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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막야(干將莫耶)
간장과 막야가 만든 칼이라는 뜻으로, 천하에 둘도 없는 명검 혹은 보검을 비유한 말이다.
干 : 방패 간(干/0)
將 : 장수 장(寸/8)
莫 : 없을 막(艹/7)
耶 : 어조사 야(耳/3)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도장(刀匠)인 간장(干將)과 그의 아내 막야(莫耶)가 음양(陰陽)의 두 칼을 만들었다고 한다. 간장과 막야가 만든 두 자루의 명검(名劍)을 말한다. 명검도 사람의 손길이 가야 비로소 빛나듯이 사람의 성품도 원래는 악하므로 노력을 기울여야 선하게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간(干)은 끝이 두 갈래로 된 창의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손잡이가 달린 방패의 모양을 본뜬 글자라고도 한다. 막(莫)은 풀 초(艹)에 햇빛 대(旲)를 받친 글자이다.
오(吳)나라에는 유명한 대장장이 간장이 그의 아내 막야와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오(吳)나라 왕으로 있던 합려(闔閭)는 간장을 불러 명검 두 자루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간장은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대장장이라는 공식 인정을 받아 기뻐 최선을 다해 칼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정선(精選)된 청동(靑銅)만으로 칼을 주조(鑄造)하기 시작했는데 이 청동이 3년이 지나도 녹지 않는 것이었다.
왕의 독촉은 매일매일 계속되고 청동은 녹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의 걱정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청동을 하루속히 녹여 칼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허다했다.
그러던 중 그의 아내 막야가 청동을 녹일 방법을 알아냈다. 그것은 부부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용광로에 넣고 소녀 삼백명이 풀무질을 하는 것이었다. 막야의 말대로 하자 과연 청동은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그래서 칼도 명검으로써 손색이 없을 만큼 제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간장은 칼이 완성되자 한 자루에는 막야라는 이름을 새겼고 또 다른 한 자루에는 간장이라고 새겼다. 이 칼은 그 어느 칼보다 단단하고 예리했으므로 높이 평가받게 되었고 이로부터 간장막야(干將莫耶)라는 말로써 명검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순자(荀子)의 성악편(性惡篇)에도 중국 역대의 명검에 끼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총(蔥), 강태공(姜太公)의 궐(闕), 주문왕(周文王)의 녹(錄), 초장왕(楚莊王)의 홀(笏),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간장(干將)과 막야(莫耶), 거궐(鉅闕) 벽려(僻閭)과 모두 옛날의 명검이다. 그러나 명검일지라도 숫돌에 갈지 않는다면 보통의 무딘 칼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명검도 사람의 노력이 없으면 자를 수 없다.”
이렇듯 순자 역시 간장막야를 고대 명검의 하나로 손꼽고 있다. 어떤 일이든지 최선의 노력을 하면서 공(供)을 들여야만 일이 제대로 성취될 수 있다는 교훈을 일깨워 준다. 이때부터 간장막야는 명검도 사람의 손길이 가야 비로소 빛나듯이, 사람의 성품도 노력을 기울여야 선하게 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위의 글은 순자의 성악편(性惡篇)에 실려 있는 글로서, 순자는 사람의 성품은 악한 것이니 그것이 선하다는 것은 거짓이라며 성악설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청동이 그 자체로는 명검이 될수 없고 반드시 인위적인 과정을 거쳐야 명검이 될 수 있듯이, 사람의 성품은 본래 생태로서 악한 것이니 예로써 교육시켜야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순자는 인간의 본래 성질은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맹자(孟子)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보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다. 이 두 주장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끊임없이 일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한 본성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나, 악한 본성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나 양측 모두 평생 동안 자신을 성찰하고 끊임없이 선하게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간장막야의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간장막야의 설화는 두 가지가 전해온다.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검(劍)이라고 알려진 것에 의해 오(吳)나라의 사람이었던 대장장이 간장(干將)과 그 아내 막야(莫耶)에 대한 이야기와 삼왕묘(三王墓)로 알려진 초(楚)나라 사람이었던 간장(干將)과 막야(莫耶)의 이야기다.
오왕(吳王)이 간장(干將)에게 명검(名劍)을 제작(製作)하라고 명(命)하자 간장(干將)과 막야(莫耶)는 쇠를 녹여 검(劍)을 만들려고 했지만 아무리 불을 지피고 풀무질을 해대도 쇠가 녹지 않는 것이었다.
어장검(魚藏劍)의 일화(逸話)에서 사람이 직접 화로(火爐)에 뛰어들면 쇠가 녹는 다는 것에 착안(着眼)하여 아내인 막야(莫耶)가 화로(火爐)에 뛰어들자 쇠가 녹기 시작했고 비로서 명검(名劍) 두 자루가 만들어졌고 이름을 간장(干將), 막야(莫耶)라고 붙였다.
간장은 간장만을 오왕에게 받쳤으나 한자루가 더 있음을 눈치챈 오왕이 다그치는 과정에서 적국에 넘어가 명검을 제작하면 위협이 된다는 구실로 간장을 죽임으로써 대장장이 간장과 그 아내 막야는 모두 사망하고 명검 간장만이 오왕의 상징적인 명검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 첫번째다.
