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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남도발과 북핵개발에 함구하고 있는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와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북한 핵공격에 방어용 사드배치 반대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국민적 총화 단결로 북핵을 막을 애국적 대안은 제시하지 않고,
국민을 분탕질로 선동하는 사드배치반대는
대한민국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세습의 왕권정치에
적화통일 제물로 바치려는 반역행위다.
이러한 것은 자유대한민국의 국민과 한국천주교회를 분열시켜
남남갈등 국론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 주교 및 사제들은!
북한의 각종 수많은 대남도발과
연평해전.서해교전등 천안함폭침.
연평도 포격. DMZ목함지뢰 폭발등
무지막지한 북한대남도발에
애국충절의 죽음과 부상으로 으로 희생된
자유대한민국의 국군장병.전경을 위해
병원을 방문하여 부상자를 위문 한 적도 없고,
순직한 국군장병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교회에서 분향소를 설치하여
신자들과 함께 기도를 해본 적이 없다.
주일미사시 신자들의 기도에
북괴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부상과 순직한 국군장병을 위한 기도지향도 없다.
그들은 종북좌빨적 행위로 변질되어
자유대한민국의 수호와 경제 발전에 분탕질과 선동으로
북한 대남공작원이 벌리는 간첩질과 다름없는
미군철수. 보안법 철폐. 국정원 헤체등의 발언과 선동으로
국가주요정책을 방해하고, 촛불시위 길거리 미사등으로
국가 안보에 위해를 가하는 못된 짓거리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못된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하느님나라의 영광을 드리는 천주교회가 아니고
북한 김정이에게 영광과 영생을 기도하는
북괴 대남선전원(공작원)이 된
한국 천주교회 빨간 악의 바이러스 일뿐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정진석추기경 사퇴 요구할 때 구경만한 주교들!
북한인권 3대 세습독재와 북한인권탄압, 핵개발, 핵위협에 대한
규탄성명 한번 내지 않는 주교회의!
오직하면 한국천주교 평신도 여러분들이
“김정은 기쁨조 종북정치사제들, 북으로 떠나라”는 규탄집회을 하는가!
사제로서 존경받고 싶거든,
대한민국의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자유대한민국의 안보수호와 경제성장에
분탕질로 위해를 끼치지 말길 바란다.
불멸에 하느님, 예수님, 성령의 교회 권위에
순종하고 평신도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의 복음을 전파 하고 있는지!
스스로 반성하고 부끄러워해야 하며,
본연의 하느님의 종 “사제”로 회심 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대남도발 사례들(2016.02.06.)
[편집]
1945년 해방 후 남과 북에 각기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서 혼란한 해방공간의 상황은 곧 남북교전으로 이어졌다.
북한은 북한대로 내부정리가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대로 남조선 반동들을 맛깔나게 후려치면 우루루 허물어지겠지?" 라고 생각을 하며 끊임없이 국지전을 감행했다. 훗날 이러한 상황은 한국전쟁 연구가들에게 교전확대설의 떡밥을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교전확대설은 어느정도 맞는 말이긴 하다. 다만 교전이 확대된 것이 북침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남침으로 확대된 것. 이러한 일련의 교전들은 사실 북한이 신생 조선인민군의 교리와 전투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부단한 시도였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교전이 하도 많았기 때문에 신문지상에 안 실린 것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1948년 이후부터는 남한에 정치적인 침투를 위해 공작원을 보내기 시작한다.
영월발전소 폭파기도 (1948. 11. 26)
서부전선 교전 (1948. 12. 2)
개성 인근 교전 (1949. 2. 6)
개성 내습 사건 (1949. 5. 4)[3]
포천 전투 (1949.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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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초반에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거짓으로 귀순한 간첩들이 정치적인 침투를 시도했으며 6. 25 전쟁이 끝난 이후 분단이 고착화되자 정보 수집과 체제 교란을 위해 간첩을 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남파 공작원이 일으킨 납북 사건과 월북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까지 이어진다.
