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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과 자존감
내가 평검사로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파견 근무할 때이니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국회 본관 4층에 있는 내 사무실로 미 대사관 직원 한 사람이 방문했다. 외교부에 있는 대학 동창이 미리 전화 소개를 해준 다음 찾아온 그는 내 나이쯤 돼 보이고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전형적인 앵글로 색슨계 미국인인데 처음 보는 사람도 경계를 풀게 하는 그런 선한 인상이었다. 다행히 우리 말도 아무 불편 없이 잘하여 우리는 영어보다는 한국어로 주로 대화를 나눴고, 얘기가 잘 통해 사무실 밖에서도 만날 정도로 금방 친해졌다.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가족이나 취미에 관해서도 묻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현 정국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물론 검사인 나는 나에게 접근해 오는 사람들을 항상 조심해 왔기에 그가 순수한 외교관이라기보다는 다른 기관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점과 나를 찾아온 것이 단순한 친교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뭔가 다른 목적이 있음을 알아채긴 했다. 이렇게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친구처럼 지냈는데, 나중에는 내가 원소속이 어디냐고 묻자 그는 씩 웃으며 그건 알 만하지 않냐고 할 정도로 터놓고 지냈다. 놀랍게도 그는 한국의 현 상황은 물론 역사와 문화 등에 대하여 속속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이해의 정도를 넘어 한국인에 대한 애정 같은 것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공교롭게도 내가 검찰로 복귀할 때쯤 그도 새 미션을 맡아 곧 귀국해야 한다고 했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내가 그에게 합죽선(合竹扇)을 선물로 건네면서 힌국인을 사랑하는 것 같은데 우정 어린 충고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먼저 합죽선을 펼쳐보며 그들 특유의 과장돼 보이는 감사의 표시를 한 다음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한국 사람 자존심은 센데, 자존감은 좀 부족한 것 같아요.” 하는 것이었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지금은 자존감이라는 말이 흔하게 쓰이지만, 그때만 해도 자기계발서 같은 데서 ‘자존심은 잠시 내려놓고 자존감을 키워 갑시다’라는 식으로 충고를 해도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낯설게 느껴질 때니까 말이다. 더구나 우리 국민에게 자존감이 부족하다는 점까지 파악해서 따끔한 지적을 한다는 것에는 약간의 두려움까지 느껴졌다. 아무튼 그는 자존심과 자존감의 문제라는 커다란 숙제를 나에게 내주고 떠난 것이다.
사전에는 자존심을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떳떳한 자세로 남에게 굽실대지 않고 기품을 지키는 것은 삶의 올바른 자세다.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선비정신, 즉 사대부로서 유교적 교양과 인격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고 세속적 이익보다 대의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불굴의 정신을 기본자세로 삼아왔다. 따지고 보면 그 선비정신도 바로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지키는 바로 이 자존심에 기초한다고 본다. 이희승의 수필 「딸깍발이」에 나오는 ‘남산골샌님’은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의관을 가지런히 하며 오직 청렴과 지조를 생활신조로 삼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며 살아온 전통적인 선비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자존심은 올바른 가치를 굳게 지키고자 하는 것이기에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자존심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나 사회조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일제의 암울한 지배하일 때 도산 안창호 선생이 교육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워 준 것처럼 자존심이라는 것은 자기 비하에서 벗어나 나라를 일으키는 동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손흥민은 한국 축구의 자존심이다.”라고 할 때의 자존심은 어떤 집단의 가치나 품위를 지키는 데 본보기 또는 향도(嚮導)가 될 만한 존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것인데, 이때의 자존심이라는 말에는 그 집단을 긍정적으로 고양시키는 힘이 있다.
