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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언자 아론
출 7: 1-4. 행 14: 8-12
저의 장인 장모님은 지금 캐나다 밴쿠버에 계십니다. 장인어른께서는 한국에서 교직에 계시다가 교장으로 은퇴하신 후 딸이 있는 캐나다로 이민 가셔서 한동안은 위니펙이란 곳에서 작은 편의점을 운영하셨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 장인께서는 돈을 정리하셔서 다음 날 아침에 은행에 가시는데 매일 돈을 정리하시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보통 새벽녘까지 돈을 정리하셨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많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돈을 꼼꼼히 정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찢어진 돈은 풀로 다 붙이고, 구겨진 돈은 다리미로 다림질을 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을 얼굴 쪽을 앞으로 오게 차곡차곡 정리하여 아침에 은행에 가지고 가십니다
. 찢어진 돈을 붙이고, 구겨진 돈을 다림질하고 면을 고르게 해서 가지고 오니 은행원들이 처음에는 몇 번 그러시겠지 하고 예사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 아니고 몇 해를 계속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해 가시니 감동해서 은행장에게 보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은행장이 이 분을 꼭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은행에서 유명 고객이 되었고 은행장으로부터 표창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은 돈이 찢어지면 붙입니까? 찢어졌다고, 구겨졌다고 그냥 버립니까? 다림질은 안 하겠지만 버리지는 않겠지요? 찢어진 부분을 붙여 다시 사용합니다. 이것은 돈의 가치 때문입니다. 가치 없는 것은 버리고도 아쉬움이 없지만 가치 있는 것은 버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서 다시 씁니다.
한 병사가 사막에서 생활하는 어느 수도사를 찾아가 하나님이 자신의 회개를 받아 주실런지 물었습니다. 수도사는 그에게 많은 것을 설명한 후에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친구여, 자네는 옷이 찢어졌을 때에 그것을 버리는가?" 그 병사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을 다시 수선해서 입습니다." 그러자 늙은 수도사가 그에게 반문했습니다. "자네가 옷에도 그렇게 신경을 쓰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겠는가?" 바로의 강퍅함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으로 모세는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의 찢어진 부분들을 붙이고, 고장난 부분을 수선하고, 구겨진 부분을 다림질하여 희망을 주시고 새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모세는 바로가 거절하고,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바로나 백성들을 나무라지 않고 자신의 둔함이라고 여깁니다. "바로가 너무 독해서 난 안가겠습니다", "백성들이 못되먹어서 안가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입이 둔한 것을 탓했습니다. 여기에 지도자로서의 모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남을 탓합니다. 남을 탓하고 자신을 숨기는 것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수선하고, 붙이고, 다림질하시는 방법을 보세요. 첫째, 대언자를 세워주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손을 애굽에 더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수선하고, 붙이고, 다림질하시는 오늘의 메시지로 들려지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모세는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처럼 군림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신처럼 되게 하십니다. 바로는 그 당시에 백성들에게 신으로 자처했습니다. 초인적 힘을 발동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권세는 땅에서 하늘을 찔렀지만 모세의 권세는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바로를 압도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에게는 절망이며, 모세에게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든 말을 주십니다. 모든 일을 주십니다. 모세의 모든 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세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모세는 일했습니다.
훗날 모세는 신명기 26:13, 14에서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이것이 모세의 일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권위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의 권위를 보세요. 고린도전서 11:23에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고 합니다. 자신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신적 권위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말이 권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버금갈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5에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지혜가 있고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저는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요 8:44). 이 말씀을 보십시오. 마귀는 말할 때에 제 것으로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지 못합니다. 마귀는 자신의 말을 합니다. 마귀가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므로 모두가 거짓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지 않고 제 것으로, 제 말로 하면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출애굽기 4:16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종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모든 일을 하나님이 직접 하셔도 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일을 직접 하시지 않습니다. 천지창조 이후로 하나님의 직접 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자연법칙을 통하여 하시고, 사람을 통하여 하십니다. 사람을 통하여 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에게 신적 권위를 주셔서 일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자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감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대언자이었고 아론은 모세의 대언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모세를 아론에게 그리고 이제 바로에게 하나님처럼 세워주신 것입니다.
둘째, 아론은 모세의 대언자로 바로에게 말하게 하였습니다.
