席湛樂. 親患危谹(篤), 心憂色沮, 嘗糞斫指, 㴱(深)夜求藥, 有虎指導. 丁憂哀毁, 人稱一門雙孝. 贈童蒙敎官, 命旌. 尹膺善 撰.
조재미 (효자정려)
자는 치보(致寶)요, 재의(在義)의 아우이다. 효성과 우애의 돈독함이 천성에서 나왔다. 어버이를 섬김에 부모의 뜻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고, 큰형과 더불어 한자리에 모여 즐거움을 다하였다. 어버이 병환이 위독해지자 마음이 근심스러워 얼굴빛이 변하였고,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째며 밤이 깊도록 약을 구하는데 호랑이가 따라다니며 길을 안내하였다. 어버이 상을 당하여 슬퍼하여 몸이 파리해지도록 마지않으니, 사람들이 한 문중에 쌍효(雙孝)가 나왔다고 하였다. 동몽교관을 증직하고 정려를 명하니, 윤응선(尹膺善)이 행장을 지었다.
《조선환여승람 朝鮮寰輿勝覽》
字致寶, 在義弟. 孝友篤, 出於天性. 事親, 志物無違, 與伯兄同席湛樂. 親患危谹(篤), 心憂色沮, 嘗糞斫指, 㴱(深)夜求藥, 有虎指導. 丁憂哀毁, 人稱一門雙孝. 贈童蒙敎官, 命旌. 尹膺善 撰.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임천조공 휘 재의 효행사실적 순조(純祖) 계해년(1823년) 7월 7일에 태어나, 기사년(1889년) 2월 20일에 돌아가셨다. 충주 유등면 수주 공산곡 임좌(壬坐) 언덕에 묻히다.
하나, 5~6세 때부터 부모의 은혜가 중함을 알아 혹 질병이 있으시면 눈물을 흘리며 곁을 지키고 떠나지 않았다.
하나, 10세 이후로부터 이에 "나갈 때는 반드시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뵈는(出必告 反必面)" 의례를 알았다.
하나, 무릇 모든 일은 반드시 아뢰어 명을 받아 행하고, 단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아 조금도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하나, 소, 말, 닭, 개도 감히 높은 소리로 꾸짖지 않고 손으로 가볍게 몰아내며, 오히려 부모께서 노하실까 두려워하였다.
하나, 공양할 때에는 부엌에 들어가 친히 밥을 짓고, 혹 아내 유씨와 함께 만들어도 반드시 먼저 맛본 뒤에 올렸으며 노비가 대신하게 하지 않았다.
하나, 집 뒤뜰에 베개 같은 돌이 많이 쌓여 있었다. 늙은 아버지가 나이 80여 세에 눈동자가 흐릿하여 밝지 못하여, 이 돌을 회석(灰石: 석회석)으로 보고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후일에 내가 죽은 뒤에는 객비(客費)를 쓰지 말고 일찍이 내 말대로 땅을 파고 화로를 만들어 판목으로 바람을 불어 만들어라. 3달 뒤에 띠를 만들어 처마 안에 쌓았다가 3년 뒤에 써라.” 하였다. 이는 상석(商石)이지 회석이 아니었다.
하나, 향리 중에 혹 기쁜 일이 있으면 부모 앞에 아뢰어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하고, 혹 흉한 일이 있으면 숨기고 고하지 않아 늙은 어버이가 마음을 쓰이고 기운을 상함에 이르지 않게 하였다.
하나, 어버이 병환이 급하매 연풍 수회 장터 가게에서 고기를 사서 혼자 짊어지고 20여 리 험한 산길을 오는데, 밤이 이미 깊었다. 문득 큰 호랑이 한 마리가 혹 좌로 혹 우로 따라왔다. 공이 돌아서서 경계하여 가로되, “네가 나를 해할 마음이 없거든 마땅히 네 갈 곳으로 가거라. 무슨 뜻으로 이처럼 따라오느냐?” 하니, 호랑이 또한 기뻐하며 듣는 듯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며 마치 집에서 키우는 개가 다니는 듯 조금도 해칠 뜻이 없이 함께 문앞에 이르러 마침내 문득 사라졌다. 날이 밝아 보니 처마 주변에 발자국을 남기고 떠났는지라, 이웃 사람들이 지혜롭다 여겼다. 하나, 향리 잔칫상에 특별한 맛이나 희귀한 음식에 있으면 반드시 소매에 넣어 와 봉양하였다.
하나, 늙은 아버지가 이질로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시다 마침내 세상을 떠나셨다. 이때가 을축년 11월 일이라. 문득 생각하시기를, “맛있는 생선과 메기국을 먹으면 내 병이 나을 듯도 한데, 이처럼 추운 겨울철에 어찌 얻어먹을 수 있겠는가?” 하시니, 공이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여 가로되, “나의 불효한 정성으로 어디 가서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잠시 후 문하의 한 종이 보고하여 가로되, “문밖에 한 사람이 생선 한 꿰미를 들고 와 팔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즉시 나가 보니 과연 맛있는 메기 3~4마리였다. 백 번 절하며 감사를 표하고 두터운 값을 주고 사서 드시게 하니 즉시 병이 낳았다. 생선 파는 사람이 가로되, “이 생선은 그저께 잡은 것인데 지난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남쪽 30여 리 되는 곳에 가지고 가면 반드시 두터운 값을 받을 것이니 이 때를 놓치지 말라’ 하기에 놀라 깨니 한 한꿈이라. 꿈이란 허령한 것이니 믿거나 말거나 가지고 왔더니 과연 꿈과 같아 허망하지 않구려” 하고 주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가로되 “하늘이 내린 효성이라” 하였다. 그 사람은 칠지(漆枝)에 사는 권모(權某)인데 이름을 잃어버려 기록하지 못한다.
