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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大夫가 말하고 있는 朝鮮의 사막지대(沙漠地帶) [제7편]
[朝鮮 疆土와 사막지대(沙漠地帶)의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
2,026년 07월 26일
○ 「제7편」은, 〈『조선(朝鮮) ‘조정(朝廷)=조당(朝堂)’의 관리(官吏) 또는 양반(兩班) 사대부(士大夫)들이 평생(平生)을 두고 기록(記錄)해 두었던 “문집(文集)”을 중심(中心)으로 : 당시(當時)의 조선(朝鮮) 강토(疆土)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중요(重要)하고 핵심적(核心的)인 구절(句節)을 찾아 ‘옛 조선(朝鮮)의 구토(舊土)’【반도(半島)를 신토(新土 : 새로운 땅)로 보면, 옛 조선(朝鮮)의 강토(疆土)는 구토(舊土)라 할 수 있다】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 중에서 「인간(人間)의 삶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에 있어 떼래야 뗄 수 없는 지형지세(地形地勢) 중에서도 특이지형대(特異地形帶)인 ‘사적(沙磧)=사막(沙漠)’의 땅」에 대한 기록(記錄)을 찾아보자. 여러 글에서 서로 반복(反復), 중복(重複)되는 해설(解說)이 많지만… …옛 조선(朝鮮) 영토(領土)【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근세조선(近世朝鮮)까지를 망라(網羅)함.】내(內)의 특이(特異)함을 설명(說明)하려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면(面)이 있음을 양해(諒解)해야 합니다.
➥ 『‘신토(新土)’라고 할 수 있는 반도(半島)【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에는, 특이지형(特異地形)인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예로부터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형성(形成)될 수 없는, 불가능(不可能)한 땅이다.』라는 것을 염두(念頭)에 두어야 한다.
「‘조선(朝鮮) 강토(疆土)’에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있다거나, 변경(邊境)에 사막(沙漠)과 접(接)했다는 등(等)의 기록(記錄)」은… …「그 땅은 반도(半島)와 그 주변(周邊)에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
“사막지대(沙漠地帶)”는 : 중원대륙(中原大陸)을 관통(貫通)하는 “하(河)”의 한 이름인 “덕수(德水)【진(秦)나라 때의 감숙성(甘肅省)으로부터 영하성(寧夏省)을 관통(貫通)하는 하(河)를 일컫는다】의 서(西)쪽에서부터 동구라파(東歐羅巴)에 이르는 곳에 존재(存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 〈「조선(朝鮮) 강토(疆土) 내(內)에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있다거나 또는 연접(連接), 접(接)하고 있다」라는 등의 기록(記錄)은 : ‘조선(朝鮮)은 반도(半島)에 없었다’라는 직접적(直接的)인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다〉 [6편(篇)에 이어 계속(繼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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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용주유고(龍洲遺稿)【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 제2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김 장군을 애도하며〔哀金將軍〕:
➊ 《義勇堂堂死不殫。始知男子出東韓。: 의리와 용기 당당하여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니, 남아가 동한(東韓)에서 나왔음을 비로소 알겠네. 威生大漠陽和變。血射長空白日殷。: 사막에서 위엄 부리니 따뜻한 날씨 변하고, 창공에 피를 뿌리니 태양이 붉게 물드네. 漢使載金催帝奬。邦人爲廟聳江干。: 한(漢) 사신 금 싣고 황제의 포상 재촉하고, 나라 사람이 지은 사당은 강가에 우뚝하네. 莫言陵律今如此。誰却將軍大將壇。: 이릉과 위율아 지금 이와같다 말하지 말라. 누가 대장군(大將軍)의 단에서 장군을 물러나게 하랴.》라고 하였다.
➥ 여기서 핵심(核心)은, 「동한(東韓)이 조선(朝鮮)을 말하는 건가?」하는 것이다. : 동국(東國)이면 동국(東國)이지, 동한(東韓)은 또 뭔가? 「동한(東韓)은, 우리나라를 뜻한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또 「동국(東國)은 뭐고, 동한(東韓)은 또 뭔가?」
「동국(東國)」 : 「“동(東)쪽에 있는 나라”란 뜻인데, 동(東)쪽에는 여러 나라가 있는데, 꼭 찍어 조선(朝鮮)을 동국(東國)이라고 했다」라면 : 「중국(中國)은 없고, 일본(日本)도 없다.」 어떻게 “동국(東國)”이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인가?
「동국(東國)」이란 「중국(中國)을 말하는 것이고, 중국(中國)은 조선(朝鮮)을 말하는 것이니, 동(東)쪽엔 “동국(東國)”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이게 정답(正答)이다.
그러나 ‘서한(西韓)’은 없다. 왜냐하면 서(西)쪽은, 서융(西戎) 곧 서방(西方)이기 때문이다. 냉정(冷靜)하게 말하면 : “동(東)쪽의 한국(韓 國)이라는 나라는 없다.” 저자(著者)는 왜 “동한(東韓)”이라는 단어(單語)를 선택(選擇)했을까?
각종(各種) 「’사전(辭典)’에서, ‘AI’에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어사전(國語辭典)’ 등등(等等)에서 말하고 있는「우리나라」란? “모두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을 지칭(指稱)한다.”
그러나 〈고전(古典)【현존(現存)하는 사서(史書), 지리지(地理志), 왕조실록(王朝實錄), 문집(文集) 등을 총망라(總網羅)한다】에 기록(記錄)된 「아국(我國), 오(吾), 아조(我朝) 등(等)이 말하는 “우리나라”란 뜻이 “반도(半島)”를 가리키는 것은 없다.」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가 번역(飜譯), 해설(解說)하면서 “우리나라는 반도(半島)”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 「일제(日帝)」는 당시(當時) 존재(存在)하지도 않았던 「한국(韓國)을 정벌(征伐)하자는 정한론(征韓論)【AD 1,870년대(年代)를 전후(前後)하여 일본(日本) 정계(政界)에서 일어났던 조선(朝鮮) 정복(征服)하자는 주장(主張)】이 일어났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게 너무 웃기는 것은 “당시(當時)에 한국(韓國)이라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게 뭔 헛소리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가능성(可能性)은 오작 하나밖에 없다. 곧 「조선(朝鮮)의 별칭(別稱)은, 한국(韓國)이었다」라는 것이다. 순리(順理)대로 따라가면 풀리게 된다.
➋ 《威生大漠陽和變。血射長空白日殷。: 사막에서 위엄 부리니 따뜻한 날씨 변하고, 창공에 피를 뿌리니 태양이 붉게 물드네.》 하였는데… …,
위의 칠언율시(七言律詩)는, 바로 ‘김응하(金應河) 장군(將軍)’을 애도(哀悼)【哀金將軍하며】하는 시(詩)라는 것을 알면 : 광해군(光海君)의 어명(御命)에 따라 출정(出征)【AD 1,619년 명(明)의 요청(要請)으로 후금(後金) 정벌(征伐)에 나섰던 강홍립(姜弘立)과 13,000名〔20,000∼23,000명(名)의 출정설(出征說)도 있다〕의 군사(軍士)가 출정(出征)하였는데, 김응하(金應河) 장군(將軍)과 그 휘하(麾下) 3,000명(名)은, 심하(深河) 전투(戰鬪)에서 〔산해관(山海關) 서(西)쪽 5∼10리(里)의 사막(沙漠) 가운데에 있었다.〕끝까지 싸우다가 전몰(戰歿)하였다】했던 김응하(金應河)와 3,000 병사(兵士)들이 치열(熾烈)하게 싸우다가 전몰(戰歿)한 장소(場所)가 바로 「대막(大漠) 곧 대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라는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 땅이 아니었다」라는 뜻이다. 곧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이나 심하(深河)’라고 불리는 또한 이곳 땅의 모든 지명(地名)은, 20세기(世紀)에 만들어진 것이다.
