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김남주 시인 육성낭송시선≫에 대하여
김남주. 이 시대 최고의 저항시인으로 불렸던 사람. 스스로는 시인이기보다 노동자의 벗이며, 전사이기를 바랐던 사람. 그가 이 세상을 떠나간 지 올해로 벌써 10년이 되었다. 시간은 많은 것을 잊게 한다. 그러나 때로 그 흘러가버린 시간으로 인해 더욱 절실하게 기억되는 것도 있다. 절개와 지조가 헌신짝 취급을 당하는 시대, 배신과 타협이 노동자의 새로운 사상이라도 되는 듯이 우쭐대는 시대. 자기 삶의 확실성을 상실하고 갈지(之)자로 걷는 것이 유연한 것으로 포장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더욱 절실한 그리움으로 그를 기억한다. 시란 자본에 대한 비타협적 증오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철저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 해방을 위해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확신했으며, 흐트러짐 없이 그 길을 갔던 사람, 바로 그 사람 김남주를 ···.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김남주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다. ‘노동의 소리’에 링크되어 있는 ≪김남주 시인 육성낭송시선≫을 통해서다. 아, 이것은 얼마나 큰 떨림이며, 기쁨인가! 그의 ≪육성낭송시선≫은 고된 노동과 자본의 위협 속에서도 해방의 꿈을 잃지 않는 모든 노동자들에 대한 격려이며, 자기 삶에 대한 확신과 그 확신의 근거를 찾고자 하는 참된 투사들을 위한 길잡이다. 우리는 자기 시대를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싸우고, 자기 시대와 더불어 당당하게 사라져 갔던 한 시인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가 우리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동지들에게 ≪김남주 시인 육성낭송시선≫을 소개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삶의 확실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의 목소리는 투박하지만 강건하고, 높지 않으나 신념에 차 있다. 그는 때로는 조근 조근하고 고집스런 음성으로, 때로는 사자처럼 포효하며 격정적인 목소리로 ‘이 저주받은 시대’에 대해, 우리의 투쟁에 대해, 그리고 투사의 삶에 대해 노래한다. 그의 ≪육성낭송시선≫을 여는 첫 번째 시이기도 한 <전사2>는 우리식 표현으로 하면 ‘투사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시에서 그는 전사란,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이 따 먹을 열매를 키우며, 압제와 착취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피와 눈물을 흘리며 자유의 나무를 기르는 사람, 해방된 세상을 위해 자기 시대를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싸우고, 자기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 데 기꺼이 동의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이런 분명한 인식,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실성이야말로 그가 죽음을 맞이한 그 순간까지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평생을 전사로, 혁명시인으로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일 것이다. 비록 이름 없이 사라질지라도, 자신이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자유의 나무, 해방의 나무를 키워 낼 것이라는 확신, 자신의 삶을 모든 노동자들의 삶과 연결시키고, 미래의 자식들의 삶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던 역사적 안목. 자신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통찰이야말로 흔들림 없이 투사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삶의 확실성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 한순간에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패배와 좌절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통스런 경험이 쌓이고, 넘어지지만 좌절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만, 자신의 실패와 오류를 뼈를 깎는 아픔으로 돌아보는 과정에서만 쟁취되는 것이었다. 이 점을 그의 또 다른 시 <진혼가>는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죽음으로써 해방의 길을 가겠노라고 다짐했던 그는, 그러나 “적들의 총구가 머리 숲을 헤치는 순간 ··· 똥개가 되어 기꺼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겠노라”고 공포에 질려 말한다.