그런데 이런 자존심도 항상 좋은 뜻으로만 쓰이지는 않는다. “김 과장은 자존심이 너무 센 게 문제야.” 식으로 말할 때는 부정적인 함의를 지니게 된다.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킨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도 직결되는 것이고 또 우리 내면의 도덕적 동기의 근본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킨다는 품위가 다른 사람이 자기를 하찮게 여길까 두려워 내세우는 것이라면 그 자존심은 존귀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초라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자존심이 센 사람은 품위를 갖춘 사람이라기보다는 품위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제로는 이들은 대부분 열등감에 빠져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허세를 보이며 자존심을 내세우나 오히려 자신의 천박함만 더 드러날 뿐이다.
이렇게 자존심이란 단어에는 양면성이 있다.
자존감 역시 사전에는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고 풀이하고 있다(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어대사전』).
아직도 일반 사전에는 표제어로 잘 올라 있지 않은 이 단어는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자기계발서 같은 데서 자주 등장하였고, 점차 심리학과 의학 그리고 사회과학 분야에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위 사전의 풀이만으로는 자존심과 쉽게 구별하기 어려운데 대체로 ‘자존심의 긍정적인 측면’을 따로 도려내어 부각시킨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학술용어로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 self-esteem)’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모든 개념이 그러하듯이 이 용어도 그 사용 분야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미로 쓰인다. ‘self-esteem’의 ‘esteem’에 존중 이전의 객관적인 평가라는 의미가 있듯이 발달심리학에서는 이 개념을 ‘자아 개념의 평가적인 측면으로 자신의 가치에 대한 판단’ 또는 ‘그러한 판단과 관련된 감정’이란 뜻으로 쓰고 있다. 이와 달리 미국의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1890년대에 ‘self-esteem’을 ‘자기 자신이 가치 있고 소중하며, 유능하고 긍정적인 존재라고 믿는 마음’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하였는데, 자기계발서를 쓰는 저자들이 부정적인 의미까지 포함된 자존심보다 이런 좋은 의미를 가진 ‘자아존중감’을 택하면서 ‘자존감’으로 줄여 부른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면 자존심과 자존감이 차이는 무엇인가?
자존심이 없으면 자존감도 없다. 그러므로 자존심을 지키는 일은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자존심이 센 사람이 바로 자존감이 높은 것은 아니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결정적인 차이는 시선의 향방에 있다(양상순 『우리말 어감 사전』, 유유, 2021, 292쪽). 자존심의 시선은 자신의 밖을 향하고 있고, 자존감의 시선은 자신의 안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명쾌한 설명이다. 자존심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민감하지만, 자존감은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중요하다. 즉, 자존감은 상황에 관계 없이 스스로에 대한 존중이 확고한 것이고, 자존심은 상대방의 평가를 통해 자기만족감을 얻는 것이다.
앞의 미국인 친구가 던지고 간 자존심·자존감이라는 말이 제법 그럴듯해 보이고, 그의 지적에 따라 나와 우리 국민이 자존심보다는 자존감을 세우도록 하는 일이 나의 과제가 된 듯했는데, 사실 그 개념이 명확히 다가오진 않았었다. 이제 개념 정립이 되었으니 그 과제를 제대로 수행해야겠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남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차원을 넘어서 아예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생각에 지배당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타인의 시선에 내 삶이 저당 잡혀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닌 타인이 되는 식이다. 자존심을 살리려다가 오히려 자신에 대한 존엄이 훼손되는 형국이 된 셈이다.
자존심은 곧잘 나의 몸과 얼굴을 꾸미는 것, 즉 내 얼굴 안 깎이게 하는 어떤 행동을 의미하는 체면치레와 연결된다. 체면의 사전적 정의는 ‘남을 대하는 떳떳한 도리나 얼굴’로 되어 있으나, 통상은 본질을 외면하고 겉치레에 치중하는 허세라는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 것으로 많이 사용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체면치레로써 자존심을 살리려 해왔다. 폐쇄적인 농경사회에서, 그것도 유교 문화의 전통 속에 살아오면서 실제의 나보다도 남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즉 다른 사람의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는 자존심은 변질되고 말았다.