➥ 「본래(本來)의 산해관(山海關), 심하(深河), 심양(瀋陽), 후금(後金) 등이 있었던 땅은, 큰 사막지대(沙漠地帶)에 있었으며, 연경(燕京) 또한 사막지중(沙漠之中)에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뜻이다.」
「반도조선(半島朝鮮)은, 없었다.」 고대(古代)로부터 “조선(朝鮮)”이란 나라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중원대륙(中原大陸)【해동(海東) : 지중해(地中海) 동(東)쪽 땅】의 토착(土着) 왕조(王朝)였다. 이걸 숨기기 위해 장난을 치니, 조선사(朝鮮史)가 뒤죽박죽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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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농암집(農巖集) 2권, 시(詩) : 詠懷(회포를 읊다)
其 五 / 《憶昔尹侍中。逐胡沙漠陲。: 생각건대 저 옛날 윤(尹) 시중께서, 오랑캐 사막(胡沙) 멀리 몰아낼 적에, 揚旌臨瀚海。勒石封高麗。拓土七百里。: 깃발 들고 한해(瀚海)까지 달려가서는, 고려(高麗) 땅이라고 돌에 새겼지, 700리 나라 영토개척을 하였지. 豆江流南涯。古人嗟已遠。功業亦一時。玆地久淪棄。收復今爲誰。登高試遠望。裂眥令心悲。何由過江去。一問先春碑。∼以下 省略∼》라고 하였는데,
➥ 이를 두고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 「중원대륙(中原大陸)에 있는 중국왕조(中國王朝)의 옛 고사(古事)를 인용(引用)하여 읊은 것이다」라고 어설픈 해설(解說)을 할 것은 100% 확률(確率)이다.
그러나 위의 기록(記錄) 중에서 :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인 「호사(胡沙) 곧 “오랑캐 사막(沙漠)”」이라는 말은, 반도(半島)나 그 북방지대(北方地帶)를 빗대어 또는 인용(引用)하여 말할 수 없는 땅이다. 왜냐하면 그 땅은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아닌 곳이기 때문에 엉뚱한 이야기로 변질(變質)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곧 「윤관(尹瓘) 장군(將軍)이 개척(開拓)한 땅은, 사막(沙漠)이라는 특이지형대(特異地形帶)이며, 이곳 땅 700리(里)를 토벌(討伐), 개척(開拓) 곧 영토를 확장(擴張)했다」라는 것이다.
‘한해(瀚海)에 임했다’라는 말 역시(亦是) 거짓일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옛 중국(中國)의 고사(古事)는 곧 동이(東夷)의 고사(古事)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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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동명집(東溟集) 3권 七言絶句 [175수] :〔送尹而遠 鳴殷 謫鏡城 四首 : 윤이원 명은이 경성(鏡城)으로 유배 가는 것을 전송하다. 4수〕
《送尹而遠鳴殷謫鏡城 四首 : 歲暮邊城行路難。黃沙漠漠海漫漫。臨岐莫怪綈袍贈。長白山前五月寒。: 세모라서 변방 성의 길 가기가 힘들 건데, 누런 모래 막막하고 바다는 또 드넓으리, 갈래길서 제포 벗어 선사함 괴이타 마소. 장백산의 산 앞에는 오월에도 날 춥다오. 邊塞春還不見春。笛中楊柳淚沾巾。三年爲客關山月。又向關山別故人。: 변방 요새 봄이 와도 봄빛 아니 보이거니, 양류곡의 피리 소리 듣자 눈물 흠씬 나네. 삼 년 동안 나그네로 관산의 달 보았는데, 다시금 또 관산 향해 가는 친구 전별하네. 尹瓘功成大漠開。至今遺廟長蒼苔。春來寒食思先壟。且上君家鼻祖臺。: 윤관 장군 공 이루어 대막 지방 열었는데, 지금 와선 그 사당에 이끼 길게 자랐으리. 봄이 와서 한식 되면 고향 선산 생각나서, 그대 집안 비조께서 세운 대에 오를 거리》라고 하였으니,
➥ 「경성(鏡城) 땅으로 유배[流配 : 歸鄕=徒配]당한 ‘윤명은(尹鳴殷)’을 보내면서 전송(送)하는 글이다. 그렇다면 당연(當然)히 경성(鏡城) 땅의 특이지형(特異地形)에 대해 말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로, 경성(鏡城) 일대(一帶)는, 「黃沙漠漠海漫漫 : 누런 모래 막막하고 바다는 또 드넓으리」라고 하였음에 비춰보면 : 그곳은 ‘황토사막지대(黃土沙漠地帶)’였음을 알려준다.
두 번째로, 「이곳은 장백산(長白山) 앞에 있다」라는 것이고,
세 번째로, 「尹瓘功成大漠開。: 윤관 장군 공 이루어 대막(大漠)을 열었는데」라고 하였으니, 그곳 땅의 특이지형대(特異地形帶) “큰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설명(說明)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노래한 동명집(東溟集)의 주인공(主人公)인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은, “중국왕조(中國王朝)의 관리(官吏)였다”라는 건가?
그러나「정두경(鄭斗卿, 1,597~1,673)」은, 1,597년(宣祖, 30)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낸 정회(鄭晦)와 광주 정씨(廣州鄭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본관(本貫)은 온양(溫陽)’이고, 자는 군평(君平)이며, 호는 동명(東溟)이라고 하였으니, 분명(分明) 조선인(朝鮮人)이다.
➥ 곧, 「반도(半島) 땅에는 옛 고려(高麗)는 없었다」라는 것이고, 「뒤를 이은 조선(朝鮮) 역시 중원대륙(中原大陸)에 있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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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1) 東溟集 8권 七言古詩 [61수] / 〔鏡城觀獵 : 경성에서 사냥하는 것을 보다〕
《鏡城九月雪壯哉. 將軍出獵元帥臺 : 경성 땅엔 구월에도 눈이 많이 내리기에, 장군께서 원수대로 사냥하러 나가시네. ∼以下 省略∼ 酒酣回首望沙漠, 北氣鬱鬱如群畜 : 술 오르자 고개 돌려 사막 쪽을 바라보니, 북방 기운 잔뜩 서려 가축들의 떼 같구나》하였다.
➥ 「위에서 말하는 “사막지대(沙漠地帶)”는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이 직접(直接) 고개를 돌리고(回首) 바라본 것을 말해주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를 부정(否定)할 수 없다.」
곧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접경(接境) 요새(遼塞)였던 “경성(鏡城)”은, 사막(沙漠)의 땅과 이어져 있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 돌려 서(西)쪽 ‘1’ 만리(萬里) 사막(沙漠)을 바라보니… …라는 것이 아니라”, “동명(東溟)이 서 있는 북(北)쪽의 사막(沙漠)으로 머리를 돌려보니”… …한 것이다.》
• 『특히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 등지(等地)의 접경(接境)에 한 번이라도 다녀온 분들의 문집(文集)에는, 그곳의 ‘특이지세(特異地勢)’에 대한 많은 기록(記錄)이 생생(生生)하게 살아있다.』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그저 모르는 척 ‘입(口)’만 꾹 닫고 있을 뿐이다. 그런다고 뭐가 이루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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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목은시고(牧隱詩藁)【牧隱 이색(李穡, 1,328~1,396), 牧隱集】17권, 시(詩) [有感 : 느낌이 있어 짓다.]
《有感 : 白頭朝列苦吟詩。身世悠悠甚矣衰。長白山前沙漠漠。大明殿上草離離。: 백발로 조정 반열에서 애써 시를 읊노니, 유유한 이 신세가 심하도다 쇠함이여. 장백산(長白山) 앞에는 사막(沙漠)이 아득하고요. 대명전 가에는 잡초가 무성하여라. ∼中略∼》라고 하였으니,
「장백산(長白山)은 백두산(白頭山)이라고 하였는데, 백두산(白頭山) 앞에 아득한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느냐?」 하는 질문(質問)에 답(答)할 자(者)들은, 반도사학자(半島史學者)들이다.
반도사학자(半島史學者)들이, 1,000년(年)을 하루와 같이 쉬지 않고 연구(硏究)에, 연구(硏究)를 몰두(沒頭)하더라도, 답(答)은 반도(半島) 땅에서 내놓을 수 없다.
➥ 왜냐하면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장백산(長白山), 곧 백두산(白頭山) 앞(前)에는 큰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長 白 山 前 沙 漠 漠 : 장백산(長白山) 앞에 사막(沙漠)이 아득하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반도(半島) 땅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 앞인 남(南)쪽 땅에 “넓고 넓은 아득한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나?」 반도(半島) 땅에 그런 땅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큰 산(大山) 앞에 큰 사막(沙漠)이 펼쳐져 있는 땅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신강성(新疆省) 북(北)쪽에 존재(存在)하며, 장백산(長白山)을 올랐던 조선(朝鮮) 사대부(士大夫)는 말하기를 “커다란 두 봉우리가 만년설(萬年雪)에 쌓여있다”라고 하였다.」
반도(半島) 북(北)쪽에 있는 ‘민족(民族)의 영산(靈山)’이라고 하는 백두산(白頭山)은, 일제(日帝)가 조선민족(朝鮮民族)의 혼(魂 : 얼)을 말살(抹殺)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름일 뿐이다.
