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가을 나들이
가을은 과실이나 농작물을 거두어들인다는 의미를 가진 고유어이다. 지금은 그런 일을 가장 많이 했던 계절(9-11월)을 이르는 말로 주로 쓰인다. 사전적 정의로 볼 때 가을은 중년과 어울리는 계절인 듯하다. 가을이다. 초록색 잎들이 울긋불긋 물든다. 바탕색이 초록인 나뭇잎에 햇빛과 바람이 물감처럼 매일 조금씩 내려앉아 채색되어 가는 듯하다. 이 좋은 계절을 그냥 보낼 수 없어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둔 그리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중년남성 다섯이 가을 나들이에 나섰다.
목적지는 양산시 원동면 내포리 골짜기. 그곳에 ‘엘로힘’이라는 안식처를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다. 물금 신도시를 지나 원동으로 가는 구도로를 경유해야 한다. 그 옛날은 비포장도로였지만 지금은 널찍하게 확장해서 잘 포장되어 있다. 가는 길이 험하지만 볼거리가 많다. 구불구불한 도로 양쪽으로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늘어서 있어서 가을 단풍 구경에도 이만한 곳이 없다. 어디 그뿐인가! 김해와 양산을 가로지르는 낙동강 유역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푸른 가을 하늘을 닮아 강물도 푸른 날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길을 이십여 분 동안 천천히 달리면 골짜기로 진입하는 길이다. 여기서부터는 중앙선 구분이 없는 산길. 교차하는 차라도 있으면 난감한 상황이 생긴다. 앞에 오는 차를 살피며 조심조심 가야 한다. 그렇게 십여 분을 가면 드디어 목적지 엘로힘 도착!
엘로힘은 ‘신들의 골짜기’라는 의미란다. 빡빡한 도시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안식처가 필요했던 친구는 수년의 탐색을 통하여 이곳을 얻었다. 토곡산에서 흘러내리는 청명한 시냇물이 있고, 그 양쪽에 약간의 평지가 있다. 양식이 귀하던 시절에는 논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돌밭이요 풀밭이다. 그곳을 잘 일구어 나무도 심고 들깨도 심어서 수확도 했단다. 이곳은 여름에 홍수가 나면 거의 휩쓸려 내려가곤 해서 그보다 약간 높은 곳에 이동식 농막을 설치해 두었다고 한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 들어와서 주일 아침에 나가곤 하는데 이곳에 와 있는 것 자체가 힐링이라고 자랑이다. 농막 앞에 앉아 졸졸 흐르는 개울 소리를 들으며, 건너편에 펼쳐진 산을 보니 그 말에 공감된다. 농막 아래의 좁다란 밭에는 들깨를 심어서 수확을 앞두고 있는데 그 이유가 웃프다. 처음에는 의욕이 앞서서 이런저런 작물들을 심었는데 거의 다 고라니 양식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라니가 먹지 않는 것을 심으려고 하니 들깨밖에 없더란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감 따기 작업에 들어갔다. 토종감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제법 실한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지난해에는 수확시기를 놓쳐서 엉뚱한 사람 좋은 일 시켰다면서 오늘 이 감을 수확하여 나누자고 한다. 끝에 가위가 달린 긴 장대, 수확한 감을 담을 종이 상자, 떨어지는 감을 받을 넓은 방수천(갑바?) 등도 준비되어 있었다. 어릴 때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감나무에 올라가 장대로 감을 딴다. 두 사람은 방수천을 마주 잡고 떨어지는 감을 받고, 나머지 두 사람은 천에 담긴 감을 상자에 담는다. 손발을 맞추어 삼십여 분 일하니 어느새 두 상자에 감이 가득하다. 꼭대기에 달린 감들은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다. 약을 치지도 않았고, 거름을 준 적도 없지만, 햇빛을 받고 비바람을 견디며 익어서 이렇게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밖에!
잠시 휴식한 후, 각자 짊어질 수 있을 만큼 가방에 감을 담는다. 주인장이 기른 표고버섯과 추자(토종 호두)도 덤으로 얻는다. 차를 몰아 십여 분 나오니 원동 삼거리 식당이다. 돼지고기 두루치기와 순두부찌개로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다음 일정에 나서기로 하였다. 다음 일정은 낙동강변 갈대밭 탐방! 출발은 원동면 가야진사(원동면 용당리에 있는 신라시대 사당으로 사라호 태풍 때 사당이 부서져서 복원한 것이라고 함)에서 하기로 했다. 가야진사에서 시작하여 강변의 갈대밭을 탐방할 수 있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변의 자연습지를 살려두고 십여 리에 걸쳐서 갈대밭을 가로질러 산책로를 만들었다. 주변에 건물이 전혀 없고 하늘과 강과 산들이 펼쳐져 있다. 가을 하늘이 너무 맑으니 그 하늘을 비추는 강물도 더 없이 맑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원래 계획은 전체 탐방로를 걷는 것이었지만 오전 작업의 피로도 있고, 집이 먼(거제도) 사람도 있어서 가볍게 몇천 걸음 걷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다음 일정으로 단풍놀이를 기약하고 중년남성들의 가을 나들이를 마무리하였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은 가을 동안 부지런히 살을 찌워 겨울을 나고, 사람들은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비축하여 겨울을 이길 준비를 한다. 하지만 나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잎을 다 떨어뜨리고 쓰임새를 줄여서 겨울을 견뎌낸다. 이제 인생의 가을을 맞은 나도 가을 나무를 닮아야 하지 싶다. 많이 모으려 하기보다는 가진 것을 버리고 나누며, 쓰임새를 줄여서 노년기라는 겨울을 이겨내야 하지 않을까! 즐거운 가을 나들이에서 얻은 씁쓸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