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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포스트 캔디
그로부터 한 달 후 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한 달 동안 김기훈이라는 남자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것의 좋은 점은 내가 첫사랑 김지훈 대신 김기훈이라는 남자를 떠올렸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그렇게… 많이는 아니고 통 틀어 열한 번 정도. 그 정도면 됐다. 난 지금 여기 서울에 있고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나는 없다.
이제야 알았다. 기훈이라는 남자를 내가 무엇으로 이용 했던 건지.
그는 나의 마침표였다.
나의 영국생활의 마침표.
나의 첫사랑과의 마침표.
우울하고 아파했던 다라라는 캐릭터와 마침표.
난 이제 새로운 다라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를 닮은 다라. 그런 정다라로 다시 태어나는 거다. 우선 이 어두운 머리카락 색과 스모키 화장 보이쉬한 내 외모부터 바꿀 거다.
서울은 역시 냄새부터 달랐다. 3년 전에 휴가를 받았을 때 들른 것과 이번은 완전히 다르다. 공항엔 둘째 언니, 정연언니가 나와 있었다. 정연언니는 서른아홉 살의 아직 미혼이며 사범대를 졸업했다. 하필 언니가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아빠의 사업이 부도가 나서 언니는 무려 다섯 번의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간신히 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
그 후로 아빠가 재기에 성공했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난 유학은커녕 대학도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기까지 시집을 일찍 가버린 큰 언니 정애언니를 대신해서 정연언니가 생활비를 책임지는 장남 역할을 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노처녀가 돼버린 것이라고 엄마는 항상 정연언니를 마음에 걸려 하셨다.
언니가 운전하며 제일 먼저 내게 던진 질문은 이거다.
“영국에서 연애 좀 했어?”
서른아홉 노처녀 티를 내는 거다.
“아니.”
“왜?”
“괜찮은 남자가 없어.”
그렇게 말하자마자 난 고슴도치를 구하고 내게 옷을 사준 남자..
참, 난 그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난 다시 김기훈이라는 남자를 떠올렸다. 열두 번째로 그의 얼굴을 떠올린 거다. 인제 그만. 서울에 왔으니 이제 그를 생각할 필요가 더더욱 없다. 내가 언니에게 말했다.
“괜찮은 남자들은 다 결혼했거나 죽었어.”
“야..너 말에 뼈가 있다?”
“그나저나 인구폭발하고 있는 이 서울에서 그 많은 남자들 중에 왜 언니 짝은 없는 거야?”
“서울에 괜찮은 남자들은 다 이십년 나이차이 나는 성형미인들하고 결혼했거나 십년 나이 차이
나는 여자들과 연애하고 있거나 그래.”
“그럼..언니 나이에 십 사년 더하면 언니는 지금 쉰세 살 아저씨를 만나야 하는 거네? 언니…사실
쉰 살 넘었어도 동안이면 괜찮지 않아?”
내가 남의 말이라고 너무 막하고 있나...싶었지만.
“근데 문제는 말이야.”
언니 표정이 냉소적이었다.
“쉰 살이건 마흔이건 남자들은 다 자기 딸처럼 보이는 동안을 찾는다는 게 문제야.”
“설마..”
“작년에 나랑 동갑인 남자하고 선을 봤는데 그 남자가 그러더라. 자기 만나는 여자 다 이십 대
초반이었대. 여자들이 빽 하나 사주니까 다 넘어왔대.”
“빽? 가방 말이야?”
“그래.”
“가방을 되게 좋아하는 여자였나 보다. 영국에도 있어. 수집광들. 뭐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모으는 여자들. 우표수집도 그렇 고.”
“넌 몰라. 그냥 가방이 아니라 명품 가방만 말이야.”
“그래? 근데 가방을 사주는데 왜 넘어와?”
언니가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큰일이다. 넌 이상해. 굉장히 현실주의자인 것 같으면서 뭘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은 언니가 차라리 외국에 나갔어야 했어. 내가 아니고. 언니 외국에서 더 알아주는 외모인데."
“난 외국에서 못 살아. 외로워서 죽을 거야. 넌 어떻게 거기서 그렇게 혼자 잘 살았니?”
