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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묵상글 ( 연중 제6주간 수요일. - 회춘이 아니라 회생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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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연중 제6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회춘이 아니라 회생을
오늘 주님께서는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데
모든 사람이 보는 데서 고쳐주시지 않고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것도 마을 밖까지 데리고 나가셔서 고쳐주십니다.
이 의미가 은밀한 사랑의 표시라고 예전 강론에서는 얘기했는데
오늘은 그 의미를 다르게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복음 끝에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과 오늘 독서와 연결해 묵상해보니 다른 관점에서
그 의미를 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는 영적인 눈이 새로 열리는 것과도 연결이 됩니다.
육신의 눈만 열린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도 열렸을 것이고,
그래서 세상은 이제 새 세상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가 살던 저 마을은 옛 세상이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의 의미도,
그를 옛 세상에서 빼내시는 의미일 것이며,
저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심은 옛 생활로 돌아가지 말고,
새 세상으로 나아가 새 삶을 시작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노아 얘기도 같은 의미지요.
홍수로 세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지만
파국이 노아에게는 새 세상의 시작이고,
그것도 육백한 살에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백 년을, 없어져야 할 세상에서 산 셈입니다.
그리고 삼백오십 년은 새 세상에서 살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저나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참 의미가 있겠습니다.
이 나이를 십분의 일로 줄이면 환갑까지 산 다음 35년은 새롭게 사는 겁니다.
환갑까지 참 인간적으로 그리고 세속적으로 살았습니다.
이 나이에, 뭐 새로울 것이, 있겠냐고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며 살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오늘 복음에서 깨우침을 받고 노아에게서 깨우침을 받는다면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지 않고 지금 새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고작 회춘하려 들지 않고 회생의 삶을 용기 내어 시작할 것입니다.
다시 봄을 맞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만큼 뼈를 깎는 아픔이랄까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없을 수 없겠습니다.
전에도 예를 든 적이 있지만, 독수리의 회생과 같습니다.
몇 년 전 저는 이렇게 독수리의 회생에 대해 묘사했지요.
“독수리는 70년을 사는 장수 동물이지요.
그런데 독수리가 70년을 살기 위해서는 40세에 갱년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40세가 되면 독수리의 부리와 발톱과 깃털은 노쇠하여
그대로 놔두면 사냥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죽게 됩니다.
이때 독수리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대로 죽을 것인가 환골탈태할 것인가.
환골탈태를 선택한 독수리는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먼저 바위를 쪼아 낡은 부리를 부숴버리고 새 부리가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 부리가 자라면 새 부리로 낡은 발톱을 다 뽑아버리고
새 발톱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 발톱이 자라면 새 발톱으로 낡은 깃털을 다 뽑아버리고
다시 새 깃털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 부리와 새 발톱과 새 깃털을 가지게 되고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로운 30년 더 살게 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삼십 년을 더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과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인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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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오늘 <복음>에는 ‘눈먼 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눈먼 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냥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기보다 보기는 보되 눈이 가려져 있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이, 곧 어둠에 덮여 빛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그는 마치, 장미꽃을 그 가시로 찔러 상처를 주는 것으로 알뿐, 그 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불이 자신을 뜨겁게 태워 상처 입히는 것으로 알뿐, 주변을 환히 밝혀준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볼뿐, 상처에서 흘러나온 구원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이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요한 1,5),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곧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대체 무엇이 가리고 있는 것일까요?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하게 시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육안’, 속을 들여다보는 보는 ‘심안’(마음의 눈),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보는 신앙의 눈인 ‘영안’(영의 눈)입니다. 이 신앙이 깊어가면서 ‘영의 눈’이 밝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시편>에서,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 35,10)라고 노래하고 있듯이,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의 신비를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당신의 ‘침’을 바르십니다. 이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신 이야기’(마르 7,31-37)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혀에 대신 것처럼(마르 7,34), 성령의 도유를 말합니다. 곧 영으로 도유되어 치유된 눈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혹 사람들만 보이나요? 이제는 ‘육안’으로 사람의 형상만 보지 말고, ‘심안’으로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 ‘영안’으로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두 눈에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겉 형상의 사람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볼 줄 알고, 나아가서 그 사람 안에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풀 한 포기에서도 하느님의 능력을 보며, 그분의 말씀에서 하느님 나라와 사랑을 보는 눈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주님!
