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산 그늘
정강철
1
깨진 유리 조각이 방바닥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탁상시계의 몸체가 형제를 일그러뜨린 채 전자밥통 아래 뒹굴고 있었고, 시침과 분침이 한데 엉켜 유리 조각 사이에 버려져 있었다.
형편없는 놈. 나는 빗자루를 들며 스스로를 그렇게 책망했다.
아내는 잠에서 깬 뒤 얼마를 더 울다가 출근을 서둘렀을까. 유난히 큰소리를 내며 설거지를 마치고서도 끝내 흩어진 방바닥을 내버려둔 이유를 나는 더 잘 알았다. 망가져 버린 탁상시계를 다시 조립이라도 하듯이 지난밤의 행적을 돌이켜 생각해 보라는 항변을, 아내는 코를 훌쩍이며 곱씹었을 것이다.
술 취한 놈이 이성이 있었겠나. 적당히 둘러대려 들겠지만 기억을 잃을 만큼 만취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폭력을 내세워 자신의 심정을 대신했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부끄러웠다. 커튼을 젖히고 유리문을 열자 창 밖 햇살이 일시에 방안으로 쏟아졌다. 유리 조각은 아무리 쓸어내도 또 반짝거렸다.
눈을 들어보니 현관 문 쪽에도 깨진 화분이 널브러져 있었다. 꽃대가 나왔어. 이것 좀 봐요.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은박지로 허리를 감싸고 분홍 리본을 매달아 두른 난蘭에다 아내는 사진 촬영까지 해두었다. 그런데 나는 어제 밤, 그 난을 던져버렸다. 그것도 아내의 얼굴을 향해.
무식한 놈, 나는 거듭 진저리를 쳤다. 화분 조각을 주워 담고 신발 속으로 숨어버린 돌멩이들을 털어 낸 뒤 한참동안 걸레질을 한 후에서야 비로소 냉장고를 열어 냉수 한 컵을 따랐다.
술좌석에서는 와전臥田의 논리에 대항하지 않는 것이 상수라고들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질 못했다. 와전 선배는 말을 많이 하여 입으로 술을 깨는 형이라 했지만 어제 밤 그는 말을 하기보다는 술을 더 많이 마셨다. 두주불사를 서슴지 않는 사람이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말이 공모전이지, 시정잡배들이나 벌이는 투전판과 다를 게 무어야?”
화제의 끄나풀치고는 제법 그럴 듯 했다. 서단이 온통 공모전 준비로 후끈하게 달아오른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잖아. 수련도 충분하고 작품도 손색이 없는데 쭈루루 미끄러지고, 안 붙을 게 떠억 붙는단 말야. 작년 치도 그래 석고문石鼓文 썼던 사람, 그게 어디 대상 감이야?”
와전 선배의 개탄은 나에게도 충분히 공명을 울릴 수 있었다. 국전이 있었을 때도 그랬고, 국전을 대신해서 생겨난 공모전에서도 다를 바가 없었다. 형평의 기준을 잃고 공공연히 뒷얘기만이 무성한, 그래서 번져 나오는 오염이란 헤아리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물론 서단의 도처에서도 입과 귀를 통한 반목과 자성의 목소리가 높은 것도 사실이었다.
소수의 손아귀에 주물러지는 공모전이야말로 이제 막 새순을 터뜨린 청년작가의 싹이 뿌리 채 뽑혀지고 마는 이유가 아니겠느냐고, 다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서단도 종래의 권위들을 털어 버려야 한다고 힘주어 말할 때까지는 나도 몇 마디 동의를 보태기도 했다.
그런데, 술기운을 미처 닦아내지도 못한 그의 입에서 뜻밖의 얘기가 묻어 나왔다. “작고하신 자네 아버님 말이지, 남개南介 선생도 책임이 있어, 오십 년 친구였다는 우헌雨軒 선생과 그런 무지막지한 싸움을 벌일 건 또 뭔가? 그 때문에 우리 서단이 이렇게 된 거 아냐? 어느 줄에서야 하느냐, 우헌의 그늘에 묻혀 있을 것이냐, 아니면 남개를 따를 것이냐, 왜 이리 됐나? 이리 저리로 문하門下를 바꾼 사람은 이젠 셀 수도 없잖아?”
짧고도 나지막한 그 얘기들은 나의 오관에 엉겨 붙던 취기를 쉽게 털어가 버렸다. 나는 와전 선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연신 같은 유형의 푸념들을 늘어놓았지만 어느 것도 하나 정리되어 들어오는 게 없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몇 해도 지나지 않아 우헌 선생의 문하로 떠나가 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떠올랐다. 눈에 띄게 줄어든 서실의 원생들을 어떻게든 추슬러 보려 애쓰는 우리 형제를 남들은 어떻게 보는 것일까. 지금까지 헤아려 본 적 없는 생각들이 무수한 의문부호를 달고 피어올랐다. 와전 선배가 우헌 서실로 출입을 바꾼 지 몇 달 동안은 그와의 지나간 추억들 때문에 형은 무척이나 괴로워 했다. 형과 같진 않겠지만, 나에게서도 막역한 그리움으로 포장되어 있던 좋았던 기억들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가 술 한 잔 나누자며 만나기를 원했을 때 잠시 흥분했던 내가 문득 어리석게 느껴졌다.
“서실을 바꾼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옛날 스승의 허물을 들추다니요. 그래, 우헌 선생은 존경할 만 합디까? 난 선배님이 이렇게 나오실 줄 몰랐어요.”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나를 황망히 붙잡으며, 그는 정도 이상으로 취한 티를 냈다.
“오해할 게 뭐 있나? 남개 선생만 잘못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우헌 선생도 잘못이 있다는 거야.”
그는 너스레를 떨며 달라붙었지만 나는 끝내 뿌리쳐버렸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형에게 이 말을 전하면 뭐라고 할까. 낭패감에 젖어 긴 한숨을 내쉬는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화풀이는 아내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왜 그렇게 아버님 얘기만 나오면 바늘 끝처럼 예민해지느냐며 핀잔을 주던 아내는 더 이상 웃지를 못했다. 비명 소리는 화분이 자신을 피해 현관 쪽으로 날아간 것과 동시에 일어났다. 방으로 달려 들어가다 돌아본 그녀의 눈자위에 증오의 핏발이 서 있었다. 아버님 때문에 반미치광이가 됐어. 휙 닫혀진 문을 향해 손에 잡힌 탁상시계가 날아갔다. 그런 후에도 무언가 개운치 못한 신트림이 자꾸만 목울대 너머로 밀려왔다.
2
붓으로 쓰는 글씨란, 참으로 기묘한 것이어서 어떠한 연마를 거듭한다 해도 완벽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꼭 이렇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것인가. 사자 소학이나 추구 따위의 책을 무릎 앞에 두고 아버지 곁에 기라죽하게 누워 있는 회초리를 목울음 삼키며 바라보던 유년의 기억 속에는 고서古書의 길고 긴 구절들을 힘들여 암송하는 형의 지친 목소리와 그 곁에서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버지가 있었다. 동네와도 한참이나 떨어진 턱없는 변두리의 산방山房이었다.
어느 여름날이던가, 시내버스 종점이 있어 언제나 시끄러웠던 개울 건너 동네로 내려가 늦도록 놀았다. 당시에는 유일하게 텔레비전이 있었던 이층 양옥집 친구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풍겨 나오는 발 냄새 때문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어디선가 아름다운 악기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저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이층에서 누이가 피아노를 친다고 했다. 이제 가봐야겠다고 일어서는 나를 친구가 주저앉혔다. 밥 먹고 가. 친구의 말 뒤편에서 그의 어머니가 흰쌀밥을 그릇에 퍼 담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쌀밥에서는 사람의 속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한 향기가 났다. 나는 그만 일어설 수가 없었다.
“넌 어디서 살지?”
금테 안경을 두른 친구 아버지의 물음에 나의 젓가락은 굴비 반찬에 가려다 멈추고 말았다. 이층에서 들려왔던 피아노의 건반 소리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낡은 한옥집, 주변의 텃밭에서 채소를 뽑아 다듬고 있는 어머니, 온종일 적요에 휩싸여 찾아오는 손님들마저 발꿈치를 들고 걸어야 되는 서실의 마루 바닥, 생선이 썩는 것 같은 역한 먹 냄새, 아무 것도 말할 게 없었다. 궁상과 천덕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우리 집은 죽어있는 집이라 생각했다.
“아빠, 앤, 저 위 남개산방에서 살아요.”
친구가 끼어들지 않았으면 나는 숟가락을 놓고 도망쳐 나왔을지도 몰랐다. 아빠라는 호칭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친구 아버지를 조심스럽게 올려볼 뿐이었다. 그런데 얘기를 듣고 난 그는 뜻밖에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너, 정말 남개 선생님의 아들이란 말이야?”
