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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娘丹心(홍랑단심)
洪:넓을 홍, 娘:아씨 랑, 丹:붉을 단, 心:마음 심.
뜻: 홍랑의 붉은 마음이라는 말로, 홍랑의 뜨거운 사랑을 이른다. 조선 선조 때의 기생 홍랑의 고
사에서 유래했다. 연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뜻한다.
문헌: 조선기생(朝鮮妓生)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때 문장가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1539~1583)은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크게 출세하진 못했다.
그가 함경도 경성(鏡城)에 북평사(北評事. 정6품)로 부임하자 환영하는 잔치가 성대히 열렸다. 인근 고을의 수령들이 대거 참석한 이날 잔치에는 기생 홍랑(洪娘)도 있었다.
홍원현감이 환영사를 했다.
“부임을 진심으로 경하 드립니다. 그동안 이곳은 여진족(女眞族)이 침입하여 소와 말을 빼앗아 가는 일이 빈번하였는데, 이제 무예가 출중하신 평사(評事)께서 부임하셨으니 우리 백성들은 큰 시름을 덜게 되었습니다.”
최경창이 말했다.
“과찬의 말씀이오. 중책을 맡게 되어 걱정이 앞서외다.”
주연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홍랑이 초경창의 옆으로 와서 말했다.
“나으리. 홍원에서 온 홍랑이라 하옵니다.”
홍랑은 고운 손으로 최경창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은은한 국화 향이 코끝에 전해졌다
최경창은 잔을 비운 뒤 그 잔을 홍랑에게 내밀었다.
“이런 곳에서 자네 같은 미인을 만나다니……. 아무래도 자네와 연분이 닿는 모양일세, 한잔 받게나.”
술을 따르는 최경창의 가슴은 홍랑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따로이 만나 시(詩)를 지어 주고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자네의 문장력이 보통이 아니구먼, 그러고 보니 우리는 뜻이 통하는 시우(詩友)이기도 하네 그려.”
“예, 나으리.”
“자네와 헤어지면 보고 싶어 어쩌지?”
“그럼 나으리께서 제가 있는 곳에 들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은 그날 밤 꿈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홍랑은 홍원으로 떠나갔고, 최경창은 직무를 시작했으나 홍랑의 생각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일이 끝나고 객사에 돌아와 자리에 누워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홍랑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나리께선 지금쯤 무얼 하고 계실까? 혹시 내 생각을 하시느라 잠을 못 이루고 계시지나 않을까? 아니면 기방에서 기녀들과 놀고 계실까? 아, 마음이 어찌 이리 허전할꼬!”
며칠 후, 최경창은 관할 지역의 동정을 살핀다는 명목으로 홍원지방을 순찰하고 나서 홍랑의 집을 찾았다.
“홍랑이 있는? 내가 왔네.”
홍랑은 버선발로 뛰어가 최경창의 품에 안겼다.
“나리, 이제나저제나 하고 날마다 기다렸습니다.”
두 사람은 또다시 숨소리가 거친 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최경창은 다시 후일을 약속하고 경성으로 돌아갔으나 그 후 두 사람은 가끔 서찰 왕래만 했을 뿐, 다시 만나질 못했다.
얼마 후, 임기가 끝난 최경창이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홍랑은 서둘러 최경창을 만났다.
“나으리, 홍랑이 왔사옵니다. 오늘 한양으로 떠나신다기에…….”
“그렇다네, 먼 길을 와줘서 고맙네.”
“소첩도 함께 가고 싶사옵니다.”
“어차피 헤어질 몸, 따라가면 무엇하겠는가?”
홍랑은 울먹이며 최경창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조심해서 돌아가게, 내 한양에 도착하면 서찰을 보내겠네.”
그러나 어느새 3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한편, 최경창은 병석에 눕게 되자 아들을 불러 말했다.
“내 병이 깊어 다시 일어나긴 틀린 듯하다, 마지막으로 홍원에 있는 홍랑의 얼굴이나 한번 보았으면 여한이 없겠구나.”
