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곳
백지은
시장은 시장만이 가지고 있는 휴머니즘이 있다.비가 내리면 오랜 습관처럼 시장에 간다. 우산에 수놓인 나염 꽃들이 덩달아 빗속으로 숨어드는 것 같다. 터가 넓은 시장 안은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상인들의 머리 위로 안개가 피어오른다. 막 도착한 짐을 찬찬히 풀어내는 늙은 짐꾼의 손마디 마디 검은 주름에 겹겹의 세월이 숨을 쉰다.
안개 부딪는 소리 아득하게 들려오기도 한다. 울타리 없는 비닐 노점은 고향집 처마 아래 떨어지는 빗물 같다. 빗물로 질펀하게 젖은 시장 안을 가로질러 기름칠로 범벅된 손으로 호떡을 만들어 파는 할머니 노점에 이른다. 오늘도 말랑말랑한 호떡을 쉼 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마술사 같은 손으로…….
호떡에서 설탕이 녹아 달콤한 꿀물을 만든다. 호떡은 할머니의 세월이다. 동그란 호떡이손으로 만들었는데도 틀에 찍어낸 것같이 똑같다.
할머니는 호떡을 팔아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다 보냈다. 이제는 쉬어도 될 연세이지만 호떡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나도 할머니의 호떡을 먹으면서 타향에서의 외로움을 달래었다. 부산에서 시집와 대구에는 연고가 없던 나는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시장으로 달려갔다. 할머니의 호떡가게 앞에서 할머니가 호떡을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받곤 했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보고 있으면 고향집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볼일이 없어도 그곳에 가보곤 했다.
모락모락 꽃이 핀다. 뜨거운 호떡을 ‘후후’ 불어 입안으로 집어넣으며 사람들은 무언지 모를 이야기를 나눈다.
할아버지가 호떡 하나를 주문한다. 할아버지의 행색은 낡고 초라하다. 할아버지는 뜨거운 호떡을 일회용 컵에 받아들고는 어딘가로 향한다. 조금 가니 건어물 상회가 있고 좌측은 떡집, 식육점, 신발가게가 있고 참기름집 건너 반찬가게, 그 끝쯤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후미진 곳에서 난전을 벌여놓고 있었다. 물건이라야 누런 스티로폼 박스 위 우엉 몇 뿌리를 놓고 팔고 있었다. 할아버지 앞으로 아이가 뛰어 온다. 할아버지는 조금 전까지의 표정과는 다르게 주름을 활짝 펴고 “넘어진다. 조심해” 품으로 파고드는 손자에게 호떡을 쥐어준다. 아이는 할아버지가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신발가게 아주머니가 우엉값을 물어보고는 우엉을 사간다. 오늘 저녁 우엉조림이라도 하시려나. 우엉을 한쪽에 두고 진열된 신발의 먼지를 턴다. 이리저리 자리도 바꾸며 손님이 없는 무료함을 달래어 본다. 조금 있으니 전화벨이 울린다. 딸아이다. “내일 소풍가니까. 김밥 재료 사 와.” 목소리에 벌써 신이 나 있다. 가게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우엉을 칼로 베낀다. 금방 손이 까매졌다. 까매진 손으로 연신 이마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손님이 들어온다. 비닐 앞치마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생선가게 아주머니다. 장화가 찢어져 물이 들어온다며 이것저것 골라보더니 흰 장화 하나를 골라 부리나케 뛰어간다. 그 사이에 생선이 상할까 빨리 가서 얼음이라도 채워 넣으려나. 생선은 아주머니에게 꿈을 약속한다. 고단한 삶들이지만 절대 꿈을 잃지 않는 그들이 좋다.
시장은 상인들이 만들어내는 사연과 눈물과 한숨이 묻어있다. 대형할인점들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시장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가 숨어있다.
호떡 한 개를 받아들고는 생각에 잠긴다. 시장을 다니기 시작한 지가 삼십 년은 된 것 같다. 수줍음 많은 새댁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중년이 되어있다. 나이는 먹어도 가지고 있는 감성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이제는 아이들 뒷바라지 다 끝내고 쉬어도 될 만큼 돈도 벌었을 것 같은 할머니가노점을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가끔 호떡을 먹으러오는 정든 사람들 때문일까 아니면 시장의 풍경이 좋은 것일까.
마음이 심란하면 시장에 간다.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울려 퍼지는 시장에 가면 삶에 대한애착심이 생긴다. 살아있다는 확인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비가 오는 시장 한복판에서 푸른 생선냄새를 맡는다.
─반년간지 『시에티카』 2014년 · 하반기 제11호
백지은
부산 출생. 2013년 『시에』로 등단.
첫댓글 호떡에 사연이 삶자체가 되네요 시장풍경도 살았있고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