“잘 살았는지는 모르겠어. 그냥 시간이 없었지. 만날 애기들이랑 그 집 식구들이랑 휴가도 같이
따라다니고 주말여행도 같이 따라 다니고.. 월급은 월세로 다 나가고 왜 영국에서 버티고
있었는지 모르겠어.”
아니다, 나는 안다. 내가 영국을 쉽게 떠나지 못했던 건 그 곳에 모든 내 청춘의 추억과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큰소리로 소리쳤다.
“돈이 최고야. 남자는 떠나지만 돈은 남는다! “
“옮거니, 체험으로 얻은 명언이구나?”
“그래도 또 선 봤지.”
언니가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야, 우리 엄마 아빠 아주 보수적이시진 않지? “
“응?”
“우리 엄마 아빠 은근히 사고가 열려 있잖아. 그치?”
“뭐 있구나?”
“나중에….나중에 내가 말해줄게.”
집에 가니 엄마랑 아빠가 다 날 기다리고 계셨다. 엄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매운 양념게장을 해놓으셨다. 아빠는 내 얼굴보고 고생했다고 한마디 하시곤 다시 나가셨다. 아빠는 원래 말씀이 없으시다. 반면에 엄마는 앞집 아이가 넘어진 일도 액션영화 못지않게 거창하게 포장해서 얘기하는 재주가 있으시다.
“아휴, 어젯밤 한숨도 못 잤어. 혹시 비행기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서. 피곤하지? 얼른 먹고
한숨 자. 근데 걱정이다. 여기서 너 하는 그런 일자리가 쉽게 구해질지. 한국 사람들은 내니라고
하면 잘 몰라. 네가 가정부라도 되는 줄 알고 밥하고 빨래시키고 그러면 안 되는데 ... 옛날엔
그랬어. 말이 좋아 유모지. 집에 식모가 유모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고…”
한 가지 더. 우리 엄마는 걱정이 참 많으시다. 신경이 예민해서 좋은 일이 생겨도 걱정, 나쁜 일이 생기면 폭풍 걱정. 그리고 아직도 내 직업이 어엿한 유치원교사도 아닌 남의 애나 봐주는 내니라는 것에 많은 의문점을 품고 계신다.
“아빠 가게로 가신 거야?”
갑자기 엄마와 언니 표정이 변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아까 오다가 보니까 가게 문 닫혀 있던데?”
언니가 대답했다.
“가게 너무 안돼서 옛날에 문 닫았어. 누가 요새 저런 작은 데서 인테리어공사를 하니? 직원들
월급도 못 주시고 하니까 그만두셨지.”
엄마가 목소리를 높이셨다.
“아니 너 얼굴 보기 창피하다고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시더니 저렇게 나가버린다니? 사람이
융통성도 없이..츳츳.”
순간 목이 메었다. 그랬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철없이 스스로 대견해하며 혼자만을 위해 살았던 영국생활이 식구들에게 미안해졌다. 내가 기운차게 말했다.
“엄마, 걱정 하지 마. 내가 이제부터 생활비 보탤게. 그동안 저금해놓은 것도 좀 있어. 솔직히
이제 일손 놓고 쉬실 나이도 되셨지 뭐. 그동안 내가 아빠 등골 많이 빼먹었으니 내가 빚을 값을
차례다. 그러게 그때 나 유학은 왜 보냈어? 아무래도 나 유학 가고 우리 집 어려워진 거 같아.”
“그런 소리하지 마. 너 공부 시킨 게 내가 지금까지 제일 잘한 일이야. 이제 정말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만 가면 우린 걱정 없어.”
정연언니가 엄마의 말에 토를 달았다.
“아니, 여태 시집보내려고 유학 보낸 거예요? 시집가면 뭐해요? 그때부터 고생문이 활짝
열리는데? 엄마는 결혼이 인생 전부인 것처럼 그러더라.”
“넌 그런 생각을 하는 애가 기를 쓰고 결혼하려고 그렇게 선을 보고 다니냐, 엉 ?”
엄마랑 언니랑 티격태격하는 걸 보니 집에 온 실감이 났다. 이런 장면도 내가 그리워한 모습이다.