“아버님, 심려 마옵소서. 소자가 속히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최경창이 병으로 누웠다는 말을 들은 홍랑은 그날로 길을 떠나 이레 밤낮을 걸어 최경창의 집에 도착하였다.
“나으리, 소첩이 왔사옵니다. 어서 기운을 차리시고 하루빨리 쾌차하셔야지요.”
“자네가 날 잊지 않고 먼 길을 와주었구먼. 고맙네!”
그런데 사대부 양반집에 기생이 찾아온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최경창은 파직되었다. 함경도와 평안도의 경계를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이 내려져 있었는데 홍랑이 이를 어겼고, 관직에 있는 최경창이 그녀를 사사로이 만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홍랑이 떠난 후, 최경창은 시 한 수를 지어 그녀에게 보냈다.
내가슴 마주 볼 뿐, 그윽한 난초를 주며 이별했네.(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천애의 먼 길 며칠 걸려 돌아갔나.(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함관령의 옛 곡조일랑 노래하지 마오.(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지금도 푸른 산은 운우에 가리워져 있으리.(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최경창은 홍랑을 그리워하며 적적할 때는 피리를 꺼내 불곤 했다. 그러다가 끝내 최경창이 죽자 홍랑은 그의 묘가 있는 파주로 가서 9년간이나 시묘살이를 했다. 또 임진왜란 때에는 최경창의 시고(詩稿)를 짊어지고 피란하여 안전하게 보전했다. 이후, 홍랑이 죽자 최경창의 자식들은 그녀를 가족으로 인정하여 최경창의 묘 아래에 장사를 지내주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紅衣將軍(홍의장군)
紅:붉을 홍, 衣:옷 의, 將:장수 장, 軍:군사 군.
뜻: 붉은 옷을 입고 싸우는 장군,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용감하
게 잘 싸우니 왜적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홍의장군이라 부른데서 연유했다. 용감한 장군을 이
른다.
문헌: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홍의장군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본관이 현풍(玄風)이고,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그는 선조 1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로 인하여 파방(罷榜)되었다. 그때부터 벼슬에는 뜻이 없어 나이 40에도 짚신에 삿갓을 쓰고 낚시를 즐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모으고, 가산을 군자금으로 쓰면서 싸웠다. 처음 모인 의병은 70여 명으로 정진(鼎津), 함안(咸安)에서 잘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리자 의병들이 더 많이 모여 들었다.
그는 전쟁에 나갈 때에는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앞장서서 지휘하니 왜적들이 홍의(紅衣)장군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는 한때 관찰사 김수(金睟)와 불화하여 도둑의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는데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해명으로 무죄임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방어사가 되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굳게 지켜냈다.
7년간의 왜란이 끝나고 한성좌윤을 거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던 중,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무고로 죄인이 되고, 광주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휘말려 죽임을 당하자 이를 통탄하여 아래와 같은 상소문을 올리고 사직했다.
“고양이를 기르는 까닭은 쥐를 잡기 위해서인데, 이제 쥐 같은 왜적이 물러났으니 제가 할 일이 없게 되었으므로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윤허하여 주소서!”
그는 퇴임한 후 시골에서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그는 뛰어난 장군이기도 했지만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華比重義(화비중의)
華:영화 화, 比:비교할 비, 重:무거울 중, 義:옳을 의.
뜻: 부귀영화보다 의리가 중요하다. 즉 눈앞의 이익이나 영화보다는 큰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는
뜻이다.
문헌: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조선 제9대 성종(成宗) 때 한성부윤과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낸 권경희(權景禧. 1451~1497)는 세조 때 진사가 되었고, 성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부수찬은 문벌이 좋아야만 할 수 있는 벼슬이었다.
권경희의 벼슬이 형조참판에 이르자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의 아내의 출신 성분을 트집 잡아 권경희가 참판이 되면 안 된다고 상소하였다.
그러자 권경희의 부친은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아들에게 문벌 좋은 집안으로 새장가를 가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효자로 이름난 권경희였으나 그 말만은 따를 수 없다고 했다.
