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생명공학과의 한 연구실은 올들어 실험을 한 건도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해 보다 20%정도 삭감된 연구비를 충당하기 위해 연구과제 지원서를 새로 작성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서울대에 국한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연구원들이 연구 용역을 받아 수행하는 연구소에도 초비상이 걸린 상황입니다. 연구원 10명이 넘는 상대적으로 큰 연구실들은 한때 대형 프로젝트에만 관심을 가졌지만 이제는 조그만 신규 공고에도 달려드는 전례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의대 정원 대폭 확대를 놓고 지금 정부와 의사사이에 살벌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래가 없는 치킨게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정부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 의사들에게 아예 면허를 취소해버리고 의사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정부의 강경자세가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요즘 학원가에는 의대 지망생들으로 초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고교 재학생이나 재수생들 그리고 현 대학 재학생 그리고 일반 회사원들까지 의대 지원을 위해 학원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른바 이공계와 의료계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이 요상한 현실이 바로 한국 과학계의 현주소입니다.
올해 국가 연구개발 이른바 R&D 예산이 지난해보다 14.8% 감액됐습니다. 4조원 이상 삭감된 26조원 정도 배정된 것입니다. 그 여파가 지금 전국 대학 연구 현장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그동안 국가 연구개발 과제를 대부분 맡아왔던 국립대와 주요 이공계 대학에서는 이른바 연구비 보릿고개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연구비 보릿고개로 인해 연구원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나거나 진행중이던 실험이 중단되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학들은 사외이사를 겸하는 그러니까 조금 형편이 낫다고 하는 교수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연구비를 충당하는 편법까지 동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교수들이 기업에서 받는 월급 일부를 모아서 저소득층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중단하고 그 돈을 연구비로 빼내 쓰야하는 형편에 도달한 것입니다. 실제로 올해 연구비 삭감으로 이제는 한국에서 연구할 수가 없다며 외국으로 떠나려는 대학원생들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실제로 중국으로 떠나는 물리천문학자는 정부가 연구개발 예산을 전년 대비 4조 원 넘게 축소한 여파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라며 이제 나이 40살에 중국으로 떠나는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속에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이 주요국 가운데 꼴찌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오면서 한국 과학계는 이중 타격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사상 처음으로 중국에게도 추월당했다는데 과학 현장의 충격은 더욱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요국 과학기술 수준 평가에서 미국이 최고 수준(100%)이며 EU (94%) 일본 (86.4%) 중국(82.6%) 한국 (81.5%)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2020년 기술 수준 평가에서는 한국이 중국을 앞섰지만 이번에는 뒤진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 확대가 시급한 상황이지만 한국만 유일하게 연구개발 예산을 축소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실제로 산업현장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때 세계 최고 수준을 나타냈던 베터리 업체들의 시장점유률이 중국업체들에게 점점 밀리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잘 나가던 반도체 역시 쉽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이 대세가 되고 여기에 특화된 시스템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면서 시장 자체가 바뀌고 있는데 한국은 점차 뒤로 밀리는 그런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대만의 TSMC는 일본에 공장을 짓고 일본과 본격적인 합작에 나서고 있어 한국은 점차 더 고립되는 위기에 몰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상황이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정말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부의 의대정원 확대 발표에 의사들이 집단 반발해 지금 의료현장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고 합니다. 수술 등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들이 정부와 의사들의 극한 대립으로 간호사들과 군 의료진까지 진료에 투입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의대정원이 발표되자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 각 대학들이 일제히 의대 정원 확대에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의대 교수진들은 반대하는데 학교측에서는 무리한 증원을 강행하는 것입니다.모 대학의 경우 지금 한학년 정원이 40명인데 이것을 3배반 늘린 144명을 요청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들이 태부족한데 학생수만 늘리겠다는 심보입니다. 지금 고교와 학원가에서는 의대를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의대 지원자들로 난리라고 합니다. 고교 재학생과 재수생은 물론이고 대학 재학생들과 회사원들까지 의대에 가겠다고 학원으로 몰려든다고 합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의대에 가겠느냐면서 사생결단의 모습으로 덤벼드는 상황입니다.
참으로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는 지금 과학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노력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연구 개발 예산입니다. 그런데 실탄을 줄이고 전쟁하라고 하는 그런 양상이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주에 위성을 쏘아 올리고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나라의 미래 먹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의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의사의 역할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고 나라 전체를 위한 큰 그림속에 어느 분야가 더 시급한지를 따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해결해야 할 그리고 시급히 조치해야 할 수많은 것 가운데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의대정원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나서는 이유가 정말 궁금합니다. 연구 개발 예산을 14.8%나 감축하면서 의대 정원은 일년에 2천명 이상 늘리려는 이런 결정속에 과연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더욱 큰 문제는 국가 연구 개발 예산 삭감도 아주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지만 이제 한국에서는 이공계에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인식이 더욱 확대되는 계기가 될 것에 현장 우려감은 더욱 큽니다. 안그래도 인재확보가 쉽지 않은 한국의 현실에서 이제 이공계 정원이 의대 지원자들로 채워지는 이공계 고사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 우려되는 시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과론적으로 그냥 눈에 보이는 의사부족 현상을 메꾸기 위해 더욱 중요한 과학 기술 연구 개발비는 축소하는 이런 상황이 과연 합당한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대 들어가면 인생 로또 당첨되는 것이라는 속물 건성에 사로잡힌 사회적 병리현상을 치유하는 것이 더욱 더 필요한 사안이 아닌가도 생각듭니다. 한번 잘못 결정된 정책으로 나라가 얼마나 어려움을 겪는지는 우리는 역사속에서 너무도 잘 실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2024년 3월 11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