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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4. 묵상글 (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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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룩은 적은 양일지라도
반죽을 크게 부풀릴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하는 일들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라도
그 영향력은 적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받는 영향은 무엇인가요?
앞선 이야기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 요구는 단순한 호기심도 아니고
믿기 위한 궁금함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에 대한
거부의 표현이었습니다.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논리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믿지 않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듣기에 그럴 듯한 표현들은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고
그 의견에 동조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누룩이 부풀게 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았어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구는 하느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눈속임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 사건들을 논리적으로만,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 한다면
이 사건을 기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논리와 이성을 강조할수록
믿음에서는 멀어지게 됩니다.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논리와 이성은 믿음을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사건을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비논리적이며 비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판단하며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갑니다.
현대 사회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합니다.
믿기 어려운 것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믿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논리와 이성이 우리 삶에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우리도 과학이라는 새로운 누룩에 영향을 받아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빵에서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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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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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마르 8,17)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달마누카지방에서 바리사이들과 표징에 대한 논쟁이 있은 후에, 배를 타고 벳사이다로 건너가던 중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마르 8,14-16)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마르 8,14)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개의 빵은 대체 어떤 빵인가?
사실, 이 빵은 마르타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직 필요한 하나인 빵’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전부인 하나인 빵’ 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하더라도 이 ‘하나’를 가지지 못하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고 마는, 그러나 이 “한 개”만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되는 그런 ‘빵’입니다. ‘배’가 교회의 표상이라면, ‘빵’은 바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
대체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누룩”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일컫는다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행동하며,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소유와 권력과 화려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바로 그들의 그러한 삶의 방식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녀야 할 누룩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서야 무엇일까요? 비록 씨앗으로 뿌려지지만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그 ‘말씀의 누룩’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말씀이 우리의 모든 삶을 부풀리게 할 것입니다. 바로 이 ‘누룩인 말씀의 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 8,17)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닫다”(σινιετε)라는 단어는 ‘나란히 서다’, ‘함께(같이) 서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개의 빵”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이신 우리 주님, 그리스도’ ‘곁에’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마르 8,14)
주님!
실상 필요한 빵은 한 개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오직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제게는 이미 당신이 있고, 당신만이 진정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당신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일 뿐,
제게는 당신만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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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
누룩은 부풀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트나 베이킹 파우더와 같은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그래서 빵과 술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13,33). 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누룩이 좋은 것에 들어가서 부풀리면 그만큼 좋은 것으로 부풀려질 것이고, 반대로 나쁜 것에 부풀려지면 나쁜 것이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누룩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마태23장 참조)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율법준수에만 구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구원을 소유와 지배, 권력의 화려함 속에서 찾았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들의 사고방식, 삶의 양식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먹게 해 주셨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빵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참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필리피서 3장 7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린 바오로 사도가 부럽습니다. 오늘 우리도 과한 욕심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 그리고 나의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나의 누룩이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삶의 자세, 잘못에 대해 벌주시고 나를 감시하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나의 시각, 재물에 대한 욕심, 부귀영화에 대한 동경,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차에 십자가나 묵주를 매달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려니 생각하는 태도, 허영, 가식 등등이 내가 지닌 누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누룩은 버리고 하느님 말씀의 누룩, 사랑의 누룩을 부풀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결국에는 빵의 기적에 관한 얘기를 상기시키시면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21)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느냐?” 아니면 “때가 되면 알리라.” 어떻게 받아들이든 능력의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근심, 걱정에 갇혀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으니 오늘 우리와 주님 사이의 통교는 오죽하겠습니까? 주님과 깊은 만남에 이르는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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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여행을 가거나, 신문 홍보를 다니면서 자주 ‘짐’을 싸게 됩니다. 꼭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세면도구, 속옷, 책, 노트북, 필기구, 바람막이, 사제복을 주로 가지고 다닙니다. 지난번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갈 때입니다. 저는 깜빡했는데 신부님 한분은 본인의 제의를 가져왔습니다. 성지에서 제의를 빌려 입었지만 본인만의 제의를 가지고 온 신부님이 부러웠습니다. 저는 키가 작은 편이라서 공동 제의는 잘 맞지 않습니다. 그 뒤로는 저도 여행을 갈 때나, 성지순례를 가면 저의 제의를 꼭 가지고 다니고 있습니다. 이번에 엘파소에 갔을 때도 저의 제의를 가져갔기에 저에게 맞는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 할 수 있었습니다. 강론 중에 신자들에게 “서울대교구에서 좋은 사제를 보냈으니 신부님을 잘 도와주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제에게는 사제복과 제의가 구원의 방주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노아’에게 구원의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방주는 물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곳은 말이나 소가 여물을 먹던 ‘구유’였습니다. 부유한 집의 안방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살던 화려한 궁궐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이렇게 누추하고, 겸손한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부족해도, 아무리 모자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구유와 방주는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주는 항공모함처럼 큰 배가 아닙니다. 방주는 수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여객선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니면 이미 구원의 방주를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간다면 이미 구원의 방주를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연민의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한다면 이미 구원의 방주를 얻은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 다른 방주를 구원의 방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공과 명예 그리고 권력입니다. 비록 화려해 보이지만, 비록 부러워 보이지만 그것들은 결코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해서 많은 신앙인들이 쉽게 가라앉는 방주를 어렵게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구원의 방주를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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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재미있는 실험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래서 늘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 10명을 세워두고 그 앞에 아름다운 여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밝은 미소와 함께 윙크하고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10명의 남자에게 앞의 여성이 누구에게 미소를 짓고 윙크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모두 자신을 보고 미소 짓고 윙크했다고 대답합니다.