하나, 늙은 아버지가 눈이 밝지 못하여 자리 안 벼루나 돌 같은 물건을 바위로 보고, 그 외 흩어져 있는 물건을 생선으로 보아 놀라시며, 자식에게 이르기를, “속히 앞개울로 가서 생선 한 꿰미를 잡아 오너라” 하셨다. 어버이가 생선을 찾으실 때라 아우가 명을 받들어 갔는데 오래지 아니하여 생선 한 바구니를 얻어 오거늘, 공이 기운을 차려 물속에서 생선을 잡는 흉내를 내어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오직 아우가 어버이 뜻을 어길까 두려워하였다.
하나, 임종 때에 손가락을 째 피를 입에 흘려 넣으니 소생하시어 3달 뒤에 돌아가셨다. 이때가 병진년 12월 4일이었다. 하나, 향리 사람들이 떡과 고기, 술과 과일로 칭찬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타고난 효자라” 하였다.
하나, 매년 봄날이 따스할 때면 형제 6명이 서로 번갈아 어머니를 업고 뒤뜰 꽃밭에 올라 혹 꽃을 꺾어 머리 상투에 꽂고 그 어머니 코에 대어 향기를 맡게 하여 늙은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하나, 매번 부모 앞에서 재롱을 떨며 아이처럼 그 젖을 만져 어머니를 환하게 웃으시게 하였다.
하나, 어머니와 더불어 매일 아침저녁 겸상을 하되 반드시 먼저 맛을 보고 권하면 받아 드셨다. 혹 한때라도 겸상을 하지 않으면 단 달게 드시지 못하므로 맹세코 시각을 어기지 않았다.
하나, 매번 잠자리를 보살필 때(昏定)에 취침하신 뒤 어머니를 세 번 불러 응답이 없으시면 이미 깊이 잠드신 줄 알고 은밀히 창문을 닫고 자기 처소로 나왔다. 닭이 울어 안부를 살피러 들어갈 때 만약 일어나지 않으셨으면 묵묵히 곁에서 모시고 기다렸다가, 베개에서 일어나신 뒤에 안부를 물었다.
하나, 늙은 어머니가 질병이 있으시면 똥을 맛보아 길흉을 시험하였다. 하나, 돌아가신 아버지(先考)가 세상을 떠난 뒤 평일에 쓰시던 물건이 남아 있으면 두 손으로 문지르며 가로되, “돌아가신 아버지의 손때와 묵은 때가 여기에 남아 있으니 마치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 하고, 공청(空廳)에 두어 부모가 계신 곳처럼 대하였다. 혹 손상될까 두려워하여 비록 풀 한 포기 같은 작은 물건이라도 은이나 금처럼 아꼈다.
하나, 돌아가신 아버지를 본군 감물내면 박달산 아래 25리 허에 장사지냈다. 매일 묘소를 살필 때 아침에 가서 통곡하며 절한 뒤 묘에 의지해 떠나지 않다가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가 집에 계시니 밤을 지새워 머물 수 없어 어두울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가 앞에서 불을 밝혀 길을 인도하는 흔적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
하나, 공이 임종할 때 장자 귀호(龜鎬)를 불러 가로되, “오늘 어머니의 공양을 보지 못하였으니 평일처럼 겸상을 차려 오거라” 하였다. 즉시 할머니에게 아뢰니 어머니가 기뻐하며 밥상을 내오시거늘, 모자가 서로 권하며 곱절이나 드시는데 공이 눈물을 흘리며 숟가락질을 그치지 못하였다.
조재미 (아우) 효행사실 (앞 문장 이어짐)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차마 차마 사람의 일을 이루지 못하더니 어머니 또한 눈물을 흘리며 수라를 들였다. 큰형(조재의)이 이로 인해 병석에 누워 큰아들 부부에게 조율(調養)하며 가로되, “할머니를 잘 섬기거라. 그리하면 지하에서 훗날 부부와 자식이 서로 만날 때 반드시 두터운 은혜를 갚으리라” 하고 말을 마치자 마침내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휘 재미 효행사실적 하나,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질병이 있으시면 하늘을 부르짖고 통곡하며 가로되, “내 몸으로 목숨을 대신하게 하소서” 하였다.