그는 마침내 내 빡빡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었다. 좋은 친구를 두었으니 사이좋게 지내라. 친구에게 덧붙인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피할 수 없이 그 날 밤에도 회초리를 맞았다. 해가 떨어지면 제 집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이 짐승들도 행하는 귀소본능인데, 남의 집에 늘어붙어 눈칫밥이나 얻어먹는 천한 놈이 되었구나. 탄식 섞인 꾸지람이었다. 퉁퉁 부은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나는 고서의 몇 구절을 더 암송해야 했다.
상전벽해라던가. 지금은 도심이 확산되어 현대식 고층건물이 줄줄이 늘어섰고 텃밭을 가로질러 이면도로가 생겨났지만 그때만 해도 창 밖 새 울음소리가 묵향으로 그윽한 서실의 정취를 북돋울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형이 전주휘호대회에서 장원을 받아 돌아왔을 때 일찍이 드물었던 일이라 하여 신문 방송에서 한바탕 야단법석을 떨었어도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칫 교만이 섞인 흥분에 들뜰 법한 형과, 부러운 시선을 감추지 못하던 나를 불러 앉혔다.
“법첩法帖의 뿌리를 캐고 서론의 안목을 높이는 것은 상을 타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고로 서권기書券氣를 빼버리면 서예의 고졸한 맛은 없어, 밤잠에 연연하지 않는, 끊임없는 탁마만이 너희가 가야할 길인 것이야.”
중학생의 나이였지만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들은 일 년이면 끝낸다는 안채顔體를 어렸을 때부터 삼 년이 넘도록 써왔고, 구체具體 역시 맛을 들여놨던지라 우쭐함이 키보다 더 자랐을 때였다. 더욱이 한문 선생님이 부탁한 학교 행사의 안내문도 척척 붓을 휘둘러 써 바친 경우가 적지 않은 탓에 칭찬도 꽤 받았던 터였다.
알 듯 말 듯한 아버지의 말씀은 틈만 나면 같은 형태로 반복되었다. 글씨의 근본은 서법에 있다는 것이었다. 집자集子나 연구도 없이 첫 걸음마 격인 습기를 떨쳐내지 못하고 알량한 기예에 눈이 멀어 서체 바꾸기에만 급급해하는 문하생에게는 호된 꾸지람이 내려졌다.
그 무렵, 형은 안채의 근례비覲禮碑 뿐만 아니라 다보탑비多寶塔碑와 마고선단비麻姑仙丹碑를 마쳤고, 구체의 항보탄비皇甫誕碑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까지의 해서를 두루 섭렵하여 해서로부터 안착된 튼튼한 재목이란 세간의 칭송을 듣기 시작했다. 여호與號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아버지도 그러한 형을 예사로 보지는 않았던지 중산仲山이란 호를 내리셨다.
3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제각기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렸다. 건너편 꽃집의 청년은 화물용 자전거에 관음죽 화분을 올려놓고 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볼품없이 찌부러진 구두코에 시선을 옮겨 놓았다가 신호등이 바뀐 걸 알았다.
남개 서실, 모든 것은 변했어도 아버지의 친필로 새겨진 당호만은 그대로였다. 빛바랜 목조 현판에 조지겸체로 휘갈겨진 글씨를 봤을 때 공연한 허전함이 콧잔등을 시큰하게 했다. 사랑채 뒤편의 감나무는 그대로 남아 <감나무 집>이라는 한정식집의 상징물이 되어 있지만 사랑채가 있던 자리는 삼층 건물이 들어서 버렸다. 풀 먹여 빳빳한 모시적삼 차림에 합죽선을 부치며 산책하시던 아버지의 자리는 이제 없었다. 부동산을 매각하여 남부럽지 않는 재산을 자식들에게 남겨준 것은 금전 때문에 추해지지 말라는 평소의 가르침을 실천한 셈이었다.
서실에 들어서자 저마다 임서臨書에 열중이던 원생들이 눈에 띄는 대로 목 인사를 해왔다. 거기에는 엊그제 입문한 초보자부터 필력이 십수 년이나 되는 주부들까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향기로운 묵향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후각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조립식 칸막이 너머에 형이 보였다. 전지에, 반절지를 이어 붙인 작품 규격의 글씨를 쓰고 있었다. 공모전에서의 으뜸이 형의 꿈이었다면 다가오는 공모전의 기회를 그냥 놓칠 리가 없었다. 이맘때가 되면 계절풍처럼 불어오는, 그래서 꿈결에서도 신문지상에 올라있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확인한다 했다.
“이걸로 작품 하실 거요?”
형의 뒤편에 서서 형의 글씨를 한눈에 보고 있었다. 최근 공모전의 경향이 고첩을 임서한 것보다는 법첩의 뼈를 잃지 않는 상태에서의 창작 풍에 비중을 둔다는 사실을 의식하기라도 하듯이, 형의 글씨는 창작에 치중한 것이었다. 언뜻 '홍복사단비'인지 '쟁좌위고'에서 따낸 것인지를 변별해내기 어려운 반 흘림체였으나 분명 법첩에서 발췌한 임서는 아니었다. 낙관에 쓰여진, 정다선선생고시이십칠수중기일丁茶山先生古詩二十七首中其一이라는 세자細字가 그걸 증명해 주었다. 행초서 쪽으로 형이 일구어 놓은 그간의 노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여전히 생소하기만 한 필체였다.
“내용을 정하느라 너무 시간을 끌었나 봐. 임서야 자신 있다만……. 그래, 너는 이번에도 안 낼 거냐?
형은 붓을 놓은 채 정좌로 돌아앉았다. 나는 비공모전파를 선언한지 몇 해가 되었지만 형은 입장이 달랐다. 상에 연연해하지 말라 하셨던 아버지도 일제 때 선전에서 특선을 연달아 수상한 바 있었다. 오랫동안 식도에 걸린 가시처럼, 대를 이어야할 형에게는 지울 수 없는 부담이 그것이었다. 특선 몇 차례로 양이 차지 않는, 최고의 영예만을 고집하는 이유였다.
“근데, 형 글씨가 홀가분해 보이질 않아요.”
나는 자획에 나타나는 운필運筆의 긴장을 가늠해 보았다. 첫눈에 안겨오던 두 가지 느낌, 주저하지 않고 명쾌하게 휘두른 자기개성의 흔적이 약하다는 것과 원문의 골격이 전체의 흐름에 억지로 끼워져 있다는 생경함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임서보다는 창작을 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었을까.
“참, 어제 와전을 만났댔잖아? 어때? 그 친구 여전하지?”
형은 아래턱을 덮고 있는 수염발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우스개 말을 곧잘 터뜨려 서실의 분위기를 이끌던 와전 선배가 저 어디쯤에선가 앉아있는 것만 같았다. 형에게서도 와전 선배의 빈자리는 크게 보이겠지. 나는 책꽂이에서 학어집을 빼내들고서 다시 형에게로 다가갔다.
“와전 형님이 이상한 소릴 해요. 자꾸 아버지를 욕되게 하려 해. 참느라 아주 혼났수. 그 분, 사람 버린 것 같아요.”
망설이긴 했지만 형도 알아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말해 버렸다. 그럴 리가? 라는 표정을 세우다가 형은 고개를 꺾어버렸다. 마묵기의 먹 가는 소리가 유달리 윙윙거렸다.
“나 수업 들어갈 거요.”
좁다란 복도를 건너 칸막이 교실로 들어섰다. 앉은뱅이책상 앞에 여남은 명의 어린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한문 강좌는 형이 서실의 운영을 넘겨받으면서 의욕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쳐달라는 형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몇 시간 해본다는 것이 어쩌다 보니 직업처럼 되어 버렸다. 틈나는 대로 서실의 원생들도 지도해주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한문 학원의 책임을 맡아버린 셈이었다. 아내는 가끔 부추길 때가 있었다. 주인도 되지 못하는 서실에 무슨 미련이 남았냐는 것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또는 형이 끼운 빗장을 영영 빗겨내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에 몸 달아 있는 지도 몰랐다.
나는 애초부터 아내가 좋아할 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블루진과 재즈 음이 활개를 치던 그 시절, 곰팡내 나는 사고와 막걸리 냄새에 찌든 나에게 그녀로부터 호감을 갖게 할 구석은 그다지 없었다. 단지 신기함이라는 인상에서 시작한 호기심이 어떻게 애정으로 변하게 되었는지, 아무튼 아내는 맨 처음 서실을 찾았을 때에도 헛웃음부터 냈다.
도대체 남자들이 할 짓이람.
서안을 대하고 있는 문하생들도 보고 탈속한 선승의 흉내를 낸다며, 맨 먼저 꺼낸 말이었다. 그랬었는데, 그녀도 어느 날 문득 글씨를 배우겠다고 했다.