두번째 이야기는 초왕(楚王)이 간장(干將)에게 명(命)하여 명검(名劍)을 만들게 하자 간장(干將)이 검(劍)을 만들었으나 삼년이나 걸리고 말았다. 왕(王)의 노여움을 사 죽게 될 것을 안 간장(干將)은 암검(劍) 막야(莫耶)만을 가지고 왕(王)을 보러 가면서 아내에게 자신이 죽거든 곧 태어날 아들에게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집뒤에 감춰둔 칼로 자신의 한을 씻어 달라고 했다.
삼년이나 걸린 데에다 두 자루 중 한 자루만 가져온 간장(干將)은 역시 초왕(楚王)에게 살해(殺害)당했다. 그리고 간장(干將)과 막야(莫耶)의 아들이 태어나고 성장(成長)하여 애비의 원수(怨讐)를 갚을 궁리(窮理)를 하자 초왕(楚王)의 꿈에까지 나타났다.
초왕(楚王)은 꿈에서 본 간장(干將)의 아들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려 사방(四方)에 방을 붙이고 현상금(懸賞金)을 걸었다. 현상금(懸賞金)이 걸려 마을에도 못가게 된 간장(干將)의 아들은 서러운 마음을 노래에 담아 부르며 산속을 배회(徘徊)하게 되었다.
이때 근처를 지나던 한 사나이가 사연(事緣)을 묻게 되고 그는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야기했다. 그 사나이는 문득 자신에게 필요한 두 가지를 주면 자신이 원수(怨讐)를 갚아주리라고 말했고 아들이 그게 무엇이냐고 묻자 명검(名劍) 간장(干將)과 아들의 목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간장(干將)을 꺼낸 아들이 자신의 목을 스스로 쳐서 검(劍)과 목을 한 손에 각각 들고 그 사나이에게 내 주었다. 그 사나이가 그것을 받아들고 반드시 복수(復讐) 해 주마라고 다짐하자 비로서 땅에 쓰러져 시체(屍體)가 되었다.
사나이는 그 길로 초왕(楚王)을 만나서 현상금(懸賞金)을 받고 그의 목은 한(恨)이 맺혀있는 만큼 끓는 물에 삶아 문드러지게 만들어야 안심(安心)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초왕(楚王)은 그대로 했다.
하지만 삼일이 지나도 목은 문드러지기는 커녕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솥을 뛰어나오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사나이가 왕(王)에게 솥으로 가서 목을 위엄(威嚴)있는 눈길로 쳐다보면 그 위엄(威嚴)에 져서 결국 문드러질 것이라 하고 왕(王)이 할 수 없이 그렇게 하는 순간 사나이가 간장(干將)을 꺼내 왕(王)의 목을 쳤다.
왕(王)의 목은 솥에 떨어졌고 그걸 확인(確認)한 사나이가 자신의 목 역시 쳐서 그 목이 솥에 떨어지자 세개의 목은 문드러지며 뒤섞여버렸고 어떤 것이 누구의 목인지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어쨌든 하나의 목은 왕(王)의 목이니 세개의 목을 모두 거두어 함께 장사(葬事)지내고 그 묘(墓)를 삼왕(三王)의 묘(墓)라 불렀다.
간장막야(干將莫耶)
간장과 막야가 만든 칼이라는 뜻으로, 천하에 둘도 없는 명검 혹은 보검을 비유한 말이다.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한 쌍의 부부검을 통칭하는 것이다. 고사성어로도 쓰이는 단어로 흔히 '명검'을 일컫을 때나 '아무리 명검이라도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간장(干將) 막야(莫耶)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도장(刀匠)인 간장(干將)과 그의 아내 막야(莫耶)가 음양(陰陽)의 두 칼을 만들었다고 한다. 오(吳)나라의 왕 합려(閤閭)는 간장(干將)에게 좋은 검을 만들라고 명(命)했다. 간장(干將)은 오나라 대장간의 명장(明匠)이 이었다.
정선(精選)한 청동(靑銅)을 모아서 주조(鑄造)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급격히 온도가 떨어져 쇠가 녹지 않았다. 그의 아내 막야(莫耶)가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노(爐)에 넣고 청동(靑銅)을 녹여 마침내 명검(名劍)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한 자루의 칼에는 간장(干將), 또 다른 한자루에는 막야(莫耶)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1. 오월춘추(吳越春秋) / 월절서(越絶書)
오월춘추(吳越春秋) 및 월절서(越絶書)에 의하면, 검을 만든 간장(干將)은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사람으로, 어장(魚腸)과 담로(擔魯)를 만든 구야자(歐冶子)와 동문이라 한다.
오왕 합려는 월나라에서 구야자가 만든 검 3자루(담로, 반영, 어장)을 받았는데, 합려는 간장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검을 만들라고 명했다. 간장은 천하에서 최고의 재료만 모아 최상의 조건에서 검을 만들려 했으나, 급격히 온도가 떨어져 철이 녹지 않았다. 석 달 동안 손가락만 빨다가 아내인 막야가 자신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넣자 겨우 철이 녹아내렸다.
어떤 판본에선 막야가 목욕재계 후 도가니에 몸을 던졌다고도 한다. 이렇게 완성된 검 두 자루 중 간장검은 숨겨두고 막야검만 합려에게 바쳤다. 합려는 노나라에서 온 사신에게 막야를 주려 했으나, 사신은 칼을 뽑아 날 상태를 한 번 보고는 오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해 받지 않았다.