도시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도 명절이 되면 빌려서라도 꼭 고급승용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가 자기를 과시하고, 결혼식도 꼭 특급 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화려한 꽃 장식과 고급 와인 제공 하에 해야지만 제대로 한 것 같으며, 바로 화장(火葬)을 하여 태워 버릴 것이면서도 최고급 원목의 관을 써야지만 고인에 대한 예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니 또 그 미국인 친구가 생각난다. 둘이는 밖에서 만날 때 번갈아 가면서 식대를 부담했는데, 한번은 내 차례가 됐을 때 한정식 코스 중 두 번째로 비싼 모란 코스를 주문하려고 하니까 그가 굳이 제일 싼 진달래 코스로 하자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설렁탕집에 왜 그리 ‘특’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특’이라고 해봐야 고기 좀 더 넣어주는 것뿐인데, 고기의 진액은 이미 국물로 다 빠졌잖아요. 제가 잘 아는 분이 그러는데 음식점에서는 기본을 시키는 것이 제일 실속이 있대요.”
그는 그때 이미 나와 우리 국민의 체면의식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이후 내내 식당 주인들의 상술에 넘어가 얼마나 많은 체면치레를 했으며, 지금도 기본으로 할까 ‘특’으로 할까를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예부터 우리는 체면을 중시했기에 “조선 사람은 낯 먹고 산다.”라든가, “닷새를 굶어도 풍잠(風簪) 멋으로 굶는다.”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최근에는 한국 여자들은 시장에 갈 때도 차려입고 간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돈다. 그러고 보니 아파트 뒷동산을 잠시 올라가더라도 최고급 기능성 등산복을 갖춰 입고, 집 앞 슈퍼에 다녀올 때도 제대로 화장을 하고 가야지 창피스럽지 않은 식이다.
심리학적으로 체면은 상황이나 관계성에 따라서 실제 마음이나 사실과는 달리 행동하고 자신의 외적 명분을 높이려는 행동 과정이라고 분석하는데, 남들이 보는 나를 중시하면서 자기 자신도 완벽을 추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지배하는 타자 지향성의 문화적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겉으로 보이는 외모의 부분에 극히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성형대국’이라는 명성(?)까지도 얻게 되었는데, 외모를 완벽에 가깝게 꾸민들 과연 자존심이 세워질 것인지는 모르겠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지 한국 특파원으로 일한 바 있는 다니엘 튜더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2013)라는 자신의 책에서, 한국은 세계적인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경제 대국을 만드는 기적을 이뤄냈지만, 그 국민들은 끝없는 경쟁의식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내가 누구여야 하는지’ 하는 스트레스에 빠져 행복하지는 못한 나라가 되어버렸다고 꼬집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독일 출신의 미국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가 말한 슈드비 콤플렉스(should be complex: 자기 자신으로 자연스럽게 살지 못하고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언제나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에는 남에게 좀 있어 보이게 하는 데 소요되는 이른바 ‘품위유지비’라는 것이 있다. 여러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결혼식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이유로 ‘체면과 주위 시선 때문’이라는 응답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소형승용차를 기피하는 이유 역시 절반 가량의 응답자가 ‘체면 때문에’라고 답해 ‘안전도가 떨어져서’, ‘승차감이 나빠서’, ‘성능이 안 좋아서’ 등의 이유를 훨씬 앞섰다고 한다. 글쎄 결혼식을 호화롭게 하고 고급승용차를 탄다고 품위가 유지되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체면을 지키려는 마음의 긍정적 측면도 경시할 수는 없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체면 때문에 공중도덕을 지키고, 여럿 있는 자리에서 체면 때문에 남에게 양보하는 배려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이렇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체면을 지키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은 진정으로 자신의 품위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자존(自尊)’이란 말 그대로 자기를 스스로 존중하고 지키는 것이다(철학에서는 ‘자존’을 ‘자기 인격성의 절대적 가치와 존엄을 스스로 깨달아 아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남이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 자존인 것이다. 자존심이 세서 남의 평가에 예민하여 아무리 거기에 맞춘들 자존은 찾아오지 않고, 오히려 자존심을 죽여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에 충실함으로써 자존은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존이 찾아진 상태를 자존감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여긴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에 타인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 역시 뛰어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다(심리학에서는 자존 감정과 타자에 대한 태도에는 플러스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또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기에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존감과 자존심은 자신에 대한 긍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한 긍정’을 뜻하고 자존심은 ‘경쟁 속에서의 긍정’을 뜻하는 등의 차이가 있다.