하나, 괴산 지장리 30여 리 되는 곳으로 이사하였다. 어버이의 명으로 기운을 북돋우라는 기별이 있을 때, 가지 않으면 마음으로 부모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였고, 가면 조석의 안부를 묻는 반길(半吉)을 어기게 될까 저어되어 그 형세가 가지런하지 못하였다. 이미 경택(卿宅) 이씨 집안에 투탁하여 방이 바빠지매, 하루는 반성(反省: 돌아와 안부를 물음)하는 길에 비바람을 무릅쓰고 매일 밤길을 타고 감에 호랑이가 앞에서 불을 밝혀 길을 인도하니 발자국조차 없었다. 슬프게 지저귀며 울고 난 뒤 새벽에 집을 향해 왕래하는 기세가 파리하기가 이와 같았다.
하나, 늙으신 부모가 그 수고로움을 불쌍히 여겨 다시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니 조금도 게으른 마음이 없었다.
하나, 출타하는 길에 한 번도 빈손으로 다니지 않고, 입에 맞는 음식은 반드시 소매에 넣어 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였다.
하나, 향리 사람들이 술과 과일, 고기로 칭찬하며 큰 효자라 하였다.
하나, 어머니가 평생에 좋아하시던 음식이 생꿩(生雉)이었다. 하루는 돌아보며 공에게 이르기를, “요즘 입맛이 달지 않은데 혹 꿩고기가 있어 씹는다면 문득 입맛이 돌 것 같으나 이 일을 어찌 구할꼬?” 하였다. 공이 묵묵히 듣고 은밀히 구할 뜻을 품고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여러 개들이 수꿩 한 마리를 쫓는지라 꿩이 놀라 마을을 지나 공의 집 마간(馬飼料室)으로 날아들어 목을 박고 엎드렸다. 공이 두 손으로 잡아 어머니 처소에 바치니 보는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역시 효성에 감동한 바라” 하였다.
하나, 임자년에 늙은 아버지가 이질로 중태에 빠지시매, 공이 홀로 의원을 찾아 왕래하는 수고로움을 맡아 수주로부터 괴산 동면까지 40여 리를 매번 어두운 밤 험한 산길과 숲길을 다녔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때에 과연 호랑이 한 마리가 호위하는 듯 다니었다.
【 기 】
공(公)의 휘(諱)는 형이 재의(在義)이고, 아우가 재미(在美)이니, 가림(嘉林: 임천 조씨)의 저명한 가문이다.
고려 평장사(平章事) 가림백(嘉林伯) 휘 천혁(天赫)을 시조로 삼는다. 본조(조선)에 이르러 대대로 벼슬길(簪組)이 이어졌다.
휘 원경(元卿)에 이르러, 진사시를 거쳐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성균관 사성에 이르렀으며 유학(儒術)으로 명망이 높고 중형을 받았다. 이분이 휘 익(翊)을 낳으니, 문과에 급제하여 군자감 정(正)을 지냈다. (익이) 휘 응공(應恭)을 낳으니, 진사시를 거쳐 한림(翰林)과 황해도사를 지냈다. (응공이) 휘 찬(璨)을 낳으니, 호는 신수재(愼守齋)이다. 학식으로 소문이 나 세마(洗馬) 벼슬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음직(蔭職)으로 군자감 참봉을 지냈다.
참봉 공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휘는 형(馨)이니 지극한 행실이 있었고, 둘째 휘는 복형(復馨)이니 처사공(處士公)이다. 효성이 두터워 어버이의 병에 약을 구하러 나설 때 호랑이가 그를 태우고 다녔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렸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선생이 그의 묘지명을 쓰면서 이르기를, "희성(希聖: 복형의 자)은 형님(馨)과 더불어 명성이 같았고 서로 양보하였다. 옛적에도 효우(孝友)의 행실은 있었으나, 조씨 문중의 두 뛰어난 형제(趙門之二難)와 같은 이는 드물다." 하였다.
복형이 휘 경휘(景輝)를 낳고, 경휘가 휘 정원(正遠)을 낳았으며, 또 3대를 전하여 휘 학심(學心)을 낳으니 덕을 숨기고 살았다. 초계 정씨(草溪鄭氏) 휘 여규(汝奎)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이분이 교관(敎官) 공이며, 두 공(재의·재미)의 부친과 모친이 되신다.
정씨 부인이 6남을 낳았는데, 두 공의 차례는 첫째(장남)와 셋째이다.
【 효자처사조공묘지명 】
숭정 기원후 네 번째 경술년, 당성 홍직필(洪直弼) 지음.
【 정려중수기 】 숭정 4년 갑인년 초여름, 은진 송달수(宋達洙) 기록, 송근수(宋近洙) 씀.
【 효자 증 조봉대부 동몽교관 조공 형제 행장 】 영력 5년 계축년 6월 하순, 파산 윤응선(尹膺善) 지음.