성시백 간첩 사건 (1950)
김수임 간첩 사건 (1950. 4)
박정호 간첩 사건 (1953. 5~1957. 10. 18)
정국은 간첩 사건 (1953. 8. 31)
풍세면 무장간첩 사건 (1954. 8. 24)
김정제 간첩 사건 (1957. 8)
박상혁 간첩 사건 (1957. 9)
창랑호 납북 사건 (1958.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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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은 무장공비에 의한 침투와 교전이 잦았던 시기이다. 7.4남북 공동성명 직전 김일성이 이후락에게 1.21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며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거 우리 군 내부의 극렬분자들이 저지른 짓이다. 나는 진짜 몰랐다. 미안하다" 라고 비공식적으로 사과한 바 있다.[4]. 당시 교전의 원인과 남북관계를 알 수 있는 약간의 실마리인 셈.
진주 덕의마을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6. 5. 17)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967. 1. 19)
중부전선 교전 (1967. 4. 12)
격렬비열도 간첩선 격침 사건 (1967. 4. 17)
화천군 비무장지대 침투사건 (1967. 04. 12)[5]
서부전선 미군막사 폭파사건 (1967. 4. 22)
강릉 고단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7. 5. 21)
연평도 근해 어선포격사건 (1967. 5. 27)
대성동 미군트럭 기습사건 (1967. 8. 7)
서부전선 군용트럭 기습사건 (1967. 8. 10)
판문점 미군막사 기습사건 (1967. 8. 28)
경원선 초성리역 폭탄테러사건(1967. 9. 5)
경의선 운정역 폭탄테러사건(1967. 9. 13)
1.21사태 (1968. 1. 21)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1968. 1. 23)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 11. 2)
주문진 무장간첩사건 (1969. 3. 16)
EC-121 격추 사건 (1969. 4. 15)
1차 흑산도 간첩선 격침 사건 (1969. 6. 9)
2차 흑산도 간첩선 격침 사건 (1969. 10. 23)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1969. 12. 11)
해군 방송선 피랍사건 (1970.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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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방송정 I-2 납북 사건(1970.6.5)
현충문 폭파 미수 사건 (1970. 6. 22)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 (1971. 1. 23)
소흑산도 근해 간첩선 격침사건 (1971. 6. 1)
철원군 비무장지대 총격사건 (1973 .03. 07)[6]
추자도 무장공비 침투사건 (1974. 5. 20)
해경 863경비함 격침 사건 (1974. 6. 28)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1974. 8. 15)
휴전선 남침용 땅굴 발견 사건 (1974. 11. 5 등 1990년까지 총 4차례)
헨더슨 소령 사건 (1975. 6. 30)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76. 8. 18)
광천지구 무장간첩 침투사건 (1978. 11. 4)
최은희 신상옥 납치사건 (1978. 1. 14, 1978. 7. 19 순차적으로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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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교 무장공비 침투사건 (1981. 6. 29.)
SR-71 정찰기 피격 사건 (1981. 8. 26.)
저진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 (1982. 5. 15.)
임월교 무장공비 침투사건 (1983. 6. 19.)
월성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 (1983. 8. 4.)
독도 근해 간첩선 격침 사건 (1983. 8. 13.)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1983. 10. 9)
다대포 침투 무장공비 매복 생포 작전 (1983. 12. 3.)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 사건(폭탄 투척 사건) (1983. 9. 22.) 체포된 공비 진충남과 이상규의 증언에 따른 발표.
청사포 간첩선 격침 사건 (1985. 10. 19.)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1986. 9. 14.)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 11. 29)
[편집]
은하계곡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2. 5. 22.)[7]
임진강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5. 10. 17.)
부여 간첩 사건 (1995. 10. 24.)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6. 9. 18)
철원 GP교전 (1997. 7. 16.)[8]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사건 (1997. 10)
속초 앞바다 무장공비 침투 기도사건 (1998. 6. 22)
동해 무장공비 사체 발견사건 (1998. 7. 12.)
강화도해안 간첩선 침투 기도사건 (1998. 11. 19.)
여수해안 간첩선 격침 사건 (1998. 12. 17.)