"네 대언자"란 문자적으로 "네 선지자"란 말입니다. 히브리어의 "나비"란 말은 선지자입니다. 이 말은 영감에 의하여 말하다는 뜻의 "나바"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론은 모세의 뜻을 대언하는 자입니다. 모세의 뜻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결국 아론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15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일입니다. 전달자는 배달꾼입니다.
배달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배달사고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의 택배 회사나 이사 회사를 보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의 짐을 안전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무슨 게이트니 하는 사건들을 보면 배달사고라는 말이 많이 나와요. 돈을 배달하다가 중간에 떼먹었다는 뜻입니다. 떼먹는 것은 배달사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배달사고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간에서 떼먹지 말고 정확하게 가감없이 전달해야 합니다. 에스겔 37장에는 마른 뼈들의 환상이 나옵니다.
에스겔은 마른 뼈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마른 뼈가 서로 접합하여 생기가 들어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인자야, 뼈에게 대언하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은 마른 뼈에게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외칩니다. 대언의 영으로 전달했을 때에 마른 뼈들에 생기가 들어가고 심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대신 하였고 대신 했지만 그 말로 마른 뼈도 일어나 군대가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2:1에는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우리의 대언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해야 할 말을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계시록 19:10에도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대언자이시고, 예수님의 증거는 대언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한 말을 필요한 시간에 우리 입에 주실 것입니다. 당의 대변인을 보십시오. 말을 잘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말을 잘 받아치는지 놀랄 지경입니다. 대변인은 당의 생각을 자신의 말로 표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언자는 자신의 말로 표현하는 것까지도 금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한나호를 타보면서 배에 대하여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배를 움직이게 하는 데 있어서, 기관실에 보내는 명령은 갑판 위의 선교에서 보냅니다. 그 명령이란 속력을 내라, 또는 줄여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라는 명령일 수도 있습니다. 기관실에 있는 기관사는 왜 그런 명령이 내려지는지 모르고,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도 모릅니다. 기관실은 해면에서 두서너 미터 낮은데 있기 때문에 해면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명령하는 대로 복종할 뿐입니다. 모든 명령은 해면 위에 있는 갑판에서부터 내려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 다소의 바울을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없어져야 하고 찾아가서 도움을 줄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울을 만나고 기도해주고 바울이 다시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이처럼 믿음과 불신은 들여다보는 입구는 같으나 보는 목표는 다릅니다. 앞이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 보면서 말하는 이에게 대항하며 불순종하며 거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 신약성경 말씀에 기록된 바울을 보십시오. 바나바는 풍체가 좋았으므로 쓰스라 불렀고, 바울은 말을 잘 하여 허메라고 불렀습니다. 쓰스는 헬라의 주신 제우스를 말합니다. 헬라의 신 허메는 제우스 신의 대변자입니다. 바울은 말을 잘 하는 달변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 2:4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는 자가 진정코 말 잘하는 자입니다. 말씀의 경로를 보세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아론은 바로와 백성에게 말합니다. 결국 아론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의 경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사람이란 영어 단어 'person'은 통과하다는 뜻의 'per'와 소리라는 뜻의 'sonare'에서 나온 말입니다. 소리를 통과시킨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소리의 전달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참 사람이어야 합니다. 참 사람이란 하나님의 소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자입니다. 대언자는 소리를 정확하게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셋째, 바로는 듣지 않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바로는 마음이 점점 강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강퍅한 마음을 버려 두십니다. 로마서 1:28에는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인간의 굳어지는 마음을 하나님은 방치하십니다. 하나님이 방치하시고 하나님이 포기하시면 불쌍해집니다. 하나님이 포기하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면 마음이 굳어집니다.
하나님 가까이 있으면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하나님은 표징과 이적을 애굽 땅에 행하여 재앙을 내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임이라고 합니다. 우찌무라 간조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 따위로 저주하시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 마음이 굳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로널드 롤하이저가 말한 대로 우리는 불충성과 연약함 때문에 탕자의 비유의 둘째 아들처럼, 또 분한 마음과 율법적 고집 때문에 큰 아들처럼 똑같이 아버지의 집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마음이 굳어지고 율법적 고집만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잘못입니다. 그러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진행됩니다. 창세기 18:19에서 말한 바처럼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신대로 하나님은 이루십니다. 신명기 9:5의 말씀과 같이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합니다.