【 쌍효각기 】 정축년 8월 상순, 동양 신현국(申鉉國)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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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집 제43권
묘지명(墓誌銘)
효자 조공 묘지명 병서〔孝子趙公墓誌銘 幷序〕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옮김>
<원문>
孝子趙公墓誌銘 幷序
惟趙氏遠有代序。始祖諱天赫。中中朝進士。樹大勳於麗朝。封嘉林伯。子孫仍籍焉。自是蟬嫣。入 本朝簪組相襲。至諱翊軍資監正。生諱應恭黃海都事。都事公擧二男。長諱璨號愼守齋。薦拜洗馬不就。其次雪江公瑗也。愼守公男諱希聖。蔭補軍資監參奉。以行義文學世家。爲左海名閥。參奉公娶全義李氏司果令胤之女。生諱復馨。是爲公也。公字汝芳。亦性於孝。事親愛敬篤摯。志物俱養。出常之行。卓類之事。所以感格神明。如王祥黔婁者。固不勝計焉。參奉公善病。往往而㞃。公親執刀圭。殫誠救護。一日癠候猝劇。公出山製藥。昏徑忙返。忽有大虎伏路左。公不少懾。諭曰情急勢迫。爾雖異物。不宜相梗。虎乃進前。低頭高尻。有若請騎然。公始揣其意。騰身其脊。虎乃起行。其疾如飛。瞬息抵家。虎仍無迹。進藥而瘳。咸稱孝感。疾革斮指進血。居憂廬墓終喪。晨昏拜廟展墓。哭諱如袒括。哀動鄕隣。由是聲聞暢蔚。爲一路所歆服。擧公實行聞于 朝。特旌其閭曰孝子之門。始公祖考都事公。爲閔公世卿女婿。閔公居忠州。卲齡喪子。公祖妣有敬姜主家之德。享山南榮養之福。而决意歸寧。用供滫瀡。愼守公奉板輿往聚外氏。克順慈心。終養外翁。仍家于忠。後承繁衍。寔爲愼守公純孝攸致。而公之至行範世。可驗其所自也。公事伯氏如父。施及同堂諸親。務盡敦睦。尤惓惓於尊祖敬宗之義。居恒自律。先德行而後文藝。克趾先美。爲幷世所欽重。而與伯氏齊名。互相推讓。晩年構一軒于昆池上。長枕大被。與共湛樂。唫哦自適。默契仁智之趣。咸稱以趙處士曰古亦有孝友之行。而尠有如趙門之二難也。 顯宗乙巳十月十六日卒。距其生己酉九月十五日。爲五十七歲。葬于忠之八峯後公山亥坐。配丹陽禹氏。直長克儀其考也。墓祔。擧五男景完,景遇,景煥,景觀,景敏。女適李敏溥。正震,正行,正五,正九。景遇出。正韓景煥出。正泰景觀出。曾玄以下不記。公歾後屢經灰劫。公私文獻。蕩然無遺。遺稿亦富而不傳。惜哉。然徵於無徵。是爲可信。以其無掇拾累列也。且公族孫尙書德潤氏。爲著 旌閭記。述世美而敍異蹟。玆可以傳信。亦奚以多爲哉。公六代孫在煕從我遊。謁隧道之文。其誠悃款。力疾而爲銘曰。
萬善百行。咸源於孝。孝悌爲仁。本立生道。嘉林炳靈。世篤行義。吁嗟乎公。克紹先懿。執玉奉盈。用全其受。至諴格神。孚及猛獸。抱終身憂。婉戀懷袖。歷選孝苑。讚諦爲首。公謂曾子。亦未有餘。煌煌 旌楔。表厥門閭。非我思存。肯恤名譽。遵養時晦。脫然天遊。與道終始。安命不憂。孫曾詵詵。充衍門楣。卽玆可驗。天道報施。聊以勸善。後人是貽。如我不信。視此銘詩。
<교감표점>
孝子趙公墓誌銘 【幷序】
惟趙氏遠有代序。 始祖諱天赫中中朝進士, 樹大勳於麗朝, 封嘉林伯, 子孫仍籍焉。 自是蟬嫣, 入本朝簪組相襲。 至諱翊軍資監正, 生諱應恭黃海都事。 都事公擧二男, 長諱璨號愼守齋, 薦拜洗馬不就, 其次雲江公瑗也。 愼守公男諱希聖, 蔭補軍資監參奉, 以行義文學世家, 爲左海名閥。 參奉公娶全義李氏司果令胤之女, 生諱復馨, 是爲公也。
公字汝芳, 亦性於孝, 事親愛敬篤摯, 志物俱養。 出常之行、卓類之事, 所以感格神明, 如王祥、黔婁者, 固不勝計焉。 參奉公善病, 往往而㞃, 公親執刀圭, 殫誠救護。 一日癠候猝劇, 公出山製藥, 昏徑忙返, 忽有大虎伏路左。 公不少懾, 諭曰: “情急勢迫, 爾雖異物, 不宜相梗。” 虎乃進前, 低頭高尻, 有若請騎然。 公始揣其意, 騰身其脊。 虎乃起行, 其疾如飛, 瞬息抵家, 虎仍無迹。 進藥而瘳, 咸稱孝感。 疾革斮指進血, 居憂廬墓終喪, 晨昏拜廟展墓, 哭諱如袒括, 哀動鄕隣, 由是聲聞暢蔚, 爲一路所歆服。 擧公實行聞于朝, 特旌其閭曰“孝子之門”。
始公祖考都事公, 爲閔公世卿女婿。 閔公居忠州, 卲齡喪子。 公祖妣有敬姜主家之德, 享山南榮養之福, 而决意歸寧, 用供滫瀡。 愼守公奉板輿往聚外氏, 克順慈心, 終養外翁, 仍家于忠, 後承繁衍, 寔爲愼守公純孝攸致, 而公之至行範世, 可驗其所自也。
公事伯氏如父, 施及同堂諸親, 務盡敦睦, 尤惓惓於尊祖敬宗之義。 居恒自律, 先德行而後文藝, 克趾先美, 爲幷世所欽重, 而與伯氏齊名, 互相推讓。 晩年構一軒于昆池上, 長枕大被, 與共湛樂, 吟哦自適, 默契仁智之趣, 咸稱以趙處士曰: “古亦有孝友之行, 而尠有如趙門之二難也。”