이번에는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 남의 눈치 보는 것에 더 익숙한 남자 10명을 세웠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여성이 등장하면서 밝은 미소와 함께 윙크하고는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미소를 짓고 윙크했느냐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보고 미소 짓고 윙크했다고 말합니다.
이 실험을 보면서, 주님의 시선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분명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이 많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지요.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신다고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서 불평불만을 합니다. 정말로 그렇게 차별하시는 주님이실까요? 아닙니다. 지금 내 마음이 주님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아서, 또 주님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어서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또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에 어떤 것도 다 할 수 있다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세상의 말과 행동에 흔들린다면, 나를 바라보시고 또 함께하시는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조심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라고 분부하십니다. 누룩은 나중에 어마어마한 효과를 내는 작고 감추어진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라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옳게 보이지만 실상은 많은 악이 감추어져 있어서 사람들을 나쁜 쪽으로 이끌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이들의 위선을 조심하려는 것이 아닌, 빵이 없다고 수군거릴 뿐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물질적인 빵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통렬히 꾸짖습니다. 그래서 전에 행했던 빵의 기적을 다시 기억하게 하면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에만 집중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어떤 것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용기입니다. 그래야 세상의 것에 흔들리지 않고, 힘차게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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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사람은 더 강한 자를 향해 분노하며, 비겁한 자는 더 약한 자를 향해 분노한다(루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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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깨달음의 여정-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며 와닿는 첫 느낌은 주님의 인간에 대한 참 깊은 좌절감입니다. 창세기의 하느님이나 복음의 예수님이나 똑같습니다. 이는 때로 우리가 세상 인간이나 우리 자신을 보면서도 때로 느끼는 좌절감이기도 합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참 구제 불능같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광야인생 제대로 미쳐 살면 성인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된다고 주저없이 단언하곤 합니다. 참 사람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생공부가 사람되는 공부요, 평생공부해도 될까 말까한 참사람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인간 창조에 대해 후회하고 아파하는 마음이 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내가 그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마음에 들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사람들같습니다. 그 장구한 세월이 지난 오늘에 주님께서 보셔도 똑같은 인간 현실에 깊은 좌절감을 지닐 듯 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끈 솟았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막연히 남탓 할 것 없이 나부터 참사람이 되고자,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평생 분투의 노력을 다해 보자는 결의입니다.
삶은 부단한 선택입니다. 참사람되고자 하는 선택보다 고귀한 선택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좋은 선택에 이어 부단한 의식적 훈련에 습관화입니다. 참 요즘 제가 많이도 강조한 선택-훈련-습관의 도식입니다. 바로 창세기에서 반갑게 발견되는 모델, 한사람이 바로 노아입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
8절에 이어 생략된 9절까지 내용입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Noah walked with God)’라는 영어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직역하면 평생 하느님과 함께 걸어갔다는 것이니 평생 도반, 평생 동반자 하느님입니다. 앞서 5장 24절에 나오는 에녹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소망이 담겨 있는 서품 상본의 성구이기도 합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longer here, for God took him)’
참 멋지고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죽음 없이 승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하여 구약에서는 에녹, 모세, 엘리야 셋을 승천한 인물로 여깁니다. 에녹 역시 평생 도반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걷기의 도보 운동을 할 때는 혼자가 아닌 하느님과 함께 걷고 있음을 의식하기 바랍니다. 저는 수도원 하늘길을 걸을 때 그렇게 합니다. 이 또한 복된 영성훈련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가까이 있는 제자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느끼시는 모습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악한 성향, 부패와 타락의 상징인 누룩에 견주어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주의를 줬는데 동문서답식으로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며 현실적 걱정을 합니다. 제대로 경청하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는 완고한 영혼들입니다.