“붓이 거꾸로 들어간다 하여 역입逆入이라 하고 말발굽같이 생겼다 하여 마제馬蹄, 잠자리 모양이라 하여 잠두蠶頭라 하는 거야.”
그녀의 무릎 끝에다 길게 써놓은 한 일一자의 요모조모를 짚어가며 일러주던 그 날 밤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서실 뒤켠 등나무 목조의자에 앉아 서로의 인생을 하나라는 울타리 안에 넣어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문득 어색한 정적이 잠시 흐른 이후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형언하기 어려운 감흥이 일어난다고 했다. 내가 글씨를 쓰는 모습, 내가 써놓은 글씨들을 보면 그 감흥은 신비의 돛을 올린 선박이 되어 경이의 바다 복판으로 출항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학어집 몇 구절을 선창하자 아이들은 일제히 따라서 했다. 한 글자씩 음과 훈을 새기고 의미를 풀어 헤쳤다. 몇 차례 반복하고 보니 또다시 혀끝에서 갈증이 느껴졌다. 아직도 나는 아내의 가슴에 살아 있을까. 경이의 바다로 떠나는 신비한 배로 남아 있을까. 화분을 부수고 폭언을 하던 남자가 제풀에 지쳐 잠들었을 때 그녀는 적의에 찬 눈으로 말했을 것이다. 제 몸도 닦지 못한 주제에 서예의 길을 간다고 으스대는 위선자.
아이들을 돌려보낸 뒤 다시 좁다란 복도를 건너 서실로 갔다. 형은 별실에서 나와 원생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글씨를 둘러보고 있었다. 커피포트에선 이내 김이 올라왔다. 작설의 싹에 어우러진 물을 밭어내다 보니 혀끝에 한 무리 침이 괴었다. 입가로 가져온 쌉싸래한 차향을 음미하면서 신간으로 보이는 서예전문잡지를 펼쳐 들었다.
<心正筆正>이라는 제목으로 된 특집 기사가 맨 처음 시야에 잡혀왔다. 이 시대의 서단을 대표하는 최고명인과의 대담 기사였다. 그는 다름 아닌 우헌 선생이었고 ‘마음이 발라야 글씨도 바르다’는 제목과 상통하는 그의 해박한 서론이 행간마다에 가득 차 있었다.
- 수신양성이 우선입니다. 손끝에 매달린 재주만을 가지고 습서 한다면 그건 껍데기일 뿐이지요. 한묵翰墨에 정을 채우지 않은 점획결구點劃結構는 생명력이 없는 돌덩이보다도 못하니까요.
나는 긴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 우위론을 내세운 우헌 선생의 서론이 해 바른 운치를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쩌렁쩌렁한 고함으로만 들렸다. 순간, 와전선배의 지난 밤 얘기가 기사 문안에 겹쳐졌다.
아버지의 시대는 갔는가. 우뚝 서 계시던 아버지의 위풍이 사라진 이후, 왜 이리도 허전하고 고단한 역정은 계속되는 것인지. 문득 촉촉해진 시야를 느끼고 말았다.
- 서의 본질은 숙련에서 나오는 생서生書에 있다지만, 정신이 감응하지 못하면 한갓 대서代書로 주저앉을 뿐이지요.
숙련을 바탕으로 한 살아있는 글씨를 주창하시던 아버지는 더 이상 대꾸가 없었고, 이를 반발함으로 인해 더욱 굳어져 가는 우헌 선생의 서론은 만산을 쪼갤 듯이 호령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책상의 모서리에 다기를 놓고서도 한동안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난날의 기억들을 이끌고 이렇게 큰 걸음으로 걸어오는 우헌 선생을 나는 또렷하게 마주보았다.
우헌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어렸을 때였다. 땡볕에 묻혀 얼굴이 붉게 익어서야 집에 돌아온, 어느 여름날의 해거름 녘이었다.
“너 이놈, 너도 책보따리 갖고 일루 와!”
돌계단을 올라 툇마루에 앉았을 때 사랑채에서 들려온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내 손은 단번에 호주머니 쪽으로 옮겨졌다. 주머니에 가득 담긴 구슬은 아무리 조심하려해도 찰랑찰랑 소리가 났다. 동네의 구슬을 모두 다 따냈다는 으쓱함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발이 드리워진 사랑채에서 형의 모습이 보였는데,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니 필시 좋은 일은 아닌 성싶었다. 일시에 기가 죽어버린 나는 책보자기를 아버지께 올려 바쳤는데 그 와중에서도 손톱 밑에 낀 까만 땟자국을 얼른 감춰야 했다. 교과서나 공책들은 제쳐두고 아버지는 필통부터 빼내들었다. 초록의 반투명한 플라스틱 필통은 새로 산 지 일주일도 안 된 것이었다.
“너도 마찬가지로구나. 달랑 몽당연필만 하나 갖춘 놈이 무슨 공부를 해보겠다는 거냐? 자고로 필낭에 붓이 채워지지 않은 자는 문객이 될 자격도 없다고 했어.”
벼락같은 호통에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형의 필통도 역시 널브러져 있었고 이미 된통 당했는지 중학생이나 된 형조차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었다.
“주머니에 그건 뭐냐?”
아버지의 두 손 가득히 형형색색 모양이 박힌 구슬이 들려졌다. 깨끗이 닦아내면 다시 새것으로 변할 그것들은 이제 아이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보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움켜진 손을 위로 쳐들고 기어이 일어나셨다. 그랬는데, 어둠 저편으로 옮기던 발걸음이 그대로 멈춰졌다. 뜻밖에도 손님이 찾아온 것이었다.
“아니, 자네가 여길 다…….”
아버지의 반가운 표정만큼이나 우리 형제도 쾌재를 부르던 참이었다. 나는 꺾고 있던 무릎을 슬며시 풀며 구슬을 어디에 내려놓을 것인지 눈여겨보았다. 구슬이 던져진 태산목 곁에, 그 중년의 남자는 서 있었다. 깡마른 살점에다 퀭한 안구가 검정 뿔테안경 너머로 반짝였다. 흰 셔츠에 검정색 맘보바지 차림의 왜소한 체격이었다. 그는 어둠을 털며 그렇게 사랑채로 들어섰다.
“이 놈들, 거기 꿇어 있지 못해.”
형과 나는 비실비실 일어서다가 아버지의 제동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우리는 손님의 눈치를 살피며 그가 어떤 형태로든 구원을 해주리라 기대했다.
“몰라보게 컸구나. 이 녀석들, 내가 누군지 모르지? 하긴 내가 여길 찾은 게 몇 년 세월은 넘긴 것 같구먼.”
손님은 우리의 머리를 번갈아 쓰다듬으며 기대했던 대로 우리를 일으켜 내보내려했다. 참으로 민망한 순간이었다.
“예끼 이 사람아. 자네가 내 자식들을 대신 가르칠 텐가?”
우리가 사랑을 나서자, 그때서야 두 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그 후로도 수시로 서실을 다녀가곤 했다. 간혹 우리 형제의 글씨를 펼쳐들고 이리저리 짚어주기도 했고, 만취한 발걸음으로 돌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부축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그를 우헌 선생님, 하고 불렀지만 그때만 해도 그가 아버지에 버금가는 대가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방에 묻혀 살면서 묘미를 알게 된 예기비禮器碑에 몰두할 무렵 우연히 우헌 선생의 저술을 읽게 되었을 때 서문을 대신한 인물평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의 경력에 감탄할 수 있었다.
우헌 선생, 1920년 경신 생이었다. 그의 조부인 좌천座泉이란 분은 구한말 유림의 법통을 이은 학자로 경술국치에 강개해 자결했고, 부친인 벽송碧松은 그의 손길을 닿지 않은 문사가 없을 만큼 당대의 명필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명가의 이력에 우헌 선생 또한 뒤지지 않았다. 약관의 나이에 선전蘚展 특선을 한 바 있다는 사실이 그 단초가 되었다. 일찍이 주목받은 천예성은 전예해행초篆隸楷行草 오체를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는 대가로 성장시키는데 부족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비문 따위를 탁본 해독하는 금석학에도 경지를 이루었다.
우헌을 압도할 명필은 없어.
사람들은 쉽게 단정하려 했지만, 일부에서는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꼽기도 했다. 남개의 출신성분이야 천골이라 우헌을 따르지 못한다지만, 어디 글씨만 가지고 맞닥뜨리면 남개를 따를 자 있겠나? 사람들의 평판에는 무엇보다도 곤혹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들의 입을 빌리면, 남개의 글씨는 그 근본이 스승인 벽송으로부터 나오고 벽송은 다름 아닌 우헌의 생부生父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벽송의 글씨는 친자인 우헌에게 물려 내려간 것이지, 남개는 정통성의 면에서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도 글씨 쓰는 기술로만 치면 남개가 한 수 위라는 여운도 늘상 덧붙였다. 결국 정신우위론을 내세운 우헌과 서법제일주의를 내건 남개는 일장일단을 지닌 우리 서단의 거목이라는 결론으로 사람들은 정리하곤 했다.