➤ 『반도(半島) 백두산(白頭山)은, 두 봉우리도 없고, 만년설(萬年雪)도 없으며, 산(山) 앞에는 아득하게 펼쳐져 있는 사막(沙漠)도 없으며, 청사고(淸史考)에서 말하는 백두산(白頭山) 동(東)쪽에 “아막헤(俄漠惠)의 땅 아타리성(俄朵里城)도 없으며, “만주(滿珠), 만주(曼珠), 만주(滿洲)”땅도 없다.』 무엇을 가지고, 무슨 조건(條件)을 갖고, 반도(半島) 백두산(白頭山)이라고 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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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淸陰集 11권. 설교집(雪窖集) [二百八十九首] : 남춘성(南春城)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심양으로 가는 데 주다 [북쪽에서 보내온 소식이 흥취를 망쳤기에 끝내 주지 못하였다. 춘성의 이름은 남이웅(南以雄)이다]
《龍灣江水日朝宗. 離別偏傷此路中. 曾是玉京同伴客. 却尋沙漠入遼東 : 용만(龍彎) 땅의 강물 매일 바다 향해 흐르거니, 이 길에서 이별하매 유난히 더 맘 상하네. 전에 함께 옥경(玉京)으로 조회 갔던 나그넨데, 문득 사막(沙漠) 가기 위해 요동(遼東)으로 가는구나.》하였다.
➥ 「사막(沙漠)에 가기 위해 요동(遼東)으로 간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막(沙漠)이란 청(淸)나라를 뜻하는데, 곧 심양(瀋陽)을 말하는 것이고, 요동(遼東)은 사막(沙漠) 곧 심양(瀋陽)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뜻이다.
(31) -1) 淸陰集 11권 / 설교집(雪窖集) [二百八十九首] : 용만(龍灣)에서 수이(守而)에게 남겨서 주다 [계미년(1,643, 인조 21) 봄에 다시금 심양(瀋陽)으로 갈 적에 지은 것이다]
《龍灣留贈守而 [癸未春再作瀋行時作] : 二年沙漠二年灣。歷盡千辛與萬艱。今日又成江上別。世間人事幾時閑 : 사막(沙漠)에서 2년이요 용만(龍彎)에서 2년이니, 천신만고 온갖 고생 두루두루 다 겪었네. 오늘에는 다시금 또 강가에서 이별하니, 이 세상 인간의 일 언제 한가해지려나》하였으니,
➥ 『압록강(鴨綠江) 이북(以北) 및 심양(瀋陽) 땅은,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는 결정적(決定的)인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다.』 반도(半島) 압록강(鴨綠江) 이북(以北)의 요녕성(遼寧省)이나 길림성(吉林省) 땅이 사막지대(沙漠地帶)인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 : 곧 동이(東夷)의 무대(舞臺)는 반도(半島) 땅이 아니다.】는 중원대륙(中原大陸)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證明)해주는 기록(記錄)이다. 또한 용만(龍彎)은 만리(萬里) 서(西)쪽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宣祖) 3(1,570) ∼孝宗 3(1,652)】은, 청(淸)에 대해 강력(强力)한 척화(斥和)를 주장(主張)하고 또 시문학(詩文學)에 뚜렷한 족적(足跡)을 남긴 인물(人物)로 평가(評價)되고 있다.》 곧 틀림없는 ‘조선인(朝鮮人)’이었다는 사실(事實)이다.
➥ 『二 年 沙 漠 二 年 灣 : 청음(淸陰)이 용만(龍彎)【의주(義州)】에서 2년(年)을, 청(淸)에 의해 사막지중(沙漠之中) 심양(瀋陽)에서 2년(年)을 보냈다』라는 뜻이다.
‘2년(年)’을 사막(沙漠)에서 보냈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이것도 중화사상(中華思想)에 환장(換腸)한 조선(朝鮮) 사대부가(士大夫家) 중국(中國)의 서(西)쪽에 있는 사막(沙漠)을 인용(引用)했다고 말할 텐가? 그렇다면 “심양(瀋陽)”은 뭔가?
제정신(精神)을 차려야 한다. 언제까지 ‘일제(日帝)의 망령(亡靈)’에 허우적거리며, 혼미(昏迷)한 상태(狀態)로 뭐 같은 삶을 살 건가? 제발, 이제는 정신(精神)을 좀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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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西河集 2권 / 칠언고시 : 〔將赴三江留別李兄景略 : 삼강으로 떠날 적에 자형 이경략과 이별하며 시를 남겨 주다〕【著者 : 이민서(李敏敍, 1,633~1,688)】
《將赴三江留別李兄景略 : 山河千里足岐路。人世百年多哀樂。紛紛離合不可常。莫將愁顏送遠客。我有一曲爲君歌。故停行杯駐金絡。君身自是鳳穴奇。詩禮初從鯉庭學。蒼鷹下巢兔營穴。宛馬爲駒汗已赤。旁窺三代志氣豪。汎濫百家文詞博。憶昨南溟我作客。家君尙爲潮陽斥。風濤萬里際瓊雷。棘以爲欄山海隔。吾兄不道跋涉難。遠訪長沙慰幽獨。燈前笑語氣溫溫。杯酒慇懃心脈脈。鴒原秋雨雁一行。流水高山琴數曲。北去南來再渡海。惟君高義層雲薄。誰知人事異朝夕。➤「兄住西城弟歸北。: 형님은 서쪽 성에 머물고 아우는 북으로 돌아가니, ➤ 北關迢迢鐵嶺高。: 북관(北關) 아득하고 철령(鐵嶺) 높아서 間以山河界沙漠。: 산(山)과 강(江)을 사이로 사막(沙漠)과 나뉘지요. 孤城一片木爲柵。; 한 조각 외로운 성은 목책을 둘렀는데, 此去脩程千六百。: 이곳과의 거리가 1,600리(里)라오. 千山萬山鳥道細。: 첩첩의 산중에 산길 가늘게 이어지고, 七月八月飛雪白。: 7∼8월(月)에도 흰 눈이 내리지요」征車將出上東門。別筵初開洛陽陌。西隣有兄字汝鉉。與兄同心亦同甲。幾年追隨共襟期。今日同來登祖席。秋風乍入雁背高。古樹霜濃黃葉落。秦雲杳杳塞日黃。斷雁離鴻風雨夕。臨行示我一篇文。字綴瓊琚語藥石。持歸塞外倘披拂。可慰天末長相憶.》
➥「兄 住 西 城 弟 歸 北。: 형님은 서쪽 성에 머물고 아우는 북으로 돌아가니, 北 關 迢 迢 鐵 嶺 高。: 북관(北關) 아득하고 철령(鐵嶺) 높아서 間 以 山 河 界 沙 漠。: 산(山)과 강(江)을 사이로 사막(沙漠)과 나뉘지요.」라고 하였는데,
『반도(半島)【한반도(韓半島), 조선반도(朝鮮半島)】땅에는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갖춘 땅이 없다.』
〈『‘형(兄)은 서(西)쪽 성(城)에 있고, 아우는 북(北)쪽으로 돌아간다’라거나, 어디에서든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또한 ‘철령(鐵嶺)은 북관(北 關)이니, 높고 높다’라는 말 또한 이해(理解)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반도(半島) 땅에서, “間 以 山 河 界 沙 漠 : 산(山)과 강(江)을 사이로 사막(沙漠)과 나누어진다.”라는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갖추고 있는 곳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이게 뭔 말인가? 「산(山)은 백두산(白頭山)이요, 하(河)는 압록강(鴨綠江)인 청하(靑河:淸河)【고전(古典)은, 黃河, 長江과 더불어 天下의 三大水라고 하였다】를 말하는 것이다.」
이건 “반도(半島) 땅과는 하등(何等)【아무런】의 관계(關係)도 없는 것이다”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 1,633~1,688) 시대(時代)의 ‘조선(朝鮮) 강토(疆土)’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이었다’라는 명백(明白)한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다.