창세기의 악한 사람들이나 복음의 완고한 제자들 대동소이 무지의 악에서, 무지의 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입니다. 참 고질적 인간 마음의 질병이 무지입니다. 무지의 완고함, 탐욕, 질투등 온갖 악의 원천이 무지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 동방영성에서 참 많이 강조하는 무지입니다. 무지의 인간, 인간의 부정적 정의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무지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이어 5천명을 먹이신 기적,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상기시키며, 다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로 끝맺습니다. 망각은 영성생활의 적입니다. 기억없이는 영성생활도 없습니다. 영성생활은 기억입니다. 주님 은혜 잊지 말고 기억하라 얼마나 많이 강조합니까?
기억하여 현재화하여 살기 위해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기도를 바치는 수도자들입니다. 말그대로 기억의 훈련입니다. 이래서 본의 아니게 맞이하는 치매가 영성생활에 얼마나 큰 재앙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비관할 것도, 좌절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포크레인으로 뽑아놓은 거대한 배나무 뿌리들을 보며 장구한 세월, 침묵중에 묵묵히, 살기 위해, 뿌리내리기 위해, 하루하루 날마다 얼마나 분투의 노력을 다한 치열한 배나무들이었는지 생각하며 제 믿음의 뿌리를 연상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뿌리를 상징하는 거대한 배나무 뿌리들은 참 좋은 희망의 표지가 되어 우리의 분발의 의욕을 북돋아 줍니다. 다음 시편 말씀과 찬미가의 기도도 참 좋은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진리여 사랑이여 목적이시여, 우리의 다함없는 행복이시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바라며, 주님께 도달하게 하여 주소서.”(월요일 3시경)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들이요, 우리 마음 안에 심어주신 하느님 향한 믿음과 희망,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목적없는 여정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무지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여정, 회개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여정에 따라 주님을 닮아감으로 무지에서 해방되어 겸손하고 지혜롭고 순수하고 의로운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슬라브인의 사도들이라 칭하는 데살로니카 출신 메테디오 주교와 치릴로 수도자 형제의 기념일입니다. 9세기 성인 형제들로 이들의 평생 분투의 노력도 감동적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기존의 서방 수도회의 아버지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외에 슬라브의 사도들인 치릴과 메토디우스의 두 수도자와 함께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다 성녀와 스웨덴의 브리지따 성녀, 그리고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함으로 모두 6명 성인이 유럽 대륙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늘 생각하는바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은 평생 휴식이 없었다는 것, 평생 고통이 따랐다는 것, 고통중에도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어느 베네딕도회 아빠스의 묵상글도 좋은 힘이, 격려가 되었습니다.
“영성생활은 경주와 같습니다. 아픔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것입니다. 결국 아픔도 사라집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 인생경주에서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다리의 아픔을 느낄 때 동료 경주자들도 똑같이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느긋해지고자 하는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픔은 느긋하라(slow down)는 신호가 아니라 더욱 힘차게 달리라(speed up)는 신호입니다.
평범함과 위대함은 이런 순간들에 의해 결정됩니다. 영성생활은 경주와 같습니다. 유혹의 순간은 위기이자 기회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우리는 편안함을(for comfort)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위대함(for greatness)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는 복음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이것이 의로움(righteousness)이요, 이것이 아름답습니다(beautiful).”
삶의 안락함에서 벗어나 부단히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의로운 삶이요 아름다운 삶이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의롭고 아름다운 깨달음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시 한연을 나눕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시종여일始終如一 살아가는 삶이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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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 주님께서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과연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은 무엇일까요? 덩달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중에도 제자들은 빵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 그리고 제자들의 빵에 대한 걱정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것에 대한 갈망과 걱정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세상 지위, 즉 ‘라삐’ 혹은 ‘선생님’이라는 지위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살았습니다.
헤로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살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 것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주님 곁에 있으면서 제자들은 빵 걱정 즉 세상 걱정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나요? 혹시 그 세상 것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혹시 그 세상 것이 우리 마음속의 주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주님께 내어 들려야 할 자리를 세상 것들이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느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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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디 살고 계신가요?
저의 이 질문은 주소를 묻는 말이 아님을 눈치채셨는지요?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고,
평안한 사람은 현재에 산다.
다시 질문해 보겠습니다. 지금 어디 살고 계신가요? 과거에 좋았던 것들만 기억하며 현재를 불평과 불만으로 채우고 계신가요? 아니면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잡으려고 늘 초조해하며 살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우리 마음이 늘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제도 그 평안을 바라지만 우리 주님께서 우리 마음이 평안하기를 오늘도 바라고 계십니다.
지금을 살아보세요. 지금에 만족하고, 지금에 감사하며 살아보세요.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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