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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수필가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팔할이 바람
수필, 미움과 사랑/ 구활
수필 미워
나는 수필이란 낱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필가란 직함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인이나 작가란 단어 뒤엔 베레모를 쓴 근사한 예술가의 이미지가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다. 베레모야 화가도 쓰고 산악인들도 즐겨 쓰는 모자지만 아무래도 시인이 좀 더 어울릴 것 같다. 시골길을 가다 ‘시인과 농부’ 또는 ‘시인의 원두막’같은 막걸리 집이나 찻집을 보면 이름 자체에 운치가 묻어있다. 하얀 사발에 출출 넘치도록 막걸리를 따라 한 잔 마시면 시인이 된 듯한 기분에 젖는다.
요즘 텔레비전에는 ‘영상 포엠’ 이나 ‘포토 에세이’ 같은 프로그램이 사랑을 받고 있다. ‘영상 포엠’에는 풍경 속에 시 한 편이 줄줄이 내려 왔다 짧게 사라진다. 그러나 ‘포토 에세이’에는 아름다운 농어촌 배경과 함께 고단한 삶의 이야기가 물 흐르듯 흘러간다.
인생은 시가 아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인생이라 한다면 그건 산문, 즉 수필이지 시가 아니다. 그 산문 속에 생일, 입학, 결혼, 출산 등 시적요소가 다문다문 한 편씩 실릴 뿐이다. 그런데도 왜 시인과 작가들은 폼 재며 우쭐대고 수필가들은 명함 한 장 내미는데도 부끄러워하는가.
나는 늦깍이 행자 신세로 수필을 써오고 있다. 추천이니 신인상이니 그런 구차스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냥 글을 쓰는 문학인이다. 문학잡지를 통한 본격적 수필쓰기가 벌써 30년이 됐다. 그동안 이 세상 밖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의 가호로 두 권의 수필 선집을 포함해서 모두 10권의 책을 냈다. 문학상이란 것도 받아 봤으며 ‘책을 내겠다.’고 신청하여 저술지원금도 여러 번 받았다. 깜냥에 비해 너무 과분한 일이다.
트라우마
나는 ‘수필가 구활’이란 명함을 찍어 본 적이 없다. 남들 앞에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성품 탓도 있겠지만 수필가라는 칭호가 별로 맘에 들지 않은 것이 더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나는 수필 또는 수필가에 대한 오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수필을 처음 쓰기 시작한 초창기에 문인들을 만나면 “이제 문학 쪽에 발을 들여 놓았다며.”라고 격려해 주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간 내 소식을 모르고 있던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는 친구가 “무슨 글을 쓰는데.”라고 물었다. “첫 수필을 발표한 후에 요즘 여러 문학잡지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지.”라고 내 옆의 친구가 대답했다. 그 말끝을 받아 “수필도 문학이가. 아무나 쓰면 되지.”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해머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신혼 초에 아내에게 바이올린 한 곡조를 들려준 신랑이 “당신은 아마추어군요, 리듬이 세련되지 못해요.”란 핀잔을 들었다. 신랑은 그 후론 바이올린을 손에 쥐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 말이 바이올린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동안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다.
수필에 대한 정신적 외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나에게 깊은 상처를 심어준 그 친구는 제대로 된 시 한 편 남기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문단 행사에 나가 보면 시인 작가 등 타 장르의 문인들이 수필을 깔보는 눈빛은 여전하다. 그런 부류들은 ‘잘 익은 벼 이삭’이 아니라 ‘고개 숙일 줄 모르는 조 이삭’ 같은 사람들이다. 내 선배 중에도 있고 후배 중에도 있다. 그들은 좋은 시는커녕 시 답지 않은 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시를 쓰며 우쭐대고 있다. 나는 그들을 때 시(時)자 사람 인(人) 자를 써 시인((時人)이라 부른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되기 까진 수필가들의 책임이 크다. 수필계 내부에 독버섯처럼 도사리고 있는 근원적인 부조리가 수필의 발육부진을 재촉한 한 원인이기도 하다. 수필 잡지의 신인상 제도를 통한 책값 떠안기기, 상장만주고 상금은 돌려받는 비열한 수작들, 비평 정신없는 평론가들의 주례사 같은 평론, 잡지 일이백 권쯤 사주고 얻은 수필가란 타이틀에 취해 등단 이후엔 글을 쓰지 않는 부류들도 수필 발전의 저해 요소임은 분명하다. 내부가 썩어가고 있는 이런 수필계가 나는 싫다.