이러한 옛 기록(記錄)을 “명백(明白)한 오류(誤謬)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자(者)는 없다. 왜냐하면 그 당시(當時)를 살아보지 못한 자(者)… …자격미달(資格未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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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耳溪集 5. 詩. 朔方風謠 丁酉年(1,777, 正祖 1) : [丁酉冬 黜補慶興府使 : 정유(丁酉), 겨울, 출척(黜) 당하여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보임되었을 때이다] : 알동가[斡東歌]【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
➊ 《斡東歌 : 番音稱梧東。在府東三十里。穆祖自全州 初移三陟。踰嶺至德源。復移居于此。今係江外地。後避狄入赤島。: 여진어 음으로는 ‘오동(梧東)’이라 한다. 경흥부(慶興府)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목조(穆祖)가 전주(全州)에서 처음 삼척(三陟)으로 이주하였다가 함관령(咸關嶺)을 넘어 덕원에 이르렀는데, 다시 이주하여 이곳에 거주하였다. 지금은 두만강 밖의 땅으로 묶여 있다. 목조는 후에 적인(狄人)을 피하여 적도(赤島)로 들어갔다.》라고 하였는데… …,
➥ 「목조(穆祖)가 삼척(三陟)으로 이주(移住)했다」라는 미사려구(美辭麗句)가 보이지만 : 「전주(全州)에서 기생(妓生)을 가지고 그곳 관리(官吏)와 갈등(葛藤)이 생겨 죽게 되자, AD 1,236년(年)【고종(高宗) 23年】가을 무렵 가솔(家率)과 함께 따르던 170여 호(戶)와 함께 야반도주(夜半逃走)하게 되는데, 이게 상식적(常識的)이지 않은 것은 : 이때는 고려(高麗)가 번성(繁盛), 번영(繁榮)하고 있을 때로, 전주(全州)는 감영(監營)이 설치(設置)되어 있던 요충지(要衝地)로, 하룻밤 사이에 일천(一千) 명(名)이 넘는 많은 무리가 없어졌다면 : 계엄(戒嚴)이 떨어지고, 그 누구도 계엄(戒嚴)에 항거(抗拒)할 수 없는 체계(體系)가 갖추어져 있을 때이다.
「가족(家族) 몇 명이 없어져도 난리(亂離)가 났을 때, 일천(一千)이 넘는 무리를 앞세우고 하필(何必)이면 고려(高麗) 요충지(要衝地) 삼척(三陟)으로 도주(逃走)했다」라는 것에 대해서 : “누구도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해(理解)할 수 없는 이야기다”」
전라도(全羅道) 전주(全州)에서 강원도(江原道) 삼척(三陟)을 어떻게 갈 수 있나? 육로(陸路)로 간다는 것은, 당시(當時)의 체계(體系)로 보면 불가능(不可能)한 것이고, 또 배(船)를 이용(利用)해 일천(一千)이 넘는 인원(人員)과 먹을 것, 입을 것, 잘 것 등(等)이라면 도대체 몇 척(隻)의 배(船)를 동원(動員)했을 것이며, 그러면 전주(全州) 감영(監營)이나 포구(浦口)에서는 무엇을 했다는 말일까?
역사서(歷史書)든, 지리지(地理志), 개인(個人) 문집(文集), 족보(族譜) 등(等), 그 어디에도 이안사(李安社) 가솔(家率)과 그를 따르던 전주(全州)의 170 여호(餘戶) 도주(逃走)는 야반(夜半)에 도주(逃走)를 한 것인데… …배를 타고, 아니면 도보(徒步)로… …배를 탔던, 도보(徒步)이든… …후대(後代)를 멍청이, 바보로 취급(取扱)하는 일제(日帝)와 이 나라의 친일(親日) 부역자(附逆者)들의 만행(蠻行)으로, 천벌(天罰)을 받아야 마땅하다.
☛ [참고(參考)] : 「이안사(李安社)의 삼척(三陟) 이주(移住) 사건(事件)」 : 《여기서 도무지 상식적(常識的)이지 않은 설명(說明)은 :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주도(主導)한 이의방(李義方)이 AD 1,174년에 피살(被殺)되었는데, 그의 동생(弟) “린(璘)”은 살아남아 전주(全州)로 가서 호족(豪族)이 되었다.」라는 것은, “당시(當時)는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體制)였다”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 후손(後孫)의 작품(作品)일 가능성(可能性)이 있다. 곧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혹(惑), 겨우겨우 홀로 살아남아 고향(故鄕)으로 피신(避身)했다고 해도 이해(理解)가 될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고도 살아남아 “전주(全州)”에서 급부상(急浮上) 호족(豪族)이 된다? 이건 희극(戲劇)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의방(李義方) / 〈이의방(李義方)은 1,170년(의종 24) 정중부, 이고와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무신이다. 무신정변의 핵심 인물로서 대장군 정중부를 끌어들여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였다. 정변의 동료인 이고를 제거하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는 등 권력을 휘둘렀으나, 조위총의 난 때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김보당의 난을 진압하고 중방의 기능을 무신정권의 주요 통치 기구로 활성화하는 등 초기 무신정권의 성립 기반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라고 하였다.
☛ 〈이의방(李義方)【필자(筆者) 주(注) : 출생(出生) ?∼1,174年】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의종(毅宗) 말에 산원(散員)으로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다. 1170년(의종 24) 보현원(普賢院)에서 대장군 정중부(鄭仲夫), 견룡행수 이고(李高)등과 더불어 무신란(武臣亂)을 일으켜 성공한 뒤 응양용호군(鷹揚龍虎軍)의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고, 형 이준의(李俊儀)는 승선(承宣)에 임명되었다. 정중부 등과 더불어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明宗)을 맞아 무신정권(武臣政權)을 수립한 뒤 대장군 전중감 겸 집주(大將軍殿中監兼執奏)에 임명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어 그 형상이 각상(閣上)에 그려졌다.
1,171년(명종 1) 대장군 한순(韓順), 장군 한공(韓恭) · 신대예(申大譽) · 사직재(史直哉) · 차중규(車仲規) 등이 비방하자, 평소 친분이 있던 차중규는 귀양을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또한 이고(李高)가 무뢰배들, 법운사(法雲寺)의 승려 수혜(修惠), 개국사(開國寺)의 승려 현소(玄素) 등과 결탁해 분수에 넘치는 뜻을 나타내므로 미워하게 되었다. 여정궁(麗正宮)에서 태자(太子)에게 원복(元服)을 가하는 잔치가 베풀어지자 선화사(宣花使)로 참여해 난을 일으키려 한 이고를 죽이고, 순검군(巡檢軍)을 풀어, 이고의 어머니와 나머지 무리들을 잡아 죽이고 아버지는 귀양을 보냈다.
1,173년(명종 3)에 왕녀를 봉해 궁주(宮主)를 삼았다. 중방(重房)에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기생들을 데리고 술을 마시며 떠들고 북치는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벼슬은 위위경(衛尉卿) 흥위위섭대장군(興威衛攝大將軍) 지병부사(知兵部事)에까지 올랐다. 이해 8월 무신정권에 반대하는 김보당(金甫當)의 난이 일어나자 다수의 문신을 살해하였다.
1,174년(명종 4)에 귀법사(歸法寺)의 승려 백여 명이 성(城)의 북문을 침범해 승록(僧錄) 선유(宣諭)를 죽이자 병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물리쳤다. 또 중광(重光) · 홍호(弘護) · 귀법 · 홍화(弘化) 등 여러 절의 승려 2천여 명이 숭인문(崇仁門)을 불사르고 자신과 형을 죽이려 하므로 부병(府兵)을 모아 승려 백여 명을 죽이고, 나아가 중광 · 홍호 · 귀법 · 용흥(龍興) · 묘지(妙智) · 복흥(福興) 등 여러 절을 허물고 불사르며 많은 재물을 빼앗았다. 이에 형 이준의가 이의방을 꾸짖어 “너에게 삼대악(三大惡)이 있으니 하나는 임금을 쫓아내어 죽이고 그 저택과 희첩(姬妾)을 취함이요, 둘은 태후의 여동생을 위협해 간통함이요, 셋은 국정을 마음대로 함이다.”라고 하자, 형을 죽이려 했으나, 문극겸(文克謙)의 만류로 그쳤다. 이때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에 반발해 군대를 일으켜 개성 근교에까지 이르자, 서경 사람인 상서(尙書) 윤인미(尹仁美), 대장군 김덕신(金德臣), 장군 김석재(金錫才) 등을 모두 잡아 죽여 저잣거리에 효수하였다. 이후 서경의 반란군을 무찌르고 대동강까지 갔으나, 흩어졌던 서경 군대가 다시 모여 성을 굳게 지키므로, 성 밖에서 한 달 정도 주둔하다가 모진 추위로 인해 돌아왔다.
