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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작가의 <누란>을 읽은 후 서평
2020101243 철학과 유연희
이 책의 이야기는 386운동권의 막내 학번이었던 허무성이라는 한 젊은 지식인의 기구한 삶에 대해 다루고 있다. 386세대는 1990년대부터 사용되던 용어로서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 대학에 다니며 학생운동,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세대를 일컫는 용어이다. 전 생애를 다루고 있는 책은 아니고, 기껏해야 주인공 허무성의 20-30년 남짓한 삶의 일부를 전달하지만, 그 안에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인 현기영은 우리에게 이 책 <누란 >보다는 4·3의 진실을 알려주는 <순이 삼촌>이라는 책으로 더욱 친숙하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앞장부터 고문이 시작되는데 몽둥이로 맞는 고문부터 시작해 회초리 고문과 물고문까지 생사의 길을 넘나든다. 그는 물고문을 받으며 고통에 이기지 못해 차라리 죽거나 까무러치기를 바라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런 그에게 고문을 가하는 김일강은 "이 빨갱이 새끼, 허무성! 항복해! 뭐, 더 이상 자백할 게 없다고? 네가 소속한 써클은 그렇다 치고, 각 대학연합 써클의 계보도 알고 있을 거 아냐! 뭐, 모른다고? 이 새끼, 자백할 게 없으면 소설이라도 써 봐. 픽션이라도 만들란 말이야. 네가 항복할 때까지 고문은 멈추지 않을 거야. 도중에 고문치사도 있을 수 있지. 박종철이도 그렇게 죽었어. 너의 연행 사실은 아무도 몰라. 그건 네가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야. 쥐도 새도 모르게 꼬르륵 증발시켜버릴 거야. 알았어? 이 새끼 다시 물속에 처박아!" 라고 말한다. 허무성은 고문자의 무기가 된 자신의 몸의 고통에 항복하고 결국 배신자가 된다.
김일강이 협박하듯 꺼낸 박종철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게 다가온다. 박정희 정권에 의한 모진 전기고문과 물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과는 다르게 이 책 속 허무성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그는 '배신자'와 '투항자'라는 타이틀이 붙여져 전혀 다른 처지가 되어버린다. 죽은 박종철과 대비되는 자신의 모습에 허무성은 정신적 죽음을 느끼게 된다. 배신자가 되어 그는 친절한 김일강의 모습과 대면하게 되고 그것에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공포심 때문에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서로 대화를 나눈다기보다는 김일강의 일방적인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의 아버지도 독재 정권에 대항했던 사실과 그 이유를 알게 되는데 그가 지하실에서 김일강에게 받았던 고문에 의한 정신적 고통과 충격 때문에 분노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찾아온다. 사람에게 정신적인 고통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언어 폭력이나 물리적 폭력 등 이런 부류의 행위들은 절대 합리화될 수도 없으며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김일강은 허무성을 아들로 생각하겠다며 일본 유학을 권유한다.