욥이 욥기 42:2에서 말한 것처럼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란 고백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21:6에는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 원래의 계획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론
천로역정에는 한 그리스도인이 인간의 마음의 상징인 큰방에 들어갑니다. 그 방에는 죄를 나타내는 먼지가 잔뜩 덮여 있습니다. 그가 법을 상징하는 큰 빗자루로 먼지를 쓸어내려고 비질을 합니다. 그런데 먼지를 쓸어내기는커녕 오히려 더 먼지를 일으킵니다. 법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죄를 쓸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자극시키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하려면 무슨 일이든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만 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주기도문에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겸허하게 하나님이 이루시라고 기도합시다. 대언자로서 하나님의 뜻만을 전달합시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한 주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혼자서 할 수 없는 것
출 7: 1-7
모세의 최대의 핸디캡은 ‘말을 잘 못하는 것’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으로 대면하면서 애굽으로 가서 네 백성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을 때, 그는 자신은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말한다. [4:10]
이 단어들은 일종의 말더듬이를 뜻하는 단어들이다.
Slow of speech, slow of tongue다.
제 생각엔, 모세가 원래 말을 잘 못했던 사람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는 애굽 궁중 출신이 아닌가? 최고의 교육과 예절을 배우면서 자란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애굽에서 쫓겨나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썩으면서 완전히 주눅 든 인생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을 잘 못하는 핸디캡은 자주 등장한다.
중요한 순간마다, 위기의 순간마다 이 문제가 꼭 감초처럼 등장한다.
핸디캡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무슨 일이 잘 안 되면 우리는 금방 핸디캡 신드롬에 빠진다. “ 학력만 조금 나았더라면... 외모만 좀 받춰줬더라면... 부모만 잘 만났더라면... 이 핸디캡이 극복되지 않는 한 난 영원히 성공하지 못할 거야”
모세도 그랬다.
이 말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다.
대개 보면 이 말이 나올 때는 그의 사역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최초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도 그랬고, 바로 앞 장(6장) 30절에서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에도 두 번이나 그랬다. [6:12(위기 때) & 6:30]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모세의 불안한 항변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이다. [1절]
여기에서 하나님의 처방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모세가 누구냐’ 하는 문제고, 다른 하나는 동역자를 세우는 일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바로 왕 앞에서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신이 아니라 신처럼 행동하는 존재라는 뜻이다[like God].
이 약속은 사실 그대로 지켜졌다.
그가 지팡이로 애굽의 강을 치니까 그 강이 핏물로 변했다.
강퍅한 바로 앞에서 무려 열 가지의 재앙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형 아론을 사용하시는 일이었다.
말을 잘 못하는 모세 대신 말 잘하는 아론이 이 사역에 채용된 것이다.
말더듬이는 당장 고쳐지는 습관이 아니다.
여러분 습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지독한 것인 줄 아는가? 저에게도 안 좋은 습관들이 있다. 제가 생각해도 별로 좋지 않은 것이어서 창피하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기는 좀 그렇다. 아마 말은 안 해도 그게 어떤 것인지 이미 파악하셨을 것이다. 참 신기한 것은, 제가 그 습관을 행할 때 이것이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계속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본다. 그만큼 습관은 지독하다.
모세의 말 더듬는 습관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의 40년 광야의 삶 속에 완전히 베어든 습관이었다.
목동이 누구와 말하겠는가? 양떼들하고 말하겠는가?
설사 걔들하고 말한들 우매한 양 수준의 동물의 언어 정도였을 것이다.
말은 습관이라고 하는데, 습관처럼 말이라도 할 수 있는 대상도 없는데 무슨 좋은 말, 멋진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참으로 놀랍다.
우리는 모세의 말더듬이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의 그런 핸디캡은 그대로 놔두시고 다른 대용품을 여기에 쓰신다.
바로 형 아론이었다.
말 잘하는 형 아론을 보조로 사용하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고정관념을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의 처방, 하나님의 해결책이라는 것은 항상 한판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전에도 한번 말씀드렸지만, 신앙은 인내로 믿음으로 기다리는 측면이 더 많다.