2. 수신기(搜神記)
수신기(搜神記)에는 초나라 버전 이야기도 있는데, 여기서는 간장이 초나라의 왕을 위해 한 쌍의 암수검을 만들었지만 기한을 넘겨 완성되었기에 자신이 목숨을 잃을 것을 직감한다. 그래서 암검만을 초왕에게 가져가기로 하고 수검은 바위 위에 솟아난 소나무, 즉 집 기둥에 숨기고 아들에게 복수를 명할 것을 막야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간장의 예상대로 초왕은 간장을 처형했고, 막야는 아들 적비를 낳았다.
적비는 무술을 연마하며 복수를 노렸으나 초왕이 적비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꿈을 꾸고 전국에 방을 내려 산으로 도망갔다. 슬퍼하고 있던 와중 적비는 어떤 협객을 만나는데, 그 협객은 적비에게 그의 목을 주면 자신이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했고, 그러자 적비는 자신의 목을 스스로 쳐 수검과 함께 그 협객에게 맡기었다고 한다. 적비가 자신의 목을 베고 나서도 몸은 여전히 꼿꼿이 서 있었으며 협객이 그에게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시체가 쓰러졌다.
협객은 적비의 몸을 묻어준 후, 초왕에게 가 그의 목을 내놓으면서 적비를 해치웠다고 말했고, 원한을 없애야 한다며 솥에 적비의 머리를 끓이게 했다. 그럼에도 사흘이 지나도 머리가 문드러지지 않고 둥둥 떠있어 협객은 왕이 살펴보아야 한다며 솥에 접근하게 했다. 왕이 솥에 접근한 바로 그 때 협객은 몸을 날려 초왕의 목을 쳐 솥에 넣었다. 놀란 군사들이 달려들려 하자 협객은 자신의 머리도 베어 솥에 빠뜨렸다.
그리하여 솥에 세 개의 머리가 삶아져서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길이 없어 신하들은 난처해졌다. 그런 와중에 무당이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목을 자른 적비와 자기 목숨을 걸고 원수를 갚은 협객의 의를 생각해서 왕과 함께 장사를 지내라 하여 장사를 지낸 다음 한 곳에 묻은 이 묘를 삼왕묘(三王墓)라고 이름지었다고 전해지며 지금의 여남군 북쪽 의남현에 존재한다고 한다.
이문열의 초한지에서는 항우가 한창 승승장구할 때 이 검을 얻는다고 나온다. 나중에 전설의 검을 얻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항우는 진짜면 좋고 아니어도 사기를 위해 그냥 소문이 퍼지게 놔두면 그만이라 여겼다. 근데 간장 막야를 본 노나라 사신이 오나라가 멸망할거라 예견했던 걸 생각하면 그 검을 가지게 된 것이 오히려 안좋은 복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루쉰도 이 이야기로 '주검(鑄劍, 벼린 검)'이라는 소설을 쓴 바 있다. 국내 번역본 중에는 제목이 '검을 벼린 이야기', '도공의 복수'라고 의역 또는 아예 바뀐 판본도 있다. 이 작품에서는 아들의 이름으로 적비 대신 미간척이란 이름을 쓴다. 미간척을 대신해 복수를 수행해 주는 무사(작중에서는 '문문향 출신의 연지오자'라는 이름이다)의 광기어린 면모가 일품이다. 국내에서 연극으로 상연된 적도 있다. 끓는 솥 안에서도 세 머리가 치열하게 물고 뜯고 싸우는 모습의 묘사가 충격과 공포적이다.
간장막야(干將莫耶)
간장과 막야가 만든 칼이라는 뜻으로, 천하에 둘도 없는 명검 혹은 보검을 비유한 말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장인이 부족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명장의 밑에 들어가 몇 년을 참고 배우려는 사람들도 드물다고 한다. 모두 참을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조건 속성으로 배우고 속성으로 일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장거리 인생 경주에서 끝까지 완주하지 못하는 것이다. 길게 보고 달려가야 하며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인생이라는 마라톤 경주에서 중요한 것은 성실함과 인내인 것이다. 그래서 간장막야(干將莫耶)라는 고사성어를 생각해 본다.
배경은 오(吳)왕 합려가 대장간의 명장(名匠)인 간장(干將)에게 명검 두 자루를 만들라고 명령하자 간장은 정선한 청동만을 골라 주조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이 청동은 3년이 지나도 녹지를 않았다.
그러자 그의 아내인 막야(莫邪)가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용광로에 집어넣은 다음 어린 소녀 3백여 명에게 풀무질을 시키자 그때서야 비로소 청동이 녹기 시작했다.
그 후 이들 부부는 명검을 만드는 데 성공하자 그 의미로 한 자루에는 '간장' 그리고 또 다른 자루에는 '막야'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에 순자는 서악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나라 환공의 총(蔥), 강태공의 궐(闕), 주문왕의 녹(錄), 초장왕의 홀(忽). 오왕 합려의 간장과 막야는 옛날의 명검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명검이라도 숫돌에 갈지 않으면 무디어지고, 사람의 힘을 얻지 못하면 자를 수가 없다."
