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에게는 그 시인을 대표해 주는 대표작이 있다. 시인의 이름을 대면 곧바로 떠오르는 작품이 바로 대표작이다. 시인의 얼굴과 같은 작품이라 하겠다. 책을 뒤적여서 찾아내거나 고르는 것이 아니다. 그냥 평상의 기억 속에 각인된 시의 제목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시 전문가나 평론가들에 의해서 선별되는 작품이 아니다. 보통의 사람들, 일반 독자들에 의해 기억되어 이야기되는 작품이 바로 그 시인의 대표작이다.
한 시인에게 있어 대표작이 없다는 것은 매우 쓸쓸한 일이다. 그것은 그 시인의 존재 문제에까지 관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실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고 활발한 활동을 한 시인이라 해도 대표작이 없으면 끝내는 잊혀지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세월을 이기는 것은 사람이나 사건이 아니고 작품이다. 시인은 결코 산문적인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남는 것은 작품이다. 그것도 많은 작품이 아니고 한두 편의 작품이 남는다.
어디에 남는가? 일반인들, 즉 무명의 독자들 가슴에(뇌리나 기억에) 남는다. 결코 유식한 평론가나 문학의 전문가, 대학교수나 신문기자들 마음에 남는 것이 아니다. 시를 잘 모르는 독자들의 가슴에 남아야 정말로 남는 것이다. 이것이 무서운 일이다. 도대체 시인의 대표작은 누가 결정하는가? 이미 짐작하는 일이겠지만 그것은 일반 독자들이 결정한다. 시인들이 아무리 자기 작품 가운데 이것이 대표작이라 우겨도 소용이 없다. 독자들이 그렇다고 그러면 그런 것이다. 그만큼 독자들의 힘은 막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이름 없는 독자들, 문학을 잘 모르는 독자들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
아마도 90년대 후반쯤 어느 가을이었을 것이다. 한국시인협회 가을 세미나가 충남 부여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김춘수 시인을 만나 여쭈어 본 적이 있다.
“선생님의 대표작이 「꽃」이지요?”
그때 왜 내가 뜬금없이 노시인에게 그런 질문을 드렸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당연히 그렇다는 대답을 들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 밖의 대답이 나왔다.
“누가 그래요? 누가 그런 엉뚱한 얘기를 하고 그래요?”
노시인은 분명 화를 내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일이었다. 그냥 보통으로 내는 화가 아니었다.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도록 내는 화였다. 더 이상 나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 앞뒤 사정을 살피면 그 까닭을 모를 바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춘수 시인이 「꽃」이라는 시를 당신의 대표작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일반 독자 대중들도 그럴까? 아니다. 일반 독자 대중들한테 물으면 여지없이 「꽃」이라는 작품을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이것이 문제다. 시인은 아니라고 그러는데 독자들이 그런다. 그러면 누구의 의견대로 대표작이 결정되는가? 시인의 의견이 아니고 독자의 의견이다. 이것을 시인들은 다시금 알아야 한다. 그래서 독자들이 무서운 대상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시인들은 그의 모든 작품들과 함께 후세에 남지 않는다. 한두 편의 대표작과 함께 남는다. 그것도 독자들이 그렇다고 인정해 주는 작품과 함께 그렇게 된다. 우리의 시사에서 함형수나 이장희, 오일도 같은 시인은 그들의 전 작품이 한 권의 시집으로 꾸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 않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 편의 시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잊혀지지 않는 별과 같은 시인이 되었다. 함형수 시인의 「해바라기의 비명」이란 시와 이장희 시인의 「봄은 고양이로다」와 오일도 시인의 「내 소녀」 같은 작품이 그와 같은 작품들이다.
흔히 시인 자신은 힘들여 애써서 쓴 시를 자기의 대표작으로 정하고 싶을 것이다. 그만큼 애정이 가는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뜻밖으로 일반 독자들은 그런 작품보다는 시인이 크게 힘들이지 않고 쓰윽 쓴 시를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시인이 힘들여 쓴 작품에는 작위성이랄지 힘들여 쓴 흔적이 들어갈 수 있다. 야구공을 칠 때 어깨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가면 안타나 홈런이 안 나오는 것과 같다.
이럴테면, 박재삼 시인더러 당신의 대표작을 물으면 「춘향이 마음」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 독자들은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최고의 작품으로 친다. 이러한 경향은 생존 시인을 두고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신경림 시인에게 물으면 「남한강」이나 「농무」를 대표작이라 말할 것이다. 그런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 독자들은 서슴없이 「갈대」나 「목계장터」를 든다.
그래도 한 시인이 한두 편의 대표작을 남기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고 영광스런 일이다. 시인의 이름과 함께 대표작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시인은 다시 한 번 곤란하다. 결국 시인은 한두 편의 작품으로 남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시인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 사람이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시가 죽지 않고 독자들 가슴에서 살아 있기에 죽지 않는 목숨이 되는 것이리라.
< 함께 읽는 시 >
호수/ 정지용
1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맘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2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꾸 간지러워.
< ‘꿈꾸는 시인, 나태주의 시 이야기(나태주, 푸른길, 2017)’에서 옮겨 적음. (2019.10.12.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