탈출 실패
수필을 처음 쓰기 시작하면 고향산천과 부모와 유년의 추억들이 먼저 튀어 나온다. 더욱이 ‘수필은 허구가 가미되면 안 된다.’는 소리를 주워들은 터라 생살을 잘라 도마 위에 올리듯 곧이곧대로 쓴다. 쓴 글이 활자화 되면 신기하고 자랑스럽다. 때론 눈물이 난다.
첫 수필을 발표한 후 글쓰기가 너무 재미있어 술을 끊어버렸다. 하루 저녁에 한 편도 쓰고 두 편도 썼다. 고향 동네 전체가 소재였고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버지와 가난이란 샅바를 잡고 평생 씨름을 하고 계셨던 어머니는 이야기의 보물창고였다. 이런 서정 수필을 모아 두 권의 수필집을 내고 나니 회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즈음이 고물전을 돌아다니며 서화 나부랭이를 수집하면서 옛 선비들의 우화를 읽는데 심취해 있을 때다. 호생관 또는 칠칠이란 호를 가진 괴짜인생 최북의 이야기를 읽고 느낀 게 많았다. 그는 가난했지만 자존심이 강했다. 아침에 그린 그림을 팔아 점심을 때우고 오후에 그린 그림으로 술을 사 저녁을 대신하곤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준대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허투루 그림을 내 주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그림이나 팔아 볼 요량으로 동네의 지체 높은 양반집을 찾아갔다. 하인이 그를 보자 “최직장(낮은 벼슬) 오셨습니까.”하자 화가는 “왜 정승이라 부르지 않느냐.”하고 화를 냈다. “언제 정승이 되셨습니까.” “그러면 내가 직장 된지는 언제인가. 가짜 벼슬로 부를 바에야 직장보다는 정승으로 불러야지”하고는 주인을 만나지 않고 돌아서 버렸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몹시 부끄러웠다. ‘수필도 문학인가’란 한 마디에 주눅이 들어 안절부절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화가들은 비교적 변신을 잘 한다. 하나의 화풍이나 똑 같은 소재에 오래 매달리지 않는다. 도자기를 그리다가 춤사위로 옮겨 가기도 하고 산을 그리다가 사막으로 넘어 가기도 한다. 이중섭도 대구 시대, 서귀포 시대, 충무 시대가 있었고 지역 따라 화풍이 달랐다. 실험과 변신은 그 자체가 도약이자 발전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그대로 서정수필 쓰기에 안주하고 있을 것인가.
명찰을 바꿔 달고 싶었다. 수필가 대신 문화유산답사가, 풍류학 연구가, 여행작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북의 야멸찬 자존심과 당돌함을 아무리 본받고 싶어도 ’나는 수필인이다.‘하고 번듯하게 나설 자신이 없었다.
역사 탐방
테마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맘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서정 수필은 돌림 마개를 꼭 닫아 냄새조차 피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이 길로 가는 거야.’ ‘아이 아이 써어.’ 내가 내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문화유산 답사 길에 올랐다. 수필을 쓰기 시작한 이래 첫 변신이었다.
수필은 앉아서 기억을 더듬어 추억을 풀어쓴다. 그러나 답사기는 발로 써야 한다. 32년 7개월간의 기자생활이 발로 글을 쓴 긴 세월이 아니던가. 답사기를 르뽀르따쥬 형식으로 쓸 것인가 수필 식으로 쓰느냐로 한참 고민하다가 내 방식인 ‘되는 대로’ 쓰기로 했다. 마침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유산답사 전문강사 3개월 보름간의 양성코스가 공고된 것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일주일에 나흘 동안 전국의 유적지를 헤집고 다녔다. 대학 때부터 산악활동을 하면서 전국의 유명산들을 섭렵한 터여서 역사탐방이 만만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내가 아는 산과 절은 수박의 겉껍데기에 불과했다.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며 문화유산에 대한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의 답사가 끝나면 반드시 글 한 편을 썼다. 그걸 모아 ‘시간이 머문 풍경’이란 답사기를 책으로 묶었다. 그 뒤에도 혼자 절집 탐방을 계속하여 ‘하안거 다음날’이란 절집 순례기를 상재했다.