순자는 어떤 명검도 사람의 손길이 가야만이 비로소 빛나듯이 사람의 악한 성품도 갈고 다듬어야만 이 선(善)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 말은 마치 현대의 악덕 제조업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듯이 생생하게 전파된다. 그런 뜻에서 현대판 장인(匠人) '간장막야' '혼다 소이치로'를 소개한다.
대장장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나온 후 21세에 자동차 수리공으로 출발해 1948년 혼다를 설립한 혼다 소이치로 회장은 1991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남이 만드는 것은 만들지 않는다"는 장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평소 "관리자보다는 기술자를 더 대접해야 훌륭한 차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해온 그는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손을 '보물단지'라고 자랑했다. '손의 철학'으로부터 혼다 신화를 창조해 낸 그는 자신의 손을 가리켜 "쉴 새 없이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내는 탐구의 손"이 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장인 정신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명예나 물욕에 전혀 연연하지 않았다. 66세에 사장 자리를 젊은 후진에게 넘겨주었고, '관(官)에 의지하지 말라'는 사훈(社訓)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말년에 그는 컴퓨터에 패배해 기술혁신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컴퓨터가 해낸 기술혁신의 총 분량이 그의 왼손이 해낸 분량에 비해 아직까지는 미비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인간 내면에 잠재된 가능성의 크기를 입증했으며, 아울러 한국인들이 만능으로 착각하고 있는 학력위주 사고방식을 성공하는 데 있어 학력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또한 그는 권력과 야합으로 부동산 투기를 하지도 않고 오로지 상처투성이에 왼손 하나만으로 최첨단 자동차 공업의 수백 가지 부속품을 발명하고 개량해 내 재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입증한 것이다.
요즘 살기 어려워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고 이혼율도 많이 높아졌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자세로 성실함이 천재를 이긴다는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간장막야(干將莫耶)
춘추오패 중 4대 패자와 5대 패자가, 춘추 초기에는 이름도 없던나라, 그리고 남방의 오랑캐로 멸시박고, 인정받지 못하던 오(吳)와 월(越) 나라에서 나온 것은 여러 가지 역사적 근거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두 나라가 당시 일반 철을 단련시켜 더욱 강한 강철로 만들 수 있는 제련 기술이 뛰어났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강철 검을 만들 수 있는 유명한 제련 기술자가 모두 오나라와 월나라 백성들이었다. 즉 오나라의 간장(干將)과 막야(莫耶), 그리고 월나라의 구야자(歐冶子) 등의 명장이 그들이다. 이 중 간장과 막야는 부부이었다.
오나라 왕 합려의 지시로 간장은 천하 명검 두 자루를 만들게 되었다. 간장은 정선된 청동만으로 검을 주조하기 시작했는데 3년이 지나도록 청동이 녹지 않았다. 청동을 녹이는 방법을 찾기 위해 간장은 노심초사 하였는데 그때 막야가 방법을 찾아내었다.
막야는 부부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용광로에 넣은 후, 소녀삼백 명으로 풀무질을 하게 하였다. 그러자 청동은 거짓말처럼 녹았고 간장은 두 자루의 명검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간장은 한 자루의 검에는 간장, 그리고 또 한 자루의 검에는 막야를 새겨 넣었다. 천하의 명검을 이르는 간장막야(干將莫耶) 성어가 생긴 연유이다.
중국의 동남부 오월 지방이나 이 지역에 인접한 초는 하천이나 호수가 많은 지형이어서 군대가 전차보다는 보병과 수군 중심으로 발달되었으며, 이런 역사적· 환경적 결과로 접근전에 유리한 검이 많이 사용되어 우수한 검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방에서는 전설적인 명검의 장인으로 간장(干將)과 막사(莫邪)를 만든 오나라의 간장, 용연(龍淵), 태아(泰阿), 공포(工布)를 만든 월나라의 풍호자(風胡子), 순균(純鈞), 담로(湛盧), 호조(豪曹), 어장(魚腸), 거궐(鉅闕)을 만든 초나라의 구치자(歐治子)가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그들이 만든 명검의 이름은 후세에까지 전해져 검의 대명사가 되었다. 또한 일찌기 오나라, 월나라, 초나라가 있었던 지방에서는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오나라 왕 부차(夫差)나 월나라 왕 구천(勾踐)이라는 춘추 시대(기원전 8세기~기원전 5세기까지) 왕들의 이름을 새긴 정교한 검이 실제 출토되고 있다.
호북성에 있는 강릉 망산의 고분에서 1965년에 발굴된 월왕구천(越王鳩淺)의 명검을 보면 칼날 하단부에 월왕구천 자작용검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발굴 당시 검의 전체가 녹이 슬지 않았고 칼날은 예리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부식되지 않았다. 칼의 양면에는 공작석과 초록색의 유리가 상감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상감, 합금, 제련의 기술이 높은 수준이었다.
오왕 합려의 무덤에서도 삼천 개의 검이 출토되었는데, 모두가 중원의 검과 달리 강철 검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았을 때 오나라, 월나라의 강성함에는 강철 검을 만들 수 있는 제련의 기술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명검
담로(湛盧)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월나라의 명인 구야자가 월왕 윤상의 명에 따라 만든 명검 중 하나로 희광에게 전해진 세 자루 중 하나. 이 검은 초나라 소왕이 소유하고 있었다. 열국지에서는 담로(湛盧) 혹은 잠로(潛盧)라고도 불리며, 잠잠하고 검푸른 빛을 띄고 있다고 해서 희광이 붙인 이름이라 한다.
