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1980년대말 서편마을(3통, 연수동 681-4) 가까운 곳에서 교량 교체때 이 유애비(遺愛碑)가 출토(出土)되었다고 한다.
가경 19년 11월 일 립(嘉慶 十九年 十一月 日 立) (가경 19년은 1814년이다. 순조(純祖)는 1800년에 즉위하였으나 다음해인 1801년을 원년(元年)으로 삼는다. 따라서 순조 14년이다. 조선시대에는 陰曆을 사용했다)에 세운 송덕비(頌德碑)로 강원도와 삼남(三南)에 수해(水害)가 심한 해에 자기의 급여로 민생을 구휼(救恤)한 功을 기리는 내용이라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보더라도 관련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지방에서 일어난 소소(小少)한 일이니 기록되지 않을 수 있다.
수해(水害)가 심해 구휼했다하나 어디까지나 추정일뿐 가뭄이 극심하고 날씨가 한랭(寒冷)해서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구휼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 비석이 발견된 곳이 개울가 다리밑이고 그 무렵 충주에 큰 물난리가 났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 같다.
참고로
1980년 7월 22일에 보은군에서 대홍수가 일어났다.
1984년 8월말과 9월초에 한강 대홍수가 일어났다. 1987년 7월 21일부터 23일까지 중부권 금강 대홍수,
7월 27일 수도권에 집중호우가 쏟아져 한강 대홍수가 일어났다.
아래 승정원일기를 보면 연원 찰방 이승렬은 비인현감 이원숙과 순조 14년 10월 25일 서로 자리를 바꾸었다(相換). 이 비를 세운 것은 11월이니 인사이동이 있은 후가 된다. 연원 찰방 이승렬이 충주를 떠나게 되었으니 전별(餞別) 기념으로 세웠다고 봐야 한다. 날짜는 11월인데 앞당겨 새길 수 있다.
行察訪李侯升烈淸德遺愛碑
(행찰방이후승렬청덕유애비)
嘉慶十九年 十一月 日 立
(가경십구년 십일월 일 립)
月廪捐俸 (월름연봉)
歲○賑民 (세○진민)
銘在片石 (명재편석)
永垂天春 (영수천춘)
廪 : 廩와 같은 자임, 곳집 름, 녹미 름, 녹봉 름.
捐: 버릴 연, 헌납할 연, 기부할 연.
俸: 녹 봉, 녹봉 봉.
○부분은 德으로 보인다. 글자가 지워졌는데 누군가가 고의로 훼손했음이 분명하다.
《충주의 금석문(2006년)》에는 乏자로 되어 있다.
賑: 구휼할 진
銘: 새길 명.
片: 조각 편
垂: 드리울 수.
天春: 보통 天秋를 많이 썼다. 오랜 세월. 天春으로 쓴 것은 드물다. 다만 한시(漢詩)에서 "겨울 한가운데 찾아온 봄날 같은 기운"을 비유할 때 쓰이기도 했다.
훼손된 글자를 자세히 보면 乏자는 아니다. 빠진 글자를 乏자로 넣고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月廪捐俸 (월름연봉) : 매달 받는 봉급을 흔쾌히 내놓아
歲乏賑民 (세핍진민) : 흉년이 드는 해에 주린 백성을 구휼하셨다
銘在片石 (명재편석) : 공적을 한 조각 돌에 새겨 기리니
永垂千春 (영수천춘) : 영원토록 오랜 세월 동안 전해지리라
빠진 글자를 德자로 넣고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德자를 닮았다.
月廪捐俸 (월름연봉) : 매달 받는 봉급을 흔쾌히 내놓아
歲德賑民 (세덕진민) : 해마다 덕을 베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셨다
銘在片石 (명재편석) : 공적을 한 조각 돌에 새겨 기리니
永垂千春 (영수천춘) : 영원토록 오랜 세월 동안 전해지리라
고의로 훼손된 점을 고려하면 德자로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德이 아니라고 반감(反感)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옛날 연원역(連原驛)에 노비(奴婢)들이 많았으니 노비들이 글자를 쪼았을까? 德자만 쪼았으니 글자를 아는 사람이 쪼았다고 봐야 한다.
몇 해전에 충주시 홍보물인《월간 예성》에 이《이승렬 유애비》를 소개하면서 연원찰방 이승렬을 모범공무원으로 표현했다. 조선시대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벼슬에 목숨을 걸었던 건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면 우선 가문의 영광이었고 수많은 식솔(食率)들을 먹여 살리려면 富를 늘려야 하는데 벼슬길에 나가는 게 최선의 선택이자 절호의 기회였다.
