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 매그넛(Boy Magnet)
- 남자를 끌어당기는 자석
프롤로그
“보고 싶을 거야, 제임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가 빙그레 웃는다.
“이제 너랑 나는 다시는 못 만난다고. 그래도 웃음이 나와?”
제임스가 이번에는 아예 킥킥거리며 웃는다. 아주 맛있게 비스킷을 빨아 먹으면서…하긴 2살짜리 아이한테 뭘 기대했나 싶다.
“Dara, thank you so much for everything you have done forJames. We will miss you. Please, come to the party. Ok? (다라,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우린 정말 네가 너무 보고 싶을 거야. 파티는 꼭 참석해 줘. 응?)”
제임스의 엄마, 사라가 내게 작별인사를 했다. 제임스의 아빠 박재인은 내 양볼에 키스했다. 박재인씨는 30대 중반의 한국남자이고 사라는 30대 초반의 홍콩여자로 둘은 런던에서 만나 결혼을 했다. 박재인씨는 한국인 부모 밑에서 성장했어도 외국생활을 오래해서인지 이런 스킨십이 참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난 재인씨가 이럴 때마다 은근히 사라 눈치를 보곤 했었다. 재인씨가 여자들에게 심하게(?) 친절하다는 얘기를 듣지 않았었더라면 난 이런 눈치 따위는 볼 필요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지사 사람들도 오지만 한국사람들도 초대했으니까 심심하진 않을 거야. 드디어 내가 너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게 되는 거지?”난 그의 손을 슬쩍 부리치고 말했다.
“드레스라고 할 것도 없는데요…”
제임스네가 런던 지사 생활을 끝내고 홍콩으로 돌아가게 되었기에 나도 자연스레 제임스의 내니(nanny : 유모)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난 제임스를 처음 만난 날을 잊을 수가 없다. 태어난 지 일주일 밖에 안되었음에도 제임스의 눈은 ‘나는 네가 좋아’라고 말하듯 맑고 투명하게 나를 응시했었다.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었다. 한 생명을 돌보아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그 생명에 대한 경외감 그리고 그 작고 맑은 영혼을 향한 조건없는 애정이 솟아올랐었다. 제임스가 처음으로 웃음소리를 내며 웃던 날, 열이 올라 제임스의 온몸을 물수건으로 닦고 그의 방에서 밤을 지새운 날, 제임스가 처음으로 뒤집던 날, 처음으로 서고 처음으로 걷던 날, 그리고 처음으로 내 이름을 다라가 아닌 ‘다다’라고 부른 날들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제임스는 더 레이디 에지몬트 로열 내니 스쿨(The Lady Edgemont Royal Nanny School)을 졸업한 내가 맡은 두 번째 아가였다. 로열내니스쿨은 전문 내니,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유모’를 양성하는 학교다.
유모란 단어를 들으면 왠지 한쪽 젖을 보란 듯이 내놓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나이 많은 할머니가 연상되지만, 영어로 ‘내니(Nanny)’의 뜻은 가족의 아이들을 돌보는 여성이란 뜻이다. 난 고등학교 2학년이던 18살 때 이모가 사는 이곳 영국으로 유학을 왔었다. 영국의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런던에서는 두 번째로 큰 가방과 의류잡화를 만드는 회사의 디자인 팀에서 일하던 나는 5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내니가 되었다. 서울에 있는 부모님은 내가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엄마의 표현대로라면 ‘남의 집 애나 봐주는 일’을 하러 비록 1년 과정이지만 학교까지 다시 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속상해하셨다. 내가 갑자기 내니가 되기로 한 이유는 어렵게 말하면, 이 번잡하고 타락한 현대사회에서 ‘순수한 모성애의 회귀’를 느끼고 싶어서이고 쉽게 말하자면, 그저 아가들의 천진한 눈망울과 아기들에게서 나는 그 특유의 냄새를 맡고 싶었을 뿐이다. 아기들을 꼭 안고 있으면 그들의 연약함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노골 노골 해지고 ‘내가 꼭 너를 지켜줄게!’하는 책임감과 사명감 같은 것이 불끈 솟아올랐던 것이다.