제 눈이 상처를 볼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을 들통 내도 어둠을 볼뿐,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이제는 겉 형상만 보지 말고, 그 안에 펼쳐지는 구원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영으로 제 영혼을 도유하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눈이 밝아지게 하소서.
하여,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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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의 눈을 뜨십시오
눈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빵이 없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18.21)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말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이느냐?’의 질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느냐? 하느님의 능력을 지닌 ‘구세주가 보이느냐?’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육안’, ‘심안’, ‘혜안(영안)’으로 구별합니다. 육안은 그야말로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그러나 심안은 마음의 눈입니다.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사람은 긍정적으로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굽은 눈으로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어떤이는 장미꽃을 보면서도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한 채 가시만은 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11,34-35).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영안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도 아니고 내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눈도 아닙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이요,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119,105). 영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지만 자기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눈먼 사람입니다. 지식이나 재물도 꼭 필요한 때 쓰지 못한다면 눈먼 이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먼 이는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익숙해져 있는 대로 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눈먼 이가 다니면서 제일 많이 부딪친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으시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겉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행하여지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똑똑히 보기 위해서는 한두 번으로 안 됩니다. 반복과 훈련이 필요하고 서서히 알아보게 되고 깨치게 됩니다.
육안의 눈을 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 것에 눈이 멀면, 결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예,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게 되었으면 어두운 과거의 마을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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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은 은퇴하신 전임 마산 교구장 배기현 주교님의 책 “늙은 아버지와 고독한 아들”을 읽었습니다. 마산교구 총대리 시절에 교구 주보에 매주 올린 글을 모은 책입니다. 글 하나하나에 주교님의 진솔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글은 맵시와 내용도 중요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진실한 마음은 전해지기 마련입니다. 글 내용 중에 ‘담배’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담배를 배웠다고 합니다. 35년간 담배를 피우던 중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1주일을 지낼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추기경님은 학도병 시절에 담배를 배웠고, 3번의 결심 끝에 65세가 되어서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배 신부! 담배는 그냥 끊는 거야.”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진심’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뒤로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느 날 부친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니 담배 끊었다면서? 내 니가 신부가 된 것만 해도 가슴 아픈데 신부가 담배꺼지 끊고 어찌 살끼라고, 도로 푸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담배를 끊으라고 하였던 추기경님의 마음도, 애잔한 마음에 담배를 다시 피우라고 했던 아버지의 마음도 참 따뜻하게 보였습니다. 주교님은 담배는 끊었지만 하느님 품으로 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컴퓨터나 프린터가 작동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안 되면 마지막으로 해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원’을 끄고 다시 켜는 것입니다. 그러면 컴퓨터도 프린터도 다시 정상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안 되면 전문가를 불러서 손을 봐야 합니다. 전원을 끄고 다시 켜는 것은 컴퓨터와 프린터가 미워서가 아닙니다. 다시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저의 방법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작동이 잘 되지 않듯이 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도 ‘사탄’이라는 바이러스가 들어왔습니다. 그 바이러스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전쟁과 폭력으로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파괴하고, 타락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의 심판’으로 병든 세상을, 타락한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려 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하셨고 물의 심판이 끝난 후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새로운 세상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쿨’하게 인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는 방법을 포기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외아들은 하느님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세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폭력, 정복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닌 나눔, 희생,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 아닌 자비, 인내,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죄와 인간의 잘못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을 뽑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품종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빛이 입자와 파동의 속성을 가진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밀과 가라지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라지의 모습일지라도 뉘우치고 회개하면 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밀의 모습일지라도 악의 유혹에 빠지면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10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등잔에 기름을 채워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은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 다만 옹기장이의 뜻에 따라서 화병도 되고, 그릇도 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화병이든, 그릇이든 쓰임새에 맞게 사용되면 됩니다. 주어진 나의 삶에 감사한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소경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욕망과 교만으로 닫혀있는 우리의 눈을 순명과 겸손으로 새롭게 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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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물건을 인터넷에서 구매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찾으십니까? 물론 주로 이용하는 사이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마 대부분 가격 비교 사이트를 보고서 단 10원이라도 더 싼 쇼핑몰을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물건에 대한 비교를 많이 해서일까요?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교도 참 많이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동차를 새로 장만하려고 하는데, 자동차와 자전거를 비교하면 어떨까요? “아니, 그렇게 멍청한 비교가 어디 있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동차와 자전거는 둘 다 이동 수단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지요. 쌍둥이라도 성격이 다르고 특기와 재주가 다릅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각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유한 ‘나’를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본당 신자가 새로 부임한 신부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임 신부님보다 여러 측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강론, 업무 처리, 신자들과의 친교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 비교가 맞을까요?