“제 내자가 그동안 갖은 고생을 하면서 오늘날을 기다려 마침내 그 듯이 이루어졌는데 이제 와서 그런 이유로 버린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소자는 불효가 되더라도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부친은 그의 뜻을 장하게 여겨 다시는 새장가 드는 것을 거론하지 않았다.
한편, 조정의 대신들은 여전히 이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 시비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성종은 오히려 권경희가 아내를 버리지 않는 것은 의리를 중히 여기는 갸륵한 일이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문벌은 좋으나 행실이 못된 신하보다는 문벌이 낮더라도 충의가 두터운 사람이 필요하니 권경희에 대해서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花王之戒(화왕지계)
花:꽃 화, 王:임금 왕, 之:갈 지, 戒:경계 계.
뜻: 꽃왕의 가르침이라는 말로, 설총이 신문왕에게 들려준 고사에서 유래했다. 편안히 놀기만 좋
아하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나라일을 하라는 가르침으로 쓰인다.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6
경주 설씨(薛氏)의 시조 설총(薛聰)은 신라 경덕왕 때 학자로 호는 빙월당(氷月堂)이고, 아버지는 당대의 거승 원효(元曉)이며,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였다.
그도 처음에는 자기의 아버지처럼 승려가 되었으나 후에 환속하여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했다.
설총은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 삼문장(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경문과 문장에 능했다.
어느 날, 신문왕(神文王)이 설총에게 말했다.
“오늘은 비가 개고 바람도 선선하니 재미있는 이야기로 답답한 마음을 풀어봅시다. 그대는 기이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을 터이니 나를 위해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시오.”
왕의 물음에 설총이 말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온갖 꽃을 능가하는 화왕(花王) 목단(모란)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푸른 비취색 장막을 둘러 보호해주었더니 봄에 꽃을 피웠는데 그 용모가 온갖 꽃 중에서 가장 빼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 아름답고 고운 꽃들이 달려와 문안을 드렸습니다. 그중에 한 아리따운 꽃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공손히 말했습니다.
‘첩은 거울처럼 맑은 이슬로 목욕하고 사계절 신선한 청풍을 맞으며 뜻대로 사는 장미라 하옵니다. 대왕님의 높으신 덕을 전해 듣고 저의 향기로운 침소로 모시고자 하오니 부디 제 뜻을 거두어주옵소서.’
그때 백발의 노파가 베옷에 가죽띠를 두르고, 구부러진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한 채 말했습니다.
‘저는 성 밖의 큰길가에서 아래로는 창망한 들을 굽어보고, 위로는 산악경치를 올려 보며 사는 백두옹(白頭翁:할미꽃)이라 합니다. 제 생각으로 대왕께서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 위해서는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리 먹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한다 해도 반드시 독을 제거하는 약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비록 좋은 신발을 만드는 삼(麻.마)이 있다 하더라도 풀로 만든 신발도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군자는 모름지기 모자라는 데 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옆에 있던 한 장수가 물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장미 첩과 백발의 노파 중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시겠습니까?’
그러자 화왕이 말했습니다.
‘백두옹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나 아름다운 장미 첩 또한 얻기 어려우니 이를 어찌함이 좋을까?’
이에 장수가 다시 말했습니다.
‘저는 대왕께서 총명하셔서 옳은 도리를 아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이 아닙니다. 무릇 만인지상(萬人之上) 즉 만인 위에 사람인 대왕께서 간사하고 사특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 하고, 정직한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풍당(馮唐)은 90세로 머리가 희도록 낭중 벼슬에 그쳤습니다.’
그러자 화왕이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다.’ 라고 했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신문왕이 말했다.
“그대의 우화에 진실로 깊은 뜻이 있으니, 글로 써서 임금 된 자의 계(戒)로 삼으리라.”
그리고 설총을 발탁하여 높은 벼슬을 주었다.
설총은 이두(吏讀)를 집대성해 중국 문자에 토를 달아 중국 학문을 익히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유학(儒學)과 국학(國學)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畵騙麻雀(화편마작)
畵:그림 화, 騙:속일 편, 麻:삼 마, 雀:새 작.