사실 내 계획은 한국에서 유치원을 차리는 거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아직 한국에 있는 영어 유치원 어느 곳도 ‘쏘시오 컬츄럴리즘(Socio Culturalism)’에 입각한 브론팬브레너(Bronfenbrenner)의 이론을 따르는 유치원은 없었다. 하지만, 유치원을 오픈하기엔 자금이 형편없이 부족했다. 집안사정도 이렇게 어려워진 줄 모르고 부모님께 사업자금 운운하려고 했었다니…
한잠 자고 일어나서 집 밖으로 나갔다. 오후 5시면 상점들이 문을 닫고 개미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던 영국 동네와 다르게 길거리 상점마다 불이 훤하게 켜 있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기운이 절로 솟았다. 포장마차에선 그렇게 내가 그리워하던 떡볶이, 순대, 어묵 국물 등을 팔고 있었다.
“떡볶이랑 순대 오천 원 어치 주세요.”
“네~”
주인아줌마가 포장을 하는 동안 우동을 먹던 아저씨가 날 보고 씩 웃었다. 갑자기 그 아저씨가 명함을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저기..내가 산성보험회사 다니는 데요. 요새 저축성 보험 좋은 게 나왔어요. 하나 드세요. 네?
아줌마 여기 내 돈 받으세요.”
내가 오천 원을 아줌마에게 내미는데 아저씨가 내 손을 치우고 억지로 자신의 돈을 아줌마에게 쥐여 주었다. 아줌마가 아저씨를 보고 놀라서 말했다.
“강씨, 왜 이래요? 순대도 외상으로 사가는 사람이 먼일이래? 이 아가씨 순대 값을 왜 아저씨가
내요?”
아저씨가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험 영업하는 거죠.”
“강 씨가 언제 자기 돈 써가면서 이렇게 영업을 했다고?”
아저씨는 내게 환하게 웃었다. 누런 이가 인상적인 아저씨였다. 난 아저씨가 그러거나 말거나 내 돈 오천 원을 아줌마 앞에 놓고 자리를 떴다.
“내 명함 가져가야죠!”
아저씨가 나와서 날 쫓아오는 것을 보고 나는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골목에 숨어서 아저씨가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보고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다시 밝혀두자면 난 그렇게 빼어난 미모도, 한번 보면 잊지 못할 매력을 지닌 여자도 아니다. 하지만, 지난 십 년 동안 수많은 남자들이 이렇게 내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들이댔다. 때론 일을 핑계로 때론 그냥 무작정… 그 날 이후로.
집에는 결혼해서 우리 옆집의 옆집에 살고 있는 큰언니, 정애언니와 형부 그리고 조카 수철이 와 있었다.
“처제 예뻐졌네.”
깜짝 놀랐다. 형부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내가 기억하는 형부는 아빠처럼 조용하고 빈말이나 인사치레는 전혀 못하는 남자였다.
“형부도 더 …젊어지셨어요.”
“허허…”
형부가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집 단 둘뿐인 남자인 아빠와 형부는 참 많이 닮았다. 둘 다 조용하다 못해 조신하기까지 하다. 난 세상에 다 이런 남자들만 있는 줄 알았다.
형부와 아빠는 이런 종류의 남자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첫째, 이런 남자들은 TV를 조용히 시청한다.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 욕을 하거나 주연배우의 스캔들 따위로 수다를 떠는 우리 집 여자들하고는 달리 저 멀리 조용한 별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다. 둘째, 조금만 언성이 높아져도 싫어한다. 정애언니는 그냥 말하는 건데 형부는, “왜 화를 내고 그래?”이런다. 셋째, 중국집에서 짬뽕이냐 자장이냐고 물으면 항상 ‘아무거나’라고 말한다.
정애언니가 형부랑 연애할 때 “제발 ‘아무거나’ 라고 하지 말고 하나 정해!”라고 말했다가 둘이 처음으로 싸움을 했다고 들었다. 큰언니, 정애언니가 형부를 놀린다.
“수철이 아빠 많이 늙었지?”