顯宗乙巳十月十六日卒, 距其生己酉九月十五日, 爲五十七歲。 葬于忠之八峯後公山亥坐。 配丹陽禹氏, 直長克儀其考也。 墓祔。 擧五男景完、景遇、景煥、景觀、景敏。 女適李敏溥。 正震、正行、正五、正九, 景遇出; 正韓, 景煥出; 正泰, 景觀出。 曾玄以下不記。
公歿後屢經灰劫, 公私文獻蕩然無遺, 遺稿亦富而不傳, 惜哉! 然徵於無徵, 是爲可信, 以其無掇拾累列也。 且公族孫尙書德潤氏爲著旌閭記, 述世美而敍異蹟, 玆可以傳信, 亦奚以多爲哉? 公六代孫在煕從我遊, 謁隧道之文。 其誠悃款, 力疾而爲銘。
曰: 萬善百行, 咸源於孝。 孝悌爲仁, 本立生道。 嘉林炳靈, 世篤行義。 吁嗟乎公! 克紹先懿。 執玉奉盈, 用全其受。 至諴格神, 孚及猛獸。 抱終身憂, 婉戀懷袖。 歷選《孝苑》, 讚諦爲首。 公謂曾子, 亦未有餘。 煌煌旌楔, 表厥門閭。 非我思存, 肯恤名譽? 遵養時晦, 脫然天遊。 與道終始, 安命不憂。 孫曾詵詵, 充衍門楣。 卽玆可驗, 天道報施。 聊以勸善, 後人是貽。 如我不信, 視此銘詩。
[주-D001] 雲 : 底本에는 “雪”. 《丈巖集ㆍ同副承旨雲江趙公墓碣銘》 및 기타 용례에 근거하여 수정.
<번역문>
효자 조공 묘지명 병서 〔孝子趙公墓誌銘 幷序〕
조씨(趙氏)는 멀리 세계(世系)가 있다. 시조 휘 천혁(天赫)은 중국에서 진사과에 급제하고 고려(高麗)에서 큰 공훈을 세워서 가림백(嘉林伯)에 봉해졌으니, 자손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이어 내려와서, 본조에 들어와 높은 벼슬에 오른 이들이 이어졌다. 휘 익(翊)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이었고, 이 분이 휘 응공(應恭)을 낳았으니, 황해 도사(黃海都事)이다. 도사공(都事公)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휘 찬(璨)은 호가 신수재(愼守齋)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 세마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차남은 운강공(雲江公) 원(瑗)이다.
(至諱翊軍資監正, 生諱應恭黃海都事。 都事公擧二男, 長諱璨號愼守齋, 薦拜洗馬不就, 其次雲江公瑗也。 ) 신수공(愼守公)의 아들 휘 희성(希聖)은 음보로 벼슬하여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이 되었으니, 도의(道義)와 문학(文學)의 세가(世家)로서 우리나라의 명문이 되었다. 참봉공(參奉公)은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사과(司果) 영윤(令胤)의 따님에게 장가들어서 휘 복형(復馨)을 낳으셨으니, 이분이 공이시다.
공은 자가 여방(汝芳)이니, 효성을 타고나서 어버이를 섬김에 사랑과 공경이 도타워서 마음을 받드는 것과 물질로 봉양하는 것을 모두 갖추어 봉양하였다. 출중한 행실과 특출한 일로서 신명을 감격시키기를 왕상(王祥)과 검루(黔婁)처럼 한 것이 진실로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았다. 참봉공(參奉公)이 병을 잘 앓아서 왕왕 위독하였는데, 공은 몸소 도규(刀圭)를 잡고서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고 간병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의 병세가 갑자기 심해지자, 공은 산을 나와서 약을 짓다가 저물녘 길에서 돌아가는 방법을 잊었는데, 홀연 큰 호랑이가 길 좌측에 엎드려 있었다.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르쳐서 말하기를, “정황이 급박하니, 네 비록 이물(異物)이지만 저지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호랑이가 이에 앞으로 나와 머리를 숙이고 꽁무니를 들고서 마치 타기를 청하는 것처럼 하였다. 공이 비로소 그 뜻을 헤아리고서 그 등에 몸을 올려 탔다. 호랑이가 이에 일어나서 가는데, 빠르기가 마치 날아가는 것과 같아서 순식간에 집에 도착하였고, 호랑이는 이에 종적이 사라졌다. 약을 올려서 부친의 병이 나으니, 모두 효성이 감동시킨 것이라 일컬었다.