뜻: 그림이 참새를 속였다는 말로, 솔거가 황룡사의 벽에 소나무를 그렸는데 그 그림이 실제 소
나무로 착각할 만큼 잘 그려져 참새들이 그 위에 앉으려다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떤 사물이 실제와 매우 흡사한 경우를 비유해서 사용한다.
문헌: 삼국사기 권48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재위540~576) 때의 화가 솔거(率居)는 가난하고 벼슬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그가 일찍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그림을 얼마나 실감나게 잘 그려졌던지 까마귀와 솔개, 그리고 참새 등 새들이 실제의 나무로 착각하여 소나무에 앉으려고 날아들었다가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림의 색이 바래자 그 절의 스님이 보수를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새들이 날아들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솔거의 화풍은 대단히 사실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경주 분황사의 관음보살상과 진주 단속사(斷俗寺)의 유마상(維摩像)도 그의 그림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어 안타깝다. 다만 황룡사가 533년 진흥왕 14년에 기공하여 17년에 준공되었으므로 솔거의 노송(老松) 벽화도 대략 그 무렵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하여 6세기 중엽에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솔거는 불교와 관련된 그림에 능통했던 것 같다.
솔거가 그림을 그릴 무렵부터 신라는 정치, 경제, 문화의 기틀이 튼튼해져 연호를 쓰기 시작했고,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으며, 불교가 정식으로 인정되어 551년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가졌다. 이는 시조묘에 제사 지내는 국가적인 행사를 말한다. 또한 화랑 제도가 생겼으며, 불교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黃泉無店(황천무점)
黃:누를 황, 泉:샘 천, 無:없을 무, 店:가게 점.
뜻: 황천에는 객주점이 없다는 뜻으로, 죽음으로 가는 길의 고독감과 허무함을 이르는 말이다.
세조 때 성삼문이 한 말이다.
문헌: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한국인(韓國人)의 인간상(人間像)
조선 제7대 세조(世祖.1417~1468)에게 폐위당한 단종(端宗.1441~1457)을 복위시키려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1418~1456)이 세조 앞에 끌려 나왔다.
“네가 감히 나의 녹을 받아먹으면서 나를 배반하다니……!”
세조의 문초에 성삼문이 대답했다.
“나는 상왕의 신하로서 그를 복위시키고자 했던 것뿐이오. 따라서 나으리의 신하가 아닌데 어찌 배반이니, 역적이니 한단 말이오? 나는 나으리가 준 녹봉은 한 톨도 먹지 않고 그대로 다 있으니 다시 가져가시오. 그리고 이미 상왕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몸이니 어서 죽여주시오.”
세조는 크게 노하여 불에 달군 인두로 단근질을 하니, 살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그러나 성상문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소리쳤다.
“아무리 참혹한 형벌에도 나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오!”
성삼문은 그렇게 살가죽이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단근질을 당한 뒤 큰칼이 씌워져 다른 동지들과 함께 형장인 한강 백사장으로 끌려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의연하게 다른 신하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나는 옛 임금을 뵈러 지하로 가지만 그대들은 새 임금을 도와 천하를 태평케 하시오!”
그는 참형되기 전에 시 한 수를 읊었다.
북소리는 목숨을 앗기 위해 재촉하는데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저무누나. (回頭日欲斜.회두일욕사)
황천에는 객점이 하나도 없다던데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오늘밤엔 뉘 집에서 머물까.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성삼문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집에는 과연 세조에게서 받은 녹미가 곳간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孝而智智而孝(효이지지이효)
孝:효도 효, 而:써 이, 智:지혜 지,
뜻: 효도하는 자는 지혜롭고, 지혜로운 자는 효도를 다한다. 고려 말 재상 이제현에게서 유래한
말로 효도와 지혜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이르는 말이다.
문헌: 여제명현집(麗齊名賢集)
고려 말의 재상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성리학자로 자는 중사(仲思)이고, 호는 익재(益齋)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네 번이나 정승을 역임할 정도로 뛰어난 정치가였다.