“아니. 언니가 더 늙어 보여. 그쵸, 형부?”
역시 형부가 조용히 웃고 만다. 어째 좀 재미가 없어 보이긴 하다. 하지만, 성실한 남편과 책임감 있는 아빠의 이미지로서는 최고인 것 같다.
“수철아, 이모한테 인사 똑바로 했어?”
수철이는 이제 12살 된 내 조카다. 수철이가 다시 일어나서 내게 인사를 꾸벅한다. 내가 수철이에게 선물로 사온 동화책을 주자 빙그레 웃는다. ‘지 아빠를 닮아서는…’ 수철이는 내가 그동안 보내준 영어로 된 동화책을 참 좋아했다고 들었다. 책을 들고 얼른 소파에 앉아서 첫 장을 펴는 수철이를 보니 이모로써 마음이 뿌듯했다.
“정연이가 최근에 맞선 본 얘기하디?”
정애언니가 무슨 비밀 얘기라도 털어놓듯 내게 말했다.
“애 셋 딸린 남자래.”
“뭐?”
“사별하고 …홀아비. 엄마 아빠한테는 비밀이다. 아시면 쓰러지시지.”
“어때? 그런 맞선도 다 좋은 경험이지.”
“어머 얘는. 그게 아니야. 정연이 오늘도 만나러 갔어.”
“진짜?”
“걔가 급하긴 급했나 봐. 정연이가 주식하다가 그동안 모아 놓은 결혼자금 다 날렸잖아. 작년에
선 본 남자한테는 사기까지 당하고.”
“주식? 사기? 정연언니가?”
“그래, 그게 다 작년에 한꺼번에 터졌잖아. 근데 그 사기 친 놈이 정말 영화배우 뺨치게
생겼더란다. 그놈이 몇 번 만나다가 뭐 유망한 사업이 있다고 투자해 보라고 권유를 한 거야.
자기도 그걸로 외제차 몰고 집 사고 땅 사고 그렇게 인생 역전했다고 그러면서. 그래서 정연이
그 바보가 ‘어머, 그래요? 그럼 제 돈도 좀 불려 주세요’ 현찰로 갖다 바친 거야.
이천을! 나중에 경찰이 그 사람 잡았는데 돈을 돌려받으려면 또 민사소송을 걸어야 한대.
복잡해지고 그러니까 소송 준비하다가 포기했단다.”
그랬구나… 속상했다. 정연언니는 항상 그렇게 당한다. 남들은 뻔히 다 아는 거짓말, 예를 들어 지구가 네모날지도 모른다고 누가 말하면 진심으로 그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그런 여자다.
“영국 얘기나 좀 해봐. 처제.”
형부가 정연언니 얘길 듣기가 민망했는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영국 뭐 춥고 사람들 성격 급하고 별로였어요.”
정애언니가 물었다.
“여기서도 같은 일 할 거니? “
"그래야 겠지..."
“여기서 유모 쓰는 집이 흔하지 않을 텐데. 도우미 아주머니들은 써도. 하긴 진짜 부자들은 쓰겠다.”
“사실 나 비고츠키와 브론팬브래너 이론을 원칙으로 한 영어 유치원을 차리고 싶어. 교육은
특권이 아니고 권리라는데 우리나라 영어교육사정은 그렇지도 않으니까 교재비 정도만 받고. ”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난 하나도 모르겠다. 비고 뭐? 영국에 있는 영어 유치원 체인점이야?
서울에 들여오려고?”
당연히 언니는 알지 못한다. 비고츠키는 브론팬브레너와 같이 러시아에서 출생한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교육학자이다. 비고츠키는 인간 발달의 중요한 영향요소로 문화와 환경의 관계의 중요성을 피력한 이론가이다. 개인과 가족 사회와 국가가 개인의 성장과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말이다. 난 뜻있는 사람들이 설립한 대안학교처럼 아이들의 창의성과 자유와 인성을 위한 그러나 영어와 한국어를 공용으로 사용하는 그런 유치원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아빠일 그렇게 된 것도 모르고 난 떡 하니 유치원 차릴 생각이나 했으니… 계획을 급수정하기로 했다.
