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차안(此岸)에서!
-사는 게 무언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대개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고 감추어진 것은 보지도 않고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자기중심적으로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 행동한다. 앞뒤 양면에서 앞면은 잘 보여 쉽게 보지만 뒷면은 보이지 않는다. 뒷면을 보려면 그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인간의 세계는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차안은 우리가 사는 여기이고, 피안은 아무도 가본 사람이 없는 내세(來世)의 세계이다. 현세에서 각자가 자기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앞과 뒤가 크게 다르지 않듯 두 세계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앞(此岸)과 뒤(彼岸)가 동질로 속성이 같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삶이 행복하다면 저 세상의 삶도 행복할 것이고 이곳이 불행하다면 저곳도 불행하리라.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이론이 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하면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있지 않은가.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살면서 주저주저하다가는 지나가 버리고 후회한다. 하고 싶은 것 하는 것이 비록 실패를 가져오더라도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다. 나는 심사숙고하여 한번 결정하면 하고야 만다.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 다 했는데 아직도 이루지 못한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승마이다. 말을 타고 금호 강변을 신나게 달리고 싶다. 언제가 몽골에 갔었다. 말을 타고 푸른 초원을 신나게 달리고 싶어 말 위에 앉았다. 그러나 혼자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기껏 마부가 이끌고 탔기에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다.
돌아와서 인근의 승마장에 갔다. 배워서 말을 타고 싶어 왔다고 했더니 자기 말이 있어야 밖으로 나가서 탈 수 있다고 하여 실망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희망은 아직도 버리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다. 아니면 ‘꿩 대신 닭이라고’ 시골에 가서 소라도 한번 타야 할까.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소 목동을 하면서 소 등에 타서 들로 산으로 오갔다. 꾸벅꾸벅 졸면서 타기도 하고 소 등에 서서 타기도 했으니 말타기에 관심과 꿈을 놓지 못하고 있는가 싶다.
대신에 하나 바꾼 게 있다. 올 초에 전기자전거를 샀다. 관내 웬만한 곳에는 전기자전거를 이용하고 있다. 매일 아침 운동하러 갈 때도 전기자전거로 간다. 아침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기분은 완전 새로운 맛이다. 이렇게 변화의 시도가 삶을 살찌우고 기쁨을 안겨줄 줄이야, 정말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다.
흔히들 ‘인생 뭐 있어!’ 한다. 특별한 게 없다는 것이니 함께 아기자기 어울려야 하지 않을까? 예수께서는 몸소 우리 죄의 속량으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랑을 보여주셨다. 우리에게 남긴 것이 “서로 사랑하여라”이다. 오랜 장마가 끝나고 친구들이 서로 얼굴 한번 보자고 한다. 그런데 아직 인생길이 먼데 종점 문양역으로 오라 한다.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