당시 고려는 몽고(원(元)나라)의 강압에 의해 제24대 원종(元宗)이후 31대 공민왕(恭愍王)에 이르기까지 근 1백여 년 동안 백성들은 몽고식으로 머리를 깎고, 몽고 옷을 입어야 했으며, 조정에서는 해마다 공물을 바쳐야 했다. 또 그들이 일본을 정벌하겠다고 하면 지원군을 보내야 했다.
몽고는 테무진(鐵木眞.철목진. 1167~1227)이 몽고 부족을 통일하고 황제의 지위에 올라 칭기즈칸(成吉思汗.성길사한)이라 하였다. 이가 곧 원(元)나라의 태조(太祖)다
1234년에는 태조의 아들 오고타이(태종.太宗)가 금(金)나라를 멸망시켰고, 1236년 5대 쿠빌라이는 도읍을 북경(北京)으로 옮기면서 나라이름을 대원(大元)이라 했다.
원나라는 고려 23대 고종(高宗) 때 6차례나 침입했으며, 결국 고려 고종 46년에는 태자가 원나라에 입조하면서부터 정치적으로 예속되게 되었다. 또 여섯 번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되어 국민 생활이 도탄에 빠졌고, 수십만 명의 포로가 잡혀 갔으며,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는데 그 중에 경주에 92년이나 걸려 세워진 황룡사 9층탑도 이때 불태워졌다. 태무진은 고려에 쌍령총관부와 동령부, 그리고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압박을 계속하였다.
또 제주도 한라산 기슭에는 말을 방목해 군마(軍馬)로 활용했다.
1247년, 제24대 충렬왕(忠烈王)이 원나라에 갔다가 머리를 몽고식으로 땋아 늘어뜨리고, 옷 또한 몽고 옷을 입고 돌아오니, 백성들이 모두 나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원나라 세조의 딸(제국대장공주)을 왕비로 맞아서 데리고 오니, 이때부터 고려 왕궁은 온통 몽고 분위기로 변했다.
이렇게 하여 원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여자들이 족두리(族頭里)를 하고, 신부는 연지를 찍고, 귓불을 뚫어 귀고리를 달고, 왕의 진지상을 수라(水刺)라고 하는가 하면, 여자들이 댕기를 드리는 등의 풍습이 생겼다.
시대 상황이 이러한 때, 15세의 이제현은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하여 당당히 장원을 했고, 이어 문과에서도 급제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문명을 날리던 제현은 임금의 지시로 원나라 연경(燕京)으로 가서 요수(姚燧), 염복(閻復), 조맹부(趙孟頫) 등과 교우하며 학문을 닦았다.
충선왕(忠宣王) 10년에는 원나라의 유청신(柳淸臣), 오잠(吳潛) 등이 고려를 원나라의 부속 성(省)과 똑같이 통치하게 해달라고 태무진에게 주청하였다. 그러자 이제현은 이의 부당함을 주청하여 철회케 했다.
어린 시절을 원나라에서 지낸 충선왕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후, 이제현 등을 데리고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만권당(萬卷堂)이란 서재를 지어놓고, 당시 원나라에서 이름을 날리던 문인, 학자, 화가, 서예가들과 폭 넓게 사귀었다. 예술과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충선왕은 왕의 권세보다는 큰 나라라고 생각했던 그 나라의 문물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원나라 수도인 대도(大都)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문물이 들어와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직 서른도 안 된 이제현으로서는 보고 듣는 것 하나하나가 새로운지라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그곳의 모든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본국에 가져가면 참고가 될 책을 눈에 띄는 대로 사들였다.
10년 만에 고려로 돌아온 이제현은 27대 충숙왕(忠肅王)과 29대 충목왕(忠穆王)을 두루 모시면서 왕세자를 가르쳤고, 틈틈이 몽고에서 보고 들은 바를 정리하여 <역옹패설(櫟翁稗說)>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31대 공민왕(恭愍王) 때에는 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즉위하자 우정승에 임명되고 나중에 문하시중이 되었다.