예전에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어느 할머니께서 역대 본당 신부님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무엇을 잘하셨고, 저 신부님은 저것을 잘하셨고….”라는 식으로 각 신부님의 고유한 면을 바라보면서 칭찬하셨습니다.
이렇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의 습관적인 잘못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분히 하나씩 고쳐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고유한 면을 발견하면서 인정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간다면, 어느 순간 어떤 사람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냥 단번에 고쳐주시면 될 것 같은데, 여러 단계를 거치십니다.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다시 두 눈에 손을 얹으십니다. 그때 비로소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났다고 해서 곧바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속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으며 또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당 한 번 나갔다고 미사 한 번 참석했다고 해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주님의 품 안에 머물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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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비결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다(제임스 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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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기쁨, 개안開眼의 여정
-주님과의 만남-
잘 들으라 있는 귀요, 잘 보라 있는 눈입니다. 잘 보고 잘 듣는 것은 영성생활의 기본입니다. ‘들어라’로 시작되는 베네딕도 규칙이요, ‘보라’ 자주 언급되는 성서에 말마디입니다. 그리하여 귀가 어두우면 보청기도 하고 눈이 어두우면 돋보기를 합니다.
색맹色盲이란, 문맹文盲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색깔을 분별 못하는, 색에 눈멈을 뜻하는 색맹色盲이요, 눈이 있어도 글자를 몰라 읽지 못함을 문맹文盲이라 합니다. 얼마나 답답한 색맹에 문맹이겠는지요. 참 다양한 눈멈입니다. 눈이 있어도 무지에 눈멀면 보지 못합니다. 탐욕, 질투, 분노, 집착, 어리석음 등 모두가 우리를 눈멀게 하는 무지입니다.
그러니 육안肉眼만 있는게 아니라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도 있고, 영의 눈인 영안靈眼도 있습니다. 육안의 시력은 날로 약화되도 심안의 시력은, 영안의 시력은 날로 좋아질 수 있습니다. 기쁨도, 감사도, 행복도, 선물도 발견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릴 때 발견되는 것들입니다. 눈이 있어도 무지나 탐욕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무지에 눈이 멀어 기쁨을, 감사를, 행복을 곁에 놔두고 슬프게, 불평하며, 불행하게 산다면 너무 어리석은 어처구니 없는 삶입니다. 개안의 기쁨, 개안의 여정입니다. 우리 영적 삶에서 개안의 기쁨은 절대적이요 개안의 여정이 참 소중합니다.
눈이 열려 ‘있는 그대로’ 실상實相을, 진상眞相을 보는 개안開眼이라면, 날로 마음의 눈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이라면 얼마나 바람직하겠는지요. 바로 행복기도 다음 대목은 개안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얼마나 자주 인용했던 자작 행복기도이던지요!