일본으로 유학 가게 된 허무성은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일본 학생의 박사논문 발표를 듣게 된다. 그는 수업을 듣는 학생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기에 일본인들은 그를 잠깐씩 힐끔거리며 쳐다보기도 하였다. 당시의 사건에 대해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거나 증언을 들어본 적도, 증거를 본 적도 없지만, 그는 학교 선배에게서 그 사건의 진실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었다. 대지진으로 인해 도시가 파괴되자 극도로 불안해진 일본인들이 허무한 유언비어에 휘둘려서 곳곳에서 닥치는 대로 조선인들을 공격하여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박살 내고, 행인들 중에 뒤통수 납작한 사람들을 골라 손등에 몰래 담뱃불을 갖다 대서, 그 사람의 입에서 '아이따 대신 아이고 소리가 나오면 조선인으로 판단하여 그 즉시 살해한 잔인한 만행들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그는 재일조선인들이 피해 당사자이면서도 그 사건에 대한 변변한 연구 실적이 없는 척박한 한국 상황이 너무나도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일본 학생의 논문은 현장 사진과 증언을 포함한 풍부한 자료들을 토대로 치밀하게 진술되어있었고, 그와 동시에 결론은 충격적이게도 그 모든 학살이 단지 민중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발생한 집단 히스테리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허무성은 일본 학생의 그 논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러한 현실에 분노하면서도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리고는 혼자 "가해자 집단 속에서 가해 사실을 그들의 입을 통해 정당화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다소곳이 배워야 하다니!"라고 생각했다. 책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에 관한 이야기가 반복되어 등장한다. 같지 않은 상황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이다.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태도에 당당하며, 오히려 피해자가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이와 다르게 피해자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정신적, 신체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느끼고 트라우마로 인해 관련 대화를 피하거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일본 유학 중인 위 사례와 더불어 책 속에 드러난 몇 가지 사례가 더 존재한다. 바로 김일강에게 고문받은 허무성과 그와 같은 써클 소속 간부이자 애인인 문정선과의 상황이다. 문정선은 허무성이 견뎌야만 했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게 아무리 고문이 심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동지들을 배신할 수 있느냐고 비난했다. 허무성은 고문을 당하며 느꼈던 고통을 "죽음의 몇 보 앞까지 육박해 들어간 그 치열한 고통, 죽음 아니고는 그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그 감각을 도대체 당사자 말고 누가 실감할 수 있겠는가. 살인을 모방한 고문, 죽음을 저당한 고문, 박종철의 죽음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고문자 김일강도 그 고통을 몰랐을 것이다. 고문을 가하는 자이지, 고문을 당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처절한 실감을 알 리 없었다. 매를 때리는 몽둥이가 어떻게 그 고통을 알겠는가." 라고 이야기했다. 허무성이 자백한 것 은 써클 내에서나 학생 운동 내에서 비난받을 수도 있는 행동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자백하지 않았더라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가져야 한다. 또한, 그가 당했을 고통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는 정서적으로 의지할 상대가 필요했을텐데 애인이었던 문 정선이 자신의 고통보다는 단체 내 불이익과 배신에 더 초점이 맞춰져 그에게 그렇게 행동한 것도 정당한 것이었을지는 모르겠다. 가해자의 고문이 잘못된 것이고 그것이 허무성의 삶을 위협하니 그에게도 선택권이 없없율 것이라는 생각든다. 왜 가해자의 잘못보다 피해자의 잘못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
또 다른 사례는 허무성이 술에 취해 당한 일방적 폭력이다. 그는 아내인 문정선이 신고한 덕에 사건이 경찰에게 알려지고 수사가 진행되긴 하지만, 여기서 경찰의 태도는 정말 탄식만 나온다. "단 걔네들한테 걸려들면 저항해서는 절대 안 돼요. 얼굴을 쳐다봐도 안되지. 어떤 가해자가 자신의 인상착의가 알려지길 좋아하겠수? 무조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야 해요. 하여간에 선생님은 너무 경솔했수, 맥주병 깨고 덤비려고 했으니, 허 참, 고분고분 했으면 맞아도 이렇게 심하게 맞진 않았을 겝니다. 하여간 조사는 해보겠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슈. 순식간 에 후닥닥 해치우고 달아나기 때문에 놈들을 붙잡기가 쉽지 않아요. 우리 구역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가해자가 우리 구역이 아닌 타지역에서 원정온 놈들일 공산이 커요. 아무튼 술에 너무 취하지 말고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요. 재수 없으면 당하는 거지 뭐."라는 경찰의 말, 오히려 경찰들은 피해자에게 왈가왈부하며 조심하라고 한다. 이유가 있어서 폭력을 당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심하라느니. 재수없으면 당하는 거라느니.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니 나도 저 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넌 여자니까 좀 조심해야 해. 밤길을 걸을 때도 조심해야 하고, 너무 짧은 옷 드러나는 옷 입지 말고, 일단 네가 먼저 조심해. " 과연 그게 내가 조심한다고 되는 일인가?
