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의 심장이 멈췄다. 2007년 크리스마스이브, 그의 나이 28세였다. 심정지 5분 만에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병상 위 식물인간으로 한 달 반을 보냈다. 의식을 회복한 뒤에다시는 두 다리로 설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최규철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2016년 5월, 넥센타이어 스피드레이싱 엔페라컵 2라운드 TT-200 클래스에서 3위에 올랐다. FIA 공인 경기 포디움에 오른 국내 1호 장애인 레이서가 됐다. 그는 달린다. 두 발을 가지런히 둔 채, 심장을 뜨겁게 달군다.
모자가 멋지다.
고맙다. 뉴에라 스냅백을 즐겨 쓴다. 한정판도 여러 개 모았다. 다치고 난 뒤 먹는 약 때문에 머리가 많이 빠진다. 그냥 두면 보기 흉해 어쩔 수 없이 한 달에 한 번씩 머리를 밀고 모자를 쓴다.
어디를 어떻게 다쳤나?
하반신 마비다. 바이크 사고로 척수(척추 안의 중추신경)가 손상됐다. 그 뒤로 휠체어 신세를 진다. 미국 유학 때 바이크 동호회 활동을 했는데, 라이딩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났다. 사실 그날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남지 않았다. 뒤따라 오던 친구의 바이크에 달린 카메라에 내 사고 장면이 고스란히 찍혔다고 한다. 한 달 반 만에 의식을 되찾은 후에 친구들이 사고 장면을 보겠느냐고 물었다. 그때는 싫다고 했는데, 10년쯤 지나고 나니 어땠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한 달 반 동안 의식을 잃었다고?
지금까지 나보다 운이 좋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사고가 났을 때, 뒤 따라오는 차에 의사가 타 있었다. 그 사람이 응급처치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 터다. 실제로 CPR을 해도 심장이 뛰지 않아서 쇼크를 주는 약물을 주사한 끝에 겨우 심장이 다시 뛰었다고 한다. 헬기가 출동했고(미국은 위급상황에 헬기가 금방 뜬다) LA에서 손꼽히게 크고 좋은 병원으로 옮겨졌다. 한 달 보름 동안 식물인간 상태였다.
가족들이 많이 놀랐을 텐데.
처음에는 내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 날 형과 어머니가 미국으로 왔다. 어머니는 3개월 동안 미국에 남아 병상을 지켰다.
조수석은 시트 대신 커다란 소화기를 달았다. 적재공간과 탑승공간 사이 격벽도 들어냈다
하반신 마비라는 사실은 언제 알았나?
한국에 온 뒤였다. 영어를 잘 하는 형이 먼저 귀국한 상태라 미국에 남은 어머니와 나는 의학용어에 대한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냥 다리 뼈가 부러졌겠거니 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할 정도로 통증이 없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엠뷸런스를 타고 큰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다음날 아침 검사결과를 들고 온 주치의가 말했다. “너 못 걸어. 평생 걸을 일 없으니 꿈도 꾸지 마. 지금부터 재활훈련을 하겠지만 다시 걸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마. 걸으려고 하는 재활이 아니니까.”
말투가 너무 매몰차다. 심정이 어땠나?
저 사람 왜 저러나 싶었다. 화를 내거나 격하게 반응하지는 않았다. 그냥 한숨 푹 쉬고 체념했다. 큰 사고 뒤라 좀 멍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주치의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헛된 희망을 주지 않으려는 나름의 배려였다고 본다. 그 말 그대로 내가 받은 재활 훈련은 신체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조치가 아니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기 위한 연습이었다. 한동안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익혔다.
몸의 재활만큼이나 정신적 재활의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가수 강원래 씨는 장애를 얻은 후 본인이 겪은 정신적 단계를 좌절?분노?수용?극복이라고 말하더라. 나도 비슷했다. 단지 꽤 오랫동안 멍했다. 처음에는 재활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TV만 봤다. 어느 순간부터는 병간호해주는 어머니에게 짜증을 많이 부렸다. 서로 마음의 상처도 많이 입었다. 2, 3년쯤 지나니 많이 누그러지기는 했다. 그래도 5년 동안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장애 때문에 힘든 부분이 거의 남지 않았다. 이렇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의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어려서부터 개구쟁이 막내아들 덕분에 마음고생이 많으셨다. 내가 이렇게 된 뒤로 제일 속 끓인 사람도 어머니다. 그러면서도 그저 미안하다고 말한다. 얼마 전, 어머니가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다. 난생처음 휠체어를 타보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막상 휠체어를 타는 입장이 되고 보니 너를 절반 밖에 이해 못했더라.” 그 날, 둘이서 많이 울었다.
