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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주일설교 고린도전서2:1-5(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본문: 고린도전서2:1-5
제목: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오늘은 고린도전서2:1-5의 말씀을 가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1. 부름을 받은 우리들
세상의 모든 공동체의 분열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말로 포장을 하지만 실상은 세상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을 더 같기 위한 경쟁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그런 것을 더 가지려는 것일까요?
그래야 내가 남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나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하는
영적 교만의 세상식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경쟁에서 이겼다 싶으면 우쭐거리고,
졌다 싶으면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이고 그래서 사람과 사람의 얽힘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전부라면
이런 경쟁이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태어나고 죽는 것이
우리의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구원 혹은 심판이 고려되는 순간
우리가 사는 오늘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과 비교되어서 나타나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 나가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가와 상관없이
차별 없는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은
우리가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고 자랑하던
세상의 조건들이 쓸데없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말하는 조건과 그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존재감은 진정한 구원의 수단이 아닙니다.
그런 조건들을 무시하는 은혜의 부름은
바로 이런 사실을 폭로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자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2.복음을 전하는 방법
오늘 우리가 나누게 될 말씀은
그러한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바울은 처음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 전할 때를 상기시킵니다.
그러면서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확인시켜 보여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들을 부르신 은혜의 원리는
그 복음을 전했던 자신의 태도에서도
드러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웠던 첫 출발을 떠올리는 건
잘못된 것을 꾸짖는 데는 아주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들이 처음 만났을 때
보고 들었을 그의 실제 모습을 상기해 줍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청중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기준과는 달리 바울은 복음을 선포할 때
본문 1절의 말씀과 같이 “말과 지혜의 탁월함”을
과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명한 소피스트들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들은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멋진 연설로
사람을 사로잡는 웅변가들이었습니다.
청중에게 ‘지혜’의 말을 제공하는 대가로
돈이나 사회적 명성을 누리곤 했습니다.
고린도 옆 동네에서는 웅변술 경연대회가 열렸습니다.
유명한 축제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웅변술 대회였습니다.
그것은 말과 지혜와 탁월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인기,
곧 더 큰 존재감을 누렸습니다.
카리스마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의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언변이 화려할수록
대단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에서는 자연스럽습니다.
그런 카리스마 있는 사람들이 환호와 인기를 누렸고
그 결과 사회적 영향력이 생겼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정치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육가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탁월한 언변을 갖춘 웅변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소피스트들에게 말의 탁월함이란
곧 소피스트로서 그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누리는
사회 경제적 존재감과 직결되었습니다.
당시 연설가는 그 나름의 관행이 있었습니다.
우선 준비된 웅변가로서 자신의 자질을 잘 보여 줌으로써
청중이 자신을 신뢰하도록 만들어야 했습니다.
또 청중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적절한 칭찬을 통해
자신과 청중들 사이에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말하고자 하는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웅변가들에게 기대하는 자질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직업 웅변가는 아니었지만
바울 역시 다수의 청중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바울의 행보에 그들에게
친숙한 소피스트들의 행보와 많이 비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바울에게 일반 소피스트에게 기대하는
자질이나 태도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문 소피스트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말하는 사람이었기에 바울에게
소피스트들에게 기대할 법한
그런 탁월함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3.하지만 바울은 어떻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1. 그는 복음을 말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바울의 태도는 탁월한 웅변가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말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말할 때는
“말과 지혜의 탁월함을 과시”하고 이를 통해
웅변가로서 존재감을 보여주려는 태도를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복음을 좋은 말과 지혜의 탁월함으로 전하면
더 좋은데 왜 그는 그런 태도를 버렸을까요?
바울이 그랬던 것은 한 가지
크게 염려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의 중심인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쏠리는 대신
전파하는 사람이 드러내고 전파되는
위험한 상황에 대한 염려입니다.
자신의 말이 자기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앞지르는 상황이 생길 수 있음을 염려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메시지와
어울리지 않는 꾸며낸 말의 위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라고 보냈는데
오히려 그리스도를 이용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선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배은망덕한 상황은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가능한 한
말을 어눌하게 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의 편지를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언어는 다양한 수준의
수사적 기교들이 가득합니다.
그것은 효과적 소통을 위해서
자연스럽게 동원되는 기법들입니다.
힘이 넘치는 그의 글에 비해 그의 설교는
전문가 수준에 미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변명해야 할 약점이었지
결코 큰소리치며 자랑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당시 수사학적 논의에서
중요하게 활용되었던 용어들이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진짜의 문제는
말을 잘하고 못하고의 여부가 아닙니다.
그 말을 통해서 누가 득을 보느냐입니다.
그의 말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그려내는가?