1357년 공민왕 6년에 벼슬을 떠났는데 왕명으로 집에서 실록을 수찬하였다.
이제현은 효심도 대단했다. 1323년에는 충선왕을 수행하고 중국 강남 지방을 방문했는데 그때 고국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토로하는 시를 썼다.
님의 은혜 갚지 못한 채
눈 앞에는 산이 우뚝 가로막혀 있어도
만 리를 달려가는 말은 가볍기만 해라.
다만 어머니 머리카락이 희니
몇 줄기 눈물이 말안장에 지누나.
이제현은 그 후로도 원나라에 자주 드나들며 조국 고려의 외교를 원활하게 이끌면서 항상 어머니를 못 잊어 죄스런 마음으로 눈물지었다.
효성스러운 자는 지혜롭고, 지혜로운 자는 효성스럽다는 옛말대로 이제현이야말로 니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효성과 부모를 지키는 마음으로 충성을 동시에 행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孝而忠同(효이충동)
孝:효도 효, 而:써 이, 忠:충성 충, 同:한가지 동.
뜻: 효도와 충성은 같다. 선조 때의 명신 유성룡에게서 유래한 말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나라에도 충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문헌: 효경대의(孝經大義)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경상북도 의성군 사촌리 외갓집에서 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룡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지방에서 시행하는 향시에 합격하여 풍산 유씨 집안에 인물이 났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성룡은 아버지가 의주와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그때마다 여러 지방을 돌아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안정된 곳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관악산에 있는 외딴 암자로 들어갔다.
그는 밤이나 낮이나 책에 파묻혀 지냈는데 책 읽기에 얼마나 열중했던지 스님이 큰 돌덩어리를 문 앞에 던져도 모를 정도였다.
그런 보람이 있어 그의 나이 20세에 생원, 진사 두 가지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다. 이어 다음 해에는 성균관에 입학을 하게 되었으며, 25세가 되던 해 10월에는 조정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합격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다.
퇴계는 그의 총명함에 감탄을 하며 말했다.
“이 젊은이는 하늘이 실수하여 지나친 총기를 주었거나, 아니면 특별히 귀여워하여 어느 사람의 몇 배도 넘는 재주를 주었거나, 둘 중의 하나다.”
나이 25세에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간 유성룡은 선조 2년(1569)에는 명나라 다녀왔고, 그 후 날이 갈수록 학문과 인풍에서 명성을 높여갔다.
그러나 평소에 존경하던 퇴계 이황과 종조부마저 돌아가시자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 나머지 벼슬을 팽개치고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랏일에 쫓겨 어머니 봉양을 게을리 한 게 죄스러워 다시는 한양 땅에 올라가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제아무리 글을 많이 읽어도 부모님께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개, 돼지와 무엇이 다를 바 있겠는가, 효성 없는 학문은 눈 뜬 장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인재가 필요했던 나라에서는 그가 원하는 대로 그냥 두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 곁을 떠나면서 사무친 정을 글로 남겼다.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아, 애달프다.
하늘같이 끝이 없는 그 은혜 갚고자 하나
시대가 나를 그냥 두지 않는구나.
어느 날, 선조가 얼굴색이 초췌한 유성룡을 보고 물었다.
“혹시 무슨 병이라도 앓고 있는 게 아니오? 얼굴이 아주 안 되었구려.”
“황공하오나 마음이 편치 못해 그렇습니다.”
“어허, 무슨 일이오? 혹시 짐이 도와줄 일은 없소?”
“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인이 몸은 한양 땅에 있는데 마음은 항상 고향의 어머니 곁에 가 있습니다. 어머니를 봉양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떨어져 있으니, 그저 밤잠만 설칠 뿐입니다.”
선조는 유성룡의 효성에 눈시울을 적시며 생각했다.
‘충직한 신하는 나라에도 충성해야 하지만 동시에 효도도 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구나.’
그래서 조용히 말했다.
“상주(尙州)라면 경의 고향과 가까운 곳이니, 그곳으로 가서 목사로 일하면서 소원대로 어머니를 봉양하도록 하시오.”
