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 심은섭
얼굴은 하얀 목련이지만 뒷모습은 사월 초파일이다 나와 함께 한 방향으로 기관총을 쏘는 총잡이다 내가 마른 강물로 흐를 때면 기우제를 지내주는 제사장이고 대기권을 이탈하는 유성을 바라보며 서로 슬픔을 수혈하기도 했다
때로는 통기타 1번 선의 C단조였다가 내가 어둠의 깃발로 펄럭일 때 푸른 새벽을 불러주었다 붉은 장미꽃이 지천으로 핀 5월이면 초병의 눈초리로 경계를 강화하지만 10월이 오면 어김없이 황금불상의 미소를 건네는 능금이다
오랜 생의 전투로 사기가 저하된 패잔병인줄로 알았으나 탄알이 장전된 38구경 6연발 권총 한 자루였다 단단한 몇 개의 고독이 실밥이 터진 나의 정신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할 때마다 내 손을 잡고 함께 군가를 불러주는 전우였다
⸺ 시집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상상인, 2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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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은섭 시인
1957년 강원도 강릉 출생
2004년 《심상》, 2006년 〈경인일보〉신춘문예로 시, 2008년 《시와 세계》 평론 등단
시집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평론집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 『상상력과 로컬시학』
강릉정심문학상, 세종문화예술대상, 5.18문학상, 박인환문학상 등 수상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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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모는 평생 삼등완행열차로 살았다.
그 열차는 언제나 느림의 미학을 깨우치며 나의 어둠마저 걷어내 주었다.
새벽이면 기적소리와 함께 흔들리며 떠나는 그 삼등열차 이등석에서 나는 출생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산다.
그러므로 나는 출생 번지가 없다.
그런 까닭에 국경이 없는 뭉게구름처럼 자유롭게 들판에 나가 궁서체로 바람소리를 받아쓰는
시인으로 사는 이유다.
- 김조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