희광이 오나라의 왕이 된 이후 초나라와 싸울 시기에 계략의 도구로 이용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물에 젖은 채로 초소왕의 침실에서 발견되었다. 마침 검상을 잘 본다는 풍호자라는 사람이 초나라의 수도에 나타나자 초소왕은 이 검을 보였는데, 그 세 자루 중에 어장은 전제가 사용해서 효력을 잃었기 때문에 담로는 어장보다 낫다고 한다.
풍호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 검을 빼어들면 검신(劍神)의 도움을 받아 어떤 강적도 물리칠 수 있다. 왕이 아니고서는 소유할 수도 없으며, 만일 그 왕이 도의에 어긋난 일을 저지르면 스스로 주인을 떠나 도의가 있는 왕에게로 간다."
풍호자의 말은 담로(湛盧)가 오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강을 건너 초왕에게 와서 초왕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했다는 소리이며, 이 사실을 듣고 기뻐한 초소왕은 항상 차고 다니면서 이 사실을 백성들에게도 알렸다. 오나라는 초나라에 담로를 보내는 이 계략으로 초왕을 오만하게 만드는 것에 성공해 전략상의 우위를 얻을 수 있었다.
어장(魚腸)
월나라의 명인 구야자가 월왕 윤상의 명에 따라 만들었다. 당시 세트로 만들어진 명검 다섯 자루의 이름은 각각 담로(湛盧), 어장(魚腸), 순구(純鉤), 거궐(巨闕), 승사(勝邪)라 한다. 이 중 셋은 오나라의 공자 희광에게 전해졌다. 오와 앙숙이었지만, 보다 변방국이었던 월이 다음 왕위 계승의 유력 후보였으므로 선물을 한 검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칼의 주인인 고발광은 오나라 왕족이었으나 계승에서 밀려난 것에 대해 남몰래 불만을 품고, 모반을 일으킬 계획을 짰다. 신중한 사전 작업 끝에, 마지막 단계로 오자서가 추천한 전제라는 인물에게 어장(魚腸)을 빌려주어 암살을 결행하기로 한다. 당연히 오자서는 아무나 데려온 게 아니었는데, 전제라는 이 인물은 성정이 담대한 자로, 삼엄한 호위병 무리 가운데에서도 전혀 겁먹지 않고 재빨리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하는 자객의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었다.
오자서도 할 수 있지만 그는 복수를 위해 아직 죽을 수 없기에 수소문 끝에 전제를 알아내고 데려온거 였다. 전해오는 야사에 의하면, 이때 전제는 병이 깊어서 더 살 수 없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 스스로 이 암살을 이행하는 인물로 자원했다고도 한다. 전제가 내건 유일한 조건은 남겨둔 식솔의 앞날을 부탁한 것이다.
전제는 경계가 삼엄한 연회석에서 음식을 나르는 요리사(혹은 하인)로 위장해 오왕 료에게 접근했다. 호위병들이 그의 온몸을 빠짐없이 수색했지만 당연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다만 그가 나르고 있던 생선 요리만은 건드리지 못했는데, 만약 생선을 건드리면 요리 모양새가 엉망이 될테니 넘어간 것이었고, 바로 이 때문에 어장(魚腸)은 생선 뱃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제는 오왕 요 앞에 물고기를 차려놓는 척을 하는 순간(혹은 먹기 좋게 물고기의 살을 발라내는 척을 하다가), 재빨리 생선의 뱃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 오왕의 가슴을 찔러 죽였다.
오왕은 암살을 우려해 속에 갑옷을 입었지만 명검답게 갑옷을 꿰뚫어 오왕 요는 단 한 칼에 즉사했다고 묘사된다. 암살자 전제는 그 자리에서 오왕 요의 호위병들에게 참살 당했지만, 고발광은 결국 이로 인해 왕위에 올라 스스로를 오왕 합려라 했으며, 후에 전제를 후히 장사지내주고 약속을 지켜 그의 가족을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생선의 뱃속에서 숨겨져 큰 일을 했다는 의미로 이 칼에는 어장(魚腸)이란 이름이 붙었다. 즉 이전에는 무명이었단 이야기인데, 희광은 원래 엷은 뜬구름 같은 무늬가 있다고 하여 연운(連雲)이라 부를 생각이었다고 한다. 문헌에 따라서는 본래부터 이름이 어장이었고, 전제가 그 이름에서 착안을 하여 생선 뱃속에 칼을 숨겼다고도 한다. 이름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견해에 더 가까운 전승이다.
유사한 설명으로 심괄은 저서 몽계필담의 기용(器用) 편에서 칼 위에 생긴 무늬가 물고기 창자처럼 생겨서 그렇게 불린 것이며, 반강검(蟠鋼劍), 송문검(松文劍)도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때는 아직 청동기가 무기로서 더 널리 쓰이는 시대였으나 보검이었으니 철로 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본래 계승 순위대로라면 오나라 왕은 희광이 되어야 했으나, 그래도 엄연히 한 나라의 왕을 비겁한 술수를 사용하여 죽였기 때문에 어장은 오왕 요를 암살하는데 쓰인 이후로는 보검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전승도 있다.
