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겨우 용기를 내었는데....)
친구들의 권유로 용기를 내어 존경하던 베토벤을 찾아갔다. 하인의 안내로 방문을 열자 새하얀 침대에는 그가 아무런 미동도 없이 잠들어있었다. 그가 병 때문에 죽어간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너무 늦은걸까.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 일찍 찾아갔더라면, 그에 대해 더 많은 걸 알아갈 수 있었을텐데!
의식없이 잠들어 있는 베토벤에게는 내 자신의 이름도, 방문 목적도, 자신에 대한 모든 것도 알려줄 수 없었다. 행여 자신이 찾아온 지 영원히 모르더라도 좋았다. 그저 존경하던 음악가의 얼굴을 보았고,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볼 수 있었으면 그걸로도 좋았다.
존경하는 베토벤 선생님께. 저는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라고 합니다. 당신이란 존재를 존경하고 당신의 음악을 사랑하는 평범한 무명 음악가입니다. 아마 하인이 제가 온다는 사실을 당신께 전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이렇게나마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음에 선생님이 제대로 눈을 뜨고 몸이 회복된다면, 그때는 제가 만든 악보를 들고 당신을 위한 연주를 들려드리러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신지요?
내가 너무 오래 잔 모양이군, 혹시 자네가 슈베르트인가? 보내 준 편지랑 악보는 잘 읽어보았네. 보내 준 악보는 정말 굉장히 독창적이고 훌륭했어! 계속 그대로만 한다면, 슈베르트 자네는 틀림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멋진 음악가가 될 수 있을걸세....
미안하네. 내 몸이 더 건강했더라면, 자네를 위해 내 레시피로 커피를 타 주고 자네를 위한 곡을 선물로 줄 수도 있었을텐데. 일단은 내 옆에 의자가 있으니 편히 앉아있다가게나. 자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으니 이야기해 줄 수 있나?
말이 끝나자마자 선생님은 매우 고통스러운지 기침을 터뜨리고 가슴을 붙잡으며 괴로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런 선생님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해 줄 수 없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았자 선생님이 더 고통스러워하면 어쩌죠?
집을 뛰쳐나오기 전 고개를 잠시 돌리자 상처 받은 짐승의 눈빛을 한 채 자신을 쳐다보는 선생님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눈을 본 순간 저는 제 감정이 단순한 존경을 넘어선 그 무언가라는걸 깨닫고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드러내지 못하고 무덤까지 나만이 안고 가져가야 할 감정.... 아, 신은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슬픔을 주시는 겁니까?
오늘 슈베르트라는 청년을 만났다. 그가 보내준 악보는 자칭 작곡가라는 부류의 것보다 훨씬 훌륭했다. 청년을 만난 순간,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 커다란 눈동자, 자신을 보며 순수하게 기뻐하는 미소가 매우 아름다웠다! 청년은 이윽고 죽어가는 내 모습이 견디기 힘들었는 지 울면서 내 방을 뛰쳐나가버렸다. 그리고 그의 우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이 사랑에 빠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끝내 청년에게 가지말라고, 좀 더 있어달라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병에 걸린 지 몇 해가 지났어도 이 지독한 통증은 늘 견디기 힘들다. 다음에 청년을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때는 꼭 힘을 내서 그를 위한 곡을 연주해주어야겠다.
1828년 3월 26일. 나는 모든 고통을 내려 놓은 채 죽음을 받아들였다. 수 많은 친구와 제자들이 내 주위에서 울고 있었다. 끝내 그 청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만약 내가 죽었다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를 위한 곡을 지어주겠노라 한 다짐은 끝내 지키지 못했지만, 부디 그 청년이 내 장례식에라도 나타나 장미 한 송이만 던져 주었으면 좋겠다.
(19세기- 결국에는 따라갔구나)
어느정도 열은 내린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잔 거지? 아니면 아직도 꿈 속인가? 눈을 떠 보니 이미 죽었던 베토벤이 내 손을 잡은 채 안타까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베토벤: 꿈이 아니다, 단지 너 말고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유령이지만.... 몸은 괜찮은거냐?
베토벤: 멍청한 자식, 존경하던 인간이 죽었다고 스토커마냥 저승길도 같이 가려는 놈은 너 밖에 없을거야! 너가 오래 살아서 늙어 가는 모습 보여주는 게 그렇게 못할 짓이냐?