좌승선(左承宣)에 임명되자 딸을 바쳐 태자비(太子妃)를 삼았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는 등,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원망이 일어나 1,174년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과 공모한 승려 종참(宗旵)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형 이준의와 같은 무리인 고득원(高得元)·유윤원(柳允元) 등도 함께 죽임을 당하였고, 딸은 태자비에서 폐출되었다. 무신정변의 핵심 인물로서 정중부를 끌어들이고 중방의 기능을 무신정권의 주요 통치 기구로 활성화하는 등 초기 무신정권의 성립 기반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 -인용(引用), 끝-〉라고 하였는데,
☛ 이렇게 「‘수백(數百) 수천(數千)’의 정적(政敵)들을 살해(殺害)하고, 길거리에 효시(梟示)하는 등의 잔인무도(殘忍無道)했던 ‘이의방(李義方)과 그 가족(家族)’을… … ‘자신(自身)들 원수(怨讎)’의 가족(家族)을 살려주고, 그것도 고향(故鄕)인 전주(全州)로 귀향(歸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라는 이야기는, 당시의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體制)하에서 불가능(不可能)하고,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또 반도(半島)라는 협소(狹小)한 땅에서는 본래(本來)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반역(反逆), 왕가(王家) 또는 체제(體制)에 대한 도전(挑戰) 등은 대역죄(大逆罪)로, 본인(本人)은 물론이거니와 자녀(子女), 부모(父母), 형제자매(兄弟姉妹), 삼촌(三寸), 사촌(四寸), 외가(外家), 또는 친족[親族 : 8촌 이내(以內)]까지도 연좌(連坐)시켜 ‘멸문(滅門)’시키고, 친지(親知)와 교우(交友)한 주변인(周邊人)들에게도 연좌(連坐)시킬 정도(程度)로 봉건체제(封建體制) 하(下)에서의 반역(反逆)의 대가는 처참(悽慘)하고 처절(凄切)했다.】
물론(勿論) 21세기 오늘날에는 연좌제(緣坐制)가 없어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이전(以前)까지도 살아있었다고 전해진다. 「12세기(世紀) 당시(當時)의 체제(體制)로 보면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또 어떤 기록(記錄)에서는, “당시(當時)의 권력가(權力家)이자 명문가(名門家)였던 ”문극겸(文克謙, 1,122~1,189)“의 사위가 되는 바람에 ”문극겸(文克謙)“의 덕택으로 살아남았을 것이다”라는 해설(解說)도 하고 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오늘날의 이야기일 뿐이고,
또 어떤 기록(記錄)에서는 ‘이린(李璘)과 그의 아우(弟) 이거(李琚)’는 ‘문극겸(文克謙)’과는 ‘겹사돈(査頓)이었다’라는 설명(說明)까지 하고 있는데, ‘이린(李璘)의 아우가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라고 하였고, 「‘린(璘)과 린(隣)’이 동일인물(同一人物)인지, 형(兄)과 아우(弟)를 말하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희극(戲劇) 같은 이야기들이다.
➡ 전해지는 말로, ‘이린(李璘)의 아우(弟)로 이거(李琚)’가 있었다고 하는데, 문극겸(文克謙)과는 겹사돈(査頓)이었다고 설명(說明)하기도 한다. ‘문극겸(文克謙, 1122~1189)’과 겹사돈(査頓)이라는 이야기는 : 「AD 1,174년(年)의 이의방(李義方)이 살해(殺害)될 때 가족(家族) 모두가 살해(殺害)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하는 점을 설명(說明)하기 위한 밑그림이 아니었을까?」하는 점이다.
즉(卽), 「AD 1,174년 이의방(李義方)이 살해(殺害)되고 나서 그 가족(家族)들은 어떻게 죽음을 피(避)했는가? 하는 점이다. ‘피할 수 있는 재간(才幹)이 없었다’라는 것이 당시(當時) 사회체제(社會體制)였다.」라는 점이다. 곧 죽임을 당한 수백(數百), 수천(數千)의 원수(怨讎)들이 이의방(李義方) 가족(家族)을 그대로 놔뒀겠는가? 하는 것이다.
‘고려(高麗) 왕실(王室)’ 측(側)에서 봐도 “이의방(李義方)은 반역도당(叛逆徒黨)의 수괴(首魁)”였다는 엄연(奄然)(儼然)한 사실(事實)이었다.
곧 형(兄) ‘이준의(李俊儀)’가 ‘이의방(李義方)’에게 말했듯이 : 〈너에게 삼대악(三大惡)이 있으니 하나는 임금을 쫓아내어 죽이고 그 저택과 희첩(姬妾)을 취함이요, 둘은 태후의 여동생을 위협해 간통함이요, 셋은 국정을 마음대로 함이다〉라는 죄(罪)를 열거(列擧)하며 꾸짖었다고 전(傳)해지지 않는가! 이러고도 그 가족(家族)이 고향(故鄕)으로 귀향(歸鄕)하여 ‘호족(豪族)=토호(土豪)’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로 편집(編輯),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자(者)들이 그 후손(後孫)들을 파렴치(破廉恥)한 무리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고증(考證)되지 않는 이야기들은 결국(結局), 「전주이씨(全州李氏) 가계(家系)를 신라(新羅) 말기(末期)로 끌어올리기 위한, 당시의 명문가(名門家)였던 남평문씨(南平文氏)를 끌어들여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로 이어지도록 만들어낸 것이다. 곧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이야기」라는 주장(主張)에 힘이 실리게 된다. 【2024.07.14 : 이성계(李成桂), 고려인(高麗人), 달단몽고(韃靼蒙古), 여진(女眞)? [제 1편]에서 인용]. 끝】
➥「적인(狄人)」이란 : 21세기(世紀) 반도(半島) 땅에서는 “우리나라 북(北)쪽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을 가리킨 말”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지만,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말로 :
본래(本來)의 「적인(狄人)」이란 : 중국(中國)에서 북방민(北方民)을 일컫던 말로, 백적(白狄), 적적(赤狄), 장적(長狄)이라고 하였는데, ‘東胡、匈奴、高車、鮮卑’ 등(等)을 일컫던 말이라고 전해진다.
가장 타당(妥當)한 것은, 당시의 북방족(北方族) 여진족(女眞族)을 적인(狄人)으로 지칭(指稱)했다면 :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조선(朝鮮)”이었다면 : 가장 적절(適切)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곧 당시(當時)의 “조선(朝鮮)은 중원대륙(中原大陸)에 있었다”라는 것을 증거(證據)하고 있는 기록(記錄)이다.
‘알동가(斡東歌)’를 보면 : 《番音稱梧東。在府東三十里。穆祖自全州 初移三陟。踰嶺至德源。復移居于此。今係江外地。後避狄入赤島。: 여진어 음으로는 ‘오동(梧東)’이라 한다. 경흥부(慶興府)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목조(穆祖)가 전주(全州)에서 처음 삼척(三陟)으로 이주하였다가 함관령(咸關嶺)을 넘어 덕원에 이르렀는데, 다시 이주하여 이곳에 거주하였다. 지금은 두만강 밖의 땅으로 묶여 있다. 목조는 후에 적인(狄人)을 피하여 적도(赤島)로 들어갔다.》라고 하였으니… …,
「전주(全州)에서 야반도주(夜半逃走), 삼척(三陟)에서 다시 함관령(咸關嶺)을 넘어 덕원(德原)【다른 기록(記錄)은, 해상(海上)으로 이주(移住)했다고 전해진다】의 의주(義州)로 도주(逃走)하는데, 이 또한 코미디로 전주(全州)에서 싸웠던 그 관리(官吏)가 다시 삼척(三陟)으로 오는 바람에 또 도주(逃走)하게 되며, 또 덕원(德原)에서 알동(斡東)으로, 다시 적인(狄人)을 피해 적도(赤島)로 도주(逃走)한다」라고 하였으니, 이후(以後)에도 도주(逃走)와 항복(降伏)은 계속(繼續)된다.
☛ 「‘고황제(高皇帝)의 선대(先代) 인물(人物)’들에 대한 평가(評價)치고는, 도무지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이야기로 점철(點綴)되어 있다. 이는 곧 본시(本是) 고려인(高麗人)이 아닌 이민족(異民族)이었을 암시(暗示)하고, ‘가공(加工)된 이야기’임을 스스로 말해주고 있다.」
➋ 《烏喇摠管定界時, 奈何蹙我千里封 : 오라 총관이 경계 정할 때, 어이하여 우리의 일천 리 국경 쪼그라뜨렸던고. 黃沙漠漠連渤海, 虎豹跳梁白葦叢 : 누런 사막(沙漠)은 아득히 발해(渤海)에 연이었고, 흰 갈대 수풀 사이로 호랑이 범 날뛰네. 중략(中略)》리고 하였는데,
➥ 「黃 沙 漠 漠 連 渤 海 : 누런 사막(沙漠)은 아득히 발해(渤海)에 연이었다」라고 하였으니… …21세기(世紀) 오늘날의 발해(渤海)를 생각하면 : 어이없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기록(記錄)이다.