더 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나의 유일(唯一)한 확실성(確實性)이라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나는 손발을 비볐다
이렇게 가혹한 고문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김남주는 자신이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김남주만의 일이겠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끝없이 계속되는 자본의 무차별적인 공격과 일상적인 유혹 앞에 굴복하고 좌절하지 않았는가? 끊임없이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도망치려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투사의 길을 걷겠노라는 자기 다짐만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설명한 것이 아니다. 이 다짐은 아직 어설픈 신념일 수 있으며, 미지근한 싸움의 결의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다짐은 반드시 자본과의 치열한 전투를 통과해야 하며, 그 전투의 과정에서만 자신의 진정한 몸체를, 구체적 사실성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나의 유일한 확실성’이라는 언급은 이 점에서 자신이 가졌던 신념이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가에 대한 처절한 자기 고백이었다. 그러나 이런 패배와 좌절에 대한 고백, 자신의 비겁, 자신의 결의가 가졌던 불철저성과 관념성에 대한 통렬한 고백이야말로 새로운 도약을 위한 계기였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지 못하고 철저하게 깨져버린 그곳에서 그는 다시 시작하고 있다. ‘육신만이 유일한 확실성’이던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미지근한 싸움과 신념을 철저하게 반성하며, 진정한 전사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이렇게 전사 김남주에게 패배는 새로운 출발점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을 조직의 삶, 계급의 삶과 합치시키고 오직 여기에서만 자기 삶을 발견하는 진정한 전사로 다시 태어난다.
삶의 확실성은 어떻게 확장되는가?
그는 이제 차분한 목소리로 동지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어쩌면 이 밤이 이승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결코 들뜨지 않는다. ‘유언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라는 그의 목소리는 비장하다. 하지만 그것은 과장되지 않으며, 낙관적인 힘이 느껴진다. 그는 동지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자신의 삶, 자신의 패배를 통해 배운 교훈을 이야기 한다.
한마디 남기고 싶네 역사의 변혁에서 최고의 덕목은 열정이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된 것은 아니네 지혜가 있어야 하네 지혜와 열정의 통일. 이것이 승리의 별자리를 점지해준다네 한마디 더 하고 싶네 적을 공격하기에 앞서 반격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공격을 삼가게 패배에서 맛본 피의 교훈이네
자신의 운명, 자신의 삶을 조직의 삶과 일치시키고 진정한 전사의 눈으로 통찰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패배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패배조차 해방을 위한 초석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자각, 아니 반드시 이 피의 교훈은 노동자계급의 힘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이제 그는 이야기하고 있다. “열정과 함께 지혜를! 섣부른 공격에 앞서 만반의 준비를!” 보라. 오늘, 전사 김남주의 이 절박한 외침은 모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덕목이 되고 있지 않는가? 이 애정 어린 충고는 모든 전진하는 노동자운동 속에 각인되어 있지 않는가? 그리하여 이제 조직과 계급 속에서 전사의 삶은 불멸의 혼이 되어 이어질 것이다.
“나를 결정할 사람은 나 자신이고, 나를 키워 준 민중이다.”
전사 김남주의 그 분명한 삶의 확실성은 근본적으로는 그가 자신의 시와 정치의 뿌리를 노동자 민중에게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계급의 선택’이라고 해도 좋을 이 문제 앞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머니 저를 결정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니까요 사형이다 무기다 10년이다 부르기를 남의 집 개 이름 부르듯 하는 저 당당한 검사 나으리가 아니니까요 높은 공부하여 높은 자리에 앉아 사슬 묶인 나를 굽어보는 저 준엄한 판사 나으리가 아니니까요 나를 결정할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고 날 낳으신 당신이고 당신 같으신 어머니들이고 나를 키워준 이 조국, 이 민중이니까요
여기에서 ‘나를 키워준 것은 조국과 민중’이라는 인식이 갖는 한계성은 분명하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민족주의적 정서와 우리 시대의 해방의 성격에 대한 잘못된 판단, 노동자들의 계급적 주도성에 대한 모호함이 담겨있다. 만약 오늘날의 시점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반복한다면 이것은 구제불능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한계는 역사적 조건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는 자신의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인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글에서 ‘자신이 9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은 몇몇 개망나니 같은 독재자들 때문이 아니라 노동하는 민중의 고혈을 빨고 있는 자본가들을 증오하고 저주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시인은 많은 개량주의자들이 90년대 초반 동구권의 변화를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라고 명명하며 노동자들의 해방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때, 한 대담에서 그것은 노동해방이라는 원래의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그를 적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이며, 우리가 건설해 갈 세상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만큼 분배받는 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또 다른 한 대담에서 자신의 시 속에 ‘농촌공동체의 복원’에 관한 집착과 ‘허무주의적 파괴성’이 있다는 대담자의 평가에 대해 ‘이는 거의 모함에 가까운 이야기’이며, 자신은 단 한 번도 궁극의 목표를 농촌공동체 식의 소(小)생산자적인 경제적 평등에 기초한 사회로 생각해 본적이 없으며,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엄격하게 질서 잡힌 노동자들의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해 본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은 이 질문에 대해 시인이 한 말의 일부다.