반영(瀊纓)
중국 전설의 무기. 오나라에서 월왕 윤상으로부터 받은 세 가지 보검 중의 하나이며, 합려가 자신의 딸인 승옥이 죽자 그 무덤을 만들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면서 용연과 함께 부장품으로 묻었다고 한다.
한장팅의 소설 손자에서는 오왕 요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합려가 왕이 되기 위해 요를 암살하려고 집에 초대했는데, 이때 요는 반영을 들면서 병사들에게 음식을 나르는 사람의 몸을 수색하고 요리를 검사하게 했다. 합려가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에게 반라로 시중을 들게 하자 긴장을 풀고 반영검을 놓았다.
손무가 등용되어 궁녀들을 지휘하기 위해 검을 빌려달라고 하자 합려가 반영(瀊纓)을 빌려줬으며, 반영(瀊纓)을 통해 궁녀들의 군심을 잡는 역할을 했다.
▶️ 干(방패 간/줄기 간, 마를 건, 들개 안, 일꾼 한)은 ❶상형문자로 乾(건), 幹(간)의 간자(簡字)이다. 干(간)은 방패, 창과(戈; 창, 무기)部는 창인데 방패를 쥔 모양으로 그것을 생략한 모양이다. 干(간)을 들고 돌진하므로 침범하다의 뜻이다. 또 옛날에는 날짜를干支(간지)로 헤아렸다. 干(간)은 幹(간; 줄기), 支(지)는 枝(지; 가지)이고 干(간)은 竿(간, 장대)도 된다. 마르다, 말리다의 뜻은 乾(건), 旱(한)과 음(音)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❷상형문자로 干자는 '방패'나 '막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干자는 방패를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干자는 화살이나 칼을 막는 방패를 그린 것이 아니다. 干자는 손에 드는 방패가 아니라 적이 성안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봉쇄하던 방패를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사슴의 뿔처럼 생겼다 하여 '녹각책(鹿角柵)'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干자는 긴 나무를 엮어 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방패는 적의 진입을 방어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干자에는 '막다'나 '방어하다'라는 뜻이 있다. 다만 상용한자에서 干자가 부수로 쓰인 글자들은 대부분이 모양자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干(간, 건, 안, 한)은 (1)오행(五行)을 각각 음양으로 가른 것. 곧 십간(十干) (2)옛날 춤추는 데 쓰던 기구. 길이 한 자 세 치 너 푼, 위는 삼각형으로 넓이 다섯 치 칠 푼, 아래 넓이 네 치 서 푼, 두께 칠 푼 되는 널판에 용(龍)의 형상을 그리고 뒤에 손잡이가 있는 데, 간척무(干戚舞)나 일무(佾舞)에 무무인(武舞人)이 왼쪽 손에 쥐는 것임 (3)신라 때 촌도전(村徒典), 마전(麻典), 육전(肉典), 재전(滓典), 석전(席典), 궤개전(机槪典), 양전(楊典), 와기전(瓦器典)의 벼슬 (4)신라 때 향직위(鄕職位)의 하나. 경직위(京職位) 제 13위(位) 사지(舍知)에 준함 (5)방패(防牌) (6)약화제(藥和劑)나 약복지(藥袱紙)에 생강(生薑)이라는 뜻으로 쉽게 쓰는 말 (7)성(姓)의 하나 (8)한(汗), 한(翰), 한(韓). 우리나라 고조선(古朝鮮) 때에 군장(君長)을 이르던 말 등의 뜻으로 ①방패(防牌) ②과녁 ③막다, 방어하다 ④구하다, 요구하다 ⑤범하다, 간여하다 ⑥줄기 ⑦몸, 중요한 부분 ⑧근본(根本), 본체 ⑨천간(天干), 십간 ⑩재능(才能) ⑪용무 ⑫등뼈 그리고 마를 건의 경우는 ⓐ마르다, 건조하다(건) ⓑ말리다(건) ⓒ건성(어떤 일을 성의 없이 대충 겉으로만 함)으로 하다, 형식적이다(건) ⓓ텅 비다(건) ⓔ아무것도 없다(건) ⓕ건성(어떤 일을 성의 없이 대충 겉으로만 함)(건) ⓖ말린 음식(건) ⓗ물을 사용하지 않은(건) ⓘ헛되이, 덧없이(건) 그리고 들개 안의 경우는 ㉠들개(안) 그리고 일꾼 한의 경우는 ㊀일꾼(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방패 순(盾)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창 과(戈), 창 모(矛)이다. 용례로는 바람 또는 요구함을 간구(干求), 방패를 간로(干櫓), 나무를 솎아 베어 냄을 간벌(干伐),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비웃으며 하는 말을 간경하사(干卿何事), 명분을 어기고 은혜를 배반하는 짓 이를테면 아들이 대역 죄인도 아닌 아버지를 고소하는 따위를 일컫는 말을 간명범의(干名犯義), 방패와 성의 구실을 하는 인재란 뜻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인재를 이르는 말을 간성지재(干城之才), 구름을 침범하고 해를 덮는다는 뜻으로 큰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것을 비유하는 말을 간운폐일(干雲蔽日), 남의 나라 안 정치에 관하여 간섭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내정간섭(內政干涉), 무기를 거꾸로 놓는다는 뜻으로 세상이 평화로워졌음을 이르는 말을 도치간과(倒置干戈), 자기에게 관계가 있건 없건 무슨 일이고 함부로 나서서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무불간섭(無不干涉), 나라를 구하는 방패와 성이란 뜻으로 나라를 구하여 지키는 믿음직한 군인이나 인물을 의미하는 말을 구국간성(救國干城) 등에 쓰인다.