어버이의 병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올렸고, 삼년상을 치를 때에 여막에서 살면서 상을 마쳤으며, 아침저녁으로 사당을 뵙고 성묘하였고, 기일에 곡할 때에 처음 상(喪)을 당하였을 때와 같이 하여, 그 슬픔이 이웃사람들을 감동하게 하니, 이를 말미암아 명성이 널리 퍼져서 한 도(道)의 사람들이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공의 실제 행실들을 들어서 조정에 알리자, 조정에서 특별히 정려하여서 ‘효자지문(孝子之門)’이라 하였다.
애초에 공의 조고(祖考)이신 도사공(都事公)께서 민세경(閔世卿) 공의 사위가 되었는데, 민공(閔公)이 충주(忠州)에 살면서 고령의 나이에 자식을 잃었다. 그러자 공의 조비(祖妣)께서 경강(敬姜)이 집안을 다스렸던 것과 같은 덕(德)을 지니고서 산남(山南)이 부모님을 영화롭게 봉양하였던 것과 같은 복을 누리고 있었으나, 친정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뵙고서 수수(滫瀡)로 봉양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자 아들인 신수공(愼守公)이 판여(板輿)로 모시고서 외가에 가서 모여, 어머니의 마음에 능히 순종하여 외조부를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하고, 그대로 충주(忠州)에서 살아 후손들이 번창하였다. 이는 실로 신수공(愼守公)의 순전한 효가 이룬 바이자, 공의 지극한 효행이 세상의 모범이 된 것에 연원이 있음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다.
공은 백형(伯兄)을 아버지처럼 섬겼고, 이것이 동당(同堂)의 친족들에게까지 미쳐서 지극히 돈독하고 화목하기를 힘썼으며, 조상을 높이고 종통(宗統)을 공경하는 의리를 더욱 깊이 유념하였다. 평소에 항상 스스로 단속하여서, 먼저 덕행에 힘쓰고 그런 뒤에 문예(文藝)를 닦아 선조의 아름다움을 능히 이어서,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흠모를 받고 중히 여겨졌으니, 백형(伯兄)과 이름을 나란히 함에 서로 겸손하게 사양하였다. 만년에 곤지(昆池) 가에 헌(軒) 하나를 짓고서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고서 함께 즐거워하면서 시를 읊으며 자적하여 인(仁)과 지(智)의 취향에 묵묵히 계합되었으니, 모두들 ‘조 처사(趙處士)’라고 일컬으면서 말하기를, “옛날에도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을 지닌 이가 있었으나, 조씨(趙氏) 가문의 이난(二難)과 같은 경우는 드물다.”라고 하였다.
현종(顯宗) 을사년(1665, 현종6) 10월 16일에 별세하였으니, 태어난 기유년(1609, 광해군1) 9월 5일로부터 57세가 된다. 충주의 팔봉산(八峯山) 뒤 공산(公山)의 해좌(亥坐)에 장례하였다. 배위(配位)는 단양 우씨(丹陽禹氏)로 직장(直長) 극의(克儀)가 그 선고(先考)이시다. 묘에 합부(合祔)하였다. 5남을 낳았으니, 경완(景完)ㆍ경우(景遇)ㆍ경환(景煥)ㆍ경관(景觀)ㆍ경민(景敏)이고, 딸은 이민부(李敏溥)에게 시집갔다. 정진(正震)ㆍ정행(正行)ㆍ정오(正五)ㆍ정구(正九)는 경우(景遇)의 소생이고, 정한(正韓)은 경환(景煥)의 소생이며, 정태(正泰)는 경관(景觀)의 소생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이 별세한 후에 여러 번 회겁(灰劫)을 겪느라 공사(公私)의 문헌들이 소실되어 남은 것이 없게 되었으니, 유고(遺稿) 또한 풍부하였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애석하도다. 그러나 징험할 것이 없는 데서 징험한다면 이것이 바로 믿을 수 있는 것이 되니, 주워 모아서 엮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공의 족손(族孫)인 상서(尙書) 덕윤(德潤) 씨가 정려기(旌閭記)를 지어서 대를 이은 아름다움을 서술하고 기이한 행적을 적었는바, 이는 확실한 사실로서 전할 수 있는 것이니, 어찌 많을 필요가 있겠는가. 공의 6대손인 재희(在煕)가 나를 종유하면서 묘도(墓道)에 새길 묘지명을 요청하니, 그 정성이 간곡하여 병을 무릅쓰고 명(銘)을 짓는다.
