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2003년07월02일 '한겨레21' 제466호
아프리카 기아문제 들먹이며 유전자조작 농산물 판로 개척에 나서는 부시 행정부의 위선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다시 포문을 열었다. 새로운 ‘악의 축’은 유전자조작 농산물(GMO)에 대한 완강한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유럽연합(EU) 국가들이다. 부시의 줄기찬 공세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는 대량살상무기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기아문제다. 부시는 기아에 신음하고 있는 아프리카대륙을 도와주기 위해 유럽각국이 1998년 유전자조작 농산물에 대해 내린 모라토리엄을 해제할 것을 강력히 요구해왔다. 세계 곳곳에 만연한 기아에 효율적으로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안전하고 효과적인 생명과학 기술의 전파를 더욱 고무해야 한다는 논리다. 부시는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이 근거 없고 비과학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혀 유전자조작 농산물 수입을 금지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유전자조작 농산물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굶어죽어도 받지 않겠다”
일러스트레이션 | mqpm최용호
유럽연합이 미국산 유전자조작 농산물 수입을 불허해, 미국은 해마다 3억달러 이상의 손실을 입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2002년 기준으로 전 세계 16개국에서 600만 농민들이 6천만 헥타르의 땅에서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재배한다. 16개 국가들 중 미국·아르헨티나·캐나다·중국이 재배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 중 미국이 전 세계 총재배 면적의 3분의 2인 4천만 헥타르의 땅에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재배한다.
따라서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판로 확보는 미국의 농업과 거대 생명과학 기업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게다가 몬산토와 같은 미국의 거대 다국적 기업들은 부시 행정부와 긴밀한 공생관계를 유지해 왔다. 유럽연합의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부시 행정부는 아프리카를 들먹이고 있다. 유럽연합이 아프리카산 농산물의 최대 수출시장이고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보급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전략은 쉽사리 먹혀들지 않고 있다. 지난해부터 계속되고 있는 가뭄으로 인해 잠비아·말라위·짐바브웨 등 남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심각한 기아 위기에 직면했다. 미국 원조기관 ‘USAID’는 유전자조작 옥수수로 이들 국가들에 식량원조를 하겠다고 집요하게 추근거렸으나 대부분의 국가들이 거절했다.
로버트 무가베 집바브웨 대통령이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거부하자 미국의 보수언론들은 무가베가 국민을 굶겨죽이려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콩·옥수수·면화·유채가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주류를 차지하는 작물인데, 동남부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 국가들은 “진정으로 도와주려거든 일반 농산물로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미국이 아프리카의 기아와 빈곤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표명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미국 행정부의 유별난 ‘인도주의적’ 제스처에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기아에 허덕이면서도 미국산 유전자조작 옥수수를 거부한 배경에는 아프리카와 유럽연합간 상호교역이라는 현실이 크게 작용한다. 아프리카산 농산물의 최대 수출 대상지는 유럽연합이다. 당장의 기아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받아들였다가 장기적으로 유럽연합에 대한 농산물 판로가 막히는 우를 범하기보다는 차라리 굶주림을 선택한 것이다.
식량주권을 다국적 기업에 뺏긴다
사진/ 남아프리카의 한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재배할 경우 종자를 전적으로 다국적 생명공학 기업들에 의존해야 한다.(GAMMA)
유전자조작 농산물에 대한 장벽을 없앨 경우 제기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장기적으로 식량주권이 선진국의 다국적 거대기업들에 저당 잡힐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도입해서 재배할 경우 종자를 전적으로 다국적 생명공학 기업들에 의존해야 하고 이는 새로운 형태의 종속관계를 의미한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은 집약적 단일작물재배(intensive monoculture) 농업에 적합한 반면 개발도상국 농업에는 유효하지 않다는 분석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아프리카의 기후와 토양에 잘 적응하는 다양한 작물 재배를 권장하는 것이 소규모 영세농업 위주인 아프리카의 농업현실에 실효성 있는 정책이라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프랑스·이탈리아·벨기에·오스트리아·그리스·덴마크·룩셈부르크 등 유럽 7개국은 1998년 이후 유전자조작 농산물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바 있다. 스페인과 같은 경우는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재배하지만 생물다양성에 관한 카르타헤나 협약 비준국이어서 전 세계 50개 비준국들과 마찬가지로 유전자조작 농산물에 대한 규제가 비교적 철저한 편이다. 따라서 유럽각국은 정치적·이념적 스펙트럼을 넘어서 유전자조작 농산물에 대한 신중한 경계와 반대의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되어 있는 편이다.
유럽에서도 유전자조작 농산물이 인체와 환경에 유해한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지속돼 왔다. 영국에서는 6월 초에 열흘간의 일정으로 유전자조작 농산물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로드쇼를 마련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식품안전성에 관한 부정적 연구결과를 정부가 고의적으로 축소함으로써 유전자조작 농산물에 대한 대중적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에 대한 논의가 이제 과학을 넘어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진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에 대한 각종 연구결과는 과학이 얼마나 정치권력이나 거대 다국적 기업의 이해관계에 휘둘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가 되고 있다. 옹호론자들은 유전자조작 농산물 재배를 확대하면 농업생산성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켜 지구촌 곳곳에 만연한 기아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와 더불어 농약 사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생태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생태계 교란과 같은 돌이킬 수 없는 환경파괴가 우려되고 제초제나 살충제에 내성이 있는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먹는 소비자는 결국 유독성 잔류물에 점점 더 노출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인체 유해성과 생태계 교란이라는 문제말고도 유전자조작 농산물 재배의 확산은 전 세계의 농업분야가 극소수 다국적 생명공학 기업에 의해 재편되는 상황을 초래하기 때문에 식량주권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기아, 생산이 아니라 분배의 문제
사진/ 기아에 시달리는 소말리아 어린이.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도입이 기아문제를 해결하리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GAMMA)
찬반 여부를 떠나서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도입과 확산이 기아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리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기아문제는 식량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왜곡된 식량분배라는 문제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아프리카의 기아문제를 들먹거리는 것 자체가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전 세계적 확산을 위해 대중들을 현혹하는 기만적 조처라는 지적이 많다. 개발도상국 원조액이 선진국들 중 최하위에 머물러 있는 미국이 아프리카의 기아문제와 선진각국의 책임감을 결부시키는 것은 위선이며 결국은 자국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지난해 논란이 제기됐던 농업보조금법에 서명함으로써 개발도상국들의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다. 미국은 자국의 농민들에게 농업보조금을 지급해 개발도상국 농업경쟁력을 붕괴시켰고 농업을 황폐화시켰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빈곤과 기아문제를 극복하는 데 정말 관심이 있다면 미국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1인당 원조액 규모를 유럽연합 회원국 수준으로 높이고 농업보조금 문제에 전향적으로 접근해 개발도상국의 농업부문에 숨통을 열어주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오는 7월7∼12일에 세네갈·남아공화국·보츠와나·우간다·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 5개국 순방에 나서는 부시 대통령은 자유롭고 평화스러우며 번영을 구가하는 아프리카 건설을 위한 미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할 것이다. 물론 잊지 않고 유전자조작 농산물 도입만이 기아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의 방책임을 굶주린 대륙에서 열렬하게 호소하면서. 거대 다국적 기업의 전도사로서.
헨트=양철준 전문위원 YANG.chuljoon@wanadoo.f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