자존감을 갖춘 사람의 가장 좋은 점은 경쟁 속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스스로 긍정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자신과 타인에게 전혀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모습이 보인다.
먼저 다른 사람을 의식하니까 자꾸 비교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내가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자세가 자신의 단점을 바로 찾아내어 고칠 수 있는 긍정적인 점도 있겠지만, 자신의 여러 측면 중 다소 모자란 점들만 왜곡되게 드러내어 잘못된 열등감에 빠지기 쉽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또 일의 결과가 실패하리라는 걱정 때문에 항상 불안해한다. 그래서 소속된 집단에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자기는 리더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직접 나서서 주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겉모습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져 외모 관리와 다이어트 그리고 명품 치장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자기 외모가 완벽해 보이지 않거나, 명품으로 가꾸지 않으면 자신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느끼는 것이다. 반대로 자기혐오 쪽으로 방향을 틀면 지나칠 정도로 외모에 관심을 끊기도 한다.
시기와 질투가 심한 것도 이들의 특징이다. 자신보다 뛰어나거나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열등감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심하게 느껴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본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이래서 나온 것이다.
또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속마음과 겉으로 표현하는 말이 일치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보다는 남의 눈치를 먼저 보는 습성에 젖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솔직한 의사를 말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관계가 깨질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신의 느낌은 감추고 침묵하거나 때로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속인다.
역경에 처했을 때 효과적으로 이에 대처하거나 실패를 경험했을 때 좌절감을 올바르게 잘 극복하지 못한다. 자존감을 갖춘 사람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설혹 실패를 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는 회복 탄력성이 뛰어난 점과 대비된다. 시험 전날 일부러 하루 종일 게임을 해서 컨디션을 해친 뒤 시험을 망치고는 ‘다 이유가 있어서 시험을 못 본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실패의 가능성이 높은 과제를 앞두고 있을 때 미리 그 결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불구화 전략(self-handicapping strategy)’을 써먹기도 한다.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 특히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인사에게 너무 쉽게 설득당하는 경향도 있다. 즉, 피암시성(被暗示性)이 강하여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아존중감이 너무 떨어지는 관계로 다른 사람도 쉽게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타인의 의견도 못 믿는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 자기가 소속된 조직에 더 자부심을 가진다. 어떤 조직에 소속감을 가지는 것이 나쁠 것은 없지만, 자기가 소속한 조직이 사회적 인식이 좋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보다 그 조직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기를 욕하면 참고 지내지만 그 조직을 폄훼하면 극도로 분노해서 참지를 못한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은 개인의 주관적 안녕감이나 삶의 질 역시 크게 떨어지게 된다.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의 부정적 측면을 너무 많이 들춰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이제 잘사는 편인데도 행복지수는 매우 낮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나 생각해 보면 앞에 든 것들이 이해가 갈 것이다. 이왕이면 행복한 것이 좋다. 행복해지려면 자존감을 살려야 한다.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존엄성이 남들의 인정이나 칭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성숙한 사고와 가치에 의해 얻어지는 의식을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자존감은 잘 살릴 수 있는가?
자기계발서나 인터넷에는 자존감을 고양시키는 여러 가지 묘책들이 제시되어 있다. 모두 나름대로 일리 있고 효과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거울을 보고 “나는 훌륭하다! 나는 위대하다!”라고 외치라고 하는 것은 유치한 자기최면이고 속임수 같기도 해서 별로 권장할 만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제일 먼저 남과 비교하는 마음부터 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남을 의식하고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걱정하고 하는 것들이 바로 자존감을 저해하는 요인인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내가 남보다 나아야겠다는 비교의식이 근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일단은 자신의 주체성을 강하게 앞세워 남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남과 비교하는 버릇만 없애면 자존감 세우는 작업은 80% 이상 이룩된 것이다. 굳이 꼭 비교를 하고 싶다면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해 보라.