아니면 그의 멋진 열변이 바울 자신을
탁월한 웅변가로 주목받도록 만드는가였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보다
바울 자신에게 집중되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의미해지는” 그런 상황을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언변이 좋든 나쁘든, 중요한 점은 자기 말을 통해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지는 것
이를 통해서 십자가의 능력이 드러나는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의 유일한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알지 아니하기로”결심했다는 말은
‘모르는 셈 치겠다’는 말이 아니라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메시지에만 집중했습니다.
빌립보서1:20에서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집중하였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정하고 전하였기에 방식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소피스트들이 어떤 도시를 방문하면
그의 실력있는 소피스트로서 능력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도시 사람들에게
멋진 칭찬과 호감을 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교육이나 정치 쪽에서
좋은 일거리와 명예와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었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많은 이는 고린도를 처음 찾은
바울에게서도 그와 비슷한 행보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일찍이 대중들의 기대와 어긋났습니다.
바울은 자신은 말해 할 주제가 분명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소피스트로서
자신의 웅변가적 자질을 증명하고 그를 통해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 했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 복음을 말하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습니다.
바울이 선포한 복음은 한마디로 “십자가”였습니다.
물론 바울의 복음의 전체를 보면 십자가뿐 아니라
부활도 중요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믿음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믿음, 우리를 구원한 복음에는
부활이 빠질 수 없습니다.
2.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다.
하지만 바울은 유독 고린도 교회에
십자가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의사가 당장 수술에 필요한 도구를 신중하게 고르듯
지금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십자가만 말한다고 해도 가볍지 않습니다.
이 점은 4-5절에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보여 볼 수 있는 가치관관 충돌하며
그 가치관을 뒤집어엎습니다.
특히 세상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와 위력에 눌려
은혜의 복음이 희미해지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거듭 그리스도를 내세웁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 선포가
대중적인 평가에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고린도 교인들이 다 알 듯이
‘약함과 두려움과 많은 떨림으로’복음은 전했습니다.(3절)
여기서 약함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신체적 질병일 수도 있고, 왜소한 외모를 말할 수도 있고,
사람들을 대하는 몸가짐의 유약함과
관련될 수도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말하는 사람이 기대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연설가는 연설 실력만큼이나
훌륭한 조건과 멋진 목소리가 중요했습니다.
이를 통해 무대 위에서
당당한 존재감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연기자가 가수에게서 우리가 종종 경험하듯,
당당한 체구와 멋진 외모로 이미 무대를
꽉 채우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여준 설교자의 모습은
이런 자신만만한 존재감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이는 바울의 모습에서 처참하게 실패한
애송이 소피스트의 안쓰러운 모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였을까요?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복음으로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선포자의 근원적인 두려움입니다.
선교의 승패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달렸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오는 두려움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탁월해도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음을 아는 데서 오는 겸허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의 선포가
자기 과시로 둔갑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4절에서
자신의 선포 방식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는 십자가의 말씀을 말하고 선포했지만
이를 설득력 있는 지혜로운 말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선포할 때 그의 초점은
언어적 지혜나 설득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인간적 존재감은 축소하고
선포되는 메시지인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선포에서 드러나야 할
본연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선포가 의지할 수단은
4절에서 말하듯이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선포하는 자신의
인간적 존재감에 무관심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복음 자체의 존재감,
곧 “성령의 능력”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사도적 섬김은 본질은 무엇입니까?
“육체” 곧 그 어떤 인간적 조건에도
좌우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육체에 의존하지 않으며,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며 선포하는 삶입니다.
인간적 가치와 수단 대신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삶입니다.
바울이 세상을 향해 나가는 무기는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달랐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는
승리하기 힘든 싸움이 되는 무기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힘/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높아진 인간적 생각을
허무는 힘, 그리하여 사람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만을 선포하며 성령과 능력의 드러남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신자들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린도 상황에서 드러나듯
‘인간의 지혜냐, 하나님의 능력이냐?’하는
결단 역시 신자들의 삶 전체에 걸쳐 계속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당시 고린도에서 ‘잘 나가는’
인간적 가치나 조건에 휘둘리지 말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마음을 두고
그 능력에 기대어 살기를 바랐습니다.(5절)
바울은 자기는 인간적 수단들을 마음껏 휘두르면서
신자들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고린도 신자들이 세상적인 자랑 때문에
그들이 복음과 얼마나 멀어졌는지 일깨우며
다시 복음적 삶의 초점을 회복하라고 호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렇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집요하게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집중하지 않고
세상의 자랑에 집중하며 세상방식으로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리며 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빠져 버리면
우리의 생명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도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꼭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나의 것을 감추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냥 노력하는 정도가 아니라
두려운 마음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그 일을 행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사람에 지혜에 세상의 가치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보여주는
복음의 전달자로 그렇게 살아가시는
성도님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