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허들링*할까요
이은
눈을 떠보니 방 안에 사우스조지아섬 황제펭귄이 들어와 있었어요 하얀 벽을 배경으로 눈 폭풍이 몰아칩니다 TV 화면 속에서 펭귄이 알을 부화하고 있는 중이구요 난 오지 않는 잠을 끌어당겨 펭귄 자궁이 열리고 알이 떨어지는 순간을 보았지요 내 발등에서 네 발등으로 알이 옮겨 다니는 동안 알이 떨어질까 봐 조바심쳤지요
남극 블리자드가 불어오기 시작했어요 누군가 먼저 휘파람을 불었어요 황제펭귄 수천 마리가 일사분란하게 허들링하기 시작했어요 일개 군단을 이루고 맨등으로 눈 폭풍을 맞고 있었어요 밖으로 밖으로 조금씩 몸을 비비며 안으로 안으로 몸을 밀며 들어가고 있었어요
지하철 역사 안 눈 폭풍을 피해 사람들이 밀려들었어요 온통 까만색 패딩을 입은 사람들이었어요 검은 펭귄들이 우글거렸지요 빙산 같은 콘크리트 벽을 배경으로 줄지어 서 있었어요 어둠 저 너머 눈보라는 멈추지 않았어요 빽빽이 들어찬 지하철 안은 더운 김이 푹푹 올라왔어요 그 순간 지하철은 적당히 흔들렸어요 그럴 때마다 펭귄 사람들은 조금씩 조금씩 몸을 비스듬히 세워 안으로 안으로 밖으로 밖으로 발을 옮겼어요
좌로 우로 둥글게 둥글게 나선형을 그리며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움직였어요 모자를 눌러쓴 남자의 콧김이 얼굴에 닿을 듯해요 이제 곧 빙하기가 올지도 몰라요 꽁꽁 언 발을 내려다보는 저녁이었어요
우리가 견뎌야 할 야생의 시간, 눈덩이를 알로 착각한 펭귄처럼 우리는 말없이 내 발등에서 네 발등으로 네 발등에서 내 발등으로 펭귄 알을 옮기고 있었어요 지하철 문이 열리고 어디서 눈보라가 들이치는지 한 무리 펭귄들이 들어왔어요 서로 몸을 비비벼 안으로 안으로 밖으로 밖으로
옆구리로 옆구리로 온기를 전달하며 몸 비비는 동안 철커덕철커덕 환승역이었어요 눈 떠보니 줄지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어요 조금 전에 우리는 잠시 허들링한 걸까요?
*허들링(Huddling): 영하 50도에 이르는 남극의 눈 폭풍과 추위를 견디기 위해 황제펭귄들이 몸을 밀착하는 집단행동.
시집『우리 허들링할까요』2018. 천년의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