다음으로 아주 작은 목표 내지 과제를 정하여 이를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것을 권한다. 예컨대 아침 식사 전에 스쿼트를 50번 한다든가, 집안의 창틀에 낀 먼지를 닦아낸다든가, 오래 연락이 안 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이런 것들이 어려운 것은 아니나 또 마음먹지 않으면 실천하기 쉬운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면서 수첩이나 다이어리에 내가 한 일을 적어두는 것도 한 방법인데, 그런 것들이 쌓이면 내가 한 일들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많아짐을 알게 된다. 이러한 소소한 성취감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도탑게 해주고, 그렇게 되면 조금 더 발전해서 ‘6개월에 100만 원 모으기’ 같이 조금 높은 목표도 세워 그것을 이룬 다음 배우자에게 적당한 선물을 하면 자존감은 물론 행복감까지 올라갈 것이다.
한 가지만 더, 자기 자신을 너무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 힘들게 살고 있다. 어떤 때는 좀 쉬고 싶고 외롭기도 해 누군가로부터 힐링을 받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나를 가장 이해하고 위로하며 편히 쉬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다. 나를 너무 몰아붙이지 않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스스로 내려놓게 하는 것, 이것이 진정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닐까? 비우면 여유가 생긴다. 이렇게 내려놓고 비우면 내 삶에서 더 중요한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 그것 또한 나의 자존감을 올리는 방법이 되리라고 본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들이 많다. 계층과 상관없이 늘어만 가는 자살률도 그렇고, 세대 간과 지역 간 그리고 남녀 간의 갈등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이며, 서로가 불신하고 비방하며 그리하여 명예훼손 고소나 소송 건수가 자꾸만 늘어나고, 청소년의 외모지상주의와 학력 부풀리기나 거짓 스펙 쌓기 같은 것은 이미 심각한 수준을 넘어섰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높아야 할 자존감은 낮은데 쓸데없이 자존심만 세고 체면 차리는 데만 급급해 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존감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사랑할 수 없다.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할 때 이 사회에 깔려 있는 여러 문제들이 잘 해결되리라고 본다.
좋은 결과를 이루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요구된다. 자존감을 올리는 데에도 끊임없는 훈련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체면 민감성을 자제하고 자존심보다는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 매우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인 것 같다. 그러나 앞서 내가 말한 방안은 그저 하나의 제안에 불과하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하에서 안창호 선생이 교육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워주었듯이 오늘날에도 우리의 자존감을 끌어올릴 좋은 가르침을 줄 정신적 지도자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론도 시시콜콜한 정치인들의 쌈박질 이야기만 다루지 말고 ‘자존감 고양 국민 캠페인’이라도 벌이는 등 자존감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어떨까 한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국민 각자의 마음가짐이다. 껍데기인 자존심은 이제 던져 버리고 진정한 자신을 찾겠다는 그런 자세 말이다. 그러면 우리 국민 모두가 자존감이 올라가 자기 자신도 사랑하고 주위 사람들도 사랑하여 행복해지리라는 생각이 든다.
왠지 꼭 그렇게 될 것만 같다. 그때쯤 이제 노인이 된 앞의 그 미국인 친구가 다시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사람은 자존감이 넘쳐나는데, 그게 바로 국력입니다.”라고 한마디 할 것이라고 상상하면 그냥 흐뭇하기만 하다.
내 엉뚱한 상상이 맞다고 하는 것인지 아래층의 TV에서 자신감 넘치는 뚱뚱한 몸매의 여가수 Lizzo의 <Juice>가 흘러나온다.
If I'm shinin', everybody gonna shine…
(내가 빛나면, 모두 다 빛이 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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