만 가지 선과 백 가지 행실이 / 萬善百行
모두 효에서 비롯되네 / 咸源於孝
효와 제는 인을 행하는 근본이니 / 孝悌爲仁
근본이 확립되면 도가 생기네 / 本立生道
가림의 영기가 빛나 / 嘉林炳靈
대대로 행의가 독실하였네 / 世篤行義
아, 공이여 / 吁嗟乎公
선대의 아름다움을 능히 이었도다 / 克紹先懿
옥을 잡고 가득 찬 그릇을 받들 듯이 하여 / 執玉奉盈
그 품부 받은 바를 온전히 하였네 / 用全其受
지극한 정성이 귀신을 감동시켜서 / 至諴格神
믿음이 금수에 미쳤네 / 孚及猛獸
종신토록 근심을 안고서 / 抱終身憂
그리워하고 마음에 품었네 / 婉戀懷袖
《효원》에서 하나하나 꼽아보건대 / 歷選孝苑
왕찬체가 으뜸이었네 / 讚諦爲首
공을 증자라고 하더라도 / 公謂曾子
또한 지나치지 않을 것이네 / 亦未有餘
빛나는 정려문이여 / 煌煌旌楔
그 문려에 정표하였네 / 表厥門閭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니니 / 非我思存
어찌 명예를 돌아보겠는가 / 肯恤名譽
준양시회하여서 / 遵養時晦
초연히 천유하였네 / 脫然天遊
시종일관 도를 따라서 / 與道終始
운명을 편안히 여겨 근심하지 않았네 / 安命不憂
자손들 번창하여 / 孫曾詵詵
문호에 가득하네 / 充衍門楣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으니 / 卽玆可驗
천도는 선인에게 보시하네 / 天道報施
이로써 선을 권면하니 / 聊以勸善
후인에게 이를 남겨주었네 / 後人是貽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 如我不信
이 비명을 볼지어다 / 視此銘詩
[주-D001] 휘 익(翊) : 조익(趙翊, 1474~1547)으로,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익지(翊之)이다. 1504년(연산군10)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주-D002] 휘 응공(應恭) : 조응공(趙應恭, ?~?)으로,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숙형(叔亨)이다. 1543년(중종38)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같은 해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황해 도사(黃海都事)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에 이르렀다.
[주-D003] 운강공(雲江公) 원(瑗) : 조원(趙瑗, 1544~1595)으로,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백옥(伯玉), 호는 운강이다. 1572년(선조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 좌랑, 삼척 부사(三陟府使), 승지(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주-D004] 왕상(王祥) : 삼국 시대 위(魏)나라 말엽부터 서진(西晉) 초기까지의 인물로,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겨울에 생선을 드시고 싶어 하시기에 강에 가서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들어가서 고기를 잡으려고 하자, 잉어 두 마리가 얼음 위로 뛰어나왔다고 한다. 《晉書 卷33 王祥列傳》 《小學 善行》
[주-D005] 검루(黔婁) : 남제(南齊)의 효자로 알려진 유검루(庾黔婁)를 말한다. 유검루가 잔릉 현령(孱陵縣令)이 되었는데, 현에 부임한 지 10일도 못 되어 갑자기 놀라서 온몸에 땀이 흐르므로 이상하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 유이(庾易)가 병에 걸려 있었다. 의원이 “병의 차도를 알려면 변을 맛보아야 하는데, 변이 달면 병세가 더하고 쓰면 형세가 호전된다.”라고 하자, 검루는 직접 변의 맛을 보았는데, 그 맛이 달고 미끄러우므로 더욱 근심하고 괴로워하였다. 이에 저녁이 되면 매양 북극성에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이 대신 죽기를 축원하였다. 그러자 하늘이 감동하여 그달 그믐까지 아버지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었다고 한다. 《南史 卷50 黔婁列傳》 《小學 善行》
[주-D006] 도규(刀圭) : 약(藥)의 양(量)을 헤아리는 기구로, 모양이 규(圭)와 비슷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주-D007] 경강(敬姜)이 …… 것 : 경강은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대부였던 공보 목백(公父穆伯)의 아내이자 공보 문백(公父文伯)의 어머니로, 일찍 과부가 되었으나 아들을 잘 교육하고 근검하게 집안을 다스려서, 현숙하며 예(禮)를 잘 아는 여인으로 알려졌다. 《國語 魯語下》 《小學 稽古》
[주-D008] 산남(山南)이 …… 것 : 산남은 당(唐)나라 때에 산남서도 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를 지낸 최관(崔琯)을 말한다. 최관의 증조모인 장손 부인(長孫夫人)이 나이가 많아 치아가 없어 밥을 먹지 못하였는데, 최관의 조모인 당 부인(唐夫人)이 시어머니인 장손 부인을 효성으로 섬기면서 젖을 먹여서 곡식을 먹지 않고도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장손 부인은 집안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며느리의 은혜를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으니, 며느리의 자손들이 모두 며느리처럼 효도하고 공경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小學 善行》
[주-D009] 수수(滫瀡)로 봉양할 :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다. ‘수수’는 전분을 음식에 섞어 부드럽게 만드는 조리법의 일종으로, 《예기(禮記)》 〈내칙(內則)〉에서 부모를 음식으로 봉양하는 방법을 말하면서 “근(堇), 환(荁), 분유(枌榆)의 날것과 말린 것을 잘 조리하여 부드럽게 하고 기름진 것으로 맛있게 한다.[堇荁枌榆免薧, 滫瀡以滑之, 脂膏以膏之.]”라고 하였다.
[주-D010] 판여(板輿) : 부들방석을 깔아 푹신하게 만든 노인용 가마를 이른다.