그 후 유성룡은 49세 때 우의정이 되었으며, 선조 23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자 고질병 같은 당파 싸움이 시작되어 그는 반대파의 음모로 벼슬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선조 34년,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미동에 작은 초가집을 지어 놓고 생전에 못다 모셨던 어머니를 그리며 외롭게 지냈다.
1607년, 몸이 쇠약해진 유성룡이 자리에 눕자 선조는 내의원을 내려보내 그의 병을 돌보도록 했으나 그런 보람도 없이 그는 66세로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아쉬움이 컸던 선조는 그를 추모하며 심회를 토로했다.
“짐은 그의 학식과 충성은 물론이고, 그의 효성을 통해 효를 다하는 자는 충도 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노라.”
그리고 닷새 동안이나 나랏일을 쉬며 슬퍼하였다.
유성룡은 선조 25년(1592년) 4월에 일본군이 대거 침입하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모시고 평양으로 파천하고, 다시 평양에서 의주로 파천했을 때에는 부원군이 되어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고 군량미의 보급에 전력을 다했다.
저서로 <징비록(懲毖錄)>과 <서애집(西厓集)> 외 여러 권이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孝宗明判(효종명판)
孝:효도 효, 宗:근본 종, 明:밝을 명, 判:쪼갤 판.
뜻: 효종대왕의 명판결이라는 말로, 신부의 순결을 의심했던 신랑이 효종의 설명을 듣고 이해했
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떤 다툼에서 지혜롭고 현명한 판결로 해결하는 경우를 이른다.
문헌: 선원계보(璿源系譜), 효종실록(孝宗實錄)
조선 제17대 효종(孝宗.1619~1699)의 영명(英明)함은 아주 사소한 일에까지 미쳤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경상도 현풍 고을에 경사스러운 혼사가 있었다. 신랑, 신부는 나이가 지긋하였고, 지체와 문벌도 매우 좋아 모든 사람들이 축복해 마지않았다. 그리하여 풍성한 음식으로 밤늦도록 잔치가 벌어졌다.
잔치가 끝나자 신랑 신부는 신방에 화촉을 밝히고 원앙금침의 폭신한 잠자리에 들었다. 백년해로의 첫날밤이 고요히 깊어갔다.
다음날 아침, 어찌 된 일인지 신랑이 심술이 나서 조반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신부를 보려 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신부의 집에서는 야단이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은 신부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는 것은 신부의 부친이었다. 이렇게 한여름에 물 끓듯 법석이 벌어졌으나 신랑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참다 못한 신부의 부친이 신랑의 집에 가서 연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신랑의 대답이 놀라웠다.
“말씀 드리기 어려우나 신부의 몸가짐이 도무지 조신한 규중처녀 같지 않아서…….”
신부 아버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규범이 있는 선비 집에서 옥같이 자란 딸에게 억설도 분수가 있지……, 그러나 하는 수가 없었다. 일이 이쯤 되면 무슨 수로든지 그 의심을 풀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 끝에 고을 원에게 사실 여부를 가려 달라고 소지(訴紙)를 올렸다.
원님도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하였으나 묘책이 없어 할 수 없이 조정에 아뢰었다. 이에 효종은 즉시 감찰어사에게 화공을 데리고 현풍으로 가서 신부 집의 도면을 자세하게 그려 오라고 명했다.
며칠 뒤, 화공은 정밀한 도면을 그려서 바쳤고, 효종은 그것을 면밀하게 살폈다.
“여봐라, 그 집의 구조가 예사 집과 다른 곳이 없더냐?”
“네! 샅샅이 살피었으나 별다른 것이라곤 없었습니다.”
“그러면 집안의 꾸밈새에 특이한 것은 없더냐?”
“그것 역시 다른 바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오나 한 가지 괴이한 것은 부유한 집이라 그러하온지 높은 다락이 있고, 그 다락에 오르내리기 위하여 큰 사다리가 하나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효종은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다는 듯이 웃었다.