선생님의 실없는 농담에 나도 모르게 내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도 잊은 채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 역시 바보같은 농담을 건넸다.
슈베르트: 선생님을 관에 넣고 제가 손수 땅 파서 묻어줬죠. 선생님이 좋아하는 싱그러운 야생장미도 듬뿍 넣어서 꾸몄는데, 꾸역꾸역 땅 파고 기어나온 걸 보면 관이 마음에 안 들었나봅니다! 아 관에 포도주 넣는 걸 깜빡해서 그런가?
베토벤: 너 때문에 내가 죽어서 저승도 못 가고 지박령으로.... 됐다 아무튼, 이제 좀 자거라. 한숨 자고나면 모든게 달라질 거고 너의 고통도 사라지겠지. 편히 잠들거라 슈베르트....
아니 이런 무명 음악가를 감히 베토벤 선생님 옆에 묻겠다는게 말이 됩니까?
형: 하지만, 내 동생은 베토벤을 누구보다 존경했소, 어찌 보면 사랑에 가깝기도 한 것 같지만, 그리고 생전에 베토벤 선생님도 내 동생의 음악을 좋아했다고 했으니 같이 묻히면 분명 베토벤 선생님도 기뻐할꺼요. 만약 내 동생이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았더라면, 베토벤 못지 않은 음악가가 되었을테니 별 문제도 없지 않소?
슈베르트, 이제 커피 끓여줄 수 있겠구나. 유령이 끓여주는 커피 맛도 제법 괜찮을걸세!
(18세기- 안녕, 신의 사자)
친애하는 마에스트로, 절 보러 이렇게 와 주신건가요? 정말 기쁘군요. 적어도 혼자 외롭게 갈 일은 없어서....
살리에리: 그런 말 마십시오. 실력있는 의사가 당신을 치료하고 있으니 곧 나아서 새 작품을 만들 수 있을겁니다. 당신이 빨리 낫기를 기도하죠.
모차르트: 그 점술가 돌팔이는 아닌가봐요! 내가 36살 생일을 맞을 일은 없을거라더니. 뒷 내용이 더 있었는데 뭐더라....혹시 생각나요?
살리에리: 그럼 생각나지. 하지만 말해주지 않기로 했다. "신의 사자, 신의 사랑속에 태어났으나 진정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검은 악마니라." 과연 내가 그의 영혼을 구원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볼프강, 많이 아프면 콘스탄체를 불러다 주겠습니다. 그녀가 당신을 위한 약을 줄겁니다.
모차르트: 아니오 필요없어요, 마에스트로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래요? 당신 손으로 직접, 제가 만든 레퀴엠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해주세요.
어둡고 무시무시한, 작곡가의 죽음을 선고하는 선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뭐가 즐거운지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는 행복한것일까?
연주가 끝나고 보니 신의 사자는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영원히 잠들어있었다. 아마 그는 신의 곁으로 갔을 지도 모르겠다. 내 자신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평온하게 잠든 시신의 얼굴을 보고 갑자기 눈에 구멍이 난거 마냥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차마 그에게 말하지 못했던 진심을 소리쳤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당신이란 존재를 사랑합니다. 전 결코 당신을 증오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음생이 있다면, 그때는 진심을 담아 당신 눈 앞에서 말해드리도록 하지요.
(19세기- 39살의 남자는 친구를 계속 기다린다)
정말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니 바람둥이 사제님. 천년만년 살것처럼 굴면서 돌아다니더니 결국은.... 나도 너의 옆에서 같이 늙어갈 수 있는 몸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온 것은 아는걸까. 1년에 한 번 유령이 방문 가능한 순간,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늙어 있었고 병으로 괴로워보였다. 나보다 훨씬 건강하게 싸돌아다녀서 병이란 존재는 그와 거리가 먼 이야기인줄 알았건만, 그도 역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것이었구나. 유령의 몸으로 해 줄수 있는 게 없어 그저 그의 차가운 손만 잡아주었다.
프리드, 이거 꿈은 아니지? 자네가 어떻게 여기에.... 이번 꿈은 좀 길었나?
쇼팽: 글쎄, 확실한 건 나는 너 눈에만 보이는 존재이며, 부엌에서 지금 자네 딸이 자네가 싫어하는 재료만 골라서 스프를 끓이고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넌 이틀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계속 잠만 자다가 깨어났다는 정도지.