수양산首陽山 그늘이 강동江東 팔십 리를 드리운다는 전래의 불문율은 서단에서도 똑같은 모습으로 적용되었고 많은 문하생들이 두 대가의 그늘로 몰려들었다. 숱한 가지치기를 거치며 중견으로 성장할 무렵 그들은 자신의 스승을 내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발판으로 믿은 까닭이었다.
“차 한 잔 따라 줘.”
가리개를 밀치고 형이 들어왔다. 먹물 배인 작업복 바지가 더욱 헐렁해 보였다. 싹을 띄운 다기에 뜨거운 물이 차오르자 잘게 썬 이파리들이 수면위로 떠오르다 이내 가라앉았다.
“쉬운 일이 아니야. 세상엔 쉬운 일만 있을 리 없지만…….”
형이 다기를 바싹 얼굴 앞으로 당겼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얼른 짐작이 되지 않았다. 와전 선배와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말하는지 아니면 서실을 꾸려나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인지 당장 알 수는 없었다. 아버지를 대신할 자리에 앉은 것 자체가 황당하고 부담스러울 테지만 그 감당을 아예 해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버지에게는 고희를 앞둔 나이까지 어떤 경우라도 남을 압도할 수 있는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헤픈 웃음을 아끼는 일부터 시작됐다. 웃음이 없는 선생님 밑에서의 문하생들은 스스로를 절제하고 조심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아버지의 정돈된 무기는, 습기에 젖은 붓놀림을 보면 벼락같은 호통으로 다스릴 때 섬광처럼 빛나 보였다. 한 획을 깨우치지 못한 자에게 결코 다음 획을 일러주는 법이 없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몸소 실천하는 셈이었다.
어찌할 도리 없이 형은 힘들어했다. 십수 년의 필력을 가진 문하생들이 경륜이 적은 스승은 인정할 수 없다 하여 한 둘씩 떠나고 난 뒤부터 남개 서실의 위상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유력한 재원들이 떠나간 서실에서 형은 나를 붙들어 매고 한문교실을 신설하고 서예 기초반도 강화했지만 경제적인 운영과는 상관없이 남개 서실이라는 짐 자체를 버거워 했다.
“와전, 그 친구만은 믿었는데…, 하긴 그거야 내 뜻일 뿐이고 와전의 입장이라면 자신의 입신을 위해 그럴 수도 있겠지.”
형의 음성에는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더욱 무겁게 들렸다. 몇몇의 원생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가리개 너머로 보였다.
4
침묵은 고문보다 더했다. 아내에게서는 찻숟갈 소리 한번 나지 않았다. 시종 방안에 박혀있는 것으로 보아 나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는 심산임이 분명했다. 방에 들어가 화해의 손을 내밀어 볼까 잠시 망설이면서도 그냥 앉은뱅이책상 앞에 머물러 있었다. 미처 치우지 못한 화분 쪼가리가 눈에 띄었지만 그것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았다. 석간도 떠들쳐 보고 읽다만 잡지도 들쳐봤지만 자꾸 방안의 아내가 신경을 두드렸다.
그래, 난 야만인이야. 솔직히 시인하고 씨익 웃어 보이면 아내는 어떻게 나올까. 처가에 보내놓은 딸아이 진솔이 얘기를 꺼내면 당장 보러 가자고 나올지도 몰랐다. 오늘은 학교에서 무슨 일없었어? 교감이란 작자는 아직도 당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슬그머니 다가가면 아내도 조금은 수그러질 것도 같았다. 눈에 잡혀온 액자 속에는 지난가을 탁본 야유회 때 형네와 우리네 가족이 나란히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노랗게 물이 든 은행잎 몇 개를 주워 든 진솔이는 제 엄마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내의 생각처럼, 제 몸도 닦지 못한 주제에 무슨 글씨를 써보겠다고. 가족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놈이 누구를 가르치려 들어?
나는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아내의 발가락에 묶인 붕대를 보았다.
“뭐야? 왜 이랬어?”
핏물이 먹힌 붕대를 보고서도 영문을 몰랐다.
“몰라서 물어? 아침에 현관에서 찔린 건데?”
외면하는 아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퉁퉁 부은 눈자위로 보아 어지간히 울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냅다 아내의 손부터 잡았다.
“많이 다쳤어?”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겠는데, 그게 잘 안 되었다.
“오늘, 조퇴하고 일찍 왔어요. 깊이 들어갔나 봐. 욱신거려 걸을 수도 없어.”
나는 손바닥을 머리카락에 묻고 한동안을 앉아 있었다. 큰일이야 아니지만 업보라 친다면 무엇으로 이걸 돌려받아야 하나. 어지러운 정신을 수습하며 구급함을 열었다. 붕대를 바꿔주며 군살이 박힌 아내의 종아리를 보았다.
“근데, 이것들은 다 뭐야?”
아내의 주변에 널린 책자들이 보였다.
“오후 내내 봤어요. 앨범도 꺼내 보고.”
아버지의 글이 실린 책들이었다. 서화 전문지와 아버지의 개인전 팜플렛, 신문 잡지 등에서 오려낸 기사들을 붙여놓은 스크랩 북, 그리고 유품으로 간직된 빛바랜 흑백 사진첩 등이었다.
“이것들을 왜? 새삼스럽게.”
“궁금해 죽겠어요. 아버님과 우헌 선생님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거야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옛날에는 안 그랬다면서요? 같은 문하에서 성장했고,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던데……, 왜 그랬을까요. 무엇이 두 분 사이를 이렇게 조각나게 했느냐 이거예요.”
아내는 눈꼬리를 세우며 입술까지 조그맣게 오므렸다. 글쎄, 그게. 문득 다가온 물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딱 부러지게 이것이다 얘기할 것도 없었다.
“서론의 차이겠지. 두 분의 안목이 달랐으니까. 붓으로 쓰는 글씨야 똑같지만 어디 생각이야 같을 수 있나?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이게 달랐던 거지. 그것도 아주 천양지차로…….”
얼버무리긴 했지만 스스로도 그걸 명쾌한 답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기껏 서론이 좀 다르다 해서 우정까지 떼어버리다니. 생각해 보니 그랬다. 여태껏 한번도 진지하게 짚고 넘어간 적이 없는 의문이었다. 그것은 신문 기사나 앨범 따위에 묻혀 있을 성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생존에 있는 우헌 선생에게 따지고 물을 것도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방바닥에 널브러진 서책과 앨범들을 펼쳐보기 시작했다. 홀연히 연막을 걷고 떠오르는 궁금함을 바싹 조여 당기고 있었다.
아버지와 우헌 선생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게 십여 년 전부터니까, 아마도 내가 군대를 제대한 후 서실의 다다미 바닥에 엉덩이를 박고 글씨에만 전념하게 된 바로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에서 나는 물 끓는 소리가 겨울날 오후의 적막한 서실의 분위기를 힘겹게 다독이고 있었다. 미닫이문이 열리고 갑작스레 찾아온 초로의 방문객을 보자마자 나는 황망히 달려가 꾸벅 절부터 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선생님.”
눈앞에 선 우헌 선생을 마주하자 반가움보다 죄스러움이 앞섰다. 제대하고 인사부터 다녀왔어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불쑥 뵙게 된 것이 무척 송구스러웠다. 우헌 선생의 중절모를 받아들고 눈을 털고 있는데 그는 허청허청 별실로 걸어갔다.
“남개, 거 있었나?”
두루마기에 쌓인 눈을 털지도 않은 채 우헌 선생은 아버지 앞에 앉았다. 깜짝 놀란 것은 우헌 선생의 가시가 박힌 말투였다.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한 나는, 저만치서 원생들에게 체본體本을 써주고 있는 형을 찾았다.
“우헌 선생님이 좀 이상하셔.”
“끝내, 따지러 오셨구만. 올 것이 오고야 만 거야.”
별실 쪽에 눈길을 두던 형이 불쑥 던진 말이었다.
금세 알게 된 일이었지만, 시사종합지에 신년휘호와 더불어 개재된 우헌 선생의 서론을 아버지가 붙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우헌이라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들먹이며 논조 하나하나를 반박한 것이었다. 시대가 거론하는 두 명필이 정면으로 맞부닥친 사건으로 치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했다. 아버지의 반발 기고가 나간 일간지의 문화부 기자는 그 후로도 서실을 심심찮게 들락거렸다. 어쨌든 서가의 곳곳에서 매서운 뒷북을 울리게 한 논쟁의 서막이, 바로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당一堂 李完用도 명필이 된단 말인가?”