물론, 피해자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주눅 들고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제대로 발언하지 못하는 상황에는 1차 가해를 당하고 다시 2차 가해를 당할 거라는 불안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가해자의 태도는 분명한 문제이지만, 피해자의 태도를 과연 우리가 문제 삼을 수 있을까? 사실 피해자는 가해를 당했기 때문에 소극적일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사회는 피해자를 주눅 들게 만들고 그들에게 소극적 태도를 권유하기까지 한다. 현기영 작가는 이런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 없는 피해자. 현기영 작가가 책에서 유독 강조하는 말이다. 이 말이 특히 더 도드라져 보이는 사례는 검사에서 고문자, 고문자에서 국회의원이 된 김일강이다. 고문자의 위치에 있을 때 김일강은 자신이 고문한 이후 배신자의 처지가 된 허무성에게 일본 유학을 권유하고, 직장을 마련해주는 등의 행위를 한다. 직장은 H대로이곳은 김일강의 사촌형이 대학의 재단이사장이었다. 이를 통해 정권과 권력의 비호가 어떤 것인지 대충은 짐작이 가능하다. 어쨌든 허무성은 김일강이 큰 표 차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을 보았고, 김일강은 음지에서 양지로 화려하게 떠올라 부상했다. 그의 말마따나 음지에서 양지로 떠오른 화려한 부상이었다. 책은 이를 '이른바 여론이라는 것이 고문자를 유능한 정치인으로 받아들인 것인데, 허무성에게 그것은 밤의 속성을 지닌 야차를 백주에 활보하도록 양성화한 것 외에 별다른 뜻이 없었다. 그것이 민주화의 본색이었다.'라고 다룬다. 이후 김일강은 자신이 박정희의 독재정권 아래에서 그의 책임 아래 수행된 몇몇 중요한 시국사건 수사에서 가혹한 고문이 있었다는 의혹에 관련된 이야기들에 시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고문의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악랄한 좌익 사범들 '이었고, 물증은 물론 증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일강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에 결백을 주장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방어가 되었다.
우리는 드라마에서도 영화에서도 피해자가 자신이 가해를 당한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들을 본다. 쉽게 얘기하자면 결혼한 한 부부가 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 가정을 파탄냈다고 부인이 주장할 때, 바람을 피운 정황과 근거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가해자는 바람을 피운 남편과 그의 내연녀이고, 피해자는 부인이지만 피해자가 먼저 바람의 장면을 포착하거나 증거물을 제출해야만 재판까지 열릴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더욱 와닿는 예시로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있을 때, 그 여성이 신고를 하거나 법정에 소송을 넣을 때 자신의 피해 사실과 상황을 진술하고 가해자로 추정되는 남성의 정액이 묻은 속옷을 증거물로 제출해야 하는 상황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어떻게 보면 무고한 사람을 재판장에 서게 할 수는 없으니 절차를 치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약하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예민한 부분을 드러내야 하는 것과 같기에 쉽지 않은 것인데 이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누란은 사전적 의미로 층층이 쌓아놓은 알이란 뜻으로, 몹시 위태로운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아마 책에서 위태로운 현실 속 층층이 쌓인 사회적 문제를 여러 개 꺼내기 때문일 것 같다. 이러한 문제들은 지식인이라는 허무성이 주인공답게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싫어하고 고치고 싶어 하는 태도가 보인다. 