풍류 입문
내 피 속에는 풍류라는 유전자가 게놈이란 줄기세포에 꼭꼭 박혀있는 것 같다. 문둥이가 문둥이를 만나면 반갑듯이 풍류꾼은 풍류꾼 끼리 만나면 단번에 알아보는 법이다. 걸레 중광스님은 나를 처음 보는 순간 “너는 내꺼야.”라고 했다. 속리산 에밀레박물관 고 조자용 선생님은 나를 소개한 선배를 제쳐두고 제자 대접을 하며 ‘구 두목’이라 불렀다. 일 년에 적어도 서너 번씩은 찾아가 뵙고 밤샘 술을 마셨다.
나는 그동안 5~10년 단위로 허물을 벗든지 털갈이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그 결실은 아직 미미하다. 하나님께서 “사과나무 한 그루 심고 빨리 올라오라‘는 기별이 올 때까지 그렇게 할 작정이다. 그래도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어영부영하다 결국 내 이럴 줄 알았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는 문구를 새기거나 중광스님의 빗돌처럼 “괜히 왔다 간다.”고 쓸지 그건 장담하지 못한다.
10여 년 동안 풍류에 깊이 천착해 왔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면서 옛 선비들의 시, 시조, 가사, 서간문을 닥치는 대로 사다 읽었다. 느낌이 오는 문장과 내용이 있으면 밑줄을 긋고 책장을 접어 두었다. 마음에 와 닿는 것부터 끄집어 내 윤색을 하고 스토리를 만들어 새 옷으로 갈아 입혔다. 시조 한 편이 수필 한 편으로 태어나고 한시 한 구절과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한 폭 본 소감이 맛있는 송편 같은 산문으로 빚어졌다.
옛 선비들은 가난 속에서도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다 같이 벼슬을 해도 매관매직으로 돈을 챙긴 오리들은 부유하게 살았지만 한 끼 밥과 한 잔의 술이 고팠던 올곧은 선비들은 양심을 팔지 않고 비가 새는 띄집에서 살았다. 풍류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자 방구들 사색이 바깥으로 뛰쳐나와 산천으로 내 달렸다.
지리산 종주할 때는 내 앞서 오른 선비를 기억해 낸다.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쓴 김종직과 조식을 상기하곤 돌아와선 산행기를 나의 곡조에 맞춰 재즈나 헤비메탈로 편곡하기도 한다. 강원도 삼척의 두타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삼화사 밑 무릉계곡 너럭바위 위에 새겨져 있는 양사언과 김시습이 쓴 글씨를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 곳에서 선비들의 노는 모습을 혼자 그려보고 풍류의 정의를 ‘시주색 풍월수’(詩酒色 風月水)로 결론을 내렸다.
풍류는 노는 것이다. 시를 지으면서 여인들과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것이다. 즐길 장소로는 바람 선선한 정자, 달 밝은 강, 맑은 물이 흘러가는 계곡이 제격이다. 여기에 시가 빠지면 시정잡배들의 짓거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풍류는 점잔과 난봉 사이에 매달려 있는 붉은 과일이라 해도 무방하다.