조선시대에 17세부터 84세에 사망할때까지 67년간 일기를 쓴 인물이 있다.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를
쓴 武班 노상추(1746∼1829)인데 무과(武科)에 합격하기 위해 가산(家産)을 탕진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벼슬살이 하면서 전답(田畓)이 늘어났다.
무과에 합격하자 인근 고을을 비롯 멀리서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한다. 도합 5,000여명. 좋게 생각하면 경사를 축하해 주기 온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안면을 트고 교류를 원하고 줄을 대기 위해 온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부탁할 일이 많은데 중앙 조정에 진출하는 지역인물이 나왔으니 이보다 더한 경사(慶事)가 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기 잇속에 민감하다.
춘생문 사건(春生門事件)을 모의하다 새남터에서 순절(殉節)한 제천출신 무신(武臣)인 두남(斗南)
이도철(李道徹, 1852~1895)은 1893년(고종 30) 음서(蔭敍)로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어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데 바리바리 한 몫 챙겨오게 된다. 《이도철과 춘생문 의거, 2006년》라는 책에 나온다. 어디 이들 뿐이겠는가? 그리고 지금은 이런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참고
순조14년(1814년 가경19년) 10월 25일 [승정원일기] 吏批의 관원현황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 ○有政。 吏批, 判書李肇源進, 參判趙萬元, 參議徐有聞竝牌不進, 右承旨趙晉和進。 以金羲淳爲大司憲, 閔命爀爲工曹判書, 權熀爲奉常正, 李元默爲長寧殿令, 尹成圭爲監察, 池泰涇爲典獄主簿, 尹行運爲廣興奉事, 申錫輔爲軍資奉事, 承文正字單姜橒, 成均博士單李衡柱, 學錄單李文欽, 學諭單金祖欽, 兼春秋單李禮延·任㸁, 沔川郡守徐有儞, 文義縣令洪醇浩相換, 溫陽郡守鄭夏容, 結城縣監李儒亨相換, 庇仁縣監李元肅, 連原察訪李承烈相換, 故進士權萬衡贈吏參例兼, 工參權烒考, 故學生姜玳贈持平, 忠節卓異贈職事承傳, 故學生李豹贈戶佐, 故學生李乘贈戶佐, 以上孝行卓異贈職事承傳, 故嘉善張夢記贈戶判例兼, 忠節卓異贈職事承傳, 故郡守李汝忠贈左承旨, 孝行卓異贈職事承傳, 故學生鄭利濟·金百源贈童敎, 以上孝行卓異贈職事承傳。
<번역>
정사가 있었다.
이조의 인사에서 판서 이조원은 나아왔고, 참판 조만원과 참의 서유문은 모두 패초(牌招)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으며, 우승지 조진화가 참석하였다.
인사 발령으로
김희순(金羲淳)을 대사헌에,
민명혁(閔命爀)을 공조판서에,
권황(權熀)을 봉상정에,
이원묵(李元默)을 장녕전령에,
윤성규(尹成圭)를 감찰에,
지태경(池泰涇)을 전옥주부에,
윤행운(尹行運)을 광흥봉사에,
신석보(申錫輔)를 군자봉사에 임명하였다.
또
승문원 정자에는 강운(姜橒),
성균관 박사에는 이형주(李衡柱),
학록에는 이문흠(李文欽),
학유에는 김조흠(金祖欽),
겸춘추에는 이예연(李禮延)·임연(任㸁)을 임명하였다.
또
면천군수 서유니(徐有儞)와 문의현령 홍순호(洪醇浩)를 서로 교체하고,
온양군수 정하용(鄭夏容)과 결성현감 이유형(李儒亨)을 서로 교체하고,
비인현감 이원숙(李元肅)과 연원찰방 이승렬(李承烈)을 서로 교체하였다.
또 추증으로
고(故) 진사 권만형(權萬衡)에게 이조참판을 증직하고,
예에 따라 겸직을 더하였는데, 이는 공조참판 권식(權烒)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고(故) 학생 강대(姜玳)에게 사헌부 지평을 추증하였는데, 충절이 뛰어난 데 따른 특명 때문이었다.
고(故) 학생 이표(李豹)와 고(故) 학생 이승(李乘)에게 각각 호조좌랑을 추증하였는데, 효행이 뛰어난 데 따른 특명이었다.
고(故) 가선대부 장몽기(張夢記)에게 호조판서를 추증하고 예에 따라 겸직을 더하였는데, 충절이 뛰어난 데 따른 특명이었다.
고(故) 군수 이유충(李汝忠)에게 좌승지를 추증하였는데, 효행이 뛰어난 데 따른 특명이었다.
고(故) 학생 정리제(鄭利濟)와 김백원(金百源)에게 동몽교관을 추증하였는데, 효행이 뛰어난 데 따른 특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