“아는 분이 나 한국 간다니까 소개해준 집이 있어. 다섯 살짜리 애 가정교사를 구한대. 위로 큰
애들 둘도 봐주는 조건이고.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우선 거기 면접부터 봐야겠네.”
“너 하여튼 잘 나가던 디자이너 때려치우고 사서 고생이야 정말.”
언니가 계속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엄마도 딸이 디자이너라고 말하는 거랑 유모라고 말하는 거랑 다르다고
하시더라. 너 내니 일하고 부터는 사람들이 너 얘기 물어봐도 절대 유모일 한다고 안하셔. 그냥
유치원 선생님 한다고 그러지. 넌 뭐 하러 남의 애들 똥 기저귀 갈고 우유 멕이고 그 고생을
에휴, ..우린 수철이 동생 볼 엄두도 못 내고 있잖아. 결혼해서 다 할 일인데 뭣 하러 벌써 결혼도
안 한 처녀가 그 생고생을 하니?”
“내가 이상해서 그러지 뭐. 헤헤.”
식구들한테 내가 보고 느끼고 깨달은 나만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형부가 물었다.
“처제도 결혼해야지?”
“글쎄요. 어디 형부 같은 남자가 있어야죠?”
형부가 어색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웃었다. 정애언니가 내 손을 잡았다.
“근데 남의 애 돌보는 거 하고 자기 애 키우는 거 하고 진짜 천지차이라는 것만 알아둬.”
형부가 말을 거들었다.
“자기애는 아주 잘 키우겠지. 전문간데 처제가.”
“아니라니까 여보. 지 애는 속 터지면 손도 팍 올라가고 소리도 꽥꽥 지르게 되는데 남의 애는 돈
받고 하는 거라 부모 눈치 보이고 속 썩여도 ‘그래, 니가 커서 개차반이 돼도 그게 뭐 내
책임이냐?’그러면서 그냥 오냐오냐하고 만다니까? 지 애면 혼쭐을 내서라도 버릇을 가르치고
그러는데 못 그러지. 돈 받고 고용된 입장은 아무래도 돈 주는 고용주 눈치를 보는 법이니까.”
언니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그건 확실히 내 스타일은 아니다. 아이들과 잘 놀고 애정을 갖고 교육을 했지만, 아이들이 버릇없이 굴고 나쁜 언어를 쓰고 신체적인 접촉을 일으키며 싸우는 것만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었다.
면접을 가기 전에 머리스타일부터 바꾸어야 했다. 까만 머리, 짙은 스모키 화장의 다라는 한국가정에 걸맞은 내니의 모습이 아닌 거다. 단정하게 단발머리를 했다. 의상은 그대로 하얀 티의 청바지. 옷까지 변화를 주기는 싫었다. 거울 속의 내게 말했다.
“정다라! 너 이제부터 캔디야.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씩씩하고 밝은 캔디. 알지?”
소개를 받은 집은 경기도 양평 근처에 있었다. 동네 입구에 ‘사과나무마을’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갑자기 닭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동네와 참으로 어울리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을 도니 으리으리한 저택이 보였다. 담이 어찌나 높은지 안이 보이지도 않았다. 초인종을 눌렀다. 설마 양복을 입은 집사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니겠지? 상상과는 달리 안에서 평범한 아주머니가 나와서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정다라라고 합니다. 열 시에 약속이 되어 있는데요.”
“들어오세요.”
아줌마는 여기서 집안일을 봐주는 충주댁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충주댁 아주머니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정원부터 눈에 확 들어왔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놀이터가 있었다. 아무리 집에 아이가 있다 해도 내노라하는 집의 정원들은 조경을 위해 잔디와 나무와 조각 등으로 정원을 꾸미지 이 집처럼 유치원의 야외놀이터를 옮겨 놓은 듯한 시설을 갖춘 곳은 드물다. 아이의 세발자전거, 미니 카, 시소, 미끄럼틀 그리고 샌드 핏(sand pit: 모래 놀이터), 커다란 나무 위에 사다리로 올라갈 수 있게 지어진 미니 오두막까지 있었다.