살이 많이 빠졌네. 내 손으로 네 영혼을 거두는 건 지독하게도 끔찍한 일이거든? 맛 없다고 의사가 준 약이나 스프 쓰레기통에 몰래 버리지말고! 담배나 술도 좀 끊어보게나. 그렇게 네 맘대로 살거면 주치의한테 주는 돈이 아깝지도 않니?
많이 아픈가? 미안하군, 유령이 살아 있는 의사를 불러줄 수는 없으니 말일세. 대신 시간이 될 때까지 곁에 있어줄 수는 있는데. 그래도 되나?
나는 용기를 내어 유령의 손을 잡아보았다. 산 자에 비해 차갑고 딱딱했지만, 손에서는 그 옛날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의 라일락 향이 진하게 풍겨왔다. 손을 잡은 채 그를 올려다보자 투명한 얼굴에서는 보라빛 눈동자가 변함없이 빛나고 아름다운 미소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친애하는 프리드, 자네만을 위해서 연주하는 곡일세. 결코 출판될 일도 없을 것이고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연주할 일도 없을거야. 어쩌면 내가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자네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르겠군. 마음에 드나?
리스트, 이렇게 보니 넌 주름도 거의 없구나? 머리만 새하얘진정도? 그래서 아직도 정신나간 여자들이 70대 노인을 쫒아다니는 거구나! 넌 변함없이 아름다워. 나도 늙었더라면 너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을까?
이런 벌써 아침이네. 잘 있어! 내 몫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와야해 알았지?
결코 나이를 먹지 못하는 유령은 살아 있는자에게 작별의 키스를 한 뒤 미련없이 떠납니다. 안녕, 내 사랑....
눈을 떠보니 딸이 요즘 왜 이리 혼잣말만 하냐며 투덜거린 채 스프 그릇을 두고 간다. 협탁 위에는 스프와 약, 안부 편지와 신문, 레슨 일정표, 출판사 편지 수십통이 잔뜩 놓여있었다. 이틀 동안 혼자 답장하고 해치워야 하는 것들이에요 아셨죠? 딸이 자신을 바라보며 놀리자, 노인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산 자는 어떻게든 살아야겠지....
쇼팽: 75년동안 사느라 수고 많았어. 유령이 된 기분은 어때?
리스트: 글쎄, 잘 모르겠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네와 내면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시간은 매우 충만하다 못해 넘친다는 것?
내 유해는 그저 묘지로 공인받은 곳에 묻어주면 좋겠습니다. 한번 묻힌 곳에서 옮기지 마시고 요란한 음악이나 추모 예배도 필요없어요. 묘비에는 그저 시편의 구절을 새겨주십시오. 전 이미 친구 덕분에 삶에 대한 미련을 모두 내려 놓을 수 있게 되었거든요.
(미래- 그 강을 건너지 마세요)
리스트, 자네 왔어? 꿈이 좀 길었나보네. 그래도 이번 생은 최고로 좋았어. 너와 사이좋게 늙어갈 수 있었잖아? 이번 생도 먼저 가서 미안해.
프레데리크는 점점 죽어간다. 약을 먹어도 통증이 줄어들지는 않는 것 같으며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숨 쉬는 것도 매우 힘들어보였다.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며 해 줄수 있는 게 없는 내 자신이 매우 미웠다.
프리드, 오늘 날씨가 매우 따뜻해. 벛꽃이 날리고 있어. 창문 좀 열어줄까? 아니면 물이랑 식사 좀 줄까? 너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쇼팽: 아니. 그저 너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전생에는 해 보고 싶은 거 다 못해보고 혼자 외롭게 떠나는 게 억울했는데, 지금은 노인이 되서 하고싶은 거 다 해보고 죽는거잖아?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마.
이상하게 졸리네. 잠은 충분히 잔 것 같은데.... 아마 지금 잠들면 다시는 눈을 못 뜰거야. 내가 죽으면, 마당에 묻어줄래? 그저 내 이름이 새겨진 비석 하나만 있으면 딱 좋을 것 같아.
그는 삶이 만족스러운 듯 웃고 있었다. 차가워진 입술은 더 이상 연인을 향해 웃어주지도, 달콤한 말도, 잔소리도 해 주지 못했다.
며칠뒤,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나고 구더기가 끓고 있으니 제발 그만 좀 하라며 이웃들이 경찰을 부를때까지 남겨진 노인은 그저 떠난 사람의 시신을 붙잡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