당초부터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고집이 우헌 선생의 입을 단호한 한 일자로 그어 놓았다.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주전자에서 물을 따랐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을 했다지만, 사생활과 글씨를 분리해 본다면 일당도 엄연한 대가라고 봐야지.”
아버지의 일갈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가져다둔 물 컵을 우헌 선생이 잡았는데, 물 컵은 손에 닿기만 해도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몇몇의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눌러 놓은 채 칸막이 너머의 두 분의 시선을 쫓고 있었다.
“어허. 그것부터 틀렸어. 일당의 필법이 정달하고 한학에 조예가 있었다고 쳐도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매국노가 아닌가. 어찌 정신이 올바른 서예가로 볼 수 있다는 건가?”
씁쓸한 환약을 깨문 듯한 조소가 우헌 선생의 입에서 새나왔다. 평재平齎 朴齎純와 더불어 일당이 자행했던 한일간 조약 때문에 그의 조부인 좌천 공이 의분 자결했던 사실을 뒤이어 상기시켰다. 평재도 그랬듯이, 일당은 한말을 휩쓴 명필이었지만 차오르지 못한 주체의식 탓에 대서代書로 주저앉았다는 얘기였다.
“이것 봐, 남개. 그 신문을 열 번도 더 읽어보고 또 생각도 해봤지만, 추사秋史 金正喜를 그렇게까지 포장하다니. 남개는 내 선친의 제자가 아니었던가? 불경이라 생각되지 않나?”
“추사는 일당과 달라. 벽송 선생님께 귀가 닳도록 들은 얘기가 바로, 추사 격하론이지. 우헌, 자네도 물론 그 맥을 잇고 있네만, 난 그럴 수 없어. 매국을 한 것도 아닌데, 왜들 그렇게 추사를 손상시키려 하는지. 추사는 이미 후세에 평가를 받았고, 오늘날 교과서에서도 배우는 위인이야. 그래서 자네 글에 대한 반박문을 냈어. 서운하다 생각지 말게. 자네 글에도 문젠 있었으니까.”
“난 추사의 전체를 말하지 않았어. 단지 추사의 주체성만을 짚어봤을 뿐이야.”
우헌 선생은 잡지를 통해 제시했던 서론을, 서랍을 열어 꺼내듯 하나 둘씩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잡지의 내용에서처럼, 내게는 다소 생소하기만 한,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라는 인물을 추사의 대안으로 내밀고 있었다. 추사가 장악해온 서단의 바람에 휘말려 역사의 기억 바깥으로 쫓겨나 버린, 비운의 명필을 소생시키기 위한 명백한 의도로 보였다.
원교와 추사. 그들은 차례로 영정조시대를 살다 갔지만 추사는 원교의 공격론 자였다. 중국 글씨가 풍미하던 백가쟁명의 서단을 고유의 한국식 서풍으로 정리했다는 원교의 업적을 추사는 인정하지 않았다. 추사는 이미 타계해버린 원교를 공박함으로써 대가의 길로 가는 버팀목을 세우고 조선 서단의 큰 봉우리로 우뚝 설 수 있었다는 게 우헌 선생의 논지였다. 추사는 거인의 어깨를 눌러서 커져버린 위인이라 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분야에서나 활개를 치는 대가일수록 그렇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추사가 원교의 글씨를, 동방의 고루한 답습 東方之陋習이라 하여 천하에 볼품없는 천격이고 서법조차 모르는 무식자라고 매도한 것을, 우헌 선생은 유독 분개했다. 사대주의적 습속에 물들어 중국 글씨만을 고집하고 여과 없이 수용했던 추사가 오히려 천격이라고 못 박았다.
“빠다 냄새나는 외국 물건이라면 똥도 좋아라 하는 요즘 것들과 다를 게 무어야? 그래, 오늘날 교과서에 나오는 명필은 추사가 맞지. 어느 누구를 잡고서라도, 원교를 아시오? 애들아, 원교라고 들어봤니? 하고 물으면 백이면 백 고개를 흔들 테니까. 웬 줄 아나? 추사의 고집처럼, 억척스럽게 옛 것만을 고집하는 수많은 보수 반동들 때문이야.“
우헌 선생은 짧은 숨으로 물을 마셨다. 그러나 아버지도 섣불리 물러설 기세는 아니었다.
“본디 서법의 정통은 중국에서 찾아야 하는 건 옳은 얘기 아닌가? 우리가 입문해서도 중국 글씨를 임서하며 하나 둘 깨우친 거지, 우리 글씨란 게 어딨나? 조선의 서풍이 중국의 것에 비하면 너무도 일천했던 게 당시의 현실인데……, 그런 점에서 중국 서법을 추종한 추사의 인식은 정확했어.”
아버지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주위엔 벌써 문하생들의 발꿈치가 조심스럽게 모아진지 오래였다. 그들은 저마다 휘둥그레 한 눈을 열어 두 어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가로운 서실의 분위기를 저편으로 밀쳐버리고 창졸간에 감돌기 시작한 긴장감은 모두를 장악하고도 남았다. 나는 손바닥에 축축이 감겨오는 땀을 훑어냈다.
“남개, 이 사람아. 내 말 좀 들어보게. 우리 서법의 근본을 중국에서 찾아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서법은 자고이래로 고정불변이 아니야. 원형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이지. 또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들의 숙제 아닌가?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한국적 미감에 어린 가락이야. 원교는 그걸 집대성하려 종생토록 애를 쓴 반면에, 추사는 원교의 열정을 속서라는 오명으로 짓밟았어. 현재까지 우리 서단이 중국의 묵수적 서풍에 눌려 있는 게 무슨 연유던가......?. 추사는 대가임이 분명하지만 주체의식이 구멍 난 우를 범한 것도 사실이야. 지금은 주체와 개성을 찾아야 할 시대야. 대가가 판을 치는 세상이 아니란 말일세.”
우헌 선생은 아울러 당시의 시대상황까지 비교했다. 글씨라는 것을 예술품의 울타리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사조의 변형에 의해 그 표현도 달라지기 때문이라 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새바람을 맞은 그 시기에, 상공업의 부흥으로 경제 유통이 활성화되었고, 광작廣作이라는 농사 혁명, 판소리계 소설이 유행할 정도의 의식 개혁, 단원壇圓과 혜원蕙圓의 풍속화와 속화에서 드러난 사실주의 기법, 사설이 늘어난 시조의 가락 등은 대변혁기의 좋은 예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는 자연스럽고도 또한 세계적인 추세였다. 더욱이 다행하고 자랑스러운 것은 훗날 실시된 갑오경장과 같은 외풍에 의한 강제 개혁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조선 내부에서 비롯된 자생적 몸부림이었다는 것이다. 궁중까지도 한글로 내간을 지은 마당에 우리식 서법의 발현은 당연하다 못해 차라리 시대의 강력한 요구이기도 했다. 원교가 우리식 서법을 주장한 것은 강대국이 내려준 파급이 아니라 주체의식에 눈 뜬 선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사는 공 들여 기운을 차린 개화의 싹을 꺾고 선대의 중국 글씨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고집을 내세웠다. 예술적 감각은 물론이려니와 사조에 눈뜨지 못하고 오히려 역행해 버린 셈이라 했다.
“추사는 헛발을 내딛었어. 만약 원교 이후에 추사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우리 서예사는 어떻게 됐을까?”
이 말을 우헌 선생은 두 차례나 반복했다.
“안 돼 토속적 가락이라는 미명으로, 정통 서법을 추구한 추사가 평가 절하될 순 없어. 이건 중대한 착오야. 절대 있을 수 없어. 추사의 문헌을 보면, 원교는 필법筆法과 묵법墨法도 모르면서 붓을 쓰고 먹을 갈았으며, 팔꿈치를 들고 쓰는 현완법懸脘法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어.”
"그건 일찍이 추사가 범했던 그릇된 판단일 뿐……. 원교를 서법의 무지랭이로 전락시킨 추사나 그걸 그대로 따르고 있는 남개나, 난 탐탁치가 않아.“
대면하여 벌인 두 분 사이의 논쟁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정작 상대편의 심기를 돌려놓을 수 없도록 두들겨버린 서로의 주장은, 여러 매체를 거친 장황한 반박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그 해 겨울부터 서단은 눈에 띄게 분열되었다. 아버지나 우헌 선생처럼 일제 때 선전鮮展 등지에서 등용된 인물은 1세대라 칭한다면, 30, 40대의 신진세력들은 3세대로 불려지는 것이 서단의 실정이었다. 양자는 얼핏 다른 세상을 열고 있는 것으로 보기 쉬우나 서가의 폐쇄적 자존심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법첩을 도외시한 명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맥의 연계를 무시하고는 대가로 가는 디딤돌을 딛을 수가 없었다. 스승의 문하에서 누가 얼마만큼의 수련을 닦았느냐로 필력의 척도를 가늠하는, 필연코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이 되어 오랫동안 서가를 길들여 온 것이었다.