그러나 『당시(當時)의 조선(朝鮮) 영토(領土)는, 누런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아득하게 발해(渤海)와 연(連)이어져 있었다』라는 것으로,
「발해(渤海)는, 사막(沙漠)의 남(南)쪽에 있었으며, 이곳에 산해관(山海關)이 있었고, 내륙에 있었던 큰 호수(湖水)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자(者)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은, 곧 “망국사관(亡國史觀)”이다. 이를 어찌 두고 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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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谿谷先生集 제30권 七言律) 1백 60수(首) : 哀 金 將軍 ‘應河’ 二首
《大 漠 煙 塵 白 日 黃, 將 軍 力 盡 死 沙 場 : 태양도 빛을 잃은 큰 사막(沙漠)의 전진(戰塵), 기진맥진 싸우다가 장군이 모래벌판에서 전사하였도다. 忠 魂 定 不 群 猿 鶴, 厲 鬼 猶 應 殺 犬 羊 : 충성스러운 그 혼백 원학(猿鶴)과 함께 할 리 있나, 무서운 귀신 되어 견양(犬羊)을 죽이리라. ∼ 中略∼, 壯 志 初 將 大 漠 呑, 死 綏 差 足 答 君 恩 : 이제 막 펼치려다 사막에 묻힌 장한 그 뜻, 사수보단 그래도 임금의 은혜 보답했네. 鼓 衰 矢 盡 三 軍 沒, 雨 濕 天 陰 萬 鬼 寃 : 고군분투 끝에 함몰된 군대, 비 오고 음침한 날 원귀(寃鬼)들의 호곡(號哭) 소리, ∼中略∼.
➥ 혹자(或者)는 예전에 이런 질문(質問)을 하셨다. 즉(卽) “사장(沙場)에서 전사(戰死)하였다”라고 하니, 「왈(曰) : 심하(深河)의 강가 모래톱에서 전사(戰死)했다는 것과 사막(沙漠)과 무슨 상관(相關)이냐?」하셨는데… …우리나라 말은 전후(前後)를 다 짚어야 한다.
앞 구절(句節)에서 분명(分明)하게 말하기를 “태양도 빛을 잃은 누런 대 사막(沙漠)에서, 기진맥진 싸우다가 장군(將軍)이 사장(沙場)에서 전사하였도다”라고 하였으니… …「큰 사막(沙漠) 가운데를 흐르는 “심하(深河)” 강변(江邊)에서 김응하(金應河)와 3000의 전사(戰士)들이 끝까지 싸우다가 모래벌판(沙場)에서 죽었다.」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 땅이 아닌 “만리(萬里) 서(西)쪽에 있었던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흐르던 심하(深河)의 강변(江邊)에서 일어났던 고사(古事)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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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象村集 9권. 詩 五言律詩 (1백 23수) : 창기에게 부치다[寄 昌期]【著者 : 상촌(象村) 신흠(申欽 : 1566년 明宗 21~1628년 仁祖 6)】
《‘寄昌期’ [昌期時拜北郵。余迎慰義州牧去云] : 春來愁正苦。書到倍茫然。供世有何好。勞生空自憐。鐵關通朔漠。鴨水接幽燕。縱寄梅花信。悠悠那可傳》
《春 來 愁 正 苦, 書 到 倍 茫 然, 供 世 有 何 好, 勞 生 空 自 憐 : 봄이 오매 시름 정히 괴로운데, 편지 이르니 정신이 배나 아득하네. 세상에 이바지함이 뭐가 좋으랴, 살기 괴로움만 스스로 애처로울 뿐 鐵 關 通 朔 漠, 鴨 水 接 幽 燕, 縱 寄 梅 花 信, 悠 悠 那 可 傳 ; 철관(鐵關)은 북(北)쪽 사막(沙漠)으로 통하고, 압록강(鴨綠江)은 유연(幽燕)과 연접했나니, 아무리 매화 소식을 전하려 한들, 하도 멀어 어떻게 전할 수 있으랴.》
➥ 「鐵 關 通 朔 漠, 鴨 水 接 幽 燕 : 철관(鐵關)은 북(北)쪽 사막(沙漠)으로 통하고, 압록강(鴨綠江)은 유연(幽燕)과 연접했나니」라는 말에서… …,
「철관(鐵關) 곧 철령(鐵嶺) 이북(以北)은, 사막지대(沙漠地帶)로 들어가는 관문(關門)이었다는 표현(表現)이며, 압록강(鴨綠江)」은, 유주(幽州)와 연(燕) 나라 땅과 연(連)이어져 있었다」라는 것이다.
(35) -1) 象村集 12권 詩 七言律詩 [99수] : 次 東皐 永平府韻[동고의 영평부 운을 차하다]
《鄕 原 別 後 歲 年 遙, 倦 役 支 離 幾 暮 朝, 遲 日 郊 坰 團 野 馬, 暖 風 烟 靄 冪 春 條 : 고향 땅을 떠난 뒤로 가마아득한 세월, 힘든 노역 지루하게 몇날 며칠 넘겼던가. 더딘 해 들녘에는 아지랑이 피어나고, 화한 바람에 안개는 봄 초목을 덮었구나. 厭 看 遼 塞 聯 寒 磧, 又 向 灤 河 渡 斷 橋, 從 古 盧 龍 稱 絶 漠, 覉 膓 懸 斾 正 搖 搖 : 요동(遼東) 변방 끝이 없는 차가운 사막(沙漠) 실컷 보고, 또 다시 난하(灤河) 향해 끊긴 다리 건너가네. 예로부터 노룡(盧龍) 사막(沙漠) 험난하다 불렸나니, 나부끼는 깃발인가 나그네 마음 흔들려》라고 하였으니… …,
➥ 「기가 막힌 반전(反轉) 스토리(Story) 임이 틀림없다.」
요동(遼東)의 변방(邊方)은 사막(沙漠)은 예부터 한적(寒磧)【추운 사막지대(沙漠地帶)】지대(地帶)였다는 뜻으로, 『본래(本來) “요(遼) 땅【요동(遼東), 요서(遼西)】은, 사막지대(沙漠地帶)였으나, 특히 요서(遼西) 땅의 노룡(盧龍) 사막(沙漠)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絶漠 : 끝없이 펼쳐진 사막(沙漠)】의 땅으로 유명(有名)했다』라는 뜻이다.
• 《「반도(半島) 땅과 요녕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그리고 흑룡강성(黑龍江省), 인접(隣接)한 내몽고(內蒙古), 아울러 하북성(河北省)과 북경(北京) 땅」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지대(沙漠地帶)【절막(絶漠)】이다」라고 한다면?》 : 정신(精神) 나간 ‘놈’이라고 할 건은 100%다.
☛ 맞는 말이다. 21세기(世紀) 오늘을 기준(基準)으로 보면 : 정신(精神) 나간 자(者)의 헛소리로 매도(罵倒)당할 것은 100%다.
그러나 「1세기(世紀) 전(前), 곧 20세기(世紀) 이전(以前)의 요동(遼東), 요서(遼西) 땅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지대였다는 것이다.」 그 시차(時差)는 겨우 100년(年)이다.
(35) -2) 象村集 13권. 詩 七言律詩 [110수] : 龍灣客詠[용만의 객중에서 읊다]
《九 日 遼 河 蘆 葉 齊, 歸 期 又 滯 浿 關 西, 寒 沙 淅 淅 邊 聲 合, 短 日 荒 (荒) 鴈 翅 低 : 9월 9일 요하(遼河)에 갈대잎 가지런한데. 돌아갈 시기 또다시 패관 서쪽에 묶였네. 살랑살랑 모래바람 변방 소리 어울리고, 어둑어둑 짧은 해에 기러기 내려오누나. 故 國 親 朋 書 欲 絶, 異 鄕 魂 夢 路 還 迷, 愁 來 更 上 譙 樓 望, 大 漠 浮 雲 易 慘 悽 : 고국의 친척과 벗들 서신이 끊길 듯하고, 타향의 꿈속에는 고향길이 아련하네. 시름겨워 다시금 초루 올라 바라보니, 대막(大漠)의 뜬구름에 저절로 서글퍼지네》
➥ 위의 내용(內容)을 ‘지명(地名)과 방위(方位)’로 결합(結合)해 보면 : 「패관(浿關)은 곧 패수(浿水)를 말하는 것이니, 「요동(遼東)은 패수(浿水)의 서(西)쪽에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고, 모래바람은 변방(邊方)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초루(譙樓)에 올라 바라보니, 대막(大漠) 땅 하늘에 뜬구름에 저자(著者)의 마음이 서글퍼진다」라는 의미다.