살인적인 렌트비를 자랑하는 런던에서 간신히 구한 소중한 일곱 평 남짓한 집에 와보니 정수가 와 있었다. 그가 소파에 누워 있다가 말했다.
“왔어? 같이 밥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열쇠 나 주세요. 지난 번에 달라고 했었는데 잊어 버렸어요?”
“야, 말 좀 놓고 편하게 해. 왜 그래? 만날 처음 보는 사람처럼. 어색하다.”
나는 정수가 나도 없는 집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이 싫다. 아무리 그가 이제 사귄 지 6개월 된 나의 남자친구라고 해도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들어와서 냉장고를 열고 마음대로 음식을 꺼내 먹고 마치 함께 사는 사람인 양 행동하는 것이 불쾌했다. 서로 아직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정수를 사귀기 시작한 것도 그가 하도 귀찮게 굴어서라고 말하는 편이 맞다.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거기에 있던 정수가 그 다음 날부터 내게 미친 듯이 전화를 해대었던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당당한 남자가 있나 싶어 나는 그를 순수한 남자라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집착이 심한 남자였을 뿐이다. 나뿐만 아니라 어떤 여자에게도 그럴 남자였다.
“치사하네. 안 그래도 돌려주려고 그랬지. 여기.”
가까운 한국식당에서 밥을 먹고 우린 자주 가는 근처 카페로 갔다. 딱히 서로 할 말도 없고 해서 난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정수가 아이폰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다음 내니 일은 어디서 해? 구했어?”
“…모르겠어요.”
“왜? 구하기 어려워?”
“…생각 중이에요.”
“넌 진짜 그게 매력이야.”
“..?”
“보통 말하기 전에 한 3초간 뜸을 들이는 거. 그게 막 너한테 집중하게 만들어. 매력적이야.”
그때 동양인 남녀 한 쌍이 들어와서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았다.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지훈아…”
정수가 아이폰에서 시선을 떼고 남자를 쳐다봤다.
“아는 사람이야?”
다행히 옆에 앉은 남자는 나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당연히 지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에게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의 이상한 눈빛을 느꼈는지 남자가 나를 힐긋 쳐다봤다. 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착각했어요.”
정수가 말했다.
“나가자. 빨리 마셔.”
그렇게 말하고 정수가 다시 아이폰에 집중했다.
옆 테이블의 남자는 한국인처럼 생겼고 여자는 일본인처럼 생겼다. 남자의 얼굴은 차갑지는 않은데 뭔가 까칠해 보이고 건방지지만 유쾌한 그런 묘한 인상이었다. 지훈과 확실히 다른 얼굴이었지만 눈매와 전체적인 실루엣이나 분위기는 정말 비슷했다. 남자배우 이름이... 예전에 ‘커피프린스’라는 드라마를 빌려 보았는데 거기에 나오는 맞다, 공유를 닮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공유라는 유명한 배우를 닮았다고 말하기엔 그의 분위기가 더 독창적이게 느껴졌다. 마치 어느 아버지에게 ‘당신은 당신 아들을 닮으셨군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모순이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옅은 블루톤의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자는 짧은 드레스에 염색한 머리 패셔너블한 일본 젊은 유학생 분위기였다. 옆 테이블의 남자가 노트북을 꺼내 같이 온 여자에게 보여준다.
“너무 근사해. 정말 좋다. 멋있다!”
여자가 하이톤의 감탄사를 한국말로 내뱉어서 둘이 한국인인 것을 알았다. 나는 여자가 뭘 보고 저러는지 궁금했다. 남자는 여자의 감탄에도 별 반응이 없다. 그가 여자에게 말했다.
“크기는 내가 알아서 결정한다.”
목소리는 지훈과 많이 달랐다. 지훈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지만 이 남자는 목소리는 차가우면서도 분명하다.
“어, 여기 눈썹 있다.”
그렇게 대답하며 여자가 남자의 눈 주위에서 눈썹을 떼내어 준다. 나의 눈이 남자의 눈이 또 다시 마주쳤다. 난 시선을 돌렸다. 정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할때 내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