[주-D011] 조상을 …… 공경하는 : 《예기(禮記)》 〈대전(大傳)〉에 “사람의 도는 부모를 친애하는 것이니, 부모를 친히 하기 때문에 조상을 높이고, 조상을 높이기 때문에 종통을 공경하고, 종통을 공경하기 때문에 종족을 수합한다.[人道親親也, 親親故尊祖, 尊祖故敬宗, 敬宗故收族.]”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2] 긴 …… 덮고서 : 형제간에 우애가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당 현종(唐玄宗)이 우애가 깊었는데, 이에 대해 “상이 평소 우애하여서, 근세 제왕들 중에 여기에 미칠 수 있는 이가 없다. 처음에 즉위하여서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형제와 함께 잤다.[上素友愛, 近世帝王莫能及. 初卽位, 爲長枕大被, 與兄弟同寢.]”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資治通鑒 卷211 唐紀 玄宗 開元2年》
[주-D013] 인(仁)과 지(智)의 취향 : 《논어》 〈옹야(雍也)〉에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仁者樂山, 知者樂水.]”라고 보인다.
[주-D014] 이난(二難) : 난형난제(難兄難弟)와 같은 말로, 덕행과 학문이 뛰어난 형제를 가리켜 이난이라고 한다. 후한(後漢) 때 진식(陳寔)의 여섯 아들 가운데 진기(陳紀)와 진심(陳諶)이 가장 덕행이 뛰어났는데, 하루는 진기의 아들 진군(陳群)과 진심의 아들 진충(陳忠)이 각기 자기 아버지가 낫다고 다투다가 조부에게 묻자, 진식이 “원방은 형 되기 어렵고 계방은 아우 되기 어렵다.[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원방은 진기의 자이고, 계방은 진심의 자이다. 《世說新語 德行第一》
[주-D015] 회겁(灰劫) : 보통 겁회(劫灰)라고도 하는데, 여기서는 전란(戰亂)을 가리킨다. 우주가 한 번 생성해서 존속하는 기간을 1겁(劫)이라 하고, 겁이 다하면 세찬 불길이 하늘과 땅을 태우는데, 여기서 생겨난 재를 겁회(劫灰)라 하는바, 이는 곧 재앙을 뜻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곤명지(昆明池)를 파니 땅속에서 검은 재가 나왔는데, 서역(西域)에서 온 승려 축법란(竺法蘭)이 이를 보고 겁회라고 하였다. 《高僧傳 卷1 竺法蘭》
[주-D016] 확실한 …… 것 : 《춘추》 환공(桓公) 5년에 “봄 정월 갑술ㆍ기축에 진후 포가 죽었다.[春正月, 甲戌, 己丑, 陳侯鮑卒.]”라고 하였는데,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어찌하여 죽은 날짜를 두 개나 기록하여 죽었다고 하였는가? 《춘추》의 의리는 사건이 확실한 것은 확실한 것 그대로 전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것 그대로 전하기 때문이다.[卒何爲以二日卒之? 春秋之義, 信以傳信, 疑以傳疑.]”라고 하였다.
[주-D017] 효와 …… 생기네 : 《논어》 〈학이(學而)〉에, 유자(有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근본을 힘쓰니, 근본이 확립되면 도가 생겨난다. 효와 제는 그 인을 행하는 근본일 것이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하였다.
[주-D018] 옥을 …… 하여 : 부모님을 공경히 받드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효자는 마치 손에 옥을 잡고 있는 것 같이 하고, 가득 찬 그릇을 받들고 있는 듯이 하며, 공경하고 삼가서 마치 들고 있는 것을 이기지 못하듯이 하고 장차 잃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처럼 한다.[孝子如執玉, 如奉盈, 洞洞屬屬然, 如不勝, 如將失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9] 효원에서 …… 으뜸이었네 : 《효원(孝苑)》에 전하기를, 당(唐)나라의 효자(孝子) 왕찬체(王讃諦)가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어, 땅을 다져서 봉분을 완성하기까지 20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는바, 검남(劍南) 지방의 효자 16명을 뽑아 아뢰게 하였는데, 그중 왕찬체가 가장 처음에 있었다고 한다. 《淵鑑類函 卷271 孝三》
[주-D020] 증자 :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參)으로, 효행에 뛰어났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증자는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섬겼다고 할 수 있으니 부모님을 섬길 때 증자와 같이 하는 것이 좋다.[若曾子, 則可謂養志也, 事親若曾子者可也.]”라고 하였다.
[주-D021] 준양시회(遵養時晦) : 때에 따라 힘과 덕을 기르며 자신을 숨김을 이른다. 《시경》 〈주송(周頌) 작(酌)〉에 “아, 성대한 왕사로서 도를 따라 힘을 길러 때로 감추어 크게 밝아진 뒤에야 이에 큰 갑옷을 쓰셨도다.[於鑠王師, 遵養時晦, 時純煕矣, 是用大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2] 천유(天遊) : 정신이 아무런 구속 없이 자연 속에 노니는 것으로, 《장자》 〈외물(外物)〉에 “사람의 마음에는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천유가 있다. 방에 공간의 여유가 없으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다투고, 마음에 천유가 없으면 여섯 개의 감각을 담당하는 기관이 서로 싸운다.[心有天遊. 室無空虛, 則婦姑勃豀, 心無天遊, 則六鑿相攘.]”라고 하였다.
[주-D023] 번창하여 : 원문의 ‘선선(詵詵)’은 많은 모양으로 자손이 번창한 것을 가리킨다. 《시경》 〈주남(周南) 종사(螽斯)〉에 “메뚜기가 많이 모였으니, 마땅히 네 자손이 많겠구나.[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 振振兮.]”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김성은 (역) |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