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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 15. 말의 올무 - 마 22: 18. 외식하는 자들아
2.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 ( 22: 15-22. 막 12: 13-17. 눅 20: 20-26 )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 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예수님과의 종교적 권위 문제를 놓고 시비를 벌였으나 (마 21: 23-27), 패배한 유대 교권자들은 일단 물러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헤롯 당원과 야합하여 정치적 문제인 세금에 대한 문제를 들고 나왔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인두세를 바쳐야만 했다. 이 조치는 특히 열심당원들에 의하여 매국 행위로 규정되어 그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예수께서 찬성하신다면 당장에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을 것이요, 또한 납세를 반대한다면 가이사를 반역한 것이 되어 로마 군대에 의해 황제 모반죄로 체포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진퇴양난의 올무에 예수님을 몰아넣기 위해 바리새인들은 교묘한 계교를 부렸다.
마 22: 15. 말의 올무 -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
예수의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은 항상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1]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이에'(*, 토테)는 때로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앞뒤의 사건을 논리적으로 연결해 주는 접속사로 쓰이는 마태의 독특한 용법이다. (90회 사용했다).
예수를 잡아야 하나 예수께서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여기 바리새인들만 언급한 것은 막 12: 13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가리키는 '저희'와 모순되는 것 같으나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대부분이 바리새인들이었고, 계속해서 진행되는 예수에 대한 올무를 놓는 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 대표로 쓴 것이다.
2]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말의 올무에 걸리게(*, 파기듀소신)하다'라는 말은 본래 사냥에 사용되는 말로 한 대상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함정이나 덫을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자기들의 메시야를 죽이기 위해 모든 종교적인 지식과 현실적인 모든 상황을 이용하여 덫을 놓는 생생한 표현이다.
(1) 그들은 이 문제로 상론하였다.
관원들과 바리새인들이 서로 꾀하여 주님을 해하려는 사실은 이미 시편 기자에 의해 예언되었다.
* 시 2: 2 -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죄는 모의하고 의논하면 할수록 그것이 더욱 악해진다는 사실이다.
(2) 예수님이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고자 계획하였다.
그들은 수차례에 걸쳐 주님을 대적해 보았으나 주님께서 담대히, 그리고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아왔다.
그래서 어찌하면 말의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릴 것인가 하고 궁리하던 끝에 결국 당시의 최대 관심사이며, 풀기 난제이던 납세 문제를 제기했다.
이처럼 사람이 그릇되고 오해되는 말로 넘어지게 만드는 것은 비열한 행위이며, 그것은 사탄이 가장 즐겨 쓰는 방법이다.
마 22: 16. 헤롯 당원 -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 이다. (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 이다. )
하나님의 원수들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활동한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종교적, 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자들이었으나, 예수님을 핍박하는 데는 힘을 합했다. 오늘날도 다양한 사상들과 입장들을 가진 사람들이 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데는 힘을 합한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존경하듯이 그가 참되시며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신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의로우시고 진실하심은 저들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참되셨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셨다.
1]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올무에 빠지게 하려고 헤롯 당원들과 함께 가도록 했다.
사실 그 양자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면에서 서로 다른 견해로 잦은 충돌을 일으켰던 사이였으나 예수에 관한 문제만은 일찍부터 협력하여 일을 꾸몄었다.
* 막 3: 6 -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평행구인 눅 20: 20은 헤롯 당원들을 동행시킨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로마의 총독의 손으로 예수를 처지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 눅 20: 20 -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연로(年老)한 바리새인들은 연소(年少)한 제자들을 보내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접근하도록 했다. 그것은 자기들의 위신과 체면을 지키고, 새로운 얼굴들을 내세워 진실한 구도자의 모습으로 가장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힐렐(Hillel) 학파와 샴마이(Shammai) 학파가 있었다.
2]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 이다.
누가는 그들이 정탐(spying)했다고 말하는데, 정탐은 자기의 신분을 감추기 위함이며, 그들은 전략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들은 예수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즉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온갖 최고의 칭찬을 시작한다.
(1) 그들의 질문
그들은 예수님을 모함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은밀하게 추진해오던 중 이제 그 시기를 만나 지체없이 시행하였다.
간사하게도 그들은 먼저 예수님에게 다가가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16절)
가장 사악한 음모가 가장 교묘한 허위 속에 감추어진다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만일 그들이 정직한 의도를 가지고 진지한 허위로 질문을 하려 했더라면 그들 스스로가 허위로 과장된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속임수로 가려진 마음이며, 온유한 입술로 가장된 악한 마음이다.
* 잠 26: 23 -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는 그리스도를 속이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범죄이며,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어리석은 일이다.
(2) '선생님이여'(*, 디다스칼레)이다.
이것은 랍비와 같은 의미인데, 진리와 권위를 갖춘 가르치는 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이 와서 '네가 무슨 권세로'라고 했던 말투와는 전혀 달리 예수를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전략을 사용한다.
(3) '당신은 참되시며'(*, 알레데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이 참으로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다. 예수를 선지자로 믿는 백성들이 듣도록 한 말일 것이다.
이것은 '선한 선생님'이라는 표현같이 그들로서는 파격적인 높임이었음이 틀림없다. 참되신 선생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여 가르칠 수 있다.