아이의 부모가 격식이나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을 해보았다. 서재에서 아이의 부모를 기다리면서 책장 안에 책들을 살펴보았다. 책꽂이엔 아이들을 위한 과학놀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요리, 감성이 풍부한 아이로 키우는 법 등의 자녀 양육에 관한 책들이 꽂혀 있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단정하게 깎은 머리, 검은 뿔테 안경, 평범한 듯한 니트에 면바지 그러나 한눈에 보기에도 비싼 브랜드임을 알 수 있는 튀지 않게 멋을 낸 부린 옷차림의 남자. 영화배우 김태우를 닮은 남자, 그 남자가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정다라라고 합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는 멈칫하더니 내 손을 잡았다.
“김석훈이라고 합니다.”
"저 기억나세요? 영국에서 만났었는데...”
“…?”
“제 옷 사주셨는데요. “
“제가..말입니까?”
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난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고슴도치. 커피. 드레스.”
그제야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 앉으세요.”
그게 다야? ‘아~~’
다라, 뭘 기대했니? 반갑다고 펄쩍 펄쩍 뛸 그런 캐릭터의 남자가 절대 아니잖아? 맞다. 그는 아마 옆에서 ufo를 타고 외계인이 나타나도 ‘그만 장난하시고 가면을 벗으시죠?’라고 침착하게 물어 볼 사람이다.
그가 물었다.
“한국엔 언제 오셨어요?”
“지난주에요.”
그가 서류에 시선을 두었다.
“성함이 정다라.”
“네.”
“내니 학교를 졸업하셨네요?”
“네.”
“그때 파티는 잘 가셨었나요?”
“네. 덕분에.”
김석훈은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캐시 앤 스팬서? 디자인 일도 하셨네요?”
“네. 헤헤. 제가 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진로를 변경했어요.”
“젊어 보이시는 건가요?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이제 서른하나에요.”
“아 …”
석훈이 이마에 주름을 잡고 말끝을 흐렸다.
“저는 좀 나이가 있는 선생님을 찾고 있었는데...”
“나이가 많다는 것이 좋은 선생님의 요건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제 짧은 생각으로는요.”
“저도 그 말엔 동의합니다. 단지 저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가진 경험과 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인격적 성숙미를 선호하는 것입니다.”
“경험이 많다고 인격이 더 훌륭해지나요? 그럼 경험이 많은 여자는 경험이 없는 여자보다 더
훌륭한, 더 유능한 애인이나 아내가 되는 건가요? 그렇진 않잖아요.”
“유능한 애인이나 아내란 어떤 의미죠?”
“네?”
“유능한 비서, 유능한 의사 이런 말을 들어봤어도 유능한 아내나 유능한 애인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군요.”
지금에 와서 ‘그냥 나오는 대로 한 말이에요’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유능한 애인이란 첫째, (와아, 굳이 이렇게 잘난 척 ‘첫째’ 하며 시작할 필요는
없었는데…) 상대방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 둘째, 상대방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주는 것.
셋째, 상대방이 사회에 기여하는 올바른 시민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조력과 지도편달을 아끼지
않는 것.”
나도 모르게 내가 생각하는 교육관을 여기다 끼워 맞추고 잘난 척하는 말투를 하고 있었다. 석훈이 나를 3초간 바라보다가 말했다.
“꽤…거창하군요. 그런데 라라에 대해선 듣고 오셨나요?”
“아니요. 그냥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를 돌보는 가정교사 일이라고만 들었어요. 위로 애들 둘도
있다고 들었고요.”
“제 막내 라라 때문에 가정교사가 필요하긴 한데 사실 라라가 유치원에 적응하기만 한다면 굳이
가정교사를 두지 않고 싶은 게 제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라라를 영국에서 데려온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고 충주아줌마도 라라가 벅차다고 하셔서요.”
“네에.”
“집 옆에 저희 재단에서 공사 중인 유치원이 완공되면 현재 라라가 다니는 유치원과 합쳐질
겁니다. 그때까지 라라를 부탁하려고 합니다. 여기서도 가정교사는 충분히 채용할 수도
있었는데 영국에 박 사장님이 정다라씨를 추천했습니다.”