“알겠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는 그 신랑을 불러올리라고 했다.
‘가을 동산에 누런 밤송이는 벌에 쏘이지 않아도 스스로 벌어지고, 봄산의 풀잎은 비를 맞지 않아도 자라난다.’
신랑이 글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니 효종이 웃으며 말했다.
“신랑은 여기 신부 집의 도면을 잘 보아라. 그 집에는 높은 다락이 있고, 그 다락에는 출입에 쓰는 사다리가 있지 아니하냐!, 너도 그것을 알고 있겠지? 너의 처는 어려서부터 그 사다리를 오르내렸을 터이니 자연히 처녀로서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처녀가 아니라고 하여 과히 염려 말라. 하하하!”
이렇게 하여 신랑은 의심이 풀렸고, 신부 집에서는 감사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효종은 재위 중에 군비를 확충하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죽을 때까지 북벌정책에 힘썼다. 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환산표를 단일화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돌보아 주는가 하면,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화폐를 유통시키는 등 경제 시책에도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한편 새 역법(曆法)을 채택하여 시헌력(時憲曆)을 실시하고, <내푼(內訓)>을 간행하여 가정의 화평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사람 하멜(Hamel)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 국방력도 크게 강화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興淸亡請(흥청망청)
興;흥할 흥, 淸:맑을 청, 亡:망할 망, 請:청할 청.
뜻: 마음껏 즐기는 모양, 또는 돈이나 물건을 아끼지 않고 함부로 쓰는 것을 이른다. 연산군에게
서 유래했다.
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한국(韓國)의 인간상(人間像)
조선 제10대 연산군(燕山君.1476~1506)은 어머니 윤씨(尹氏)가 품행이 사악하다 하여 성종(成宗. 재위1460~1494)에 의해 폐비되어 사약을 받고 죽자 계모이자 중종(中宗)의 어머니인 자순대비(慈順大妃)에 의해 길러졌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생모의 죽음에 대해서 알게 되자 충격을 받고 자포자기한 나머지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연산은 채홍사(採紅使. 창기(娼妓) 중에서 아름다운 계집을 뽑는 벼슬아치)와 채청사(採淸使. 처녀 중에서 장래 아름다워질 계집아이를 뽑는 벼슬아치)를 전국에 파견하여 얼굴이 예쁜 기생과 처녀는 물론이고 여염집 아낙네까지 불러올렸다. 그리고 기생은 흥청(興淸), 또는 운평(運平)이라 했다.
흥청이라는 말의 본디 뜻은 ‘나쁜 기운을 씻어낸다는 의미에서 기생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는 또 성균관과 운각사를 폐지하여 유흥장으로 만들었다.
지방의 창기들은 궁에 들어와 흥청이 되는 것만으로도 지체가 높아졌는데 왕과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면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하여 급수가 더 높아졌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기녀는 그보다 낮은 지과흥청(地科興淸)에 머물러야 했다.
연산의 이런 패륜은 신하도 가리지 않아 교리(校理) 이장곤(李長坤)의 처까지 범했다. 그런 사실을 안 장곤은 처를 살해하고 전라도 보성으로 도망갔다. 그런데 마침 보성군수가 친구여서 그의 도움으로 백정(白丁) 양수척(楊水尺)의 사위가 되어 지냈다.
그 후 연산이 몰락하고 중종이 즉위하자 이장곤은 다시 복귀하여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그 바람에 백정의 딸은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다.
또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박원종(朴元宗)의 누나는 연산의 백부(伯父. 큰아버지)인 월산대군의 후처였는데, 연산이 어느 날 뜰을 거닐다가 백모(伯母, 큰어머니)를 보고 그 미모에 반해 자기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다.
봉변을 당한 백모는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박원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나중에 반정을 일으켜 연산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연산군은 흥청거리며 집권 기간을 지냈으나 스스로 망하기를 자청하였다. 그래서 흥청망청(興淸亡請)이라는 말이 나돌게 되었다. 그러니까 흥청거리다가 스스로 망하는 일을 끌어 들였다는 망청이 된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