“주님,
당신을 만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옵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개안의 기쁨, 개안의 여정에 참으로 결정적인 것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은총이 바로 마음의 눈이, 무지의 눈이 열리는 개안인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릴 때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바로 세례성사는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림을 상징하는 입문성사입니다. 바로 오늘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는 복음의 일화와 제1독서 창세기 노아의 홍수 역시 세례성사를 상징합니다. 초대교회와 초대교부들은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벳사이다에서 눈먼이를 고치시는 내용이 은혜롭습니다. 바로 그 어디나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리는 자리가 벳사이다입니다. 오늘 개안은 그대로 무지의 눈이, 마음의 눈이 열림을 상징하니 그대로 세례 은총입니다. 개안은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진행되니 그대로 개안의 여정을 상징하는 다음 복음이 은혜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바로 점진적인 개안의 과정은 그대로 우리 평생 개안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날로 주님과의 만남과 더불어 함께가는 개안의 여정에 밝아지는 마음의 눈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세례성사로부터 시작된 개안의 여정은 날마다의 성체성사, 주기적인 고백성사라는 두 평생 성사 은총이 날로 우리 마음의 눈을 밝게 합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이 바로 개안의 여정입니다.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무지의 어둠도 점차 사라져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대중의 인기와 호기심에 거리를 두는 예수님의 겸손한 면모입니다. 이처럼 평생 날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과의 만남중에 서서히 좋아지는 마음의 눈, 마음의 시력입니다. 날로 마음의 눈이 밝아질수록 주님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한 참사람이 됩니다. 무지에 눈멀 때 괴물이요 폐인이 될 수 있지만 개안과 더불어 참사람의 실현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노아는 홍수의 와중에도 방주에 머물다 구원되니 그대로 물로 새롭게 태어난 세례성사의 구원 은총을 상징합니다. 역시 방주에서 나오는 구원의 여정도 점차적인 과정을 밟습니다. 얼마나 신중한 믿는 이의 처신인지 믿는 이들의 모범인 노아입니다. 세례의 구원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그의 첫 제사가 참으로 개안한 노아의 모습입니다. 말그대로 세례를 통해 신인류 노아의 재탄생을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노아는 제단을 쌓고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셨다.’ 이어지는 주님의 다짐이 우리의 개안의 여정에 큰 가르침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우리의 무지의 악, 무지의 어리석음, 무지의 탐욕을 각성케 하는 말씀입니다. 지속가능한 일상이 계속되리라는 주님의 확약의 말씀인데, 무지한 사람들의 탐욕으로 인해 기후위기를 초래함으로 공동의 집인 지구가 위협받고 있으며 지속 가능했던 순환의 삶이니 무너지고 있으니 이것은 순전히 무지한 인간탓입니다. 참으로 생태적 회개가 절박한 시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우리 무지의 눈을 밝혀 주시어 생태적 회개의 실천에 더욱 분발 노력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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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모든 사람은 소중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신 각기 다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다르기에 우리는 가끔 사람들은 무엇에 비유해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소나무 같은 사람,
단풍나무 같은 사람,
느티나무 같은 사람,
플라타너스 같은 사람,
대나무 같은 사람.
여러분은 어떤 나무 같은 사람으로 보이기를 바라십니까? 그런데 방금 들었던 예들은 모두 좋은 의미에서 우리를 나무에 빗대어 말했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신 사람이 이야기한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는 그리 좋은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저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무 같은 사람….
이 표현은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사람인데 나무 같아요.’는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내 모습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 마저 들게 합니다.
사람이 나무 같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나무껍질처럼 딱딱해져 있는 우리 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지 않고 경직되어 있는 모습도 그 안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가 딱딱해졌다는 뜻은 멈췄다는 뜻과 같은 뜻일 것입니다. 또한 죽음을 의미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늘 부드럽기를, 생기 가득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딱딱한 마음 곁으로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무 같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사람처럼 생긴 나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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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면서 우리가 하는 가장 쓸데없는 짓
해는 떠서 낮에 걸터앉아 있습니다.
달은 떠서 밤에 걸터앉아 있습니다.
낮이 지나서 밤이 오면 해는 달에게 자리를 내어줍니다.
밤이 이나 낮이 오면 달은 해에게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들은 서로를 비교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시간에 빛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감옥이고, 어둠이고, 고통입니다.
세상 살면서 우리가 하는 가장 쓸데없는 짓.
그것은 바로 ‘비교’를 통해 나에게 ‘좌절’을 쥐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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