제1연평해전 (1999.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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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9.19∼20 북한군 철원군 DMZ서 MDL 월경(아군 경고사격)
2001.11.27 북한군 파주군 장파리 DMZ서 아군 초소에 기관총 2∼3발 발사
2002.6.29 북 경비정 NLL침범, 제2연평해전 발생
2003.1.10 북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
2003.2.20 북 미그-29기 1대 연평도 NLL 13㎞ 남하(아군 전투기 대응출격)
2003.7.17 북한군, 경기 연천 DMZ서 14.5㎜ 기관총 4발 발사(아군 경고사격)
2003.10.30 북 경비정 NLL 월선(아군 경고사격)
2004.7.14 북 경비정 NLL 월선(아군 함포사격)
2004.10.10 북 잠수함 동해침투 첩보(아군 폭뢰 투하)
2004.10.26 연천군 GOP 철책선 2곳 절단
2004.11.1 북 경비정 3척, 서해 소청도 동방 6.5 마일 및 연평도 서방 25마일 해상 NLL 월선, 해군 경고사격
2005.2.10 북, 핵무기 보유 선언
2005.5.11 북 영변 5MW 원자로에서 8000개의 폐연료봉 인출 작업 완료 발표
2006.7.5 북, 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2호를 포함한 7기 미사일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 발사장서 시험 발사 실시.
2006.10.9 북, 제1차 핵실험 강행
2008.7.11 박왕자 씨 피살사건
2009.11.11 대청해전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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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피격사건 (2010. 3. 26)
연평도 포격 사태 (2010. 11. 23)
대북전단 발원지 격파사격 협박 (2011~)
연평도 해상 포격 [9]
최고존엄 모욕 시위(2012년-)[10] [11] [12]
3차 핵실험 감행 (2013. 2. 12) # 규모 4.9~5.0급 인공지진이 발생했고 북이 중, 미에 전날 통보했다고 하며 국방부는 대략 10kt급으로 보고 있다.
2014년 3월 북한 무인기 추락사건
어업 지도선 2척 NLL 침범[14]
2014년 6월 귀순현판 탈취사건
6월 19일 무장한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경기도 파주에 있던 귀순벨을 손상시키고 귀순안내 현판을 가져간 것으로 드러났다. 말 그대로 북한군이 우리를 농락한 샘. 게다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것으로 드러나 질타가 쏟아졌었다. 이후 여러가지 이유로 넘어오는 일이 많아졌다. 밑의 대북전단일 이후 넘어오는 대로 경고사격을 하고 있는 중.
연천 대북전단 발원지 격파사격(2014. 10. 10)
북한 SLBM 수중 발사 실험(2015. 5. 9)
DMZ 목함지뢰 폭발 사건(2015. 8.10)[15]
서부전선 포격 도발 사건(2015.8.20)
제4차 북한 핵실험(2016.1.6)
제5차 북한 핵실험(2016.9.9)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면 추가바람. 또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아시는분은 항목 작성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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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정희 시대의 공안사건을 모두 포함한 숫자인지 확인되지 않은 숫자다. 확인바람. 실제로 과거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권력의 하수인을 하던 흑역사가 있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 파악에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하지만 공안사건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현재 잠입하는 남파간첩은 꾸준히 있으며 간첩은 계속 검거되고 있다. 방송이 안 될 뿐이지.
[2] 이 시기의 무장공작원 및 무장공비의 숫자는 대부분 1950년대 잔존 빨치산들이 포함되어 있다. 평균의 함정
[3] 북한군이 개성 바로 근처까지 진입해서 박격포 등의 화기로 시내에까지 포격한 사건이다.
[4] 1.21 사태가 일어난 1968년은 김일성이 갑산파, 연안파, 소련파 등의 정적들을 8월 종파사건 등의 조작을 통해 꾸준히 대량 제거해 나가던 작업의 후반부이다. 이 시기에는 간부들이 많이 숙청당했기 때문에 간부공황 문제가 제기되고도 있었던 시점과 가깝기 때문에 김일성은 이를 타개하고자 군부에 약간의 자율권을 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이렇게 지들끼리 알아서 청와대까지 쳐들어놓고 김일성한테 "저 잘했죠?" 라고 말하는 결과가 발생했다고 한다. 내부의 안티 하지만 김일성도 1.21사태를 제외한 다른 사건은 칭찬한 사례가 있는 것으로 봐서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극렬분자 탓이었던 것이 확실한 듯.
[5] 정전 이후 최초로 포병대응사격을 실시.
[6] 해당 부대는 정전이후 2번째로 포병대응 사격을 실시했으며 북한군 GP를 105미리 백린 연막탄으로 파괴하는 전과를 세운다. 이후 92년 은하계곡 침투사건과 98년 철원GP교전을 겪고 만다. 이 사건의 여파로 북한군은 전, 후방 사단이 통째로 교체되는 굴욕을 겪어야했었다.