“흰 너럭바위 위에는 풍류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선인들의 일필휘지 명필들이 흘러가는 계류수를 베개처럼 베고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설잠선사 매월당 김시습의 글씨도 있고, 조선 명필 봉래 양사언의 '무릉선경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境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란 달필이 붓끝에서 방금 떨어져 나온 듯 싱싱하다. 풍류(風流)라는 낱말 만치 멋스럽고 넉넉한 것이 또 있으랴. 풍류는 '점잔'을 벗어나 '난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속되지 않고 그렇다고 성스럽지도 않다. 그것은 어쩌면 '피의 소리'이기도 하고 '끼의 맥박'이기도 하고 나아가서 '기질의 숨결'이기도 하다. 풍류의 매체는 술이다. 술 없이는 풍류를 논할 수가 없다. 술은 시며 소설이며 수필이다.”(‘풍류별곡’의 부분)
풍류학을 공부하면서 ‘바람에 부치는 편지’와 ‘풍류의 샅바’라는 두 권의 책을 냈다. 그러나 풍류공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마 죽을 때까지 씨름을 해도 풍류란 장사는 나의 바깥다리 후리기나 호미걸이에는 좀처럼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고향의 맛
서점에 가면 출판계의 추세를 짚어 볼 수 있다. 몇 년 사이에 음식에 관한 책들이 부쩍 많이 눈에 띄었다. ‘옳다, 이것이로 구나’. 음식을 새로운 화두로 삼았다. 나는 어머니가 해 주신 시골 음식 쪽으로 파고들기로 했다. 스무 편 쯤 써서 각 편마다 직접 그린 스케치 한 장씩을 붙여 내가 봉직했던 매일신문으로 찾아갔다. “연재를 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쳤다.
연재는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연재 글은 NAVER에서 받아 ‘구활의 고향의 맛’이란 제목으로 체계적으로 게재되고 있다. 시작한 지 일 년이 지나자 출판사에서 ‘책을 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니의 손맛’이란 제목으로 책을 내고 나니 또 다시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이르렀다. 시골음식을 너무 퍼먹었더니 재료가 바닥이 난 것이다. 이럴 바엔 방향타를 여행과 음식으로 돌려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천과 바다 구경이나 실컷하며 맛있는 지역음식을 먹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요즘도 한 달에 한두 번 1박2일 또는 2박3일 정도의 여행을 떠난다. 벌써 만 4년이 지났다. 연재는 현재 208회째 진행 중이며 매주 한 번씩 이백 자 원고지 11매 분량을 쓰고 있다. 내 주변에는 함께 떠날 여행도반들이 기다리고 있다. 배낭을 둘러매고 집을 나서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산천으로 들어가면 나는 풍경의 일부가 되고 돌아와선 자연 속에서 만난 경치와 음식을 글로 적고 그림으로 그린다.
나의 인생 자체는 자연에 가깝다. 자연은 나의 스승이며 친구이자 교과서다. 내가 어릴 적부터 해온 낚시, 등산, 사냥, 답사, 여행의 기억들이 풍류 속에 녹아나더니 요즘은 나의 여행인생에 물 묻은 화선지 위의 수묵처럼 번지고 있다.
수필 사랑
나는 수필을 사랑한다. 나와 수필과의 관계를 줄탁동시(啐啄同時)라고 생각한다. 계란 속의 병아리는 부화 시기가 되면 껍질을 깨려고 온 힘을 다해 쪼아댄다. 이 때 어미 닭이 그 신호를 알고 바깥에서 부리로 껍질을 쪼아 부화를 돕는 것을 줄탁동시라고 한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수필이란 병아리가 나오겠다는 ‘뺙뺙!’하고 소리를 지르면 싫든 좋든 내가 쪼아 끄집어내야 한다.
한국 화단의 모더니즘 1세대인 김환기는 뉴욕 생활에 권태가 깃들 무렵 시인 김광섭의 ‘저녁에’란 시를 읽고 화들짝 놀란다. 잊고 있었던 자아를 찾은 것이다. 그는 큰 캔버스를 끄집어내 점을 찍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점이지만 화가는 점 속에 바다를 그린 것이다. 화가가 찍은 점은 바로 전라도 신안의 안좌도 고향이었다. 그것이 바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작품이다. 그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끝에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불원 나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
에세이 21 질의와 답변
질문자 : 백임현(白妊鉉)
1. 구 활 선생님께
선생님의 논문에서는 수필에 대한 깊은 애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시가 아니라 산문 즉 수필인데, 그 수필이 문단에서 폄하되고 있는 것을 안타까이 생각하셨습니다. 우리 수필가들은 이런 풍토 속에서 심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데, 선생님은 다양한 인문적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세계를 확장해 가는 것으로 그 트라우마에서 탈출을 시도하셨습니다.
