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상북도 경상감사가 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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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04:18조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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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사가 있던 곳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는 이름의 부족국가였던 대구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신라 경덕왕 때인 737년이다. 조선시대인 1601년 경상좌도와 경상우도가 합쳐지면서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었고, 그 뒤로 3백여 년간 경상도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김요는 금학루(琴鶴樓) 기문에 “땅의 형세가 평탄하고 넓다. 겹친 산봉우리가 둘러 있고 큰 내가 꾸불꾸불 얽혀 있으니 사방에서 모이는 곳이다”라고 썼다. 강진덕은 “땅이 넓어 사람 많이 살고, 누각이 높아 시야가 넓구나. 학은 능히 구름과 날아가고 거문고는 달과 어울려 맑네”라는 시를 남겼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대구는 감사(監司)가 있는 곳이다. 산이 사방을 높게 둘러싼 그 복판에 넓은 들을 펼쳐놓았으며, 들 복판에는 금호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고을 관아는 강 뒤편에 있다. 경상도의 한복판에 위치하여 남북으로 거리가 매우 고르니 또한 땅의 형세가 훌륭한 도회지라고 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고, 기후는 따뜻하며, 풍속은 묘종을 좋아한다”라고 기록된 대구의 진산은 연구산(連龜山)이다. 이 산은 관아의 남쪽 3리에 있다. 민간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고을을 처음 세울 때 돌거북을 만들어 남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북쪽으로 꼬리를 두도록 산등성이에 묻어서 지맥을 통하게 했다고 한다.
세종 때 대구의 호수는 436호이고 인구는 1,329명이었는데, 『여지도서』에 실려 있기로는 1만 2,752호이고 인구는 5만 9,614명이다. 남자는 2만 4,913명이고 여자는 3만 4,701명으로 여자가 1만여 명 더 많았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신문왕은 신라가 한반도의 동쪽에 치우쳐 있어 새로 정복한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통치하기 힘들어지자 달구벌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구시내를 가로지르는 신천은 팔조령에서 비롯하여 금호강으로 접어들고, 낙동강에서 두 번째로 긴 지류인 금호강은 대구화원 관광지 부근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대구는 대구 능금과 3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남성로의 약령시 그리고 대구분지로 이름을 날리다가 지금은 대구광역시가 되어 경상도 북부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선 후기에 평양, 전주와 함께 나라 안의 3대 약령시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대구 약령시는 조선 후기부터 개시되었던 한약재의 계절시장이다. 경상감영 안 객사 주변에서 개시되었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후 얼마간까지는 대구 약전골목 일대에서 봄과 가을 두 차례 개시되었다.
대구 약령시 정문
대구 약령시가 개설된 이후 약 3백 년 동안 일 년에 두 차례씩 시장이 열렸다. 음력 2월에 여는 춘령시(春令市)와 음력 11월에 여는 추령시(秋令市)로 계절대시(季節大市)였다.
효종 연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대구 약령시는 그 기원에 관하여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17세기 초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면서 조정에 필요한 약재를 쉽게 구하게 할 목적으로 관청에서 세웠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대구가 낙동강의 뱃길을 이용한 일본과의 교역 근거지가 되면서 약재 수출을 위하여 관청에서 세웠다는 설이며, 마지막으로는 임진왜란 이후 나라 안의 시장경제 체제가 파산 상태에 이르면서 물물교환의 경제 상태에서 벗어나 저절로 생긴 근대화적 성격의 시장이라는 설이다.
대구 약령시가 개설된 이후 약 3백 년 동안 일 년에 두 차례씩 시장이 열렸다. 그것은 계절대시(季節大市)로서, 음력 2월 1일부터 말일까지 여는 춘령시(春令市)와 음력 11월 1일부터 말일까지 여는 추령시(秋令市)였다.
화원정
대구는 대구 능금과 약령시, 대구분지로 이름을 날리다가 지금은 광역시가 되어 경상도 북부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처음 약령시가 개설되었던 곳은 경상감영 서편 객사 주변(대구 중부경찰서 북편 일대)이었다. 약재 생산자와 상인들은 정해진 개시일 동안 대구읍성 사방의 관문을 통하여 출입하면서 상품을 사고팔았는데, 관인의 지휘와 통제를 받는 약재의 객주, 여각 및 거간의 중개 알선을 받으면서 거래되었다.