그 어디에도 반도(半島) 변방(邊方)의 땅을 노래한 구절(句節)이 없다. 『반도(半島) 땅의 “패수(浿水)”가 주장(主張)마다 다르고, 시대(時代)마다 다르다는 어처구니없는 학자(學者)들의 헛소리가 들리지만, 중요(重要)한 것은, 패수(浿水) 서(西)쪽에도 넓고 넓은 땅이 있다」라는 것이고, 그래서 「수양제(隋煬帝)는 12군(軍) 전군(全軍)에게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에 집결(集結)하라」라는 황명(皇命)을 내릴 수 있었던 거다.
『반도(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십원(十圓) 한 장’ 관계(關係)도 없다.」 곧 이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설명(說明)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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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潛谷遺稿 3권. 詩, 集杜五言絶句 : 護行使. 原平君을 北平에서 만나다. 【김육(金堉) : 1580(宣祖 13년)∼1,658(孝宗 9년)】
《逢護行使原平君於北平 : 使者日相望 有感 / 何況道路長 遣興 / 今君度沙磧 送人從軍 / 吾亦離殊方 雙燕 ; 사신들이 날마다 줄을 잇는데, [有感], 하물며 길이 긴들 어떠하리오, [遣興], 지금 그대 사막(沙漠)을 건너갈 건데, [送人從軍], 이 몸 또한 이역 땅에 떠나와 있네. [雙燕]. 》라고 하였으니,
➥ 「북평(北平)은, 곧 오늘날의 북경(北京)이 될 수 없으며, 북평(北平)은, 사막지대(沙漠地帶)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명백(明白)한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다.」
(36) -1) 잠곡유고(潛谷遺稿) 10권 致祭文 [判書 李顯英 致祭文]
《王 若 曰, 惟 韓 之 李 : 왕(王)은 이르노라, 생각건대 한산(韓山)이라 이氏 집안은, ∼中略∼ 三 歲 之 中, 再 啓 西 轅, 雪 飧 沙 宿, 兼 程 疾 馳 : 삼 년이란 세월을 지나는 동안, 두 차례나 서(西)쪽으로 수레 몰았지, 눈 속에서 밥을 먹고 사막(沙漠)에서 자며, 말 달려서 하루에 이틀 길 갔지》라고 하였으니,
➥ 위와 같은 기록(記錄)을 보면서 : 「반도조선(半島朝鮮)을 말하는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이제는 정말 묘지(墓地)로 내몰아야 한다.」
「3년(年) 세월(歲月) 중에, 서(西)쪽으로 수레를 몰고, 눈(雪) 속에서 밥을 먹으며, 사막(沙漠)에서 자며, 달렸다」라는 이야긴데… …반도조선(半島朝鮮) 땅에서 ‘북경(北京)=북평(北平)’을 가는 길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통과(通過)할 일은 없다.
왜?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정도(程度)의 질문(質問)은, 초등(初等) 5년(年)이면 다 알 수 있는 아주 기초적(基礎的)인 상식(常識)이다. 그렇다면 ‘반도(半島) 식민사학(植民史學)’은 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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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澤堂先生 續集 3권 詩 : 鍾城鎭으로 부임하는 종숙(宗叔) 이여복(李汝復)을 전송하며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년(宣祖 17)~1,647년(仁祖 25)】
《送宗叔李汝復赴鍾城鎭 : 愁州關險壓銅鞮。頗牧今聞出紫閨。大漠東南江入海。高城西北路爲梯。軍筵夜按琵琶曲。獵騎朝披叱撥蹄。白首詞垣眞潦倒。壯遊陳迹夢中迷。》
《愁 州 關 險 壓 銅 鞮, 頗 牧 今 聞 出 紫 閨, 大 漠 東 南 江 入 海, 高 城 西 北 路 爲 梯 : 수주(愁州)의 험준함은 동제와 비교도 안 되는데, 파목(頗牧)께서 궁궐 나와 거기로 떠나신다고요. 사막(沙漠) 동남(東南)쪽으로는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고, 높은 성곽 서북쪽은 사다리 타고서 넘을 험로 軍 筵 夜 按 琵 琶 曲, 獵 騎 朝 披 叱 撥 蹄, 白 首 詞 垣 眞 潦 倒, 壯 遊 陳 迹 夢 中 迷 : 밤중엔 군중(軍中) 연회 비 파곡에 박수치고, 아침엔 사냥 나가 질 발을 마음껏 몰으시리. 백발로 문자 만지는 일 이젠 정말 힘이 빠져, 북변(北邊)의 옛 추억만 꿈속에 아른거리네요.》
➥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가 존재(存在)하는 이유(理由)가 뭔가? 그 답(答)은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가 내놓아야만 한다. 어처구니없는 학계(學界)다. 아마도 그들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위의 구절(句節)을 보면… …종성진(鍾城鎭)에 관(關)한 것이다. 『大 漠 東 南 江 入 海, 高 城 西 北 路 爲 梯 : 사막(沙漠) 동남(東南)쪽으로는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고, 높은 성곽 서북쪽은 사다리 타고서 넘을 험로』라고 하였다.
사막(沙漠) 동남(東南)쪽으로 흐르는 강물은 바다로 들어가고… …하였는데, 이는 ‘두만강(豆滿江)=두만강(豆萬江)’을 지칭(指稱)하는 말이다. 그러나 「반도(半島) ‘두만강(豆滿江)=두만강(豆萬江)’ 주변(周邊)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이게 문제(問題) 다.
반도조선(半島朝鮮)은, 이렇게 결정적(決定的) 장면(場面)에서는 모니터가 블랙(Black)으로 처리된다. 말 그대로 “답변(答辯)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큰 사막(沙漠)에서 동남(東南)쪽으로 흐르는』… …이런 구절(句節)은, 반도(半島)의 지형지세(地形地勢)에서 불가능(不可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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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학봉속집(鶴峯續集) 제1권 詩 : 순안관(順安館)에서 새벽에 일어나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順安館曉起 : 鼓角催天曉。征驂向客嘶。風沙連朔漠。山海接遼陲。: 고각 소리 날 밝기를 재촉하는데, 역마는 나그네를 향하여 우네. 모래바람 사막에 잇닿아 있고, 산과 바다 요동 땅과 접하여 있네. 去去遵長道。行行返幾時。君親念俱切。回首淚雙垂。》
➥ 「순안관(順安館)은 순안(順安)의 역참(驛站)의 관사(館舍)를 말하는 것으로, 순안현(順安縣)을 말하는 것인데, 평양(平壤)에 속해 있었다」라고 전해진다.
위의 구절(句節)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 『風沙連朔漠。山海接遼陲。: 고각 소리 날 밝기를 재촉하는데, 역마는 나그네를 향하여 우네. 모래바람 사막에 잇닿아 있고, 산과 바다 요동 땅과 접하여 있네.』라고 한 바에 따르면, 반도(半島) 평양(平壤)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평양(平壤)의 북방지대(北方地帶) 및 요동(遼東) 땅은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아니기 때문이다.
(38) -1) 학봉속집(鶴峯續集) 제1권 詩 : 조천기행(朝天紀行)
《丁 丑 之 春 月 孟 陬, 余 爲 介 士 朝 神 京 : 정축이라 그해 정월 봄이 막 시작될 때, 서장관이 되어서 신경(神京)에 조회 갔네. ∼中略∼ 風 沙 日 日 擊 面 人, 雲 頑 日 曀 邊 風 獰, 行 人 三 月 尙 重 裘, 磧 裏 不 見 春 草 萌 : 모래바람 날마다 사람 얼굴 때리고, 구름 짙어 음산한데 변방 바람 사납네. 행인들은 삼월에도 두꺼운 옷 입고 있고, 모래밭엔 봄풀이 싹트는 게 안 보이네. 廣 寧 雄 藩 鎭 遼 右, 城 譙 壯 麗 兵 戎 精, 西 倚 醫 閭 北 沙 漠 ; 광녕은 웅번이라 요동 서쪽 억눌러서, 성문은 장대하고 군사들은 정예롭네. 서(西)쪽으론 의무려산(醫巫閭山) 북(北)쪽으론 사막(沙漠)이며 ∼中略∼》라고 하였으니… …,
➥ 신경(神京)이란 천자(天子) 또는 황제(皇帝)가 사는 궁궐(宮闕)을 있는 서울을 말하는 것이니, 위의 내용(內容)으로 보면 “북경(北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반도(半島) 땅에서 북경(北京)으로 가는 길은, 특이지형(特異地形) 사막(沙漠)이 없다.