(1)체험의 일상성에 대하여
선생님은 우리 수필의 문제점이 소재의 빈곤과 안이한 일상성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평범한 세상살이도 작가에게는 살아 있는 인문적 체험입니다. 일상성의 체험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체험과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그 점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 저는 우리 수필의 문제점이 소재의 빈곤과 안이한 일상성에 있다고는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글 소재도 평범한 세상살이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의 수필에 문제가 있다면 작가들의 정신에 치열성이 부족하고 수필잡지들이 상업성으로 흐르는 바람에 과잉생산된 수필가들의 질적 저하가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체험은 무엇입니까. 일상성의 체험이 두엄이 켜켜로 쌓여 두엄더미를 이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변천과 실험에 대하여
화가들처럼 실험과 변신은 그 자체가 도약이고 발전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우리 수필도 이제는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특히 여성들은) 일상의 공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체험을 통한 작품세계의 변신이란 용이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변화와 변신을 모색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 일상의 공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상상의 공간에서 자유를 획득하면 됩니다. 수필이 반드시 체험을 통해야만 글이 됩니까. 저는 수필의 허구논쟁이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취급할 품목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체험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허구든 상상이든 내 멋대로 글을 쓰기 때문에 맘에 드는 답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생각 속에서 항상 혁명을 일으켜 이 세상을 거꾸로 들여다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으면 ‘나는 여성이다. 나는 주부다’란 생각부터 버리고 ‘나는 인간이다’란 기치를 높이 들고 원고지와 대화를 해 보겠습니다.
(3)체험과 수필에 대하여
수필세계의 영역 확대를 위한 선생님의 치열한 도전정신과 성실성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많은 수필가들에게 경종이 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일반적인 수필적 경향에서 탈출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수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하셨다는 점에서 우리 수필 문단에 기여하신 바가 지대하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신지, 선생님의 시도는 성공적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우리 수필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 질문이 몹시 어렵습니다. 저의 앞으로 계획은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저는 성공을 목표로 무엇을 시도한 바가 없습니다. 저는 흘러가는 소나무껍질 조각배에 불과합니다. 수필도 흘러가는 대로 그냥 두면 제자리로 찾아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김소월의 ‘나보기가 역겨워’에서 출발한 시가 최영미의 ‘마지막 섹스의 추억’이나 오탁번의 ‘굴비’, 그리고 문정희의 ‘치마’로까지 발전 했듯이 수필도 안주하지 않고 계속 변화해 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각성과 반성이 필요합니다. 이는 수필가, 평론가, 잡지발행인들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답게 정말 답게 살아야 합니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군군신신부부자자)란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질문자 : 최원현(崔元賢)
구 활 선생님께
구 활 선생님의 폭넓은 지식과 깊은 사유와 발로 뛰는 열정이 빚은 수필쓰기를 잘 읽었습니다.
1. 과학의 발달은 기계문명과 물질문명의 시대를 만들어 인문학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어 근래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들을 합니다. 특히 사이버리즘의 지배를 받는 요즘에는 작가 의식이나 작가 책임마저 경시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고 수필은 인간의 삶과 생각을 문학화합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위기는 수필의 위기가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 수필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 모든 위기는 우연이기도 하고 필연이기도 합니다. 우연과 필연은 전혀 다른 개념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초한 것이 때론 필연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필연이 우연으로 가장해 나타나곤 합니다. 기업에서는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의 위기나 과학의 퇴조는 벌써부터 예견되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논둑이 터지면 가래질로 막을 수 있지만 학문의 위기는 막을 무기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허리를 곧추 세우고 누가 뭐라든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대로 해 나가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글 몇 편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까. 세상은 쉽게 바뀌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영영 안 바뀌지도 않습니다.
2. 요즘 문학의 세계화를 많이 말합니다. 문학의 세계화 속 수필의 세계화를 바란다면 우리 수필은 어떤 인문학적 글쓰기로 길을 열 수 있을까요?
답 요즘 한류를 보셨지요. 싸이와 동방신기, 소녀 아이돌과 김덕수 패 등등. 그들은 ‘우리 것을 최고’라고 생각하고 한 길로 매진했습니다. 우리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입니다. 수필의 세계화 모색도 중요하겠지만 하위 장르에 머물고 있는 꼴찌 수필의 위상을 먼저 끌어올리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원로들과 문인협회 임원 그리고 수필잡지 발행인들이 똘똘 뭉쳐 서울의 주요 일간신문의 신춘문예에 수필장르를 넣는 일부터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이 일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상기하고 세계화를 꿈꿀 일이라 생각합니다.