한판에 승부를 보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모세와 아론이 자기들의 장점을 가지고 서로 보완시켜 주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야 한다.
특별히 교회라는 데는 그런 식의 하나님의 테스트를 집단적으로 경험하는 곳이다.
만약 교회가 사회적으로 유능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한다면, 지금 우리는 여기 와서 이렇게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
교회는 역설적인 기관이다.
교회는 자신이 무능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적절하게 사용되는 유일한 곳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앞에 항복한 자들이 모여서 그 사랑으로 서로를 보충해주는 곳이다.
저는 현대 교회를 보며 솔직히 화가 많이 난다. 어떤 대형교회를 갔다. 그 교회는 주로 부유층이 몰려 사는 곳의 교회였다. 어떤 분한테 개인적으로 교회 소개를 받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우리 교회는요 장관이 몇 명이구요, 국회의원이 몇 명이구요....” 이렇게 소개한다. “우리 교회는 모두 다 수준 높은 사람들이어서 목사님 설교도 그 수준으로 안 되면 안 돼요” 한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 왜 제가 화가 나는 줄 아는가? 교회의 무능성, 빈약성 때문이다. 여러분 세상에서 내놓으라는 그런 분들이 교회에 제 발로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거스틴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하나님 외에는 채우지 못한 어떤 공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교회 가면 내놓으라는 그들의 공허한 가슴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올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유 때문에 찾아온 그들한테, “교회도 당신들처럼 되어야지”라고 거꾸로 도전받는다.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한번 생각해보라. 그렇게 되면 그들이 거꾸로 웃지 않을까? “아 교회도 별 거 아니구나!” 하면서!
명심하시라!
교회는 나의 핸디캡이 주님의 은혜로 극복되는 곳이지 들춰내는 곳이 아니다.
반대로 교회는 나의 장점이 드러나는 곳이다.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면, 상대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차원으로 드러난다.
단지 과시하기 위해서 쓰이지 않는다.
교회 공동체에게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면서 그 장점을 그저 과시하라고 쓰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내가 미스코리아 출신이다. 이민 와서 나갈 교회를 찾다가 콘트라코스타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첫 주 그 교회에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온 교인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정말 기분 좋았다. 그래서 그 다음주에는 시선을 더 끌어 모으려고 더 멋있게 화장하고 더 야한 옷을 입고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목사님까지도 설교할 때 나한테 시선을 더 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기를 6개월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하게 더 확실하게 그렇게 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내 주변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내가 교회 처음 나왔을 때 반갑게 맞이해줬던 몇몇 여자 집사님들이 이상하게 하나씩 떨어져나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웃음이 많고 항상 편안한 느낌을 주던 그이들이 점점 더 쌀쌀맞게 나를 대했다. 그리고 그 여자 집사님의 외모도 바뀌기 시작했다. 안 하던 화장을 진하게 하고 수수한 옷차림이 화려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히 나를 향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일 때문에 이제 남편과 다투는 일까지 생긴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가상의 스토리다.
여러분 이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한 예로 예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좋은 장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경우는 그 장점을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잘 못 쓰고 있다.
오히려 파괴시키는 쪽으로 사용했다.
이 사람의 경우는 우선 자신의 빛나는 외모를 자신을 위한 내적인 미로 바꾸어 나가는 도구로 써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 이 사람의 내외적으로 반짝거리는 미로 인해서 더 온전하게 설 수 있도록 도와줬어야 한다.
저는 여기에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론이 말 잘 한다고 해서 아론이 동생의 리더십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말 잘하는 아론에게 쏠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아론은 자기의 역할을 잘 지켰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잘 보라: “대언자”.
이는 구약의 ‘선지자’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다.
계시는 모세에게 내려진다.
그러면 모세가 계시의 내용을 여과 없이 아론에게 알린다.
그러면 아론은 그 내용을 잘 해석해서 좋은 말로 다듬어서 백성들에게 잘 설명해주면 된다.
철저한 분업이다.
그러면서 그들 서로의 위치를 존중한다.
현대 교회는 이런 점들 분명히 배워야 한다.
현대 교회들이 참 신앙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인본주의적이다.
이성주의와 기능주의에 많이 사로잡혀 있다.