다시 한번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라고 하여 강조한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니, 또한 그것을 참되게 가르치는 자는 어렵고 미묘한 문제라 할지라도 명쾌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4)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그렇게 참되게 가르치고 행하는데 있어서 예수는 백성들의 여론과 인기를 고려하지 않았고 관원들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평가하시는 방식인데, 그처럼 사람이 가진 권세나 사람들의 평판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하셨다는 말이다.
이렇게 열렬한 지지자로서 진정으로 해답을 앙망하는 자세로 가장한 것이다. 이는 겉에 꿀을 바르고 속에는 독을 넣은 인사말이지만 이것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가장 공정한 평가를 바리새인 스스로가 내린 것이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이런 과분한(?) 칭찬에 걸맞게 어떤 껄끄러운 문제에 대해서도 단호하고 시원한 해답을 두려움 없이 제시해야 했다.
그러면 당연히 로마당국의 정책에 대항하는 견해를 공식적으로 답할 것이고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헤롯 당원들이 증인이 되어 그들이 로마 총독에게 고소(告訴)하면 된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활동한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종교적, 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자들이었으나, 예수님을 핍박하는 데는 힘을 합하였다.
오늘날도 다양한 사상들과 입장들을 가진 사람들이 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데는 힘을 합한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진심으로 존경하듯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예수님의 장점들은 저 악한 자들의 편에서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참되셨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셨다.
마 22: 17. 당신의 생각 -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 한 대 )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한다는 친(親)로마파요, 또 하나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칠 필요가 없다는 반(反)로마파, 즉 민족주의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변론이 있었을 것이며, 이것은 당시의 중요한 사회 문제이며 예수께 질문해 그를 곤란케 할 만한 문제이다.
1]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한 컷 치켜세운 바리세인들의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자하는 속임수를 사용하였다.
2]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예수 당시 유대 지방의 납세 문제는 민감한 문제였다.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 헤롯은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이었으므로 그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종교적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 지방은 아켈라오가 폐위되고 황제의 직속령으로 재편성되어 황제가 임명하는 총독이 다스리게 되자 유대 백성들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직접 세금을 바치는 격이 되었다.
이때 가이사는 A. D. 12-37년에 로마를 통치한 티베리우스 황제였다. 로마 정부는 매 14년마다 한 번씩 각 지방에서 바쳐야 하는 세금의 총량을 결정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했다.
* 눅 2: 1 -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스라엘에서는 바벨론 유수 때부터 이방 지배자들에게 조공(朝貢)을 바치는 일이 문제된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구 조사를 즈음하여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이방 왕들에게 세금을 바쳐 그를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하였다.
* 행 5: 37 -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그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가이사에 대한 납세의 적법성(適法性) 문제는 계속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선민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유대 땅의 소출(所出)에서 십일조를 성전에 바쳐왔다. 그런대 동일한 소출에서 떼어 이방인 왕의 통치 아래 있다는 표로 세를 바치는 것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꺼림칙하게 여겼다. (F. F. Bruce).
과격분자들인 열심당은 그 일을 수치(羞恥)로 여겼다. 그러나 헤롯당은 헤롯 가문을 재건시켜 헤롯 대왕의 호시절로 돌이키려고 로마 제국에 협력하면서 납세도 적극 권장하던 자들이었다.
납세를 찬성하면 열심당과 바리새인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여 그들이 환영하는 메시야가 될 수 없고, 납세를 반대하면 헤롯 당원과 바리새인들, 로마 총독과 헤롯 왕으로부터 정치범으로 몰리게 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 예수가 로마에 대한 납세를 찬성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사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려는 그들에게도 그 문제는 큰 고민이었다.
여하튼 바리새인들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도에 참된 예수의 견해 중에서 율법에 열심인 자신들과 일치되리라고 예상한 점을 이용한 데 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예수를 옭아매기에 충분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세금 - 로마 제국이 강요하는 세금은 토지세와 소득세와 인두세가 있었다. 여기의 '세'(*, 켄소스)는 인두세로서, 로마 정부는 자기들의 통치를 받은 속국에서 남자는 14세 이상부터, 그리고 여자는 12세 이상부터 65세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에게 부과하였다. 한편 라틴어의 Census라는 말은 바로 이 인두세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한다는 친(親)로마파요, 또 하나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칠 필요가 없다는 반(反)로마파, 즉 민족주의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변론이 있었을 것이며, 이것은 당시의 중요한 사회 문제이며 예수님께 질문할 만한 문제였을 것이다.
마 22: 18. 외식하는 자들아 -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
예수께서는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질문 뒤에는 예수님을 올무에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예’ 아니면 ‘아니오’일 것이요 그러면 그를 친(親)로마파나 반(反)로마파로 몰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유대 백성과 이간을 붙일 빌미가 되든지, 아니면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자로 비난할 거리가 될 것이다.
1]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예수는 그들의 정중하고 호의적이며, 간절한 물음 속에 있는 살의와 사악함을 보셨다. 이에 대해 누가는 '간계'라고 표현했다.
* 눅 20: 23 -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마가는 '외식함'으로 나타냈다.
* 막 12: 15 -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그들의 입으로 말한바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예수는 당신을 시험코자 하는 그들의 중심을 다 아셨고 그것을 백성들 앞에 드러내셨다.
2]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예수는 그 질문이 가지고 있는 함정과 덫을 바로 아셨다. 그들의 질문의 배후에는 예수님을 올무에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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