일부 청년작가들은 성명을 발표하며 두 어른의 대립에 자제를 촉구하는 용기를 보이기도 했다. 언론에서는 서단과 제3세대 등장이라는 제명으로 이들을 북돋우기도 했지만 지금의 결과로 보면 한갓 일과성의 화제 거리에 그치고 만 셈이었다. 이들은 차츰 문하를 이탈하게 되었고 국전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으며 비국전파를 선언하는 식의 예견된 수순을 밝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서단에서는 둘만 모여도 남개와 우헌의 서론을 들먹였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며 스스로의 흥미에 젖어들곤 했다. 한쪽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서단을 부흥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는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긍정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두 갈래로 흩어져 뻗어 가는 세찬 강줄기는 다시 모여 흐르지 않았다.
5
“따지고 보면 우헌 선생님도 굉장하신 분이에요.”
아내의 말은 우헌 선생의 저술활동을 두고 한 것이었다. 아내는 내게 두툼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우헌전집>이라 새겨진 금박의 제목부터 친필이었다. 낱장의 행간마다에 해 바른 운치를 담고 부유하고 있는 모든 서론도 역시 친히 쓴 것이라 했다.
“탁월한 이론가이기도 하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분이라고 보면 딱 맞아. 우헌 선생을 넘볼 자는 애초부터 없었던 건지도 몰라.”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도 몰랐다. 당초부터 힘겨루기엔 벅찬 상대가 아니었을까. 나는 새삼스런 시선으로 우헌 전집을 들춰보고 있었다.
그 해 겨울의 충격 때문이었는지 우헌 선생은 이후 일 년 남짓을 두문불출했다. 사람들은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을 실어 입방아를 찧어댔지만 정작 선생은 응집시킬 수 있는 전집 발간에 필생의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서문에도 밝혔지만, 그간 유수한 매체를 통하여 발표해 온 서론들은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정리하여 책임질 수 있는 것으로 내세울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러한 필요를 느끼게 했는지, 말하지 않았어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우헌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서론이나 서평을 다시 끌어 모은 이유는 원교라는 선인이 서예사의 굴곡을 두드러지게 잇도록 분류한 것으로 잘 드러내고 있었다. 권말 부록에는 시정에 우헌체로 불리우는 독특한 서체를 수록해 놓기도 했다.
우헌 전집을 출간과 동시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전대미문이라는 수사가 대수롭지 않게 사용되었으며 서가는 때 아닌 언론의 이목을 다시 받게 되었다.
반발은 꼬리를 무는 것인지, 우헌 전집의 대성황은 곧이어 아버지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문화부 기자들은 또다시 남개 서실을 들락거렸고 우헌 전집의 맹점을 거론하는 아버지의 의견은 영상이나 지면을 통하여 바삐 세상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우헌 서실 쪽의 대응이었다. 우헌 선생은 문하생 모두에게 암송을 권장하는 주문을 내놓았다. 그것은 그가 각고 끝에 발굴해 낸, 원교의 저서 가운데 가장 한국식 서법에 입각해 있다는 원교서결圓敎書訣이었다. 손수 원문을 해독하고 우리말 예체로 옮겨 우헌 서실의 사면 벽에 붙여 두었다는 것이다.
- 글씨를 쓰고자 하면, 먼저 정신이 지면 위에 어리도록 명상해야 하며 字劃의 大小를 짐작하고 붓을 상하좌우로 움직여 점획이 서로 상통하는가를 헤아려 보아, 뜻이 붓보다 앞선 연후에 비로소 글씨를 써야 한다.
심정필정心正筆正이라는 우헌 선생의 지론대로 철저한 정신 제일주의였다. 글자보다 뜻이 앞서야 한다는 신념을 문하생들의 머리 속에 구구단처럼 새겨 놓으려는 까닭을 알 수도 있을 듯 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각자의 길을 떠나버린 만큼, 모든 것이 당사자들의 부덕의 결과라는 세론의 귀를 막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점차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개와 우헌의 싸움은 소모전이야. 이제 보기도 딱해.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반론은 용의주도한 가운데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필법의 주체는 용필用筆에 있고 용필의 핵심은 근골筋骨에 있으니, 이들은 손끝의 재주가 아니라 쓰는 이의 참 뜻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우헌 선생의 이론을 정면으로 치받았다. 작품의 평가는 오로지 글씨 자체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맹렬한 서법 제일주의였다. 비록 뜻이 앞서더라도 결구가 비속하면 숙서가 되지 못하며 그것은 예술품으로서의 글씨가 아니라 점획이 따로 떨어져 나뒹굴 따름이라고 했다. 어디까지나 미학 추구에 전념하고 좋은 서법을 좇아 완벽한 글씨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서예인이 나아갈 방향이며, 또 후진에게는 이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던 것이 서가의 오래된 악습이며, 작가의 명망성에 작품의 가치가 결정되는 악순환이 결국 작품의 정당한 평가를 그르치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젊은 세대에게 외면당하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며, 글씨 쓰러 다니는 자들은 시대를 거꾸로 돌리지 못하여 안달이 난 구닥다리쯤으로 취급되는 현실이 되었다 했다.
아내는 어느새 잠에 취해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이불을 멀리 끝까지 덮어쓰긴 했는데 발목 부분은 삐져나와 있었다. 붕대를 동여맨 발가락을 보고서 얼른 외면해 버렸다. 딸아이 진솔이를 보고 싶은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는 여자.
우헌 전집을 덮고 흑백 사진첩을 챙겨 제 자리로 가져가다 말고 신문기사에 달린 아버지의 사진을 보았다. 웃음이 없는 눈빛, 주름 깊은 눈자위로부터 뻗어나간 어두운 그늘이 얼굴 전체에 드리워져 있었다. 웃음이 어울리지 않는 인생을, 어떻게든 만족하지 못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 박스 기사에 채워진 아버지의 기고를 새삼스럽게 읽어 내려가며 생각했다. 다분히 의도적이고 억지스러울 만큼의 반론을 무엇 때문에 이토록 집요하게 풀어냈을까를 가늠해 보았다. 원교가 필법의 결과로 본 원교의 인식을 단 한 차례라도 헤아려 본 것인가. 먹을 묻혀 글씨를 쓰는 과정에서 묵법과 필법을 뭉뚱그려 간파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아닐 텐데, 아버지는 굳이 이 둘을 분리하여 따져 들었다.
또한 원교의 스승인 백하 윤순 白河 尹淳을 공격한, 추사의 논백하서論白河書의 인용도 마찬가지였다. 이헌령 비헌령 격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결연코 끄집어낸 의도가 아리송하기만 했다. 우헌 선생도 이 대목만큼은 무척 상심했다는 후문이 있기도 했다. 그것은 자신의 선친이자 서로의 스승인 벽송 어른에 대한 불경으로 해석될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원교를 무차별 공격하여 조선 서단의 거목으로 우뚝 선 추사, 이백 년 전 망령이 되살아나 우헌 선생의 가문을 위협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감정적인 대응이었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구절도 있었다. 책거리 뒤끝의 잡음과 법첩에 의한 습서가 아닌 우헌체의 수련을 강요하는 따위의 우헌 서실의 음지마저 건드린 것이었다.
우헌 선생의 상심과 분노는 상상만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원교서결을 외우게 하는 조치 외에는 그다지 별다른 반응은 보여주지 않았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그 즈음 건강이 악화되어 가던 아버지께서 급기야 병석에 누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서릿발 같은 반격과 손목을 부러뜨릴 정도의 보복을 보고자 했던 호사가들은 내심 실망스러울 일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으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두 분의 대립은 이제 없었다. 다만 원교의 키를 높이고자 하는 우헌 선생의 의도는 이후 몇 차례의 강론과 기고 등에서 보여지긴 했다.
아버지의 병환을 알긴 했겠지만 우헌 선생은 흔한 병문안도 거부했다. 아예 남개라는 이름조차 입에 올리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우리 형제에게 우헌 선생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한다면, 이 무렵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던 우헌 선생도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친히 행차를 결심했고 한 방울의 낙루落淚가 사진기자에게 잡혀 오랜 화제 거리가 되기도 했다. 생전의 온갖 애증도 망자의 육신 앞에서는 허무한 그림자도 되지 못하는 것인지.
6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는 서실의 구석자리 접의자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던 나는, 무엇인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멈췄다 다시 이어지는, 깊은 밤의 적요를 깨뜨리고 전해 오는 그 소리는 분명 형의 것이었다. 처음엔 서서히 눈을 떴다가 마침내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서실의 다다미 바닥에 엎드린 형의 어깨가 들썩였다. 울음소리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안쪽에서 새나왔다. 무슨 곡절이며 웬 청승인가를 따져 물을 겨를이 없었다. 바로 형의 곁에 나란히 누워 있는 글씨 때문이었다. 눈알을 부릅뜬 듯이 나를 향해 펼쳐져 있는 글자들을 바라본 순간 내 입은 저절로 벌어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디.