학자들은 성경을 청소하려고 하고 있고, 교회 성장을 강조하는 자들은 교회를 세상의 조직으로 정화시키려고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공동체라는 단어를 쓰지만, 사실 모든 것들을 이성과 기능으로 재단하려고 한다.
여러분 교회는 여러분의 수단이 아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저 우리는 그 목적에 합류된 아주 귀중한 모임일 뿐이다.
연약한 아론과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의 대역사를 보이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을 드러내고, 또 그런 과정 속에서 영적인 만족과 기쁨과 치유를 우리 모두 이 곳에서 맛봐야 한다.
이 목적으로 우리의 교회가 여기에 존재한다.
다른 목적은 없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중에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사실 모세가 말을 잘 못해도 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2-6절]
잘 아시는 대로 바로의 특징은 강퍅함, 완고함이다.
어느 정도로 완고하냐면, 10번의 말을 통한 경고와 10번의 눈에 보이는 재앙을 보고도 끄떡없는 완고함이다.
2절부터 다시 자세히 보라. [2절-4절 a]
그는 말해도 듣지 않고, 보여줘도 듣지 아니한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모든 결과는 모세와 아론의 말 잘함, 말 잘 못함과 별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말은, 하나님은 이들의 말 잘함 말 잘 못함에 의존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뜻도 된다.
놀랍지 아니한가?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역사의 대행자요, 대언자일 뿐이지, 그들이 뭘 잘 해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4:10-17]
하나님이 목회자인 저의 장단점을 세워주고 극복시켜서 이 교회를 세워 나가시는 것이지, 제가 어떻게 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저희 당회의 겸손한 섬김을 통해서 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지, 저희 당회원들의 유능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저희 교회가 세워져가는 것이지, 우리의 돈과 힘으로 되어져 가는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혹시 저를 보고 교회 오시면 안 된다.
저의 뒤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구하셔야 한다.
여러분은 우리교회 교육 프로그램을 보고 교회 오시면 안 된다.
내가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맛보겠노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셔야 한다. 여러분은 이 교회를 그냥 이민사회의 무료함을 달래고 친구들 만나는 사교클럽 정도로 생각하고 오시면 안 된다.
나의 장점이 상대의 약점을 보완해주고, 나의 약점이 상대의 장점에 의해서 극복되는 유기체적 경험이 이뤄지는 곳이 바로 이 곳이리라 하는 확신 속에 이 교회 오셔야 하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7절을 보자.
성경에 보면 가끔 이런 식으로 당사자들의 연령이 나올 때가 있다.
이것은 세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된다.
일단 성경역사의 연대를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것을 의도하고 기록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그것을 캐낼 수는 있다.
또 하나는 문체적인 이유다.
창세기부터 나오는 족장사를 보면, 이야기를 기술하다가 꼭 그들의 나이를 삽입한다.
이게 아마 히브리인들의 역사 기록의 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세 번째는 실제적인 도움이다.
이것 역시 그런 의도 속에서 기록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걸 통해 현실적인 적용을 할 수 있다.
모세와 아론의 나이는 우리의 각자의 나이와 우리의 현실적인 사역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럼 여기에서 잠시 이 세 번째 부분만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리 모두 아론의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모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모세의 120년 인생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그것도 절묘하게 40으로 끊긴다. 1부 40년은 애굽의 궁중생활이다. 이 내용은 이미 잘 아신다. 2부 40년은 미디안 광야의 목동생활이다. 성경에서는 이것 역시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아주 짤막하게 나온다. 그게 그 때 어떤 생활이었을지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그리고 마지막 40년이다. 출애굽기의 거의 모든 내용은 바로 이 부분에서 이뤄진다.
7절은 그 부분의 시작 지점을 말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인생의 황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모세처럼 장수할 리는 없고 길게 살아야 80이라면 그것을 3등분해보라. 그러면 27년이 그 한 부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 각자는 그 중 어디에 속하는가? 저 같은 경우는 둘째 부분 중간을 조금 넘어섰다. 아마 54세를 갓 넘어서신 분들이 아마 여기의 모세와 같은 입장일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가?
여러분들의 인생에서도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신가?
물론 외형적인 은퇴야 가능하다.
하지만 내면적으로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명분 있고 값어치 있는 일들을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으시는가?