사고 전과 후, 무엇이 제일 달라졌나?
눈높이가 달라졌다. 휠체어에 앉아서 보는 세상은 두 다리로 서서 볼 때와는 아주 다르다. 누군가 아무 생각 없이 횡단보도 앞에 주차하면 보도블록 경사로가 막혀서 길을 건널 수 없다. 장애인 주차구역에 비장애인 차가 서 있어서 내 차를 대지 못하면 차에서 내려 휠체어에 옮겨 탈 방법이 없다(문을 활짝 열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약속이 있다. 휠체어에 앉아 세상을 보면서 작은 실천과 배려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무심결에 한 행동 때문에 장애인은 큰 불편을 겪기 일쑤다.
큰 사고를 겪고서도 운전을 시작한 이유는?
장애인이 휠체어 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주문한 휠체어를 직접 가져다준 업체 대표 형님도 나와 같은 장애를 지녔다. 당시 직접 차에 내 휠체어를 싣고 왔는데 호리호리한 몸으로 높은 SUV를 척척 타고 내리는 모습을 보고 ‘이거다’ 싶었다. 나도 운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장애 인구는 500만명 정도다. 그 가운데 나 같은 척수 장애인은 1% 좀 안 되는 4만명이다. 적지 않은 수지만 거리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을 쉽게 보기 어려운 이유는 많은 사람이 집 안에만 머무르기 때문이다. 한때는 나도 그중 하나였다. 운전을 시작하면서 활동적이던 본래 성격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레이싱을 시작한 계기는?
2011년에 첫 번째 미니를 중고로 샀다. 미니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과 어울렸다. 동호회 안에 스피드를 좋아하는 소모임에도 들었다. 태백서킷 다녀온 회원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 차로 서킷 한 바퀴만 돌아봤으면’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1년 뒤 지금 타는 미니 쿠페를 사서, 휠?타이어?시트?서스펜션 싹 다 갈고 4점식 벨트를 달았다. 부푼 가슴을 안고 라이선스를 따러 갔는데, 서킷 측에서 난색을 보였다. 내 신체조건 때문에 라이선스 발급은 힘들다고 했다. 대신 한 타임 동안 혼자 돌게 해줬다. 서킷 맛을 보고 나니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당시 처음 생긴 DDGT 레이스에 출전하기로 하고 참가 방법을 사방팔방 알아봤다. 결국 다른 차들과 맞부딪칠 일 없는 타임 트라이얼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출전 자격을 얻었다.
서킷용 경주차 콘셉트로 맞춤제작한 J5 JK2 2웨이 서스펜션
사고 트라우마가 발목을 잡지는 않았나?
사고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스피드에 대한 갈증이 크다. 다만 변한 점도 있다. 몸이 알아서 위험에 반응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전보다 가속페달을 일찍 떼고 브레이크를 세게 밟는다. 차를 끌고 유명산 와인딩에 가보기도 했는데, 못하겠더라. 서킷을 달리는 데는 아무 문제 없지만,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다 보니 남들보다 기록 단축이 더디다.
결국 2015 넥센타이어 스피드레이싱 엔페라컵 2라운드에서 포디움에 올랐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의 도움 덕분에 가능했다. 트랙 주행을 시작한 지 4년이 됐지만 경제적인 상황이 여의치 않아 기껏해야 1년에 5, 6번 밖에 가지 못했다. 실력이 더디게 느는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쟁쟁한 동료들이 해준 족집게 강습이 주효한 덕분에 결승에서 첫 주행보다 랩타임을 5초나 단축했다. 국내 최초로 FIA 공인 경기 포디움에 오른 장애인이 됐다. 짜릿했다.
영광을 함께한 경주차를 소개해 달라.
그동안 수많은 탈것을 소유했지만, 대부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지금 타는 미니 쿠페는 벌써 6년째 타는 중이다. 가장 오래 소유했지만 정말 곱게 탔다. 주행거리는 5만km도 안 된다. 인터뷰에 나오느라 염화칼슘 뿌려진 길을 오늘 처음 달려봤다. 미니 쿠페 쿠퍼 S를 기본으로 튜닝에 들인 비용만 3000만원. ECU 매핑으로 제원상 최고출력 184마력을 휠 마력 230마력으로 끌어올렸고, 높아진 출력에 대응하기 위해 TCU도 매핑했다. 대용량 인터쿨러와 강화 마운트, 엔진오일 쿨러 등 거의 모든 부분을 손봤다. 서스펜션은 J5 JK2 2웨이, 시트는 JCW 모델에 순정으로 들어가는 레카로 버킷시트로 교체했다. 바퀴는 일본 휠 브랜드 TWS의 T66-F 17인치 휠에 넥센 엔페라 타이어를 조합했다. 서킷용으로 개조하면서 조수석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커다란 소화기를 달았다. 휠체어를 싣고 내리기 쉽도록 적재공간과 탑승공간 사이의 격벽을 들어냈다.