세세한 낱자들은 점차 흐려지더니 한 발치씩 멀어져 갔다. 머리끝을 감싸고도는 현기증은 글자들을 더욱 멀리 떼어 놓았다.
형의 행려는 이토록 고단했던 것일까. 우헌 선생이 고안해 냈다는 이른바 우헌체로 보였다. 왕희지王姬之를 추종했던 손과정孫過程의 흘림체를 연상케 하는, 실제로 우헌체의 뿌리는 손과정의 서보에 있다고 우헌 선생 자신이 토로한 바 있던, 생전에 아버지 가슴에 비수가 되어 종생토록 적의를 지니게 된 그 구체적 대상이던 글씨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채워져 있었다.
형, 이걸로 공모전에 내겠다는 거요? 나는 형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미쳤어? 지금? 이젠 멱살을 잡았다. 그것은 할복보다 더 잔인한 패배의 증거였다. 지난날의 혼돈은 일시에 굴욕이 되고 분루가 되어 한꺼번에 뿌려지는 것 같았다. 패배는 아버지의 몫인가.
나는 형을 밀어내고 종이를 집어 들었다. 죄다 찢어야 해. 공모전에 눈 먼 사팔뜨기 글씨쟁이. 이따위 글씨랑 이젠 집어치우란 말야. 내가 질러댄 악다구니는 공허하게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때 난데없이, 찢어진 화선지에서 하나 둘씩 떨어져 나온 글자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뒤로 넘어질 때, 자획의 윤갈潤渴과 태세太歲, 필압의 강약과 경중이 두 눈알을 쑤시고 들어왔다. 모든 것은 흉기였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꿈이란, 일상의 선험적 사건이 잠재의식 속에 잠복해 있다가 수면 중에 되새기게 된다는데, 체험해 본 적도 없고 상상조차 한 적 없는 상황이 이렇게까지 실감나게 나타나다니, 나는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 무엇이 우헌 선생과 고리를 이룬 강박관념이 되어 유형무형으로 살아나는 것일까. 개운치 않은, 무언가 떨어지지 않은 미진함이 이부자리를 걷어낸 뒤까지 이어졌다.
“오늘은 출근할 거지?”
나는 욕실 문을 열며 아내를 보았다. 아내는 양치질 거품을 입안 가득 물고 눈으로 대답했다. 뒤꿈치로 선 그녀의 발끝에 아직도 붕대가 매어 있었다. 애써 시선을 바꾸어 신문을 가지러 가는 데 아내의 말이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진솔이 보러 갈래요. 서실 끝나면 데리러 와요. 무식하게 던진 화분 조각에 찔려 내 발가락이 이렇게 됐다고, 엄마한테 고자질은 안 할게.”
그랬는데 또 한 마디의 말을 덧붙였다.
“형님 만나면 좀 물어 봐요. 아버님과 우헌 선생님과는 왜 그렇게 사이가 나빠진 건지....... 전생에 질긴 악연이라두 있었나요? 난 요즘 그게 궁금해 죽겠어. 아주 궁금해 미치겠어.”
7
“일종의 자존심 싸움 아니겠어?”
형이 힘겹게 대답한 말이었다. 아래 입술을 슬쩍 깨물다가 비로소 붓을 벼루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들어올리며 바싹 다가앉았다.
“나도 그걸 생각해 본 적이 있다만 자신 있는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했어. 두 분의 지나간 과거의 행적을 샅샅이 안다면 또 몰라도 우헌 선생님이 살아 계신 동안이라면 그분 입으로 명확한 이유를 말하게 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한 분은 돌아가신 마당에 남아있는 한 분이 그걸 말하려 할까? 우헌이란 인물은 그럴 분이 아니야. 난 그분을 믿는다. 아버지 생전에도 입을 꽉 다물었던 비밀이었는데, 이제 와서 그걸 까발려 버린다? 아냐. 안
될 일이야. 이제 와서 의미도 없는 일이고, 더군다나 돌아가신 아버지께는 흠집이 될 수도 있는데…….”
“비밀이라뇨? 그게 뭐요? “
나는 소매까지 걷어 올리며 얼굴을 들이댔다. 형은 실소를 터뜨리며 손을 가로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투였다.
“이걸 말해 좋을 게 없어. 세상에 알려지면 또 한 차례 난리를 피울지도 몰라. 두 분에게도 별 이로울 건 없을 테니까.”
형은 쓰던 글씨를 마저 쓰겠다는 듯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는 형의 손으로 다시 잡은 붓을 빼앗았다.
“왜 이래요? 난 피가 마를 지경이라니까.”
“괜히 쓸데없는 얘길 꺼냈나 보다.”
“난 뭐 남개의 자식이 아닌가?”
조바심과 함께 공연한 서운함도 따라나섰다. 남 몰래 닳아서 부대끼기는 형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온종일 졸라대던 끝에, 정작 그 얘기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들을 수 있었다. 형은 구태여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말을 자꾸 되풀이하며 건물 옆의 감나무집으로 나를 이끌었다.
“두 분이 거침없이 싸우시다가 한풀 꺾이기 시작할 쯤이었을 텐데. 우헌 선생이 전집을 만들기 위해서 은둔하셨다는 소릴 어떻게 들으셨던 모양이야. 어디서 약주를 기울이셨는지 무척 취해서 들어오셨어. 화도 많이 나신 것 같고, 방에 앉으신 후에도 느이 형수에게 술상을 봐오라고 하셨으니까.”
형은 더 이상의 음주를 만류했다지만, 아버지는 끝내 몇 잔을 더 나누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엄정하던 모습이 점차 흐트러지기 시작하자 형은 황급히 술상을 물리치려 했는데, 순간 아버지의 중얼거리는 말씀을 들었다 했다.
뜻이 앞선 연후에 글씨를 써야 한다고? 천만에, 뭐? 정신이 깃들지 않으면 숙서가 되지 못해? 꽉 막힌 놈.
형은 단번에 우헌 선생을 떠올렸다. 길고 지리한 대결은 옆에서 지켜보는 이도 답답한 것이었다.
우헌 선생님을 만나신 겁니까?
형은 술상을 내려놓았다. 아버지의 눈은 한꺼풀 내려앉아 있었다. 한동안의 침묵 끝에 아버지의 입에선 돌연 왕희지 얘기가 엉켜 나왔다. 무슨 연관을 지닌 것인지는 이내 알게 되었지만.
너, 난정서蘭亭序를 아느냐?
예, 왕희지의 고첩이지요.
그 난정서가 어떻게 나온 건 줄 알아? 왕희지 같은 불세출의 명필도 오늘 우리 모습을 보면 웃겠다. 허어. 왕희지가 난저산蘭沮山이라는 데서 이렇게 술을 마셨더란다. 취흥이 머리 꼭대기까지 오르는 순간에 느닷없이 글씨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거지. 그걸 놓칠 수가 없어 필낭에서 붓을 뽑아들고 일필에 삼백 스물 네 글자를 휘갈겼어. 그러다 지쳐 그 자리에 엎어져 잠들어 버렸는데, 술에서 깬 뒤 다시 같은 글자들을 써보려 했지만, 이제는 안 나오는 거야. 그 삐치는 기술과 끊어진 것도 같은 기막힌 자획은 나오지 않더란 얘기지. 정신이 어리도록 생각한 연후에 글씨를 쓰라고? 그건 자가당착이야. 난 그렇게 못한다. 그렇게 배웠다 할지라도 난 그렇지 못해. 내가 무엇 때문에 벽송의 문하에서 쫓겨났는데…….
쫓겨나다뇨?
형은 저으기 놀라 있었다. 과음이 연일 계속되는 이유도 아니고 평소보다 훨씬 말씀이 많아지신 것 때문도 아니었다. 벽송 선생의 제자임을 내세우고 그것 때문에 의연함은 무게를 더하던, 당당한 아버지의 이력이 문득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숨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후덕한 벽송 선생이 수제자인 남개를 다아 키워놓고 독립시켜 주었다 하는데, 너도 그렇게 보았느냐?
형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쫓겨났다는 말씀을 이미 들어버린 탓이었다. 모두들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헌과 남개의 대립을 두고 남개의 배은망덕을 논하는 자들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내 말을 잘 들어보아라. 난 이제 얼마 살지를 못해. 이 손등에 핀 죽음 꽃을 보면서, 완전한 글씨에 이르지 못하고 가는 게 서운타마는. 어쩌겠느냐. 사람 목숨이 하늘의 뜻에 있고 억만 갑을 윤회하는 것이 인생이거늘. 내가 이승에 태어난 곳이. 벽송 어른의 마름 집이었고 그분의 배려로 내가 이 길을 걷게 된 것도 모두가 운명이 아니겠느냐. 다들 고마우신 분들이다 만, 난 불행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갖고 있어.