▶️ 將(장수 장/장차 장)은 ❶형성문자로 将(장)의 본자(本字)이다. 문자의 오른쪽 부분은 月(월; 肉)과 寸(촌)을 합(合)한 모양, 옛날에는 肉, 月과 人(인)을 합(合)한 모양으로나 또는 肉, 月과 手(又; 손)을 합친 모양으로도 썼다. 고기를 손으로 가지는 일이라 생각된다. 음(音)을 나타내는 爿(장)은 몸을 의지하는 침대에서 의지(依支)가 되는 것을 나타낸다. 將(장)은 어린아이의 손을 끌거나 노인의 팔꿈치를 잡거나 하여 걸음을 돕는 일로, 나중에 壯(장; 씩씩한 남자)과 결부되어 군대가 의지(依支)로 삼는 사람에서 군대를 이끄는 대장(大將)의 뜻으로 쓴다. 또 음(音)을 빌어 어조사로 쓴다. ❷회의문자로 將자는 '장수'나 '장차'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將자는 爿(나뭇조각 장)자와 肉(고기 육)자, 寸(마디 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將자의 갑골문을 보면 爿자에 양손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큰 평상을 드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소전에서는 여기에 肉자가 더해지기는 했지만, 갑골문에서의 將자는 혼자서도 평상을 들 정도로 힘이 센 사람을 뜻했다. 참고로 지금의 將자는 '장차'라는 뜻으로도 가차(假借)되어 쓰인다. 그래서 將(장)은 (1)장수(將帥), 장군(將軍) (2)준장(准將), 소장(少將), 중장(中將), 대장(大將)의 통틀어 일컬음 장관(將官) (3)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오위(五衛), 내금위(內禁衛)의 으뜸 벼슬 종2품(從二品) 문관직(文官職)임 (4)장기에서, 초(楚) 한(漢)자를 새긴 짝 장수를 나타내는 짝임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장수(將帥), 인솔자(引率者) ②장차(將次) ③문득 ④청컨대 ⑤무릇, 대저(大抵: 대체로 보아서) ⑥만일(萬一), 만약(萬若), 혹은(或-: 그렇지 아니하면) ⑦또한, 한편 ⑧거의, 대부분(大部分) ⑨그리고, 그리하여 ⑩오히려 ⑪원하건대, 바라건대 ⑫어찌 ⑬거느리다, 인솔(引率)하다 ⑭기르다, 양육(養育)하다 ⑮동반(同伴)하다 ⑯행(行)하다, 행동으로 옮기다 ⑰나아가다, 발전하다 ⑱가지다, 취하다 ⑲받들다 ⑳지키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장수 수(帥)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병사 병(兵), 마칠 졸(卒), 선비 사(士)이다. 용례로는 장교와 사병을 통틀어 장병(將兵), 군사를 거느리는 우두머리를 장수(將帥), 군을 통솔 지휘하는 무관을 장군(將軍), 군에서 소위 이상의 무관을 통틀어 이르는 장교(將校), 장군의 미칭을 장성(將星), 앞으로 닥쳐올 때를 장래(將來), 앞으로 늘어 나감이나 순조롭게 나아감을 장취(將就), 씩씩하고 왕성함을 장성(將盛)앞으로나 차차를 장차(將次), 때가 가깝게 됨을 나타내는 말을 장근(將近), 받아들여 순종함을 장순(將順), 기름 또는 양육함을 장양(將養), 우두머리 되는 장수 또는 운동 경기의 팀을 통솔하는 선수를 주장(主將), 항복한 장수를 항장(降將), 무술에 뛰어나고 군대를 거느려 다스리는 우두머리를 무장(武將), 손님 대우를 받는 장수를 객장(客將), 늙은 장수 또는 싸움의 경험이 많아 군사에 밝은 장수를 노장(老將), 이름난 장수를 명장(名將), 용맹스러운 장수를 용장(勇將), 범처럼 용맹스러운 장수를 호장(虎將), 사납고 굳센 장수를 맹장(猛將), 저편의 계략을 미리 알고 이를 이용하는 계교를 일컫는 말을 장계취계(將計就計), 장래를 설계함을 일컫는 말을 장래설계(將來設計), 장수 집안에서 장수가 남을 일컫는 말을 장문유장(將門有將), 장수나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을 일컫는 말을 장상지재(將相之材), 날마다 달마다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뜻으로 학업이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진보함을 일컫는 말을 일취월장(日就月將), 혼자서는 장군을 못한다는 뜻으로 남의 의견을 무시하고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독불장군(獨不將軍), 많은 전투을 치른 노련한 장수란 뜻으로 세상일에 경험이 많아 여러 가지로 능란한 사람을 이르는 말을 백전노장(百戰老將),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으로 어떤 일에 크게 성공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을 개선장군(凱旋將軍), 잉어가 용으로 화한다는 뜻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 양명함을 이르는 말을 어룡장화(魚龍將化) 등에 쓰인다.