3. 구활 선생님은 끊임없이 자신의 글쓰기의 세계를 변화시켜 왔는데 그건 아무나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이 있을 것 같은데 특히 등단 10년 이내의 수필가와 등단 10년 이상의 수필가들에게 선생님의 수필쓰기 경험에 비추어 가장 필요한 조언을 해 주신다면 무엇을 해 주시겠습니까?
답 밥그릇 숫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면허 딴 지는 30년이 넘었는데 운전을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거의 매일 시를 읽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봅니다. 등단 연수에 관계없이 수필가들이 시를 많이 읽으면서 산문을 열심히 쓰면 좋겠습니다.
질문자 : 류인혜(柳仁惠)
1. 구 활 선생님께
(1) 선생님께서 다른 지면에 연재하시는 ‘구활의 여행 스케치’를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수필, 미움과 사랑>이라는 글을 읽으며, 이번 세미나의 주제에 대해 충분한 학습이 되었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그 경계가 모호했던 일반적인 ‘수필’과 선생님께서 쓰시는 ‘인문적 글쓰기’의 뚜렷한 구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수필 작품을 쓴다는 개념이 아니라 기자 출신의 숙련된 전문가로서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돌아간다는 고향이 사랑하는 ‘수필’이라고 이해를 해도 괜찮을는지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수필과 인문적 글쓰기의 ‘만남’이라면 인문적 글쓰기가 수필의 발전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 맞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수구초심과 궤를 같이 하는 말입니다. 젊은 시절 바람을 많이 피운 남정네가 늘그막에 본처 곁으로 돌아와 잘못을 사죄하고 여생을 보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에야 까놓고 말씀드리지만 저는 인문적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고향은 따뜻하고 편안하고 넉넉합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향에 대한 글쓰기가 수필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는 안중에 없습니다. 저는 그냥 고향으로 돌아 갈 뿐입니다.
(2)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풍류’란 한 시절이 만든 문화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풍류의 정의를 ‘시주색(詩酒色) 풍월수(風月水)’라고 하셨고, 술이 없는 풍류는 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옛 선인들은 요즘처럼 스마트폰도 없고, 놀고 싶어도 신나게 술을 마시며 놀 수 있는 클럽도 없고, 소리를 내지르며 열정을 내뿜을 수 있는 축구장이나 야구장이 없었기에 산천을 친구삼아 그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풍류란 단지 시를 즐기는 선비들만의 전유물로 이해를 해야 될는지요? 그러면 주(酒)와 시(詩), 색(色) 등을 상류층이 아닌 사람들 즉 여자, 서민, 청소년들은 어떤 방법으로 풍류를 즐겼는지, 아니면 그런 층의 사람들에게는 풍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드리려면 막걸리 상을 펴놓고 1박2일쯤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답은 3분으로 줄여달라니 이 행사 끝나고 개별적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풍류는 옛 선비들만의 전유물도 아니며 가진 자들의 소유는 더더욱 아닙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모든 인간의 마음속엔 풍류라는 끼가 뱀이 똬리를 틀 듯 틀고 있습니다. 풍류라는 낱말이 고급스럽게 들려서 그런지 몰라도 풍류는 바람의 흐름 즉 주체할 수 없는 끼의 발산입니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는 일류 풍류객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게꾼이었습니다. 그는 술만 한 잔 들어가면 지게목발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산 저 산 넘어가는 저 구름아’. 그에게 시는 바로 노래였습니다. 색은 앞집도 하고 뒷집도 하는 것이니까 저들끼리 알아서 하겠지요. 색은 창세기 이후 세계화가 되었으니까요.
첫댓글 수필가들이 한번 쯤 읽어 보면 좋을것 같아 퍼 왔습니다.
미경 샘, 저도 이 글 에세이 울산으로 업어다 놓으렵니다.
고맙습니다.
이미경 작가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구 활 선생님의 수필론이 감동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