그러나 위의 조천기행(朝天紀行)을 보면 : 『정월(正月)이 막 시작(始作)될 때 모래바람(風沙)이 얼굴을 때리고, 모래밭에는 풀 새싹이 보이지 않고, 서(西)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 북(北)쪽은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다』라고 하였으나,
「반도(半島) 땅과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및 의무려산(醫巫閭山) 북(北)쪽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없다. 의무려산(醫巫閭山) 뒤에는 아주 좋은 산림지대(山林地帶)가 펼쳐져 있는 산악지대(山岳地帶)이니 본래(本來)부터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탄생(誕生)될 수 없는 구조(構造)다.」 자연환경(自然環境)은 왜곡(歪曲), 조작(造作)할 수 없다.
곧 「반도조선(半島朝鮮)은 없다는 것이고, 조선(朝鮮)의 강토(疆土) 내(內)는,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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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大東野乘, 海東雜錄 3 本朝 : 유응부(兪應孚) [일찍이 함길도절제사(咸吉道節制使)가 되었을 때 지은 시(詩)에]
【有詩云。將軍威德鎭戍邊。沙塞塵淸士卒眠。盡日空庭何所玩。良鷹三百坐樓前。: 장군의 위덕(威德)이 변경을 진압하니, 모래사막(沙塞) 국경에 티끌이 맑아져 사졸들은 졸고 있도다. 온종일 빈 마당에 볼 만한 것 무어더냐. 좋은 매 3백 마리 누각 앞에 앉았네. 此亦可見氣像。本 : 이 역시 그의 기상을 엿볼 만하다.》라고 하였다.
➥ 유응부(兪應孚, ?~1456)가 누군가? 「Naver 한자 사전」에 의하면 :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장군(將軍)(?~1456). 자(字)는 신지(信之). 호(號)는 벽량(碧梁).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세조(世祖) 2년(1456)에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실패(失敗)하여 처형(處刑)되었다. 유학(儒學)에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숙종(肅宗) 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시조(時調) 3수(首)가 전(傳)한다.》라고 전해지는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유응부(兪應孚, ?~1456)는, 전형적인 무골(武骨)로, 무과에 올라 1448년(세종 30)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고, 1449년에는 경원도호부사 · 경원절제사를 거쳐,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의주목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1453년에는 평안좌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를 거쳐, 이해 6월에 세조가 즉위한 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단종복위(端宗復位) 건으로 :《세조(世祖)가 성이 나서 「‘달군 쇠’를 가져와서 ‘그의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네이버 지식백과 /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라고 전해지는 무골(武骨)이었으며 청렴(淸廉)한 관리(官吏)였다》라고 전해지는데… …,
「유응부(兪應孚, ?~1456)」라는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변방(邊方)을 지키던 무장(武將)으로, 자신(自身)이 수비(守備)하고 있던 변방(邊方)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가감(加減) 없이 말해주고 있는 장면(場面)이 바로 이 구절(句節)이다.
「유응부(兪應孚, ?~1,456)」는, 위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듯이 『불에 달군 쇠붙이로 “배 밑”을 지지게 하니【배 밑은 어디를 말하겠는가?】,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듯이, 상상(想像)을 초월(超越)하는 무골(武骨)로서, 그 심지(心地)가 대단히 단단한 인물이었다는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분이 스스로 지은 시(詩)에서 : 무엇을 얻고자 거짓말이나 헛소리를 넣었을까?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모래사막(沙塞) 국경에 티끌이 맑아져 사졸들은 졸고 있도다.[沙塞塵淸士卒眠]」라는 것은, 변방(邊方)의 이민족(異民族)을 초무(招撫) 하니, “티끌이 조용해졌다”라는 것으로, 곧 평화(平和)로움을 말하고 있다.
이래도 “중국(中國)의 사막지대(沙漠地帶) 요새(遼塞)를 인용(引用)한 것이다”라고 말할 텐가?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외칠 수가 있다니… …뻔뻔한 그 똥배짱에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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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조선(朝鮮)의 선대(先代)는, 작금(昨今)의 이 나라 국민(國民)의 선조(先祖)들로써, 족보(族譜)를 들이대며, 「누구는, 아무개는 우리 집안의 몇 대 조상(祖上)이며, 정승(政丞)을 역임(歷任)한 분이시다. 양반가(兩班家)로 몇 백년(百年)을 내려온 정통(正統) 사대부가(士大夫家)다」라면서 침을 튀긴다.
그러다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에 없었다. 옛 조선(朝鮮)은, 동구라파(東歐羅巴)로부터 그 동(東)쪽의 동방(東方), 해동(海東)의 땅, 대륙(大陸) 땅에 있었다.」라고 하면 : 180도 돌변(突變)하여 ; 「뭔 소린가? 왜 정신(精神) 나간 헛소리로 가짜뉴스를 유포(流布)하는 건가?」라면서 따지듯 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社會)의 현실(現實)이자, 이 나라 역사학계(歷史學界)의 실상(實狀)이다.
왜 그럴까? 일제(日帝)가 반도(半島) 땅을 통치(統治)하면서, 토착민(土着民)들의 반발(反撥)과 저항(抵抗)을 무력화(無力化)시키기 위해 “조선(朝鮮)의 혼(魂 : 얼)”을 없애기 위해 만든 ‘허구(虛構)의 반도(半島) 조선사(朝鮮史)’를 ‘매국노(賣國奴)+부역자(附逆者)’들에게 배포(配布)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90%의 문맹(文盲) ‘반도(半島) 토착민(土着民)’들에게 세뇌(洗腦), 주입(注入)한 것이다.
오늘날의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대부분(大部分) 이때의 ‘매국노(賣國奴)+부역자(附逆者)’들의 후배(後輩), 제자(弟子), 추종(追從)하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한마디로 표현(表現)하면 : 사고능력(思考能力)이 떨어지고, 발상(發想)의 전환(轉換) 자체(自體)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반도(半島) 조선사(朝鮮史)’의 민낯이 발가벗겨지기 때문이다.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예(例)’가 바로 ‘구한말(舊韓末)이나 AD 1,910년(年) 전후(前後)의 반도(半島) 땅의 문맹율(文盲率)’이다. 『5,000년(年), 반만년(半萬年)을 이어왔다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의 나라, 소중화(小中華)의 나라에서 그 구성원(構成員)들의 문맹율(文盲率) 85∼90%가 되었다는 건가?』 이것은 팩트(Fact)다.
족보(族譜)를 들이대며, 많은 침을 튀기며 주장(主張)해도 해결(解決)될 수 없는 일이다. 이 땅의 많은 문중(門中)과 종친회(宗親會)가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실정(實情)을 뒤엎을 근거(根據)는 없다. 이 많은 것들이 AD 1,910년(年) 이후(以後)에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들어졌다는 근거(根據)는, 우리나라 성씨(姓氏) 몇에 대다수(大多數)가 분포(分布)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그 증거(證據)다.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그 영토(領土) 안에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품고 있었으며, 북막(北漠)의 오랑캐를 정복(征服)하고, 초무(招撫)하고, 화친(和親)하면서 변경(邊境)을 안정(安定)시켰다.
2,026년 07월 26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본격적인 폭염(暴炎) 시즌이 왔습니다.
이에 따라 "휴가철"도 되었습니다.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방학이 시작되고... ...오늘은 햇볕이 아주 뜨겁게 느켜집니다.
주의보, 경보도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
여름철을 잘 보내면, 한 해를 건강하게 보네게 된다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름철 건강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더위 여름 철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 '조선과 사막지대'라는 연결구는 당연한 것임에도, 아주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잘못된 교육때문일 겁니다.
조선 강역에는 사막지대라는 특이한 지리구조로 된 땅이 있었음에도 "반도조선"을 주입하다보니... ...'사막'이라는 말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 특히 백두산=장백산 아래에는 대막(大漠)이 있었다는 말은,
사대부의 문집속에도,
조선실록에도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 반도조선사로 보면 : 이 모두는 거짓말이, 헛소리가 되어버립니다.
* 또 향토사학에서 관광차원에서 부풀리고 부풀리는 옛 이야기는 "역사"라는 테두리안에서 이야기될 수 없는 "도를 지나친 헛소리를 마구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증명되지 않은,
근거도 없는,
빈약한 스토리를,
유네스코에 등재한다고 하면서 떠버리는 향토사학의 문제점은 심각할 정도라고 보아집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반도조선"은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 이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반도사학의 반도조선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문은 원문대로,
한글해설서는 해설서대로,
향토사학은 향토사학대로,
제멋대로 놀고 있기 때문이죠
*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기에는... ...끝까지 가보고자 합니다.
하나하나 원문과 근거를 제시하며,
고증과 함께,
그것들을,
진실을 파헤쳐보기로 하겠습니다.
무더운 여름철,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