▶️ 莫(없을 막, 저물 모, 덮을 멱)은 ❶회의문자로 暮(모)와 동자(同字)이다. 삼림(森林) 혹은 초원(草原)에 해가 지는 모양을 나타내고 해질녘의 뜻이다. 나중에 음(音) 빌어 없다, 말다의 뜻(無, 毋)으로 전용(專用)되고 해질녘의 뜻으로는 暮(모)자를 만들었다. ❷회의문자로 莫자는 ‘없다’나 ‘저물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莫자는 茻(잡풀 우거질 망)자와 日(해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갑골문에 나온 莫자를 보면 풀숲 사이로 해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날이 저물었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해서에서는 아래에 있던 艹(풀 초)자가 大(큰 대)자로 바뀌게 되어 지금의 莫자가 되었다. 그러니 莫자에 쓰인 大자는 艹자가 잘못 바뀐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莫자는 이렇게 날이 저물은 것을 표현한 글자지만 지금은 주로 ‘없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해가 사라졌다는 뜻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다시 日자를 더한 暮(저물 모)자가 ‘저물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莫(막, 모, 멱)은 ①없다 ②말다, ~하지 말라 ③불가하다 ④꾀하다(=謨) ⑤편안하다, 안정되다 ⑥조용하다 ⑦드넓다 ⑧아득하다 ⑨막(=膜) ⑩장막(帳幕)(=幕) 그리고 ⓐ저물다(모) ⓑ날이 어둡다(모) ⓒ나물(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 따위. 이것을 양념하여 무친 음식)(모) 그리고 ⓓ덮다(멱) ⓔ봉하다(열지 못하게 꼭 붙이거나 싸서 막다)(멱)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몹시 크거나 많음을 막대(莫大), 힘이 더 할 수 없이 셈을 막강(莫强), 매우 중요함을 막중(莫重), ~만 같은 것이 없음을 막여(莫如), 또는 막약(莫若), 벗으로서 뜻이 맞아 허물없이 친함을 막역(莫逆), 매우 심함이나 더할 나위 없음을 막심(莫甚), 매우 심함을 막급(莫及), 가장 좋음을 막상(莫上), 아닌게 아니라를 막비(莫非), 깊은 밤이나 이슥한 밤을 막야(莫夜), 몹시 엄함을 막엄(莫嚴), 말을 그만둠이나 하던 일을 그만둠을 막설(莫說), 더할 수 없이 매우 강함을 막강(莫強), 황폐하여 쓸쓸함을 삭막(索莫), 고요하고 쓸쓸함을 적막(適莫), 어느 것이 위고 아래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말을 막상막하(莫上莫下), 도무지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을 막무가내(莫無可奈), 마음이 맞아 서로 거스르는 일이 없는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친밀한 벗이라는 말을 막역지우(莫逆之友), 아주 허물없는 사귐이라는 말을 막역지교(莫逆之交), 더할 수 없이 매우 강한 나라라는 말을 막강지국(莫強之國),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막불감동(莫不感動), 더할 나위 없이 아주 중요한 곳이라는 말을 막중지지(莫重之地), 동서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을 이르는 말을 막지동서(莫知東西), 자식을 가르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을 막여교자(莫如敎子), 매우 무지하고 우악스럽다는 말을 무지막지(無知莫知), 가는 사람은 붙잡지 말라는 말을 거자막추(去者莫追), 피할 곳 없는 도적을 쫓지 말라는 뜻으로 궁지에 몰린 적을 모질게 다루면 해를 입기 쉬우니 지나치게 다그치지 말라는 말을 궁구막추(窮寇莫追) 등에 쓰인다.
▶️ 耶(어조사 야, 간사할 사)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음(音)을 나타내는 귀 이(耳; 귀, 야)部와 우부방(阝=邑; 마을)部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빌어 의문(疑問)의 어조사(語助辭)로 쓰인다. 본디는 아(邪)였는데 나중에 잘못 써서 된 글자이다. 그래서 耶(야, 사)는 ①어조사(語助辭) ②그런가 ③아버지(=爺) ④예수, 야소교(耶蘇敎) 그리고 ⓐ간사하다(마음이 바르지 않다)(사) ⓑ사특(邪慝)하다(요사스럽고 간특하다)(사)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힘을 합할 때 일제히 내는 소리를 야허(耶許), 영탄하는 어조사로 야야(也耶), 목재나 돌 따위의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때에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 번갈아가면서 내는 소리를 호야(呼耶), 나라 이름으로 가야(伽耶), 있는지 없는지 흐리멍덩한 모양을 이르는 말을 유야무야(有耶無耶), 썩 높거나 깊어서 천 길이나 만 길이 되는 듯하다는 말을 천야만야(千耶萬耶),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를 이르는 말을 아승기야(阿僧祇耶), 구름이냐 산이냐는 뜻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산인지 구름인지 분별하지 못하여 의심함을 이르는 말을 운야산야(雲耶山耶)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