말씀을 더 하시렵니까?
형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일어 제동을 걸고 싶었다. 아버지는 깊은 신트림과 함께 갈수록 달아오르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씹고 계시는 것으로 보였다. 듣지 않을 수만 있다면 좌불안석의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내 나이 서른 둘, 느이 애미가 둘째를 가졌을 때였다. 감잎이 지고 바람이 제법 소슬해졌었지. 원교 이광사의 스승인 백하 윤순을 꼬집은, 추사의 논백하서란 서책이 있어. 그걸 구해 한참 몰두하고 있는데, 어느 틈엔가 벽송 어른이 등 뒤에서 나타나시더니, 뭐라 했는지 아느냐? 천한 마름의 자식을 건사해 둥지를 틀어줬더니만 어데서 흉칙한 서안을 대하다니. 웬 말씀인가 싶어 나는 눈을 쳐들었어. 추사의 저술인데 흉칙하다니요? 그때 벽송 어른의 노기 띤 호령을 난 잊을 수가 없구나. 이 노옴, 스승을 욕하고 스승을 말아먹을 놈, 당장 눈 앞에서 사라져. 난 바로 무릎을 꿇고 느이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눈물을 떨어뜨렸다. 용서해 주십시오. 어디로 가라는 겁니까?
형은 아버지의 술잔을 가득 채웠다. 이제 무거운 짐을 벗으려 하시는구나. 형도 고개를 돌려 한잔 가득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우헌은 모든 것을 보고 있더라. 문하에서 내쳐진 뒤 이곳으로 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몇 년 후, 우헌이 가끔씩 찾아주긴 했지만 우린 숙명적으로 격이 달라. 사람들이 우헌과 나를 한 집안의 식솔로부터 시작하여 평생토록 우의를 다져온 동지로 치부하고 그게 깨져버린 지금은 별나게 생각하는가 본데, 그럴 때마다 내 머리 속은 이렇게 혼란스러울 수가 없구나.
형은 아버지의 말씀에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와 형이 그 이상의 대화를 어떻게 나누었든지 상관이 없었다. 더 묻지도 않았다. 듣지 말았어야 될 얘기인지도 몰랐다. 다만 내 혼미한 의식 속에는, 스승의 문하란 화려한 명망성을 얻는 발판이기도 하다가 때로는 거추장스러운 형국이 될 수도 있는 법인가 하는 의문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어쨌든 명가의 이력에 연결된 우리 가문의 양광이 혼비백산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소주 한 잔 할래?”
형이 나물 반찬을 뒤집다 말고 말했다. 얽혀져 버린 혼돈의 끄나풀을 붙잡기 위해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술?”
적당히 대꾸했지만 형의 술 속을 이해할 만 했다. 멀쩡한 정신이기엔 다소 힘겨운 울림이 내게도 짓눌려 왔다. 진솔이를 만나러 처가에 가기로 한 약속도 덩달아 떠올랐다.
“우리, 이대로 살 순 없잖아? 난 새로운 결심을 조심스럽게 다지고 있어. 그늘이 없는 풀이파리는 어떻게 될까?”
“고아들처럼 말라비틀어진 잡초가 되기 십상이겠지요, 뭐.”
새로운 결심? 무슨 얘기를 했나 싶어, 형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형도 어느새 듬성한 흰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숱한 명인들이 명멸했던 서단에서, 우린 무얼까? 글씨라는 것이, 선인들의 서풍을 추종하고 천착하는 데서 자신의 서풍도 나온다 치자, 그래. 과거를 무시한 새로움은 있을 수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너무 집착하다 보면 법노法奴라는 병에 걸리는 거야. 생각해 봐라. 남개의 시대는 갔어.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지금이 우헌의 시대냐? 언젠가는 우헌도 곧 가게 될 것이고 이제 새로운 명인이 나타나겠지. 우리더러 언제까지나 남개의 아들로만 머물러 있으라면 법노라는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겠다 이 말이야.”
나는 겨우 형의 말뜻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형이란 존재가 더욱 듬직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잡초가 되어도 좋다. 지하에 계신 아버지도 더욱 편히 잠드실 거야. “
형은 두 손을 꽉 쥐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8
몇 달이 지나서. <남개 서실>이란 목조 현판은 내려졌다. 같은 그 자리에 새로운 당호가 붙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돼지 머리가 시루떡과 과일이 늘어선 상 위에 놓여 있었고 도처에서 보낸 화환 중에는 우헌 서실에서 보낸 것도 나란히 키를 맞추고 있었다. 이윽고 형의 호를 딴, <仲山書室>이라는 현판에 못질이 시작되었다. 사방에서 플래시 불빛이 터졌다. 나는 한켠에 비껴서 있는 형에게서 환한 웃음을 보았다. 그 뒤편에 벙그러진 웃음을 짓는 진솔이를 번갈아 보며 마음껏 박수를 쳤다. 박수소리는 여러 사람들의 손과 손을 통해, 더러는 환호와 더불어, 크고 또렷하게 퍼져 나갔다
(tanb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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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렇게 해서 괴얌님의 성함을 알게 되는군요...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봅니다.
이 소설은 카페 회원인 괴얌의 작품으로, 12년 전 '문학사상'의 소설부문 당선작이다. 이 소설은 언젠가 카페의 소설방에 게시된 것을 잡아 두었다가 교정과 편집을 보아 올리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다섯 번 읽었다. 소설 속의 '우헌'과 '남개'의 논쟁에서는 언뜻 조선 정조(正祖) 때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떠올리기도 했다. 소설의 구조는 매우 견고하며, 문장은 견실하다. 소설의 전개과정에서 보여주는 인물간의 갈등의 고리는 그 연결이 매끄럽다. 인물의 성격묘사 또한 넘치거나 부족함이 없이 긍정적이다. 인터넷이 없다시피 한 시절에 쓰인 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 내용으로 보아 사전 준비를 위한 작가의 발품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지나치게 '경험에 한정된' 글쓰기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할 것이다. '관념 의존형'에도 마찬가지이다. 문학적 작품성이야 나 같은 졸 독자가 거론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뛰어난 강사의 소설 강의를 듣고 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만큼 내게는 소설작법에 대한 윤곽이 선명하게 다가온 작품이기도 하다.
먼저 읽고난 소감은 가슴이 먹먹 합니다. 자칫 가벼운 몇 삽으로 우물물을 퍼 올리는 세태에 이렇게 깊게 삽질을 해서 맑게 고인 물을 먹게 해준 괴얌님께 감사를...양쪽의 사소한 발단으로 갈리고 서로의 입장을 세우다가 세력화,집단화, 이념화 되어버리는 권력투쟁의 원천지를 엿보는 느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잇는 역사서들은 얼마나 많은 오류와 오해로 알려져 잇을까..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고 승자의 악덕과 패자의 미덕은 얼마나 많이 숨겨져 잇을까..싶기도 하고, 선대의 깊은 갈등구조를 생존술의 변명으로 우회하며 벗어나는 시선도 멋집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 감동으로 몇 마디 해봅니다. 아마도 저녁때 돌아와서 다시 읽어보며 후회할 말들 일지도 모르는데...에구구
다시 읽어도 참 아름답다 탄백님의 글에 대한 감상이 완벽하다
단정하고 야무진 작품평을 읽으니 이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집니다. 옛날 <정음사>에서 출판한 세계문학전집을 읽을때 작품해설과 작품평을 먼저 읽고 작품을 대하던 시절이 생각나는군요. 하늘 한참 바라보고 눈을 식힌 다음 집중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수고하심에 감사를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동안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잘 읽을게요.
소설에 대해서 문외한인 저의 눈에도, 더함도 덜함도 없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흐름이 매끈합니다. 정말 소설작법의 모범적인 전형으로 봐도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이분법의 갈등을 봉합하는 중산서실의 현판이 현실에도 걸려있기 바랍니다.
오래 전에 쓰신 글 이라는데....괴얌님이 자랑스럽습니다....
참, 볼수록 잘 썼다는 생각
흠, 역시 좋아 읽고 또 읽어도 .
탄백 님은 이 소설을 다섯번 읽었다는데,나도 오늘로서 꼭 다섯번이다 '뛰어난 강사의 소설 강의를 듣는 기분'이라고 한 말이 어쩌면 이렇게도 깊게 공감이 갈까~소설을 읽을려고 시작하다보면 꼭 괴얌 님의 이 소설 내용이 먼저 오버랩 된다.오늘도 난 '역시'란 감탄사를 연발하며 읽었다
잘 읽었습니다. 쓰신 노고를 충분히 느끼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