“최근까지는 제임스라는 두 살 아이를 맡았었는데 그전에 박사장님 큰 아이들을 맡았었어요.”
“그러니까 라라를 맡으시는 기간은 짧으면 3개월 길면 6개월 정도입니다. 그래도 상관없으신가요?”
“네.”
일단 아무 일이라도 시작해야지 집에서 놀 수는 없다. 일단 이 일을 하면서 장기적으로 할 일을 찾아야 한다. 그가 서류를 꼼꼼히 읽었다.
“상당히…주관이 뚜렷하신 것 같군요. 전 어찌하다 보니 학교 교장직을 맡고 있긴 하지만
교육학은 전공하지 않아서 쓰신 글을 다 이해할 수는 없군요. 하지만…아이들 교육에 있어서
감정이입과 유연성, 이 두 가지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쓰여 있는데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아이들은 물과 같다고 보는거죠. 물은 어느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모양도
달라지고 어떤 환경을 만나면 수증기가 되고 또 다른 환경에서는 얼음이 되기도 하고
따뜻해지고 차가워지고 그렇잖아요? 선생님이나 부모, 가정, 사회가 제공하는 환경이 물처럼
아이들을 달라지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알맞은 필요한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건 유연성에 대한 설명 같군요. 그렇다면 감정이입은요?”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훈련은 어릴 때부터 가능해야 한다고
믿어요. 싸이코 패스들은 타인이 느끼는 슬픔이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잔인해지죠.
감성을 개발하는 교육은 상상력과 창조력과도 연관되니까요.”
“아이들을 좋아하시나요?”
“그냥 좋아만 하는 건 아니고 책임감도 있어요.”
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 미리 알아두셔야 할 것은…애들 엄마와 전 이혼을 했었습니다. 라라가 한 살 때였죠.
그리고 그 해 라라 엄마는 영국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간적으로 그의 표정에서 죄책감, 미안함, 슬픔 등등의 오만가지 감정을 한꺼번에 목격할 수 있었다.
“첫째랑 둘째는 이혼 후에도 저와 있었지만, 라라는 제가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
영국에서 선생님이랑 만났을 때 그때 외할머니가 키우시던 라라를 제가 데리러 갔던 겁니다.”
“라라가 여기 와서 쉽게 적응하긴 어려웠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의사소통도 가능하고 여러모로 적당한 선생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석훈의 설명으로는 그의 큰아들 영진과 둘째 딸 서진은 고3과 중3이라고 했다. 3년 전에 이혼과 또 엄마의 죽음을 동시에 겪어야 했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아이들은 방학 때마다 영국의 외가댁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가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라라는 자폐는 아니지만 자폐적 성향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전 라라가 반드시 다른
아이처럼 밝게 자라리라 믿습니다.”
그의 표정이 너무 비장해서 그의 말에 나는 덩달아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가 계속했다.
“그리고 영진이 서진이에게도 가정교사 역할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학교수업은 잘 따라가는지
과외는 제대로 받고 있는지 교우관계나 방과 후 활동은 빠지지 않는지 ..”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여자아이가 하얀 천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손에는 요술 봉 같은 것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얘가 라라구나 싶었는데 석훈의 표정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라라, 누가 아버지 서재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라고 했지? 지난번에도 내가 한번 주의를 준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손님이 계시니까 밖에서 기다려야 해. You need to wait outside. I have a
visiter here.”
다섯 살 자기 딸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마치 부하직원을 혼내는 듯한 태도에 나는 좀 멍해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라라라고 불린 아이가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갔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입주 가정교사라고 들으셨겠지만”
이건 무슨 소리지?
“네? 잠깐만요. 입주요?”
첫댓글 와- 작가님 글 재미있어요. 30대에 어울릴만한 현실적인 소설이라고 해야할까나요? 작가님 어서 돌아오셔야해요!! 다라와 지훈/기훈/석훈.. 뭔 관계가 있을까요?
1편부터 읽고 있는데 잼있네요 ^^ 재미도 재미지만, 작가님의 교육학 지식에 대한 놀라움에 입도 한 번 쩍 벌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