미니 쿠페와 어느덧 6년의 시간을 함께했다. 최규철이 원할 때면 언제든 심장을 붉게 달궜다
가속페달과 브레이크 조작은 무엇으로 대신하나?
스티어링휠과 시프트레버 사이에 핸드 컨트롤러를 달았다. 오른손으로 레버를 조작한다. 가속·감속페달과 연결해 레버를 밀면 제동하고 당기면 가속한다. 내 차에 달린 컨트롤러는 마쓰다 MX-5 장애인용 차에 순정으로 들어가는 제품이다.
오른손이 발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이 왼손으로만 스티어링휠을 조작하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크게 힘들지는 않다. 물론, 급격한 스티어링을 반복해야 하는 짐카나에서는 한 손 조작이 쉽지 않다. 스티어링휠을 놓치는 바람에 벽으로 돌진한 적도 있다.
휠체어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주문제작 했다. 풀 티타늄 프레임에 자전거 메이커에서 만든 옵션 휠을 달았다. 타이어도 자전거에 들어가는 제품, 민첩성과 내구성이 특징이다. 등받이와 옆면에는 탄소섬유를 썼다. 이전에 타던 휠체어보다 더 견고하고 가벼워 밀고 다니기 편하다. 옵션을 포함한 가격은 550만원이다.
핸드 컨트롤러가 페달을 대신한다. 밀면 제동하고 당기면 가속한다
미니 쿠페와 달린 길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드라이빙을 꼽으면?
동해안 7번 해안도로. 아는 동생과 같이 국도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동해안 따라서 부산까지 다녀왔다. 해안도로를 따라 내려가서 포항 맛집에 들르기도 했다. 하늘과 바다는 눈이 시리도록 파랬다.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아름다운 길이었다.
또 어떤 길을 달리고 싶나?
해외 서킷에 도전해보고 싶다. 같은 팀 리더 양우람 선수가 올해 스즈카 서킷 진출을 계획 중이다. 자동차에 대한 열정과 도전정신이 정말 대단한 친구다. 기회가 된다면 나도 도전해보고 싶다. 현실은 국내 서킷을 가기도 녹록지 않다. 최근 1년 넘게 서킷을 달리지 못했다.
타이어 트레드에 치열한 서킷 질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그동안 서킷을 달리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금전적인 이유가 크다. 그동안 아버지의 지원으로 경기에 참여했는데, 매번 손을 벌리기가 쉽지 않다. 최근 1, 2년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아서 시간 내기 쉽지 않았다. 건강은 많이 되찾았다. 경제적 문제만 해결되면 언제든지 다시 서킷을 달릴 생각이다.
최규철은 어떤 레이서인가?
휠체어 타는 아마추어 레이서. 그뿐이다.
무엇이 인간 최규철을 살게 하는가?
바퀴, 그리고 바퀴 달린 녀석들. ‘WHEEL IS MY LIFE’가 좌우명이다.
달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자체로 살아있다는 의미다. 나는 한 번 죽었었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시간도 보내 봤다. 그래서 더 분명하게 깨달았다. 달리는 동안 내 모든 감각으로 살아있음을 만끽한다. 차를 컨트롤하면서 즐거워하고 아쉬워하고 기뻐하고 두려워한다. 더없이 뜨겁고 활기차게 생동한다.
글 · 김성래 기자
사진 · 임근재
첫댓글 분당 위본하고, 인제에서 뵌적이 있어요. 비록 아는척은 못하고 스쳐지나갔지만, 대단한 열정을 지니신분인듯~~~^^
규철이 멋져~~ㅋㅋㅋ 형님이 옮겨 주셨군요~^^
우리동 초기부터 활동해온 규철님은 인간 승리의 표본이죠. 서킷에서 본 그의 열정은 항상 저를 일깨워줍니다.
지금은 그란 같이 하는 사이~^^
규철이 멋지다~!
진짜 오랜만에 이 곳에 댓글남깁니다. 규철이형 그때 형과 다닌 전국일주 저도 종종 생각하며 살아요. 연락드릴께요!^^
형 마음속 레인 마스타~♡
에공. 부끄러버랑 ^^... 히힛
오~~#
멋있어 규철아~
규철이 언제나 화이팅!!!