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 6월21일
스페인의 필립 2세를 섬기고 있는 마르끼스 페란떼 까스티글리오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롬바르디의 가족 城에서 3월 9일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군인이 될 처지에 있었으나, 아주 어릴적부터 수도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1577년에 그는 공부하러 플로렌스로 가서, 만투아 공작의 궁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알로이시오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경험한 귀족 사회의 폭력과 방종에 크게 실망하였다.
그는 선교사가 되려는 열망으로 불탔다. 마침내 그가 16세 되던 해 예수회에 입회하기로 결정하였다.
부친의 격노는 아무도 막을 수 없을 듯 했으나 드디어 그는 1585년, 로마의 예수회 수련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모범적인 수련자였으며, 흑사병이 퍼지기 시작할 때까지는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는 듯 하였다
예수회가 환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병원을 열자,
알로이시오는 너무나 열심히 일한 나머지 자신도 만성 열병에 걸려 끝내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는 성 로베르또 벨라르미네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성인이 후일 그의 성덕을 증언하였다.
성 알로이시오의 자서전과 편지 및 영적인 저술들은 아주 독특하고 다른 시대와 사회 사람들에게도 매우 매력적이다.
로마에 돌아와서는 주교들의 청으로 여러 주교직의 책무에 대해 연설을 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더 굳게 하기 위해,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독언집(獨言集)과
성 베르나르도가 쓰신 아가(雅歌)해석과 제노아의 성녀 카타리나 전기를 읽었다.
그리고 특히 1590년과 1591년에 걸쳐 엄습했던 기아와 혹사병 때에 이웃을 사랑하는 덕을 밝히 드러내어,
그는 처음에 성 식스토 병원에서 봉사하다가 다음에는 위로의 성모 마리아 병원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도중에서 흑사병 환자를 만나 등에 업고 가다가 자기 자신이 병에 전염되어 돌아왔다.
그것이 3월 3일 이었다. 그는 석 달 동안을 병고에 시달리다가 하루는 밤새도록
일종의 탈혼 상태가 계속되는 중에 성체 축일 팔일 축제 내에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해의 성체 축일 팔일 축제는 6월에 있었다.
그러나 팔일 축일이 다가오자 병세가 오히려 나아지는 것 같아 보여서
그의 고해 신부인 벨라르민 신부까지도 그 날 밤 그의 곁에 있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리하여 그가 밤 열 시와 열 한 시 사이에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에는
다른 신부 두부노가 간호원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성인의 유해는 성모 영보 성당 지하실에 매장되었는데,
7년 후에 티베르가의 홍수로 인해 유해의 분배를 행했다.
나머지 유해는 같은 성당에 딸린 한 경당에 모셨다가 여러 번 옮겨 모셨고
나중에는 성모 영보 성당 자리에 새로 지은 성 이냐시오 성당에 모셨다.
알로이시오 공자가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교황 베네딕또 13세에 의하여 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비오 11세에 의해서는 가톨릭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