거래 방법은 먼저 정선된 희귀 약재가 관수용으로 판매되고 난 다음 의원 및 일반 민수용이 거래되었으며, 일본 상인의 출입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그러므로 성곽 밖에 자리 잡고서 일 년 내내 2일과 7일에 열리던 서문시장과 4일과 9일에 열리던 동문시장의 한 모퉁이에는 민수용 한약재가 대량으로 자유롭게 거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령시의 규모가 커지고 대구시가 확장됨에 따라 1907년 5월 약령시는 남문 밖 오늘날의 약전골목(남성로와 동성로 일부)으로 이전하였다. 약령시가 한창 성하던 1918년 무렵 이름난 서문시장의 한 해 거래액이 당시 돈으로 3만 원이었던 것에 견주어 약령시의 거래액은 84만 원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령시가 활성화되자 대구의 유력한 한약종상 양익순이 주동하여 1923년 약령시진흥동맹회(藥令市振興同盟會)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시장의 공정 거래, 상업 금융, 운임 특혜, 여관 접대 시설 개선 등 일대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결과 1914년에는 6만 8,000원에 불과하던 총 거래액이 1925년과 1926년에는 각각 77만 5,000원, 83만 8,000원으로 11~12년 사이에 십여 배로 증가하였으며, 1940년에는 161만 원에 달하였다.
한약 박물관
약령시가 활성화되자 대구의 유력한 한약종상 양익순이 주동하여 1923년 약령시진흥동맹회(藥令市振興同盟會)를 조직하였다. 위는 대구 약령시장 박물관.
한 해에 두 차례씩 열리던 약령시에서 한몫 잡기 위해 수천 리 여정을 마다 않고 모여든 사람들은 전국의 내로라하는 약재상들만이 아니었다. 전국 곳곳에서 기생들까지 몰려들어 크게 흥청거렸고, 약령시가 절정에 이르면 시장 전체가 팔도의 사투리로 난무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번성했던 악령시가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신약, 즉 서양에서 양약이 들어오면서 한약의 수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14년에 조선총독부가 발동한 「조선시장규칙」에 따라 규제가 심해지면서 시장 자체가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약재 채취에 대하여 규제령을 내리고는 이를 낱낱이 간섭하였는데, 한약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탐탁잖게 여겼던 데다가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흰옷 입은 사람들의 모임을 정치집회인 양 위태롭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약령시는 거의 3백 년 동안 존속하면서 나라 안 구석구석에 힘이 미치는 시장권을 형성하여 객주를 중심으로 한 여관업, 창고업, 중개업 그리고 금융업까지 성하게 하여 하나의 도시 경제를 성립시킬 만한 규모에 이르렀으나, 계절에 관계없는 상설시장인 지금의 약전골목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가 새로운 중흥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는 중이다.
또한 대구의 역사에서 팔공산(八公山)을 빼놓을 수가 없다. 팔공산은 대구, 경산, 군위, 영천, 칠곡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옛 이름은 공산(公山) 또는 부악(父岳)이며, 해발 1,193미터다. 최고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봉과 서봉이 양 날개를 펴듯이 솟은 이 산은 일봉에서 가산까지 이어진 산길이 20여 킬로미터에 이르기 때문에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다.
이 산자락의 공산 부근에서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운명을 건 한판 싸움을 벌였다. 견훤이 서라벌을 공격하자 신라의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경애왕은 죽임을 당하였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왕비까지 능욕한 견훤은 김부에게 왕위를 넘겨준 뒤 귀로에 왕건이 거느린 5천 명의 고려군과 맞닥뜨렸다.
공산동수(公山桐藪)에서 견훤의 군사에게 포위된 왕건은 신숭겸이 자신으로 가장하여 수레를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함으로써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그때 신숭겸, 김락 등 여덟 명의 장수가 모두 전사하였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팔공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산자락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산인 동화사와 파계사, 은혜사, 부인사 등이 있다.
대구 동남쪽에서 동래까지 사이에 밀양, 청도, 김해, 양산 등이 낙동강을 따라 자리하고 있다. 신라 때의 이름이 추화군(推火郡)이고 고려 공양왕 때 증조할머니 박씨의 고향이라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뒤 현재에 이르러 시가 된 밀양은 점필재 김종직의 고향이기도 하다.
대구시 화원관광단지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대구는 감사(監司)가 있는 곳이다. 산이 사방을 높게 둘러싼 그 복판에 넓은 들을 펼쳐놓았으며, 들 복판에는 금호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고을 관아는 강 뒤편에 있다. 경상도의 한복판에 위치하여 남북으로 거리가 매우 고르니 또한 땅의 형세가 훌륭한 도회지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상감사가 있던 곳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2012. 10. 5., 신정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