몇 주 전에 저는 어떤 자리에서 도전을 받았다. 40대 후반에 미국 와서 어떤 어려운 시험 하나를 통과하신 한 분의 간증 때문이었다. 그 분의 간증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이 나이면 자녀들의 진로만 생각하면 될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우리도 맘만 잘 먹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뭔가 기여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믿습니다.” 동의하고 싶지 않으신가? 어떤 분은 보면 “나는 그 동안 너무 일 많이 한 것 같다. 이제는 좀 쉬어야겠다” 그러신다. 좋다! 저도 쉬는 것에 대해서 찬성한다. 하지만 그 쉼이 그 다음의 삶의 질을 더 고양시켜주기 위해서 이뤄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개가 그렇지 않다. 그 쉼이 영원한 게으름으로 남기가 더 쉽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나라에 기여할 충성된 일꾼으로 부르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 식으로 경제적으로(economically) 이해한다. 그래서 그냥 게으른 쉼 가운데 안주해버리고 만다.
저는 여기에서 교회 내의 공식적인 은퇴연령을 재고해보자는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 각자가 그 분의 나라를 향해 어떤 생각과 어떤 태도를 갖고 살며, 또 거기에 어떤 투자를 하며 사는가, 그 모습을 재고해보자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향한 가슴 있는 충성도를 재평가해보자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나이나 환경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하나님나라에 기여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줘도 영향을 준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뭔가 시끄러운데 주변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우리 각자가 어떤 상황에 있든,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일을 신경 써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별히 모세와 아론을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현재 연세 50대 초반이 되신 분들에게 부탁드린다. 저희 교회 50세 이상 되신 성도님들을 보면 교회 일에서 자꾸 손을 떼시려고 한다. 제가 본 다른 교회의 모습을 그렇지 않다. 그 교회의 중추적인 일꾼들을 보면 남녀를 막론하고 50세 이상이다. 그런데 저희 교회는 기류가 좀 수상하다. 마치 그 동안 과도하게 일을 해 오신 것처럼 생각하고 자꾸 물러나려고만 하신다. 아니다! 아직 일하실 때다. 더 부지런히, 더 충성스럽게 일하실 때다.
항상 하나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일하시라.
그래야 신앙이 건강해진다.
우리의 관점과 세상의 풍조로 가면 이상이 생기고 영적 치매현상이 온다.
하나님의 관점은 모세 인생의 후반부, 그것도 후반부의 마지막을 쓰시기로 하셨다.
이 장면을 놓치지 마시라.
그리고 여러분 각자의 인생을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위해 성실하게 쓸 수 있도록 다 내어드리시기를 바란다.
폴 투르니에라는 분이 이런 말을 남겼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모세가 처음 부름 받았을 때 사방 천지에 자기 혼자만 서 있는 것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문제를 제시할 때마다 하나님은 혼자 서 있지 않도록 하셨다.
아론을 보내주셔서 말더듬이를 보완해주셨다.
성막을 지을 때는 하나님의 아티스트 브살렐을 보내주셨다.
혼자서 판관 노릇을 하기 힘들어지자 장인 이드로를 보내주셔서 지혜의 권면을 듣게 해주셨다.
이처럼 교회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다.
어떤 사람은 구세주 강박증(savior syndrome)에 빠져 있다.
자기 아니면 타인을 구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건전한 자기희생 증후군을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남에게 이런 구세주 강박증을 요구한다.
자기가 못하는 것을 남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영적 이기주의자다.
그러나 그런 것은 교회가 아니다.
목사의 장점을 노출시켜 교인들은 유익을 얻는다.
교인들은 얻은 은혜의 유익을 가지고 남을 섬기며 봉사한다.
그러면서 아름답게 자라간다.
신체가 균형 있게 성장하는 것처럼 아름답게 자라간다.
이게 바로 교회다.
신자는 교회론적으로 부름 받은 존재임을 잊지 마시라.
다시 말해서 신자는 교회 가운데서, 교회를 위해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개인은 교회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발견해나가야 한다.
교회 속에서 성숙해져야 한다.
아무쪼록 본문의 모세와 아론의 사역 속에서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효과적으로 발견하셔서, 여러분 자신도 성숙해지고, 여러분 각자의 섬김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다른 지체들이 더 온전하게 세워지기를 바란다.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내가 이 분을 세워드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