하지만 주인공이 인식하면서도 바꾸지 못하는 문제들도 존재하고, 무지한 부분도 분명히 존재해서 좋게 말하자면 책의 내용이 독자에게 더욱 현실성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는 안 좋게 이야기하자면 너무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치적 권력을 통해 폭력을 행하고 침묵으로 방어하는 가해자와 이런 가해자를 정당화하는 사회, 그리고 피해당한 피해자에게 조심하라고 하며 자신이 피해를 겪었다면 그것을 입증해야만 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권리를 찾기 위해 학생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앞장 섰던 과거로 인해 후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사례 그리고 허무성이 "내 말은 그런 것들을 이용하되 지배당하지는 말자는 거야. 그건 경박한 즐거움일 뿐이야. 이 세상에 최고의 가치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야. 그런 것들 보고 있으면, 이 세상엔 즐거운 것들만 있는 것 같아. 어떤 불행도 어떤 슬픔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 인터넷, 영화뿐만 아니야. 노래도 그렇잖아. 포르노 아닌 게 없어. 세상이 이런데, 누가 포르노의 그물을 벗어날 수 있겠어? 바로 그 무서운 중독성, 그게 소비 향락문화의 본질 아냐? 그게 무슨 얼어 죽을 진보야? 노예지. 자네들이나 나나 노예에 불과하다고. 아무리 거부해도 소용없지. 애당초 거부가 불가능해, … 안방의 독재자 텔레비전은 전에는 신파조의 눈물을 강요하더니, 이제는 웃음만을 강요했다. 역사도 현실도 없고, 유머도 없고, 경박한 말장난이나 외설적인 몸짓만 있을 뿐인 엔터테인먼트의 세상. 웃겨야 산다! 웃겨야 출세한다."라고 이야기하며 386세대 이후 확 바뀌어버린 90년대의 사회에서 불편해하고 화내는 부분 등을 보아도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이들은 지금의 현실과 별 다를 바가 없다. 허무성의 전공은 사학과로 책에서는 사학과가 최근 몇 년 동안 독문과, 철학과와 함께 무용론, 폐지론에 시달려왔는데, 독문과와 철학과는 이미 폐과 처분당했으며 그 이유는 돈만 들어가고 실용적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나도 철학과 학생으로서 철학이 밥 먹여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학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철학은 취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 취업은 내 인생에서 나에게 밥을 먹여주는 유일한 입구이고, 우리는 배움보다는 직업을 얻고 일하는 것에 치중하며 살고 있다. 허무성의 학생은 "우린 바빠요. 취직 걱정해야지. 초고속으로 변하는 세상 따라잡기 힘들어 죽겠는데! 우린 할 일이 따로 있어요. 우린 우리 앞에 펼쳐진 백지 위에 새로운 역사를 쓸 겁니다."라고 이야기한다. 허무성이 살던 세대와는 너무 차이가 난다. 각자 세대에서 추구하는 목적이 존재하고, 그 세대에서만 향유하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책에서는 어쨌든 문제로 여겨지는 부분도 많지만 불쾌하게 치고 빠지는 부분도 있었다. 초반부터 꾸준히 사람을 성적 대상화 시키는 것이었다. 김일강이 허무성의 엉덩이를 보며 하는 얘기나, 허무성이 카페 미미의 미미를 보고, 자신의 아내였던 문정선을 보고, 교수 송난정을, 조소과 오용미, 연예인 이효리, 지나가는 수 많은 여성들을 보고 하는 얘기들… 15살 연하의 어린 부인이 단지 젊기에 별 말 못한다는 김일강 그리고 야한 동영상을 보고 자신의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자신의 아내를 강간하는 허무성. 이게 사회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책에서의 페미니스트인 송난정을 통해 전달했어야 했지, 교수와 학생의 불건전한 만남까지도 일반적인 사랑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아 더욱 불편했다. 이 책이 사회의 문제를 일깨워주고 싶어 만든 책이라면 좀 더 조심했어야 할 부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첫댓글 누란은 중앙아시아 사막에 존재했던 고대왕국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무성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통해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과정에서 보기에 불편한 설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고발정신이 제대로 전달되려면 "페미니스트인 송난정을 통해 전달했어야" 한다는 의견은 한 걸음 더디게 가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다큐처럼 담담하게 쓰고 있기는 해도, 소설은 "불편함"을 통해서도 고발을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0.12.08 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