“내 시의 어디에도 '농촌공동체의 복원에 관한 집착' 따위는 없다. 나는 자본의 비인간성과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증오하고 저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 이전 사회를 그리워하는 순진한 낭만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지향하는 미래사회의 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 또는 독자들에게 미래의 전망을 암시하기 위해 옛사람들의 삶과 언어와 무기 등을 차용했을 뿐이다. 이를테면 내 시에 자주 등장하는 녹두꽃, 죽창, 낫, 등이 그런 것이다.”
이런 그의 언급들을 고려할 때, 그가 한계를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상황을 규정짓는 근본에 자본주의가 있으며, 이를 극복하는 힘은 노동하는 자로부터 나온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렇듯 자신의 뿌리가 노동하는 자에게 있으며, 이들이 자신의 삶을 결정할 것이라는 확고한 인식은 착취하는 자, 억압하는 자에 대한 더욱 철저한 증오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결국 자신의 뿌리인 노동자하는 자들의 자유는 착취하는 자들과 양립할 수 없으며, 오직 이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통해서만 열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살>, <이 세상에>, <권력의 담>과 같은 시들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자본가계급과 국가권력에 대한 철저하고 집요한 폭로, 그들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비타협적인 증오와 적개심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철저한 사랑의 다른 얼굴이다.
여기에서 전사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가 도출된다. 전사란 결국 노동자와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일치시키며, 그들과 자신을 뗄래야 뗄 수 없는 공동의 운명체로 인식하는 것, 노동자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들의 전진을 돕는 사람인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줏대와 지조, 민중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자본에 대한 분노는 이와 같은 분명한 정치적 전망 없이 획득될 수 없다.
마치며 - 전사의 자유
≪육성낭송시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시는 <자유>다. 그는 이 시에서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하고,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우며, 만인을 위해 피와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 칠 때, 그것이 곧 자유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의 자유에 대한 이 규정은 계급에 따라 동일한 단어의 의미가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의 노동이 만인을 위한 것이라는 자각, 나의 투쟁이 전체를 이루는 한 부분이라는 생생한 책임감, 우리는 피와 눈물을 같이 흘리는 하나의 운명이라는 이 연대정신.
김남주는 전사란 모름지기 이런 계급적 자유의 정신을 구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자유의 정신은 해방세상을 열어가야 할 노동자들이 정신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는 단지 말로 쟁취되지 않으며, 이를 물질적 힘으로 전화시킬 실천 투쟁일 때만 획득된다는 그의 가르침이다. 그는 우리에게 혹 자신을 속이지는 않는지 묻는다.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오늘 우리는 얼마나 철저하고 치열하게 자유를 실천하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확고하게 전사의 길을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마주하게 될 때, 그리고 자기 일에 대한 전사적 영감이 필요할 때, 한번쯤 김남주를 방문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투박하고 진실한 그의 음성에서, 그가 쏟아내는 함성에서 무언가 배울 것이 있을 것이다.■
≪故 김남주 시인의 육성낭송시선≫은 <노동의 소리 http://nodong.com> → <노래듣기> → <개인 가수> → <김남주 낭송>을 차례로 클릭하면 들을 수 있습니다. ‘민족시인 김남주 해남 기념 사업회’가 운영하는 김남주 홈페이지에 가시면 시인이 직접 쓴 여러 글들도 볼 수 있습니다.
http://swl.jinbo.net/bbs/zboard.php?id=data&page=1&sn1=&divpage=1&category=6&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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