[7] 당시 병장 한명이 턱에 총상을 입었으나 치료 후 무공훈장을 받고 전역을 했다고 한다.
[8] 1973년하고 1992년에 이어서 같은 부대가 겪은 사건이었다.
[9] 북한은 발파 작업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으나, 대다수는 실제로 포를 발사한 것이 맞다는 것이 정설이다.
[10] 사실 이전에도 여러번 이런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의 이유는 자기들을 모욕하는 언동을 군부대 부호로 쓴다는 것에 국가의 모욕이라면서 도발하는 식이다. 자기들은 매일 그러면서
[11] 이번 2012년에는 15만명을 동원한 궐기 대회도 있었는데 김정은 체제가 아직 정립이 되지 않아 내부결속용으로 쓰려는 목적이 강하다는 듯하다.
[12] 이후 조·중·동을 비롯한 국내 주요 언론사의 이름과 지도좌표를 언급하며 조준 격파하기 전에 사과하라고 요구했는데 특이하게도 성명서에서 언급한 좌표는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60진법(1도=60분, 1분=60초)이 아닌 10진법 좌표(1도=100분, 1분=100초)였다. 몇몇 언론과 네티즌들은 이 10진법 좌표를 60진법으로 해석하여 '북한이 엉터리 좌표를 가지고 있다' 며 비웃었으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구글 어스만 있어도 딸 수 있는 좌표를 틀릴 리가 없잖아
[13] 경기지역과 휴전선 근처의 GPS신호가 수신이 잘 되지 않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처음에는 북한이 억지라고 주장했으나 후에 알고 보니 전자정찰국의 지시로 방해전파를 쏘아올리고 있었던 것. 다만 그들의 의도와 달리 군사, 항공장비 등은 GPS외에 사용하는 것도 많아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이 잘 작동되지 않았다는 것만 빼고 별 피해도 없었다. 전기낭비 이것을 조사하다 겸사 GPS 교란장비를 팔아먹으려던 2명도 같이 검거되었다.
[14] 경고사격후 해당 선박들은 북으로 돌아감
[15] 조사결과 고의로 설치한게 아니면 불가능 하다고 한다
북한의 대남첩보원 발각횟수 : 5,500여 회 (1953년~1980년) (1.7일당 1회꼴)[1]
한국군·경찰에게 잡히거나 사살된 북한측 공작원 및 무장공비 : 2,973명 (1953년~1980년) (3.3일에 1명꼴)[2]
출처: rigvedawiki.net/w/북한의%20대남%20도발
첫댓글 종북좌파에게 너 종북이냐 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하는 놈 한 명도 없습니다.
어쨌든 요즘 천주교 돌아가는 꼴이 김정은에게 도움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지금 박 정권이 독재정권은 분명히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대통령이 부정을 저질렀습니까? 그렇다면 주교들은 그냥 사목에만 힘 쓰면 됩니다. 왜 쓸데없이 국가정책, 특히 국민의 목숨이 달린 안보문제에, 무지한 자들이 이래라 저래라 해서 분란을 일으킵니까. 그러니 저 같은 놈이 개새끼! 라고 욕을 하고 이를 구마신부인지 뭔지가 서울대교구 자유게시판에 퍼날라서 대수천 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노리고 쌍욕을 한 것이고요.
교구 게시판에서는 사제 욕은커녕 교구 정책에 반하는 의견은 삭제되거든요. 거기는 좌파가 이미 점령했습니다. 그러니 제 글을 구마신부인지 뭔지가 올려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이 나라가 적화가 되면 제일 먼저 당하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죠
종교가 없는 북한에서 성직자 수도자가 처참하게 당한 것을 알고 있을텐데. 주교님들 정구사 넘들 행복에 겨워 똥 오줌 못가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북한의 핵 위협에
완전히 노출된 최악의 위기 상황이다.
우리의 안보가 미국에 맡겨져 있는 위기상황인데
종북세력은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있고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 & 정의구현사제단은
사드설치 반대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로서는 북핵을 막을 유일한 대안이
미사일공격에 대한 방어용사드배치인데
이를 반대하는 것은 북한정권에 동조하며,
적화통일을 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